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백강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백강 전투는 663년 백제 부흥군과 왜(일본)의 연합군이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 맞서 싸운 전투이다. 백제의 멸망 후 백제 부흥을 돕기 위해 왜가 참전했으나, 당나라와 신라의 수륙 합동 작전에 패배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백제 유민과 왜는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다. 전투 이후 왜는 율령 국가 건설을 가속화하고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는 등 정치적 변화를 겪었으며, 한반도 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백강 전투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전투 이름백강 전투
다른 이름백촌강 전투
백강구 전투
하쿠손코우노 타타카이 (白村江の戦い)
하쿠스키노에노 타타카이 (白村江の戦い)
바이장커우 지잔 (白江口之战)
날짜663년 10월 4일 ~ 663년 10월 5일 (율리우스력) / 663년 8월 27일 ~ 663년 8월 28일 (음력)
장소금강 하류, 백강 (현재 대한민국)
결과당나라신라의 승리. 왜의 한반도 영향력 완전 소멸
교전 세력
교전국 1당나라
신라
교전국 2
백제 부흥군
탐라
지휘관
지휘관 1유인궤
문무왕
부여융
류렌위안 (Liu Renyuan)
손렌시 (Sun Renshi)
두샹 (Du Xiang)
지휘관 2아베노 히라후
가미쓰케노 키미 와카코
이오하라노 오미타리
에치노 타쿠츠
부여풍
병력 규모
병력 1당군 13,000명
당 함선 170척
신라 지원 기병대 규모 미상
병력 2왜군 42,000명
왜 함선 800척
백제 부흥군 규모 미상
피해 규모
피해 1알려진 바 없음. 교전 세력 2에 비해 훨씬 가벼움.
피해 2함선 400척
왜군 10,000명 사망
말 1,000필 손실
관련 전쟁
관련 전쟁고구려-당 전쟁

2. 배경

581년 수나라가 건국되어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왜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승려 혜자를 파견하였다. 문제와 양제 치세에 걸쳐 네 차례의 대규모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수나라는 쇠약해졌고, 618년 멸망하였다. 이후 당나라가 628년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당 태종당 고종이 고구려를 644년부터 648년까지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627년 백제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당나라가 내전 중이라 즉각적인 지원은 없었지만, 백제가 당나라와 적대 관계가 되면서 선덕여왕(632년~647년)은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를 통해 친당 정책을 추진했다. 654년 태종무열왕 즉위 후 양국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649년 신라가 김다수를 왜국에 파견하는 등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당시 왜국에서는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급진 개혁 세력은 당나라와 신라를 중앙집권화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을 추진하며 신라와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러나 신라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는 백제계 호족 소가씨와 긴밀한 관계였던 나카노오에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으면서 친백제 세력이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왜국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나라가 왜국의 우호국인 백제를 공격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왜국은 당나라와 백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54] 신라의 급속한 발전 또한 왜국에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지적도 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했다. 당은 백제의 옛 영토를 지배하에 두었지만, 곧 유민들이 투쟁하였다. 1세기 중반, 한반도백제, 신라, 고구려의 세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 세 나라는 서로 경쟁하며 수 세기 동안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이 무렵 백제와 왜(일본)는 오랜 동맹 관계였고, 왕실 간에도 혈연 관계가 있었다.[3] 660년 백제의 멸망은 야마토 왕실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이메이 천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우리가 옛날 기록을 살펴보니 군사를 요청하고 원조를 구한 사례가 있었다. 비상시에 도움을 주고 중단된 것을 회복하는 것은 정의의 일반적인 원리의 발현이다. 백제는 궁지에 몰려 우리에게 와서 스스로를 우리 손에 맡겼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결의는 확고하다. 우리는 장군들에게 백 가지 길로 동시에 진격하라는 별도의 명령을 내릴 것이다." [5]

훗날 덴지 천황이 되는 나카노오에 황자는 사이메이 천황과 함께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가 이끄는 원정군을 파병하여 포위된 백제 복구 세력을 돕기로 결정했다. 병사들은 주로 본토 서부, 시코쿠, 특히 큐슈 출신의 지방 유력자(쿠니노 미야츠코)였지만, 간토와 일본 북동부 출신의 전사들도 일부 있었다.[6]

사이메이 천황은 군사 작전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규슈 북부의 조선소 근처 아사쿠라 궁궐로 수도를 옮겼다. 주력 함대가 출항하자, 《만요슈》는 사이메이 천황이 다음과 같은 와카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7]

>

> :숙田津에 배를 타려고 달을 기다렸더니, 썰물도 들어왔구나. 이제는 떠나자!

> :''Nikita tsu ni funanori semu to tsuki mateba, shio mo kanahinu: ima ha kogiide na.''

>

661년 8월경, 5,000명의 병사, 170척의 배, 그리고 아베노 히라후 장군이 모두 백제 복구 세력이 장악한 지역에 도착했다. 가미츠케노노 키미 와카코(上毛野君稚子)가 이끄는 2만 7천 명의 병사와 이오하라노 키미(廬原君)가 이끄는 1만 명의 병사를 포함한 추가 일본군 증원이 662년에 도착했다.[8]

2. 1. 삼국 시대의 전개와 국제 정세

581년 수나라가 건국되어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는 위기를 느껴 왜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승려 혜자를 파견하였다. 문제와 양제 치세에 걸쳐 네 차례의 대규모 고구려 원정(수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수나라는 쇠약해졌고, 618년 멸망하였다. 이후 당나라가 628년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당 태종당 고종이 고구려를 644년부터 648년까지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627년 백제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당나라가 내전 중이라 즉각적인 지원은 없었지만, 백제가 당나라와 적대 관계가 되면서 선덕여왕 (632년~647년)은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를 통해 친당 정책을 추진했다. 654년 태종무열왕 즉위 후 양국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648년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백제 공격이 논의되었다.[52] 649년에는 신라가 김다수를 왜국에 파견하는 등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당시 왜국에서는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급진 개혁 세력은 당나라와 신라를 중앙집권화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을 추진하며 신라와 급속히 가까워졌다. 김춘추는 직접 왜국을 방문하여 왜 조정과 교섭하며 "용모가 아름답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647년).[53] 신라는 백제 정복을 위해 백제의 동맹국인 왜국을 고립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신라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는 백제계 호족 소가씨와 긴밀한 관계였던 나카노오에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으면서 친백제 세력이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왜국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나라가 왜국의 우호국인 백제를 공격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왜국은 당나라와 백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54] 신라의 급속한 발전 또한 왜국에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지적도 있다. 하쿠치(白雉) 2년(651년) 신라 사찬 지만이 세련된 관복을 입은 것에 불쾌감을 느낀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가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신라 정벌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5]

6세기부터 7세기 한반도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하고 있었으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은 한반도 남부 임나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562년 이전에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475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가 함락된 후 웅진으로 천도하여 부흥했고, 538년 사비로 다시 천도했다. 백제는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일본 측 중신 파견 및 주재)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일본의 원군을 지원받았다.[23]

659년 4월, 당나라는 비밀리에 출격 준비를 갖추고, 같은 해 “내년에 반드시 해동의 정치를 행할 것이다. 너희 왜객들은 동쪽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하며 왜국 遣唐使를 낙양에 억류하여 백제 원정 계획이 누설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34]

2. 2. 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당나라에 끌려갔다. 당나라 군대의 약탈로 많은 백성들이 고통받는 와중에, 멸망한 백제의 귀실복신, 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56] 복신은 당시 왜국에 체류 중이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임시 왕으로 추대하고 왜국에 원병을 요청했다.

648년부터 신라당나라 사이에는 백제 공격이 논의되고 있었다.[52] 649년 신라에서 김다수가 왜국에 파견되는 등 왜에 대한 외교도 활발해졌다. 당시 왜국에서 나카노오에 황자(후의 덴지 천황)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 급진 개혁 세력은 당과 그 동맹국 신라를 자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신라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 신라의 실력자였던 김춘추도 직접 왜로 건너가 왜 조정과 교섭하면서, 왜의 귀족들에게 "용모가 아름답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647년)[53] 백제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백제의 동맹국이었던 왜국을 떼어내는 것이 신라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백제와 왜국을 갈라 놓으려는 신라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는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왜의 유수의 호족 소가(蘇我) 일족과 긴밀한 통혼 관계에 있던 나카노오에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으면서 친백제 세력이 친신라보다 우세해졌기 때문이다.[54]

일본서기에는 왜병의 파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파견 시기규모지휘관
661년 5월1만여 명 (선박 170여 척)아즈미노 히라후, 사이노 아치마사, 에치노 다쿠쓰[56]
662년 3월2만 7천 명카미츠케누노기미노 와카코, 아베노 히라후[57]
663년 8월1만여 명이오하라기미



기록상 왜국의 파병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당나라의 국력은 중국 역사상 최강이었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는 일은 쉽게 결단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부흥군 지도자였던 귀실복신이 원병 요청과 함께 당시 왜국에 인질로 체류하고 있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한 것은 660년 10월의 일이었지만[58], 왜 조정에서 풍을 신라로 보낸 것은 661년 9월의 일이었다.[59]

곧 왜국은 부흥운동에 원조를 실시했는데,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에 급서한 뒤에도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지원에 전력을 다했을 정도였다. 662년 1월에는 화살 10만 척과 곡식 종자 3천 석을 보내기도 하고, 두 달 뒤인 3월에는 추가로 피륙 300단을 보냈다.[60] 왜국이 '백제 지원에 나서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당시 고구려661년 12월에 있었던 당의 침략 시도를 좌절시켰다(《일본서기》)[61]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663년 8월, 권력을 장악한 귀실복신과 부여풍의 싸움이 격화되어 결국 복신이 살해당한 뒤,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3. 백강 전투 (663년)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멸망한 백제의 귀실복신, 흑치상지 등은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56] 복신은 당시 왜국에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왜국에 원병을 요청했다.

663년 8월, 권력 다툼으로 귀실복신이 살해된 후,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원병을 청했다. 신라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려 했고, 당은 웅진도독부유인원의 증원 요청에 따라 유인궤가 이끄는 수군 7천 명을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 문무대왕의 정예군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과 부여융이 이끄는 170여 척의 왜군이 수륙협공으로 신라주류성으로 진격했다. 백제 기병이 육지에서 신라군을 막았고, 왜선은 강변 모래밭에 대기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 차이로 인해 나·당 연합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네 번 모두 완패했다. 백강에 집결한 1천 척의 함선 중 4백 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왜병 장수 에치노 다쿠쓰는 분전했지만 전사했고,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는 당병에 붙들려 8년간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귀국했다. 부여풍은 측근 몇 명만 거느리고 고구려로 도주했고, 왜병은 남부여 유민들을 배에 싣고 당의 수군에 쫓기며 귀국했다. 육지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왜의 기병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켜 백제 부흥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663년, 백제 부흥군과 야마토 해군은 백제 남부에 집결하여 주류성을 구원하려 했다. 야마토 해군은 금강을 통해 주류성으로 지상군을 수송하려 했으나, 당나라는 7,000명의 병사와 170척의 함선으로 해상봉쇄를 펼쳤다.[9]

10월 4일 (음력 8월 27일), 일본 함대의 선봉대가 돌파를 시도했으나, 당나라 함대는 정석적인 전술과 강력한 진형을 유지하며 공격을 격퇴했다.[10]

10월 5일 (음력 8월 28일), 일본군 증원으로 당나라 함대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강폭이 좁아 당나라 함대는 전열을 유지하며 전면과 측면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수적 우세를 확신하고 하루 종일 최소 세 차례 공격했지만, 당나라 함대는 매번 공격을 막아냈다. 일본군은 지쳐 전열이 흐트러졌고, 당나라 함대는 예비대로 역공하여 일본군 좌우익을 붕괴시키고 함대를 포위했다. 많은 일본군이 물에 빠져 죽었고, 많은 함선이 불타거나 침몰했다. 야마토 장군 에치노 다쿠쓰(額田部赤檮)는 근접전에서 십여 명 이상을 베었으나 전사했다.[11]

일본, 한국, 중국 자료 모두 일본군의 큰 피해를 보여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 함선 400척이 침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3. 1. 왜의 참전 결정과 파병

일본어의 참전은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시작되었다. 멸망 직후, 귀실복신흑치상지 등은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당시 倭일본어에 체류 중이던 백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倭일본어에 원병을 요청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倭일본어는 세 차례에 걸쳐 파병을 단행했다.

시기규모지휘관비고
제1파661년 5월1만여 명, 선박 170여 척아즈미노 히라후, 사이노 아치마사, 에치노 다쿠쓰부여풍 호위[56]
제2파662년 3월2만 7천 명카미츠케누노기미노 와카코, 아베노 히라후주력 부대[57]
제3파663년 8월1만여 명이오하라기미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강국이었기에, 백제 부흥군 지원은 倭일본어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귀실복신이 원병과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한 것은 660년 10월이었지만[58], 倭일본어 조정이 부여풍을 보낸 것은 661년 9월이었다.[59]

일본어는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 급서한 뒤에도 황태자 나카노오에 (덴지 천황)가 즉위도 미루고 지원에 전력을 다했다. 662년 1월에는 화살 10만 척과 곡식 종자 3천 석, 3월에는 피륙 300단을 보냈다.[60]

일본어가 백제 지원을 결정한 배경에는 661년 12월 고구려가 당의 침략을 좌절시켰다는 소식[61]662년 1월 연개소문의 군대가 평양 근교에서 당군 10만을 격퇴했다는 정보가 있었다. 또한, 2월에는 군량 부족으로 평양 근교에 고립되었던 당의 소정방신라의 군량 지원으로 간신히 퇴각한 것을 보고, '고구려와 함께라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3. 2. 전투 경과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당나라로 끌려간 후, 귀실복신, 흑치상지 등이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56] 복신은 당시 왜국에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왜국에 원병을 요청했다. 《일본서기》에는 왜병 파병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57]

파견 순서지휘관병력 규모출발 시기비고
제1파아즈미노 히라후, 사이노 아치마사, 에치노 다쿠쓰1만여 명, 선박 170여 척661년 5월부여풍 호위
제2파카미츠케누노기미노 와카코, 아베노 히라후2만 7천 명662년 3월주력 부대
제3파이오하라기미1만여 명663년 8월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기에, 백제 부흥군 지원은 어려운 결정이었다. 귀실복신660년 10월에 원병과 부여풍 귀환을 요청했지만[58], 왜 조정이 풍을 신라로 보낸 것은 661년 9월이었다.[59]

왜국은 부흥운동을 지원했는데,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 급서한 뒤에도 황태자 나카노오에가 즉위도 미루며 지원에 전력을 다했다. 662년 1월에는 화살 10만 척과 곡식 종자 3천 석, 3월에는 피륙 300단을 보냈다.[60] 왜국이 지원을 결정한 배경에는 661년 12월 고구려가 당의 침략을 좌절시켰다는 소식이 있었다.[61] 662년 1월 연개소문 군대가 평양 근교에서 당군 10만을 격퇴하고, 2월에는 당의 소정방이 신라의 군량 지원으로 간신히 퇴각한 것을 보고, '고구려와 함께라면 손해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663년 8월, 권력 다툼으로 귀실복신이 살해된 후,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원병을 청했다. 신라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려 했고, 당은 유인원의 증원 요청에 따라 유인궤가 이끄는 수군 7천 명을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 문무대왕의 정예군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과 부여융이 이끄는 170여 척의 왜군이 수륙협공으로 신라주류성으로 진격했다. 백제 기병이 육지에서 신라군을 막았고, 왜선은 강변 모래밭에 대기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 차이로 인해 나·당 연합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네 번 모두 완패했다. 백강에 집결한 1천 척의 함선 중 4백 척이 불탔으며, 《삼국사기》는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왜병 장수 에치노 다쿠쓰는 분전했지만 전사했고,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는 당병에 붙들려 8년간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귀국했다. 부여풍은 측근 몇 명만 거느리고 고구려로 도주했고, 왜병은 남부여 유민들을 배에 싣고 당의 수군에 쫓기며 귀국했다. 육지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왜의 기병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켜 백제 부흥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663년, 백제 부흥군과 야마토 해군은 백제 남부에 집결하여 주류성을 구원하려 했다. 야마토 해군은 금강을 통해 주류성으로 지상군을 수송하려 했으나, 당나라는 7,000명의 병사와 170척의 함선으로 해상봉쇄를 펼쳤다.[9]

10월 4일 (음력 8월 27일), 일본 함대의 선봉대가 돌파를 시도했으나, 당나라 함대는 정석적인 전술과 강력한 진형을 유지하며 공격을 격퇴했다.[10]

10월 5일 (음력 8월 28일), 일본군 증원으로 당나라 함대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강폭이 좁아 당나라 함대는 전열을 유지하며 전면과 측면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수적 우세를 확신하고 하루 종일 최소 세 차례 공격했지만, 당나라 함대는 매번 공격을 막아냈다. 일본군은 지쳐 전열이 흐트러졌고, 당나라 함대는 예비대로 역공하여 일본군 좌우익을 붕괴시키고 함대를 포위했다. 많은 일본군이 물에 빠져 죽었고, 많은 함선이 불타거나 침몰했다. 야마토 장군 에치노 다쿠쓰(額田部赤檮)는 근접전에서 십여 명 이상을 베었으나 전사했다.[11]

일본, 한국, 중국 자료 모두 일본군의 큰 피해를 보여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 함선 400척이 침몰했다.[12]

4. 전투의 영향

663년 백강 싸움에서 귀실복신이 죽고 내분이 겹치면서, 의 지원군마저 당나라 수군에게 크게 패하여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부흥군 지휘부와 백제 유민들은 왜국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 주류성이 함락되었을 때, 백제 귀족들은 "오늘로서 나라의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의 무덤도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며, "호례성에 가서 왜군 장수들과 논의해야 할 일을 상의하자"고 입을 모았다.[61]

왜는 백제 난민들을 수용하는 동시에 신라나 당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왜의 조정은 이러한 상황을 국내 정치에 반영하여 중앙집권화에 이용하려 했다. 덴지 천황 때 책정된 오오미령(近江令)부터 덴무 천황 때에는 왜국 최초의 율령법으로 여겨지는 아스카기요미하라령(飛鳥淨御原令)이 제정되면서 율령국가 건설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701년 다이호 율령 제정으로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어 신국가 건설은 일단락되었다.[41]

신라와 당의 연합이 왜국을 정복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왜는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 문무왕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 8세기 초까지 신라와 교류했다. 원효의상 등의 신라 승려들이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귀실집사를 제사지내는 기시쓰 신사.


왜로 망명한 백제 유민들은 왜국에서 신분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부여풍의 동생 부여선광(扶餘禪廣)은 구다라노고니키시(百濟王)라는 카바네를 받아 왜국 귀족 관료 사회에 편입되었다. 749년 무쓰(陸奧)에서 금광을 발견하여 나라 대불 건립에 공헌한 구다라노고니키시 쿄후쿠(百濟王敬福)는 종3위를 하사받고 형부경(刑部卿) 직위까지 역임했다. 좌평이었던 백제 왕족 여자신(餘自信)은 지금의 일본 오카야마현 쓰야마시 다카노에 정착하여 다카노 미야쓰코(高野造) 집안의 선조가 되었으며 그 지역에 타카노 신사가 있다. 400명의 유민과 함께 왜로 향했던 귀실집사소금하(小錦下) 관위를 얻었고, 학직두(學職頭)라는 직책을 받아 유교 교육기관의 책임자가 되는 등 학문적 소양을 인정받았다.[40][47]

귀실집사오미 국(近江國)](지금의 일본 시가현) 간자키(神前) 지방에서 집단 거주하다가 669년 왜 조정에 의해 여자신 집단과 함께 약 700명의 백제 유민들이 황무지였던 가모노고오리(蒲生郡)에 이주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야마토가 백제를 보호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 브루스 배튼(Bruce Batte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일본이 만약 완전히 한국 내부의 갈등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본 영토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전쟁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던 이유는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13]

이 전투와 그 이면에 있었던 모든 준비 과정은 야마토 일본과 백제 사이의 강력한 유대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일반적인 국가 간의 군사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것이다. 언어학자 J. 마셜 언거(J. Marshall Unger)는 언어적 증거를 바탕으로 백제가 야요이(弥生) 이동 이후 한반도에 남아 있던 잔존 원시 일본 또는 준 일본 공동체를 나타낼 수 있으며, 여전히 야요이인과 그 후손들과 의식적인 연결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14] 반도의 정치적 갈등을 피해 엘리트 난민들이 야마토에 정착하는 현상은 적어도 5세기 이후로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15]

백강 전투는 당나라중국(中原)을 재통일하고 동아시아(東ユーラシア) 전역에 세력을 뻗치면서, 동북아시아의 세력 구도가 크게 바뀌는 과정을 결정적으로 만든 전투라고 할 수 있다.

4. 1. 한반도의 정세 변화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628년에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당 태종당 고종644년~648년에 걸쳐 고구려를 공략했지만 실패하였다.[52]

627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때는 당이 내전 중이어서 원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백제가 당과 적대 관계가 되면서 선덕여왕은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를 통해 친당 정책을 펼쳤고, 654년에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자 양국 관계는 더 친밀해졌다. 648년부터 신라와 당 사이에 백제 공격이 논의되고 있었다.[52] 한편, 649년 신라에서 김다수(金多遂)가 왜국에 파견되는 등 왜에 대한 외교도 활발해졌다. 당시 왜국에서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 급진 개혁 세력은 당과 그 동맹국 신라를 자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신라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647년 당시 신라의 실력자였던 김춘추도 직접 왜로 건너가 왜 조정과 교섭하면서, 왜의 귀족들에게 "용모가 아름답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53] 백제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백제의 동맹국이었던 왜국을 떼어내는 것이 신라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백제와 왜국을 갈라 놓으려는 신라의 노력은 결국 실패했는데, 이는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왜의 유력 호족 소가(蘇我) 일족과 긴밀한 통혼 관계에 있던 나카노오에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으면서 친백제 세력이 친신라보다 우세해졌기 때문이다.[54] 당시 왜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이 왜의 전통적인 우호국 백제를 해상으로 공격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왜는 전통적인 우호 관계였던 당과 백제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다.[54] 또한 신라의 급속한 발전이 왜에 불안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하쿠치 2년(651년)에 신라에서 왜에 파견한 사찬 지만(知萬)이 세련된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왜의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巨勢徳陀子)가 왜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후의 덴지 천황)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5]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한반도의 정세는 급변하게 되었다.

4. 2. 왜(일본)의 변화

649년부터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 후의 덴지 천황)가 왜국의 실권을 잡으면서 친백제 세력이 친신라 세력보다 우세해졌다. 당시 왜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나라가 왜국의 전통적인 우호국 백제를 해상으로 공격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왜국은 전통적인 우호 관계였던 당나라와 백제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다.[54] 651년 신라에서 왜국에 파견한 사찬 지만(知萬)이 세련된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왜국의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巨勢徳陀子)가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5]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왜국은 백제 난민들을 수용하는 동시에 신라나 당나라와의 대립은 깊어졌다. 덴지 천황 때에 책정된 오오미령(近江令)부터 덴무 천황 때에는 왜국 최초의 율령법으로 여겨지는 아스카기요미하라령(飛鳥淨御原令)이 제정되면서 율령국가의 건설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701년 다이호 율령의 제정으로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어 신국가의 건설은 일단락되었다. 결과적으로 왜국 내부의 위기감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면서 일본이라는 율령국가 수립의 한 토대가 된 것이다.[41]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왜국의 중신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신라의 명장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 8세기 초까지 신라와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4. 3. 백제 유민의 이동

663년 백강 전투에서 귀실복신이 죽고 내분이 격화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부흥군 지휘부와 백제 유민들은 왜국으로 망명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 주류성이 함락되었을 때, 백제 귀족들은 "오늘로서 나라의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의 무덤도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며, "호례성에 가서 왜군 장수들과 논의해야 할 일을 상의하자"고 했다.[61]

왜로 망명한 백제 유민들은 왜국에서 신분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부여풍의 동생 부여선광(扶餘禪廣)은 백제 부흥 운동이 실패한 후, 왜국에 귀화해서 구다라노고니키시(百濟王)라는 카바네를 받아 왜국의 귀족 관료 사회에 편입되었다. 이후 749년무쓰(陸奧)에서 금광을 발견하여 나라 대불 건립에 공헌한 구다라노고니키시 쿄후쿠(百濟王敬福)는 종3위를 하사받고 형부경(刑部卿) 직위까지 역임했다. 좌평이었던 백제 왕족 여자신(餘自信)은 지금의 일본 오카야마현 쓰야마시 다카노에 정착하여 다카노 미야쓰코(高野造) 집안의 선조가 되었으며 그 지역에 타카노 신사가 있다. 400명의 유민과 함께 왜로 향했던 귀실집사는 왜로부터 12위인 소금하(小錦下) 관위를 얻었고, 학직두(學職頭)라는 직책을 받아 유교 교육기관의 책임자가 되는 등 학문적 소양을 인정받았다.[40][47]

귀실집사는 오미 국(近江國)](지금의 일본 시가현) 간자키(神前) 지방에서 집단 거주하다가 669년 왜 조정에 의해 여자신 집단과 함께 약 700명의 백제 유민들이 황무지였던 가모노고오리(蒲生郡)에 이주되었다고 한다.

5. 역사적 의의와 논쟁

많은 학자가 야마토 정권백제를 보호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 브루스 배튼(Bruce Batte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13]

「日本がもし完全に韓国内部の争いでなかったとしても、少なくとも日本領土とは直接関係のない戦争にそれほど熱心に飛びこんだ理由は簡単に答えられない。」|일본이 만약 완전히 한국 내부의 갈등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본 영토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전쟁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던 이유는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일본어

이 전투와 그 이면에 있었던 모든 준비 과정은 야마토 일본과 백제 사이의 강력한 유대감을 명확히 보여주는데, 이는 일반적인 국가 간의 군사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것이다. 언어학자 J. 마셜 언거(J. Marshall Unger)는 언어적 증거를 바탕으로 백제가 야요이 이동 이후 한반도에 남아 있던 잔존 원시 일본 또는 준(準) 일본 공동체를 나타낼 수 있으며, 여전히 야요이인과 그 후손들과 의식적인 연결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14] 어쨌든, 한반도의 정치적 갈등을 피해 엘리트 난민들이 야마토에 정착하는 현상은 적어도 5세기 이후로 여러 차례 반복되어 왔다.[15]

5. 1. 한국사의 관점

많은 학자가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보호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 브루스 배튼(Bruce Batte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일본이 만약 완전히 한국 내부의 갈등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본 영토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전쟁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던 이유는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13]


이 전투와 그 이면에 있었던 모든 준비 과정은 (다른 어떤 기록과는 별개로) 야마토 일본과 백제 사이의 강력한 유대감을 명확히 보여주는데, 이는 일반적인 국가 간의 군사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것이다. 언어학자 J. 마셜 언거(J. Marshall Unger)는 언어적 증거를 바탕으로 백제가 야요이 이동 이후 한반도에 남아 있던 잔존 원시 일본 또는 준(準) 일본 공동체를 나타낼 수 있으며, 여전히 야요이인과 그 후손들과 의식적인 연결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14] 어쨌든, 한반도의 정치적 갈등을 피해 엘리트 난민들이 야마토에 정착하는 현상은 적어도 5세기 이후로 여러 차례 반복되어 왔다.[15]

5. 2. 일본사의 관점

많은 학자는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보호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 브루스 배튼(Bruce Batte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13]

「日本がもし完全に韓国内部の争いでなかったとしても、少なくとも日本領土とは直接関係のない戦争にそれほど熱心に飛びこんだ理由は簡単に答えられない。」일본어

이 전투와 그 이면에 있었던 모든 준비 과정은 일반적인 국가 간의 군사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야마토 일본과 백제 사이의 강력한 유대감을 명확히 보여준다. 언어학자 J. 마셜 언거(J. Marshall Unger)는 언어적 증거를 바탕으로 백제가 야요이(弥生) 이동 이후 한반도에 남아 있던 잔존 원시 일본 또는 준 일본 공동체를 나타낼 수 있으며, 여전히 야요이인과 그 후손들과 의식적인 연결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14] 어쨌든, 한반도의 정치적 갈등을 피해 엘리트 난민들이 야마토에 정착하는 현상은 적어도 5세기 이후로 여러 차례 반복되어 왔다.[15]

이러한 한반도의 움직임은 일본에도 전해져 경계심이 고조되었다. 대화개신기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당나라가 왜(일본)와는 거리가 먼 고구려가 아닌, 전통적인 우방국인 백제를 해로를 통해 공격할 가능성이 생겨남에 따라, 일본의 외교 정책은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맺어 온 중국 왕조(당)와 백제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 시기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일관된 친백제 노선설”, “효덕 천황 = 친백제파, 중대형황자 = 친당·신라파”, “효덕 천황 = 친당·신라파, 중대형황자 = 친백제파” 등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 신라 정벌 진언

백치 2년(651년)에 좌대신 거세덕타자가 일본의 실력자였던 중대형황자(후의 천지 천황)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 견당사

백치 4년(653년), 백치 5년(654년) 2년 연속으로 견당사가 파견된 것도 이러한 정세에 대응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 왜구·숙신 토벌

제명 천황 시대가 되면서 북방 정벌이 계획되었고, 월국 국수 아베노 히라후는 658년(제명 천황 4년) 4월, 659년 3월에 왜구를, 660년 3월에는 미시하세를 토벌하였다.

661년 5월, 제1차 일본군이 출발했다. 지휘관은 아즈미노 히라후, 사이 비라, 박시 신조 타라이즈였다. 봉장왕을 호송하는 선발대였으며, 선박 170여 척이었다.

662년 3월, 주력 부대인 제2차 일본군이 출발했다. 지휘관은 아가모노노 키미 와카고, 코세 신젠 오미 야쿠고, 아베노 히라후(아베노 오미)였다.

663년(덴지 천황 2년), 봉장왕은 복신과 대립하여 그를 죽이는 사건을 일으켰지만, 일본의 원군을 얻은 백제 부흥군은 백제 남부에 침입한 신라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백제의 재기(再起)에 대해 당나라는 증원으로 유인궤가 이끄는 수군을 파견했다. 당·신라 연합군은 수륙 병진하여 일본·백제 연합군을 일거에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육군은 당나라 장수 손인사, 유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문무왕)이 지휘했다. 유인궤, 두상 및 옛 백제 태자 부여융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은 금강을 따라 내려가 육군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포위 섬멸했다.

한편, 야마토 조정은 강력한 권한을 가진 통일 지휘관이 없었고, 작전도 허술했다. 당나라와 비교하여 대외 전쟁 경험도 부족했고, 전체 병력도 열세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백제 측 인원들도 의견 통일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이미 내분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였다.

5. 3. 규슈 왕조설 (이설)

후루타 다케히코(古田武彦) 등은 7세기까지 규슈 북부에 일본 열도를 대표하는 왕조가 있었다는 규슈왕조설(九州王朝說)을 주장했다. 이들은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과 싸운 왜가 기나이 정권이 아니라 다자이후(大宰府)를 수도로 삼고 있던 규슈 왕조의 군사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고대사학계에서는 사료 비판과 같은 역사학의 기본적인 절차조차 밟지 않은 학설이라며 "학설로서 비판이나 검증을 받을 가치도 못 된다" 하여 무시하고 있다. 일본의 주요 학술 잡지에서 이러한 '규슈 왕조설'을 긍정적으로 채택한 학술 논문은 하나도 없으며, 일반적으로 규슈 왕조를 언급하는 주장은 신빙성 있는 학설로 취급되지 못한다.[13]

많은 학자들은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보호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 브루스 배튼(Bruce Batte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일본이 만약 완전히 한국 내부의 갈등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본 영토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전쟁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던 이유는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13]

이 전투와 그 이면에 있었던 모든 준비 과정은 (다른 어떤 기록과는 별개로) 야마토 일본과 백제 사이의 강력한 유대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일반적인 국가 간의 군사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것이다. 언어학자 J. 마셜 언거(J. Marshall Unger)는 언어적 증거를 바탕으로 백제가 야요이 이동 이후 한반도에 남아 있던 잔존 원시 일본 또는 준 일본 공동체를 나타낼 수 있으며, 여전히 야요이인과 그 후손들과 의식적인 연결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14] 어쨌든, 반도의 정치적 갈등을 피해 엘리트 난민들이 야마토에 정착하는 현상은 적어도 5세기 이후로 여러 차례 반복되어 왔다.[15]

참조

[1] 웹사이트 Three-Kingdom Era: Koreans bring culture to Japan https://www.koreatim[...] 2011-11-25
[2] 서적 Japanese Sea Power: A Maritime Nation's Struggle for Identity https://www.navy.gov[...] Foundations on International Thinking on Sea Power 2009
[3] 서적 Japanese Sea Power: A Maritime Nation's Struggle for Identity https://www.navy.gov[...] Foundations on International Thinking on Sea Power 2009
[4] 논문 왜 왕권과 백제ㆍ신라의 「質」 : 왜국의 「質」 導入ㆍ受容의 의미 :왜국의 「質」 導入ㆍ受容의 의미 https://www.dbpia.co[...] 2006-10
[5] 서적 Gateway to Japan: Hakata in War and Peace, 500–1300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6
[6] 서적 Gateway to Japan: Hakata in War and Peace, 500–1300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6
[7] 서적 Man'yōshū Iwanami 1999-2003
[8] 서적 Japanese Sea Power: A Maritime Nation's Struggle for Identity https://www.navy.gov[...] Foundations on International Thinking on Sea Power 2009
[9] 서적 Japanese Sea Power: A Maritime Nation's Struggle for Identity https://www.navy.gov[...] Foundations on International Thinking on Sea Power 2009
[10] 서적 Japanese Sea Power: A Maritime Nation's Struggle for Identity https://www.navy.gov[...] Foundations on International Thinking on Sea Power 2009
[11] 서적 Japanese Sea Power: A Maritime Nation's Struggle for Identity https://www.navy.gov[...] Foundations on International Thinking on Sea Power 2009
[12] 서적 Japanese Sea Power: A Maritime Nation's Struggle for Identity https://www.navy.gov[...] Foundations on International Thinking on Sea Power 2009
[13] 논문 Foreign Threat and Domestic Reform: The Emergence of the Ritsuryō State https://www.jstor.or[...] 1986
[14] 서적 The Role of Contact in the Origins of the Japanese and Korean Languages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9
[15] 서적 Imperial Politics and Symbolics in Ancient Japa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9
[16] 문서 日本書紀天智天皇2年8月条(663年)「大唐の軍将、戦船百七十艘を率いて白村江に陣列れり。」
[17] 웹사이트 白村江の戦い https://kotobank.jp/[...] Kotobank
[18] 문서 旧唐書「劉仁軌の水軍が白江口で倭兵と遭遇し、其船四百艘を焚く」
[19] 서적 世界大百科事典 18 平凡社 1967
[20] 서적 詳説日本史 山川出版社 2004
[21] 논문 拙著『白村江の戦』史料摘要 https://asia-u.repo.[...] 亜細亜大学アジア研究所 1974
[22] 문서 白村江の海戦 7世紀に起きた日中韓の戦争 http://www.hokkai.ac[...] 北海商科大学北東アジア研究交流センター
[23] 문서 日本書紀崇神、応神、雄略等
[24] 문서 三国史記新羅本紀
[25] 문서 森,1998,p96
[26] 문서 斉明6年7月乙卯
[27] 문서 森,1998,p92
[28] 문서 旧唐書東夷伝
[29] 문서 森,1998,p98-9
[30] 문서 森公章は総数不明として、660年の百済討伐の時の唐軍13万、新羅5万の兵力と相当するものだったと推定している。森公章1998,p146
[31] 문서 三国史記新羅本記五
[32] 문서 森1998,p100
[33] 문서 森1998,p102
[34] 문서 森,1998,p97
[35] 문서 森1998,p104
[36] 서적 森1998
[37] 서적 森1998
[38] 문서 日本書紀 天智天皇2年8月条
[39] 웹사이트 白村江の戦いと廬原氏 http://www.tosyokan.[...] 静岡県立中央図書館 2021-05-03
[40] 서적 森1998
[41] 웹사이트 白村江の戦い、歴史が示す日本の気概 https://yoshiko-saku[...] 櫻井よしこオフィシャルサイト 2017-06-08
[42] 서적 日本書紀
[43] 서적 三国史記
[44] 서적 日本書紀
[45] 서적 日本書紀
[46] 서적 森1998、続日本紀
[47] 서적 日本書紀
[48] 논문 白村江敗戦と軍事力の組織化-軍防令の理念と実像- 八木書店
[49] 서적 戦争の日本古代史 講談社現代新書
[50] 서적 扶桑略記
[51] 문서 東夷傳百済
[52] 서적 삼국사기
[53] 서적 일본서기
[54] 문서
[55] 서적 일본서기
[56] 서적 일본서기
[57] 서적 일본서기
[58] 서적 일본서기
[59] 서적 일본서기
[60] 서적 일본서기
[61] 서적 일본서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