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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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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금하는 664년 일본 덴지 천황 시대에 제정된 관위로, 26계 관위 제도 개편 과정에서 설치되었다. 소금하는 소금상, 소금중과 함께 소금하에 속했으며, 685년에 폐지되었다. 소금하는 견당사, 견신라사 등 외교 분야와 군사, 기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에게 수여되었으며, 후대의 종5위하에 해당한다.

2. 제정 및 변천

덴지 천황 3년(664년) 2월 9일 관위 26계 제도를 시행하면서, 소화상(小花上)과 소화하(小花下) 2계를 소금상(小錦上), 소금중(小錦中), 소금하(小錦下) 3계로 개정하여 설치하였다.[1] 다이카 3년(647년)에는 소금(小錦)이라는 관위가 있었고, 다이카 5년(649년)에 소화상과 소화하로 분할되었는데, 소금하는 그 이름을 부활 계승한 것이다.

덴무 천황 14년(685년) 1월 21일에 관위 명칭을 일신하면서 폐지되었다.

3. 주요 서위자

일본서기에 따르면, 소금하는 관위와 이름이 함께 판명되는 예가 가장 많은 관직이다. 이는 소금하가 신분적으로 특별시되는 대부의 하한선이었기 때문에 사서에 기록될 기회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금하는 후의 종5위하에 해당한다.

견당사로는 654년에 대사로 임명된 가와베노 마로와 659년에 난파되어 사망한 사카이베노 이시후가 소금하였다.

견신라사로는 675년에 부사로 임명된 미야케노 이리이시와 681년에 대사로 파견된 우네메노 다케라가 있었다. 같은 해, 지쿠시에 온 신라 사신 김충평을 접대하기 위해 소금하 가와베노 고쿠비가 파견되었다. 684년에는 소금하 다카무쿠노 마로가 대사로 신라에 파견되었다.

우네메노 다케라와 같은 날 고구려에 파견된 사에키노 히로아시도 소금하였으며, 그는 675년에도 같은 관위로 쇼시의 미노 왕과 다쓰타의 타테노에서 풍신을 제사했다.

백강 전투 이후 일본에 귀화한 백제의 달솔 귀실집사665년에 소금하 관위를 받았다. 그는 671년에 다른 망명 백제인들이 일제히 관위를 받았을 때도 소금하가 되었다.

그 외에도 673년에 쇼시의 미노 왕과 함께 조고이치대사사가 된 기노 고타마로가 있다. 이듬해 대마국에서 처음 생산된 은을 헌상한 오시미노 오쿠니는 그 공으로 소금하에 서위되었다. 쿠누마로는 675년에 천황의 노여움을 사 소금하 자리를 박탈당했다. 아즈미노 이나시키는 681년에 천황의 명으로 제기와 상고의 여러 일을 기록하고 정하는 일에 참여했다.

683년에는 여러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제왕오위의 이세 왕을 따라 소금하 타지노 오사다와 나카토미노 오시마 등이 순행했다. 684년에는 미노 왕을 따라 소금하 우네메노 지쿠라가 시나노의 지형을 조사했다.

일본서기에는 소금하를 수여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된 예도 많다. 이는 소금하에 도달한 것 자체가 중요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680년의 박정자마로, 681년의 다나카노 카누시, 카키노모토노 사루, 타베노 쿠니오시, 다카무쿠노 마로, 아와타노 마히토, 모노노베노 마로(이시가미노 마로), 나카토미노 오시마, 소네노 칸이누, 쇼노 치토쿠, 그리고 682년의 토네리노 누카무시가 그 예이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문성각은 임신 정변에서의 공으로 사후 증위에 의해 소금하가 되었다.[2] 오와리노 마시미도 임신의 공신으로, 생전에 소금하가 되었다.[3] 사카이베노 이와시키도 마찬가지이다.[4]

3. 1. 외교 분야

일본서기에 따르면, 소금하는 관위와 이름이 함께 판명되는 예가 가장 많은 관직이다. 이는 소금하가 신분적으로 특별시되는 대부의 하한선이었기 때문에 사서에 기록될 기회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금하는 후의 종5위하에 해당한다.

견당사로는 654년에 대사로 임명된 가와베노 마로와 659년에 난파되어 사망한 사카이베노 이시후가 소금하였다.

견신라사로는 675년에 부사로 임명된 미야케노 이리이시와 681년에 대사로 파견된 우네메노 다케라가 있었다. 같은 해, 지쿠시에 온 신라 사신 김충평을 접대하기 위해 소금하 가와베노 고쿠비가 파견되었다. 684년에는 소금하 다카무쿠노 마로가 대사로 신라에 파견되었다.

우네메노 다케라와 같은 날 고구려에 파견된 사에키노 히로아시도 소금하였으며, 그는 675년에도 같은 관위로 쇼시의 미노 왕과 다쓰타의 타테노에서 풍신을 제사했다.

백강 전투 이후 일본에 귀화한 백제의 달솔 귀실집사665년에 소금하 관위를 받았다. 그는 671년에 다른 망명 백제인들이 일제히 관위를 받았을 때도 소금하가 되었다.

그 외에도 673년에 쇼시의 미노 왕과 함께 조고이치대사사가 된 기노 고타마로가 있다. 이듬해 대마국에서 처음 생산된 은을 헌상한 오시미노 오쿠니는 그 공으로 소금하에 서위되었다. 쿠누마로는 675년에 천황의 노여움을 사 소금하 자리를 박탈당했다. 아즈미노 이나시키는 681년에 천황의 명으로 제기와 상고의 여러 일을 기록하고 정하는 일에 참여했다.

683년에는 여러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제왕오위의 이세 왕을 따라 소금하 타지노 오사다와 나카토미노 오시마 등이 순행했다. 684년에는 미노 왕을 따라 소금하 우네메노 지쿠라가 시나노의 지형을 조사했다.

일본서기에는 소금하를 수여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된 예도 많다. 이는 소금하에 도달한 것 자체가 중요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680년의 박정자마로, 681년의 다나카노 카누시, 카키노모토노 사루, 타베노 쿠니오시, 다카무쿠노 마로, 아와타노 마히토, 모노노베노 마로(이시가미노 마로), 나카토미노 오시마, 소네노 칸이누, 쇼노 치토쿠, 그리고 682년의 토네리노 누카무시가 그 예이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문성각은 임신 정변에서의 공으로 사후 증위에 의해 소금하가 되었다.[2] 오와리노 마시미도 임신의 공신으로, 생전에 소금하가 되었다.[3] 사카이베노 이와시키도 마찬가지이다.[4]

3. 2. 군사 및 기타 분야

일본서기에 따르면 소금하는 관위와 이름이 함께 판명되는 예가 가장 많은 관위이다. 이는 소금하가 대부의 하한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후대의 종5위하에 해당한다.

견당사로는 백치 5년(654년)의 대사 가와베노 마로와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에 난파로 사망한 사카이베노 이시후가 소금하였다.

견신라사로는 덴무 천황 4년(675년)에 부사로 임명된 미야케노 이리이시와 덴무 천황 10년(681년)에 대사로 파견된 우네메노 다케라가 있었다. 같은 해 지쿠시에 온 신라 사신 김충평을 접대하기 위해 소금하 가와베노 고쿠비가 파견되었다. 덴무 천황 13년(684년)에는 소금하 다카무쿠노 마로가 대사로 신라에 파견되었다.

우네메노 다케라와 같은 날 고구려에 파견된 사에키노 히로아시도 소금하였으며, 그는 덴무 천황 4년(675년)에도 같은 관위로 쇼시 미노 왕과 함께 다쓰타에서 풍신을 제사지냈다.

백강 전투 이후 일본에 귀화한 백제 달솔 귀실집사덴지 천황 4년(665년)에 소금하 관위를 받았다. 그는 덴지 천황 10년(671년) 다른 망명 백제인들과 함께 다시 소금하가 되었다.

이 외에도 덴무 천황 2년(673년) 쇼시 미노 왕과 함께 조고이치대사사가 된 기노 고타마로, 덴무 천황 3년(674년) 대마국에서 처음 생산된 은을 바쳐 소금하에 오른 오시미노 오쿠니, 덴무 천황 4년(675년) 천황의 노여움을 사 소금하 자리를 빼앗긴 쿠누마로, 덴무 천황 10년(681년) 천황의 명으로 제기와 상고의 여러 일을 기록하고 정하는 일에 참여한 아즈미노 이나시키 등이 소금하였다.

덴무 천황 12년(683년)에는 여러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제왕오위 이세 왕을 따라 소금하 타지노 오사다와 나카토미노 오시마 등이 순행했다. 덴무 천황 13년(684년)에는 미노 왕을 따라 소금하 우네메노 지쿠라가 시나노의 지형을 조사했다.

일본서기에는 소금하를 수여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된 예도 있는데, 이는 소금하에 도달한 것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덴무 천황 9년(680년)의 박정자마로, 이듬해의 다나카노 카누시, 카키노모토노 사루, 타베노 쿠니오시, 다카무쿠노 마로, 아와타노 마히토, 모노노베노 마로(이시가미노 마로), 나카토미노 오시마, 소네노 칸이누, 쇼노 치토쿠, 그리고 그 이듬해의 토네리노 누카무시가 그 예이다.

속일본기의 기사에서는 문성각이 임신 정변에서의 공으로 사후 증위에 의해 소금하가 된 것을 알 수 있다.[2] 오와리노 마시미도 임신의 공신으로, 생전에 소금하가 되었다.[3] 사카이베노 이와시키도 마찬가지로 임신의 공으로 소금하가 되었다.[4]

3. 3. 기타 서위자

일본서기』에서 관위와 이름이 함께 판명되는 예를 관위별로 세어보면 소금하가 가장 많다. 이는 소금하가 신분적으로 특별시되는 대부의 하한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금하는 후의 종5위하와 같다.

견당사로는 백치 5년(654년)의 대사 가와베노 마로와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에 난파되어 죽은 사카이베노 이시후가 있다.

견신라사로는 덴무 천황 4년(675년)에 부사로 임명된 미야케노 이리이시와 덴무 천황 10년(681년)에 대사로 파견된 우네메노 다케라가 있다. 같은 해에는 지쿠시에 온 신라 사신 김충평을 그곳에서 향응하기 위해 소금하 가와베노 고쿠비가 파견되었다. 덴무 천황 13년(684년)에는 소금하 다카무쿠노 마로가 대사로 신라에 파견되었다.

우네메노 다케라와 같은 날 고구려에 파견된 사에키노 히로아시도 소금하였으며, 그는 덴무 천황 4년(675년)에도 같은 관위로 쇼시의 미노 왕과 다쓰타의 타테노에서 풍신을 제사했다.

백강 전투 이후 일본에 귀화한 백제의 달솔 귀실집사덴지 천황 4년(665년)에 소금하 관위를 받았다. 그는 덴지 천황 10년(671년)에 다른 망명 백제인들이 일제히 관위를 받았을 때 같은 소금하가 되었다.

그 외에도 덴무 천황 2년(673년)에 쇼시의 미노 왕과 함께 조고이치대사사가 된 기노 고타마로가 있다. 이듬해에 대마국에서 처음 생산된 은을 헌상한 오시미노 오쿠니는 그 공적으로 소금하에 서위되었다. 쿠누마로는 덴무 천황 4년(675년)에 천황의 노여움을 사 소금하의 자리를 빼앗겼다. 아즈미노 이나시키는 덴무 천황 10년(681년)에 천황이 제기와 상고의 여러 일을 기록하고 정할 것을 명했을 때 그 일원이 되었다.

덴무 천황 12년(683년)에는 여러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제왕오위의 이세 왕을 따라 소금하 타지노 오사다와 나카토미노 오시마 등이 순행에 나섰다. 덴무 천황 13년(684년)에는 미노 왕을 따라 소금하 우네메노 지쿠라가 시나노의 지형을 분간했다.

『일본서기』에는 소금하를 수여받았다는 것만 기록된 예도 있는데, 이는 소금하에 도달한 것 자체가 중요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덴무 천황 9년(680년)의 박정자마로, 이듬해의 다나카노 카누시, 카키노모토노 사루, 타베노 쿠니오시, 다카무쿠노 마로, 아와타노 마히토, 모노노베노 마로(이시가미노 마로), 나카토미노 오시마, 소네노 칸이누, 쇼노 치토쿠, 그리고 그 이듬해의 토네리노 누카무시가 그 예이다.

속일본기』의 기사에서 문성각이 임신 정변에서의 공적으로 인해 사후 증위에 의해 소금하가 된 것을 알 수 있다.[2] 오와리노 마시미도 임신의 공신이지만, 생전에 소금하가 되었다.[3] 사카이베노 이와시키도 같다.[4]

4. 각주

참조

[1] 서적 日本書紀 0664-02-09
[2] 서적 続日本紀 0716-04-08
[3] 서적 続日本紀 0758-04-19
[4] 서적 続日本紀 0757-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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