설미수
1. 개요
설미수는 원나라 고창 출신으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다. 1376년 고려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활동하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둔전제 실시를 건의하고, 호조, 공조, 예조 판서를 역임하는 등 내정에도 기여했다. 1415년에 사망하였으며 시호는 공후이다.
| 한글 | 설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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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 偰眉壽 |
| 히라가나 | 세쓰 비주 |
| 문화관광부 2000년식 표기 | Seol Misu |
| 매큔-라이샤워 표기 | Sŏl Misu |
| 참고 문헌 | 기시모토 미오, 미야지마 히로시, 《明清と李朝の時代》, 주오코론신샤, 1998-04-01, ISBN 4124034121, 1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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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9년 출생 -
고엔유 천황
고엔유 천황은 북조의 천황으로서 즉위 후 신하들과 갈등을 겪었고, 아들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한 후 사망했다. -
1359년 출생 -
프란체스코 노벨로 다 카라라
프란체스코 노벨로 다 카라라는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적자들은 아버지 사후에 교살당했고, 사생아 중 일부는 결혼하거나 수녀원장이 되었다. -
경주 설씨 (설손) -
설송웅
설송웅은 4.19 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한 시민 대표 중 한 명이자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 경호실 경호원이었으며, 용산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자 행정가이지만 잦은 당적 변경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역사 강사 설민석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다. -
경주 설씨 (설손) -
설민석
설민석은 한국사 강사, 방송인, 기업인으로서 이투스, 메가스터디, EBSi 등에서 활동했고 단꿈교육과 단꿈아이의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방송 출연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역사 왜곡 논란도 있었고,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등의 저서가 있다. -
중국계 한국인 -
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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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한국인 -
오연총
오연총은 고려 예종 때 요나라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여진 정벌에서 윤관의 부원수로 활약했으며, 신기군 징발 조건 완화와 서경 궁궐 창건 반대 등의 정치적 행보를 보이다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고 문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가계
偰眉壽중국어는 원나라 고창 출신으로, 증조부는 설문질(偰文質), 조부는 설철독(偰哲篤)이다. 아버지는 숭문감 승(崇文監丞)을 지낸 설손(伯僚遜)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 관계 | 이름 |
|---|---|
| 증조부 | 설문질(偰文質) |
| 조부 | 설철독(偰哲篤) |
| 아버지 | 설손 |
| 어머니 | 조씨(趙氏) |
| 형 | 설장수(偰長寿) |
| 형 | 설연수(偰延寿) |
| 형 | 설복수(偰福寿) |
| 형 | 설경수(偰慶寿) |
| 조카 | 설순(偰循) |
| 외아들 | 설유(偰猷) |
네 명의 형이 먼저 죽자 어린 조카들을 돌보아 길렀으며, 형 설연수(偰延寿)는 후사가 없었으나, 시비(侍婢)에게서 얻은 딸을 형수(兄嫂)에게 고하고 양민(良民)으로 만들어 시집보냈다.
3. 생애
설미수(偰眉壽)는 원나라 고창(高昌) 출신으로, 숭문감 승(崇文監丞) 백료손(伯僚遜)의 아들이다. 어머니 조씨(趙氏)는 엄격한 교육 방식으로 그를 가르쳤다.
설미수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으며, 네 명의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어린 조카들을 보살폈다. 특히 둘째 형 설연수(偰延壽)에게는 친자식이 없었으나, 형수는 설미수에게 척혼(戚混)인 여식을 맡겼고, 설미수는 형수에게 허락을 구해 여식을 양민(良民)으로 만들어 잘 키워 시집보냈다.
그는 정부(政府)에서 관대함을 중시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가는 곳마다 위엄과 은혜가 함께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외아들은 설유(偰猷)이며, 설유의 7세손인 설거(偰擧)는 과천시 북쪽 마을에 살았다.
3.2. 조선 개국 이후의 활동
1376년(우왕 2) 1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다. 1403년(태종 3) 공조전서(工曹典書)로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명나라 조정(朝廷)에서 무역해 가는 마적(馬籍)을 가지고 경사(京師)로 나아가 상주(上奏)하여 수(數) 안에서 줄어든 말 22필을 면제받았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1403년에는 계품사(啓稟使)로, 1406년에는 성절사로, 1407년에는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사은사로 두 차례, 전후 다섯 번에 걸쳐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조공하는 금(金)·은(銀)을 면제해 주도록 청하였다.
1407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로 나아가 감로(甘露)와 예천(醴泉)을 하례하고, 이어서 상주하여 기취실가(起取失加)의 소관(所管)인 찰한실라불화(察罕失剌不花)의 12호 인구를 면제받았다. 때마침 황후가 붕서(崩逝)하자 예부(禮部)에 품고(稟告)하여 최질(衰絰)로 들어가 곡(哭)하니, 황제가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므로 다른 번방(藩邦)과 다르다." 하고 칭찬하고 깊이 탄상(嘆賞)하여 사여(賜與)함이 더욱 두터웠다. 돌아와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임명되었다.
1407년 참지의정부사로 재직 중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행하게 하였고, 호조판서와 공조판서를 거쳐, 1410년 예조판서, 1411년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가 되었으며, 1414년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1415년 졸(卒)하자 철조(輟朝)하고 사제(賜祭)하고 치부(致賻)하였다. 시호는 공후(恭厚)이다.
3.3. 대명 외교에서의 활약
설미수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403년에는 계품사(啓稟使)로 파견되었고, 같은 해 공조전서(工曹典書)로서 명나라 조정에서 무역해 가는 마적(馬籍)을 가지고 경사(京師)로 나아가 상주(上奏)하여 수량 안에서 줄어든 말 22필을 면제받았다. 1406년에는 성절사, 1407년에는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사은사로 두 차례 더 파견되어 전후 다섯 번에 걸쳐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조공하는 금(金)·은(銀)을 면제해 주도록 청하였다.
1407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서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로 나아가 감로(甘露)와 예천(醴泉)을 하례하고, 이어서 상주하여 기취실가(起取失加)의 소관(所管)인 찰한실라불화(察罕失剌不花)의 12호 인구를 면제받았다. 때마침 황후가 붕서(崩逝)하자 예부(禮部)에 품고(稟告)하여 최질(衰絰)로 들어가 곡(哭)하니, 황제가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므로 다른 번방(藩邦)과 다르다."라고 칭찬하며 깊이 탄상(嘆賞)하여 사여(賜與)함이 더욱 두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