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련 전투
1. 개요
수사련 전투는 1725년부터 1726년까지 대만 원주민 타오족 수사련 공동체의 지도자 골종이 한족의 토지 경작으로 인한 생활 공간 압박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골종은 1725년부터 1726년까지 한족을 공격하여 62명이 사망하고 100여 채의 집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혔다. 청나라는 초기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1725년 11월부터 정책을 변경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청나라 군대는 오창조를 중심으로 남로군과 북로군으로 나뉘어 수사련을 공격했고, 골종과 그의 아들들을 처벌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의 대만 통치가 강화되었고, 원주민 사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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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 당시 대청(大清) 복건성(福建省)에 속했던 대만부(臺灣府) 창화현(彰化縣) 조계(烏溪) 상류의 일월담(日月潭) |
|---|
| 교전국 1 | 청나라 |
|---|---|
| 교전국 2 | 대만 원주민 타오족(邵族)의 수리사(水裡社) |
| 지휘관 1 | 오창조(吳昌祚)왕견(王汧)하면(何勉) |
|---|---|
| 지휘관 2 | 타오족(邵族)의 골종(骨宗) |
| 군대 1 | 병용(兵勇)민장(民壯)숙번(熟番) |
|---|---|
| 군대 2 | 타오족(邵族) 수리사(水裡社) - 일월담(日月潭) 수사련(水沙連) 지역 아타얄족(泰雅族) 묘리미사(貓里眉社) - 오계(烏溪)의 미계(眉溪) 지역 |
| 병력 1 | 병용(兵勇) : 610명 이상민장(民壯) : 약 250명숙번(熟番) : 930명 이상 |
| 병력 2 | 실제 병력은 모름 |
| 사상자 1 | 알 수 없음 |
|---|---|
| 사상자 2 | 알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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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현의 역사 -
921 대지진
1999년 9월 21일 대만에서 발생한 921 대지진은 모멘트 규모 7.7, 리히터 규모 7.3의 강진으로 난터우현 지지 근처를 진앙으로 하여 대만 전역에 심각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야기했으며 처룽푸 단층의 지표 파열로 지형 변화를 초래하여 국제적인 지원을 받았다. -
장화현의 역사 -
다이추주
다이추주는 일제강점기와 중화민국 시대를 거치며 대만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미친 지역으로, 타이중시를 중심으로 대만 중부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무사 사건과 2.28 사건으로 역사적 상처를 입었으며,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현재는 타이중시와 장화시를 아우르는 중요한 지역이다. -
청나라가 참전한 전쟁 -
아편 전쟁
아편 전쟁은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과 중국 간에 벌어진 무력 충돌로, 아편 무역, 불균형적인 국제 관계, 중국의 아편 중독 만연에 대한 청나라의 강경 대응이 원인이 되어 제1차, 2차 아편 전쟁을 거치며 중국의 국권 침탈과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심화시킨 사건이다. -
청나라가 참전한 전쟁 -
제1차 아편 전쟁
제1차 아편 전쟁은 1839년부터 1842년까지 청나라와 영국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광저우 무역 체제와 아편 밀매가 원인이 되어 영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난징 조약 체결로 청나라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대만 원주민 -
아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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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원주민 -
부눈족
부눈족은 대만 중앙산맥에 거주하며 맹렬한 전사이자 머리 사냥꾼으로 알려졌으나 일제강점기 강제 이주와 국민당 정부의 문화적 동화 정책을 겪었고, 독특한 다성 음악과 음력 달력 기반 삶, 귀 사격 축제 등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며 난터우, 가오슝, 화롄, 타이둥 현 등에 걸쳐 다섯 개의 하위 집단으로 나뉘어 거주하는 고산족이다.
2. 배경
水沙連之役중국어은 18세기 초, 청나라 옹정제 재위 시기에 대만에서 일어난 한족 이주민과 대만 원주민 간의 갈등이 배경이다. 경제적 기회를 찾아 대만으로 이주한 한족 인구가 증가하면서, 타오족(邵族)을 비롯한 원주민들의 생활 공간이 압박받게 되었다. 토지 경작과 자원 확보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2.1. 사회적 배경
18세기 초, 청나라 옹정제 재위 시기에 많은 한족들이 경제적 기회를 찾아 대만으로 이주하였다. 한족 인구의 증가는 대만 원주민, 특히 타오족(邵族)의 생활 공간을 압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토지 경작과 자원 확보를 둘러싼 한족과 원주민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2.2. 골종과 타오족
골종(骨宗)은 타오족(邵族) 수사련(水沙連) 공동체의 지도자로, 그의 아들 발사롱(拔思弄)과 수리만(水里萬)과 함께 부족을 이끌었다. 청나라 옹정제 재위 시기에 많은 한족들이 땅을 경작하기 위해 대만으로 이주하면서 타오족의 생활 공간이 압박받게 되었다. 이에 골종과 그의 아들들은 부족을 이끌고 평지에 있는 한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타오족은 전통적으로 머리 사냥 풍습인 추카오(出草)를 행했는데, 이는 풀 뽑기라는 뜻으로 외부인에 대한 경고와 위협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골종 사건으로 1725년(옹정 3년) 음력 3월부터 1726년(옹정 4년) 음력 11월까지 62명의 사망자와 100여 채의 집이 불타 없어졌고, 소 140마리가 죽는 피해가 발생했다.
3. 골종사건의 발발
1725년, 타오카스족의 골종(骨宗)은 옹정제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청 조정은 원주민들에게 세금을 걷고 남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다. 이에 골종은 다른 부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당시 청나라 관리들의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
3.1. 한족 공격
1725년 3월, 골종은 타오족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거주하는 한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타오족 전사들은 대만 원주민의 머리사냥 풍습인 추카오(出草, 출초)를 행하며 한족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추카오는 풀 뽑기라는 뜻이다. 한족들은 공격을 피해 평지에서 도망쳐야 했다.
3.2. 피해 상황
1725년(옹정 3년) 음력 3월부터 1726년(옹정 4년) 음력 11월까지 골종사건으로 인해 한족 62명이 사망하고 100여 채의 집이 소실되었으며, 소 140마리가 죽는 피해가 발생했다.
4. 청나라의 대응
청은 1725년 11월 이전에는 한족이 대만 원주민 거주 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원주민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경계를 넘어와 살인을 저지르자, 1725년 11월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726년 1월, 옹정제는 민절총독 의조웅(宜兆熊)에게 '이번공번(以番攻番)', 즉 원주민을 이용하여 다른 원주민을 공격하게 하는 계책을 쓰도록 지시했다. 이는 저항하면 억압하고 복종하면 달래주는 전략이었다.
1726년 8월, 청은 수사련 원주민 토벌을 위한 원정대 배치를 완료했다. 민절총독 고기탁(高其倬)과 복건순무 모문전(毛文銓)은 오창조를 총통(總統)으로 임명하여 11월에 대만으로 돌아가 전투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4.1. 초기 정책 (1725년 이전)
청은 원래 한족이 산에 사는 대만 원주민 경계에 들어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원주민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소극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경계 밖으로 나와 사람을 죽이자, 1725년 11월부터 정책을 변경했다.
4.2. 정책 변화 (1725년 11월 이후)
1725년(옹정 3년) 11월, 원주민들의 공격으로 한족들의 피해가 커지자 청나라는 기존의 소극적인 대응 정책을 변경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옹정제는 원주민에 대한 강경책을 승인했다.
1726년(옹정 4년) 1월, 복주장군서리(福州將軍署理) 겸 민절총독(閩浙總督) 의조웅(宜兆熊)에게 '이번공번(以番攻番)', 즉 원주민을 이용하여 다른 원주민을 공격하게 하는 계책을 쓰도록 하였다. 이는 범죄자는 체포하되 나머지는 풀어주어, 저항하면 억압하고 복종하면 달래주는 전략이었다.
지방 당국은 옹정제의 허가를 받아 수사련(水沙連)에 병력을 배치할 계획을 세웠다. 1726년(옹정 4년) 8월, 수사련 원주민 토벌을 위한 원정대 배치가 완료되었다. 민절총독 고기탁(高其倬)과 복건순무 모문전(毛文銓)은 8월 10일 복건분순대만하문도(福建分巡臺灣廈門道) 오창조(吳昌祚)를 불러 병력 활용 방안을 묻고, 그를 총통(總統)으로 임명하여 11월에 대만으로 돌아가 전투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4.3. 이번공번(以番攻番) 계책
1726년(옹정 4년) 1월, 옹정제는 복주장군서리(福州將軍署理) 민절총독(閩浙總督) 의조웅(宜兆熊)에게 이번공번(以番攻番) 계책을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이번공번은 원주민을 이용하여 다른 원주민을 공격하는 전략으로, 저항하는 원주민은 억압하고 복종하는 원주민은 회유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4.4. 군사적 대응
1726년(옹정 4년) 8월, 청나라는 수사련 원주민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대를 배치했다. 민절총독(閩浙總督) 고기탁(高其倬)과 복건순무(福建巡撫) 모문전(毛文銓)은 오창조(吳昌祚)를 총통(總統)으로 임명하고, 11월에 대만으로 돌아가 전투를 시작하도록 명령했다.
5. 청나라 군대의 편제
청나라 군대는 남로군, 북로군, 후근 부대로 구성되었다. 오창조가 이끈 남로군은 주력 부대로서 군수 지원과 군량 운송을 담당했다. 북로군은 남로군과 협력하여 작전을 수행했다. 후근 부대는 군수 물자 보급과 후방 지원을 담당했다.
청나라 군대의 총 편제는 다음과 같다.
병용(兵勇)은 정규군과 의용병을, 민장(民壯)은 청나라 시대에 주(州)와 현(縣)을 지키던 위병(衛兵)을, 숙번(熟番)은 동화된 원주민이라는 뜻의 평보족을 의미한다.
5.1. 남로군(南路軍)
오창조가 이끄는 남로군(南路軍)이 주력이었고, 군수 지원과 군량 운송을 담당했다. 남로군은 죽각료에서 산으로 진입하는 임무를 맡았다. 병용(兵勇)은 정규군과 의용병을, 민장(民壯)은 향토 방위군을, 숙번(熟番)은 동화된 원주민을 뜻한다.
| 지휘관 | 병력 | 임무 |
|---|---|---|
| 오창조, 장문요(張文耀), 부운장(傅雲章), 좌사원(左思源), 주소웅(朱紹雄), 왕정계(王廷桂) | 병용 180명 민장 100명 숙번 280명 | 죽각료에서 산으로 진입 |
5.2. 북로군(北路軍)
북로군(北路軍)은 남로군과 협력하여 작전을 수행했으며, 북항(北港) 남투사(南投社)에서 대기하다 명령에 따라 진군하는 임무를 맡았다. 병용(兵勇)은 정규군과 의용병을, 민장(民壯)은 청나라 시대에 주(州)와 현(縣)을 지키던 위병(衛兵)을, 숙번(熟番)은 동화된 원주민이라는 뜻으로 대만의 평원에 사는 평보족(平埔族)을 의미한다.
5.3. 후근(後勤)
후근 부대는 군수 물자 보급과 후방 지원을 담당했다. 주요 지휘관은 유홍량(劉弘量), 진사상(陳士祥), 정화(鄭捷), 완방귀(阮邦貴), 마린지(馬麟趾) 등이었다. 이들은 병용 80명 등을 이끌고 죽각료에 주둔하며 군량을 공급하는 임무를 맡았다. 병용(兵勇)은 정규군과 의용병을 뜻한다.
| 지휘관 | 병력 | 임무 |
|---|---|---|
| 천총(千總): 유홍량(劉弘量) | 자세히 모름 | 창화현 탄압 |
| 파총(把總): 진사상(陳士祥), 정화(鄭捷) 효력외위(效力外委): 완방귀(阮邦貴) 대만현 현승(縣丞): 마린지(馬麟趾) | 병용 80명 | 죽각료 주둔 및 수비, 군량 공급 |
5.4. 총편제
참고로 병용(兵勇)은 정규군과 의용병을 뜻하고, 민장(民壯)은 청나라 시대에 주(州)와 현(縣)을 지키던 위병(衛兵)이며, 숙번(熟番)은 익숙해진(동화된) 원주민이라는 뜻으로 대만의 평원에 사는 평보족이다.
6. 진군 과정
1726년(옹정 4년) 11월 2일, 吳昌祚중국어가 대만으로 돌아와 작전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같은 해 11월 16일, 오창조는 관병을 이끌고 현재 대만의 타이난시를 출발했다. 12월 3일, 북로군과 합류하여 수사련(水沙連) 경내인 중항(中港) 수리사(水裡社)에 집합했다.
북로군은 담수 동지(淡水同知) 왕견(王汧)과 참장(參將) 하면(何勉)이 군을 이끌었다. 1726년(옹정 4년) 12월 3일에 남로군과 함께 남투사(南投社, 현재 대만의 난터우시)를 출발하여, 합리난사(蛤裏難社) 등 10개 사(社)를 지나고 북항강(北港溪)을 따라 순조롭게 수리사(水裡社)에서 남로군과 만났다. 순대어사(巡臺御史) 색림(索琳)이 동행하지 않았기에, 북로군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남아있지 않다.
6.1. 남로군(南路軍)의 진군
吳昌祚중국어가 1726년(옹정 4년) 11월 2일 대만으로 돌아와 작전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1월 16일, 오창조는 관병을 이끌고 현재 대만의 타이난시를 출발했다. 12월 3일, 북로군과 합류하여 수사련(水沙連) 경내인 중항(中港) 수리사(水裡社)에 집합했다.
12월 11일, 청나라 군은 호수를 건너 수사(水社) 부락을 공격했고, 남로군(南路軍) 수비(守備) 종일승(鍾日昇)과 천총(千總) 채빈(蔡彬)이 수급 85개를 찾아냈다. 또한 사람 머리가죽 4장과 사람의 손 한 쌍, 옷과 장신구를 빼앗고 곡식창고를 불태웠다. 12월 13일, 북로군 하면(何勉)이 골종(骨宗) 등을 포로로 잡았다.
6.2. 북로군(北路軍)의 진군
북로군은 담수 동지(淡水同知) 왕견(王汧)과 참장(參將) 하면(何勉)이 군을 이끌었다. 1726년(옹정 4년) 12월 3일에 남로군과 함께 남투사(南投社, 현재 대만의 난터우시)를 출발하여, 합리난사(蛤裏難社), 묘리미외사(貓里眉外社), 묘리미내사(貓里眉內社), 만란사(挽蘭社), 미가랍사(眉加臘社), 타라랑사(哆羅郎社, 치라낭사), 두절사(斗截社), 평료만사(平了萬社), 불곡사(佛谷社), 치무사(致霧社) 등 10개 사(社)를 지나고 북항강(北港溪)을 따라 순조롭게 수리사(水裡社)에서 남로군(南路軍)과 만났다. 순대어사(巡臺御史) 색림(索琳)이 동행하지 않았기에, 북로군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