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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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라시는 러시아 브랸스크주에 위치한 도시로, 17세기부터 여러 차례 명칭이 변경되었다. 1648년부터 1667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했으며, 이후 코사크 헤트만국에 위치했다. 1803년부터는 체르니히우 현에 행정적으로 속했다.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유대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으나,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 점령 하에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고, 이후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방사능에 오염되었으며, 현재는 식품, 섬유, 제재업 등 경공업이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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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치는 1707년 설립되어 상공업 중심지로 성장한 러시아 브랸스크주의 도시로, 섬유 산업 번성, 세계 대전 중 유대인 학살, 체르노빌 사고 피해, 드론 공격 피해 등을 겪으며 현재 클린초프스키 구의 행정 중심지이다. - 브랸스크주 - 스타로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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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 | |
위치 | 브랸스크 주 |
행정 구역 | 수라시스키 군 |
도시 행정 구역 | 수라시스키 도시 행정 구역 |
최초 언급 | 17세기 |
이전 이름 | 수라지치 (1781년) 수라시-나-이푸티 (1797년) |
웹사이트 | 수라시 공식 웹사이트 |
인구 | |
2021년 인구 조사 | 11,176명 |
2010년 인구 조사 | 11,640명 |
2002년 인구 조사 | 12,046명 |
1989년 인구 조사 | 12,559명 |
지리 | |
거리 | 모스크바에서 |
2. 역사
수라시는 1648년부터 1667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 스몰렌스크 주의 일부였으며, 이후 코사크 헤트만국에 위치했다. 17세기에는 '''수라지치'''(수라지치/Суражичиru)라는 마을로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후에는 ''슬로보다''로 불렸다. 1781년부터는 '''수라시-나-이푸티'''(수라시-나-이푸티/Сураж-на-Ипутиru)라는 도시로 알려졌고,[2] 1797년부터는 단순히 수라시로 불렸다.
1803년부터는 체르니히우 현에 행정적으로 위치했다.[2] 1870년에는 마을에 82명의 장인과 8개의 소규모 공장이 있었다.[2]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도시의 인구는 4,006명이었으며, 그 중 59.9%가 유대인, 24.4%가 벨라루스인, 13.9%가 러시아인, 0.8%가 우크라이나인, 0.6%가 폴란드인이었다.[3] 유대인은 18세기 전반에 수라시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1897년 수라시의 유대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했다. 1905년 10월과 1917년 겨울 말과 봄에 포그롬으로 고통받았다. 1918년에는 붉은 군대 군인들이 수라시에서 포그롬을 저질렀다. 1939년 수라시의 유대인 2,052명은 전체 인구의 약 23%를 차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 중 1941년 8월 17일에 독일 국방군에게 점령되었고,[4] 유대인들은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들이 떠난 집은 손상된 후 불태워졌다. 1942년 3월에는 모든 게토 수감자들이 키슬로브카 마을 근처에서 총살당했다. 1943년 9월 25일에 붉은 군대 브랸스크 전선에 의해 해방되었다.[4]
2. 1. 초기 역사
수라시는 1648년부터 1667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 스몰렌스크 주의 일부였으며, 이후 코사크 헤트만국에 위치했다. 17세기에는 '''수라지치'''(수라지치/Суражичиru)라는 마을로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후에는 ''슬로보다''로 불렸다. 1781년부터는 '''수라시-나-이푸티'''(수라시-나-이푸티/Сураж-на-Ипутиru)라는 도시로 알려졌고,[2] 1797년부터는 단순히 수라시로 불렸다.1803년부터는 체르니히우 현에 행정적으로 위치했다.[2] 1870년에는 마을에 82명의 장인과 8개의 소규모 공장이 있었다.[2]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도시의 인구는 4,006명이었으며, 그 중 59.9%가 유대인, 24.4%가 벨라루스인, 13.9%가 러시아인, 0.8%가 우크라이나인, 0.6%가 폴란드인이었다.[3]
17세기 문헌에 따르면 수라시는 수라지치(수라지치/Суражичиru)라는 성당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고, 후에 슬로보다가 되었다. 1781년에 수라지-나-이푸치(수라지-나-이푸치/Сураж-на-Ипутиru)라는 이름으로 시가 되었고 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1797년 이후, "이푸치 강가의"라는 접미사가 제거되어 그냥 수라시라고 불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에서는 1941년 8월 17일에 독일 국방군에게 점령되었지만,[4] 1943년 9월 25일에 붉은 군대 브랸스크 전선에 의해 탈환되었다.[4]
2. 2. 도시로의 발전
수라시는 1648/1667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 스몰렌스크 주의 일부였으며, 이후 코사크 헤트만국에 위치했다.[2] 17세기에는 수라지치(수라지치/Суражичиru)라는 마을로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후 ''슬로보다''로 불렸다. 1781년부터는 수라시-나-이푸티(수라시-나-이푸티/Сураж-на-Ипутиru)라는 도시로 알려졌고,[2] 1797년부터는 단순히 수라시로 불렸다. 1803년부터는 체르니히우 현에 행정적으로 위치했다.[2]1870년에는 마을에 82명의 장인과 8개의 소규모 공장이 있었다.[2]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도시의 인구는 4,006명이었으며, 그 중 59.9%가 유대인, 24.4%가 벨라루스인, 13.9%가 러시아인, 0.8%가 우크라이나인, 0.6%가 폴란드인이었다.[3] 18세기 전반에 유대인들이 수라시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1897년 수라시의 유대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에서는 1941년 8월 17일에 독일 국방군에게 점령되었지만, 1943년 9월 25일에 붉은 군대 브랸스크 전선에 의해 탈환되었다.[4]
2. 3. 러시아 제국 시기
수라시는 1648/1667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 스몰렌스크 주의 일부였으며, 이후 코사크 헤트만국에 위치했다.[2] 17세기에는 '''수라지치''' (수라지치/Суражичиru)라는 마을로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후에는 ''슬로보다''로 불렸다. 1781년부터는 '''수라시-나-이푸티''' (수라시-나-이푸티/Сураж-на-Ипутиru)라는 도시로 알려졌고,[2] 1797년부터는 단순히 수라시로 불렸다.1803년부터는 체르니히우 현에 행정적으로 위치했다.[2] 1870년에는 마을에 82명의 장인과 8개의 소규모 공장이 있었다.[2]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도시의 인구는 4,006명이었으며, 그 중 59.9%가 유대인, 24.4%가 벨라루스인, 13.9%가 러시아인, 0.8%가 우크라이나인, 0.6%가 폴란드인이었다.[3]
유대인은 18세기 전반에 수라시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수라시의 유대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했다. 이들은 1905년 10월과 1917년 겨울 말과 봄에 포그롬으로 고통받았다. 1918년에는 붉은 군대 군인들이 수라시에서 포그롬을 저질렀다.
17세기 문헌에 따르면 수라시는 수라지치(수라지치/Суражичиru)라는 성당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고, 후에 슬로보다가 되었다. 1781년에 수라지-나-이푸치(수라지-나-이푸치/Сураж-на-Ипутиru)라는 이름으로 시가 되었고, 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1797년 이후, "이푸치 강가의"라는 후반 접미사가 제거되어, 그냥 수라시라고 불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에서는 1941년 8월 17일에 독일 국방군에게 점령되었지만, 1943년 9월 25일에 브랸스크 공세를 진행하는 붉은 군대 브랸스크 전선에 의해 탈환되었다.[4]
2. 4. 유대인 공동체와 포그롬
수라시의 유대인들은 18세기 전반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3]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도시 인구 4,006명 중 59.9%가 유대인이었다.[3] 1939년에는 유대인 인구가 2,052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23%를 차지했다.[3]수라시의 유대인들은 1905년 10월과 1917년 겨울 말과 봄에 포그롬으로 고통받았다.[3] 1918년에는 붉은 군대 군인들이 포그롬을 저질렀다.[3]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8월 17일, 수라시는 독일에 점령되었고, 유대인들은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다.[3] 그들이 떠난 집은 손상된 후 불태워졌다. 1942년 3월에는 모든 게토 수감자들이 키슬로브카 마을 근처에서 총살당했다.[3]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수라시는 17세기 문헌에 수라지치(수라지치/Суражичиru)라는 성당이 있는 작은 마을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슬로보다가 되었다.[2] 1781년에 수라지-나-이푸치(수라지-나-이푸티/Сураж-на-Ипутиru)라는 이름으로 도시가 되었고, 1797년 이후에는 그냥 수라시라고 불리게 되었다.[2]18세기 전반에 유대인이 수라시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수라시의 유대인 인구는 2,398명으로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했다. 1939년에는 2,052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23%를 차지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 중 1941년 8월 17일에 독일 국방군에게 점령되었다.[4] 유대인들은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고, 1942년 3월에는 키슬로브카 마을 근처에서 총살당했다. 1943년 9월 25일에 붉은 군대 브랸스크 전선에 의해 해방되었다.[4]
2. 6. 소비에트 연방 시기
수라시는 17세기 문헌에 수라지치(Суражичиru)라는 성당이 있는 작은 마을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슬로보다로 불렸다. 1781년부터는 수라시-나-이푸티(Сураж-на-Ипутиru)라는 도시로 알려졌고,[2] 1797년부터는 단순히 수라시로 불렸다.1803년부터는 체르니히우 현에 행정적으로 위치했다.[2] 1870년에는 마을에 82명의 장인과 8개의 소규모 공장이 있었다.[2]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도시 인구는 4,006명이었으며, 그 중 59.9%가 유대인, 24.4%가 벨라루스인, 13.9%가 러시아인, 0.8%가 우크라이나인, 0.6%가 폴란드인이었다.[3]
유대인은 18세기 전반에 수라시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수라시의 유대인 인구 2,398명은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했다. 수라시의 유대인들은 1905년 10월과 1917년 겨울 말과 봄에 포그롬으로 고통받았다. 1918년에는 수라시에서 붉은 군대 군인들이 포그롬을 저질렀다. 1939년 수라시의 유대인 2,052명은 전체 인구의 약 23%를 차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 중 1941년 8월 17일에 독일 국방군에게 점령되었지만, 1943년 9월 25일에 브랸스크 공세를 진행하는 붉은 군대 브랸스크 전선에 의해 탈환되었다.[4]
3. 행정 구역 및 지방 자치
행정 구역의 틀 내에서, 수라시는 수라시스키 구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한다.[5] 행정 구역으로서, 수라시스키 구에 '''수라시스키 도시 행정 오크루그(Urban Administrative Okrug)'''로 통합되어 있다.[6] 지방 자치 구역으로서, 수라시스키 도시 행정 오크루그는 수라시스키 지방 자치구에 '''수라시스코예 도시 정착지'''로 통합되어 있다.[7]
4. 환경 문제
1986년 4월 26일 발생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브랸스크주 영토의 일부가 방사성 핵종에 오염되었다. 특히 수라시스키를 포함하여 고르데예프스키, 클리모프스키, 클린초프스키, 크라스노고르스키, 노보지브코프스키 등이 오염되었다. 1999년에는 오염 수준이 5 퀴리/km2 이상인 지역에 약 226,000명이 거주했으며, 이는 주 전체 인구의 약 16%에 해당한다.
4. 1.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영향
1986년 4월 26일 발생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브랸스크주 영토의 일부가 방사성 핵종에 오염되었다.(주로 고르데예프스키, 클리모프스키, 클린초프스키, 크라스노고르스키, 수라시스키, 노보지브코프스키). 1999년에는 오염 수준이 5 퀴리/km2 이상인 지역에 약 226,000명이 거주했으며, 이는 주 전체 인구의 약 16%에 해당한다.5. 문화
수라시 시내에는 역사 박물관이 있다.
수라시에서 동쪽으로 8km 떨어진 랴리치 마을(랴리치/Ляличиru)에는 예카테리나 2세의 총신이었던 표트르 자바도프스키의 저택 터가 남아 있다. 러시아에서 활약한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콰렌기가 설계하여 1780년대부터 1790년대에 걸쳐 지어진 저택과 영국식 정원 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5. 1. 박물관
수라시 시내에는 역사 박물관이 있다.수라시에서 동쪽으로 8km 떨어진 랴리치 마을(랴리치/Ляличиru)에는 예카테리나 2세의 총신이었던 표트르 자바도프스키의 저택 터가 남아 있다. 러시아에서 활약한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콰렌기가 설계하여 1780년대부터 1790년대에 걸쳐 지어진 저택과 영국식 정원 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5. 2. 랴리치 마을의 유적
예카테리나 2세의 총신이었던 표트르 자바도프스키의 저택 터가 수라시에서 8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랴리치 마을(랼리치/Ляличиru)에 남아 있다. 러시아에서 활약한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콰렌기가 설계하여 1780년대부터 1790년대에 걸쳐 지어진 저택과 영국식 정원 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6. 산업
수라시에는 식품 공업, 섬유 공업, 제재업 등 경공업이 입지해 있다. 1923년에 개통된 볼샤 - 크리체우 - 우네차 간 철도와 크리체우 - 우네차 간 도로가 통과한다. 이 도로는 남쪽으로 가면 우네차에서 브랸스크에서 포체프, 우네차, 클린치, 노보지프코프를 거쳐 벨라루스 국경으로 뻗어 있는 M13 간선 도로로 연결된다.
7. 교통
참조
[1]
간행물
2010Census
[2]
서적
Słownik geograficzny Królestwa Polskiego i innych krajów słowiańskich, Tom XI
[3]
웹사이트
Surazh district - the city of Surazh
http://www.demoscope[...]
2023-12-03
[4]
웹사이트
The Untold Stories. The Murder Sites of the Jews in the Occupied Territories of the Former USSR
https://www.yadvashe[...]
[5]
법률
Law #13-Z
[6]
법률
Law #69-Z
[7]
법률
Law #3-Z
[8]
웹사이트
city population
https://www.citypopu[...]
20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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