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모치히사 (센고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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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모치히사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1550년 사쓰마국에서 시마즈 타다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마즈 요시히로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1591년 타네가시마, 야쿠시마, 쿠치노에라부지마를 영유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사도와라 3만 석을 받아 1603년 사도와라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1610년 사망했으며, 법명은 조요소슈 코게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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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즈 모치히사 (센고쿠 시대)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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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명 | 시마즈 씨 |
| 이름 | 시마즈 이사히사 |
| 통칭 | 마타시로, 우마노카미 |
| 다른 이름 | 요닌보 (어린 시절 이름), 유키히사 → 마사히사 → 이사히사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
| 생년월일 | 1550년 8월 2일 |
| 사망일 | 1610년 5월 31일 |
| 묘소 | 다이운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기온마치) |
| 관위 | 종5위 하우마노카미 |
| 주군 | 시마즈 다카히사, 요시히사, 요시히로, 다다쓰네, 도쿠가와 히데타다 |
| 번 | 휴가사도와라번 번주 |
| 가계 | |
| 아버지 | 시마즈 다다마사 |
| 어머니 | 사타 다다시게의 딸 |
| 형제자매 | 딸 (이리키인 시게토요의 부인), 이사히사, 딸 (시마즈 다다나가의 부인) |
| 배우자 | 정실: 이케가미 (기타고 도키히사의 딸, 후 이혼) 계실 (또는 측실): 마쓰키 씨 측실: 하라 씨, 이와모토 씨 |
| 자녀 | 아키히사, 이리키인 시게토키 (다다시게), 딸 (기타고 다다요시의 부인), 다다오키, 딸 |
| 사도와라 번주 | |
| 대수 | 초대 |
| 임기 | 1603년 ~ 1610년 |
| 후임 | 시마즈 다다오키 |
| 기타 정보 | |
| 신호 | (정보 없음) |
| 시호 | 고게쓰인덴 쇼요 스우조 다이코지 |
2. 생애
덴분 19년(1550년), 사쓰마국 나가요시에서 시마즈 타다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이로쿠 4년(1561년)에 아버지 타다마사가 전사한 후에는 시마즈 가문의 당주인 백부 시마즈 다카히사, 사촌 요시히사에게 양육받았다.
에이로쿠 8년(1565년), 오스미국 죠사고를 받아[3], 성장하여 아버지의 영지였던 오스미의 요충지 시미즈성을 물려받았다.
텐쇼 원년(1573년), 시마즈 요시히로를 따라 아버지를 전사시킨 키모츠키씨를 공격했고, 이듬해 키모츠키씨가 항복했다.
텐쇼 6년(1578년) 11월, 휴가국타카기에서 오토모 세력과의 전투에서, 이큐는 스스로 적진에 돌격하여 분전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시마즈 세력이 승리했기 때문에, 이큐가 제일의 군공으로 인정받았다.
텐쇼 15년(1587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의 역에서 시마즈씨가 패배하자 영지의 재편이 있었고, 류큐 무역의 독점을 목표로 한 요시히사는 타네가시마씨를 사쓰마의 치란으로 옮겼다. 이에 따라 텐쇼 19년(1591년), 이큐는 타네가시마·야쿠시마·쿠치노에라부지마 1만 석을 영유하게 되었다.[3]
분로쿠 원년(1592년), 요시히로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갔지만, 이듬해 귀국했다.[4]
게이초 2년(1597년), 시미즈에서 타네가시마로 옮겼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의 게이초 4년(1599년) 3월 5일에 오스미·타루미 11687석을 요시히로에게서 받아, 타네가시마에서 타루미로 옮겼다.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덴분 19년(1550년), 시마즈 모치히사는 사쓰마국 나가요시에서 시마즈 타다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이로쿠 4년(1561년), 아버지 타다마사가 전사한 후 시마즈 가문의 당주인 백부 시마즈 다카히사와 사촌 요시히사에게 양육되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오스미국 조 사고를 받았으며,[3] 성장하여 아버지의 영지였던 오스미의 요충지 시미즈성을 물려받았다.2. 2. 시마즈 가문의 주요 전투 참여
덴쇼 원년(1573년), 시마즈 요시히로를 따라 아버지를 전사시킨 기모쓰키씨를 공격했고, 이듬해 기모쓰키 가문이 항복했다. 덴쇼 6년(1578년) 11월, 휴가국타카기에서 오토모 세력과의 전투(미미가와 전투)에서 스스로 적진에 돌격하여 분전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시마즈 세력이 승리했기 때문에 제일의 군공으로 인정받았다.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의 역에서 시마즈씨가 패배하자 영지의 재편이 이루어졌다.2. 3. 임진왜란 참전과 영지 변경
덴쇼 19년(1591년), 요시히사는 류큐 무역의 독점을 목표로 타네가시마, 야쿠시마, 구치노에라부지마 1만 석을 모치히사에게 주었다.[3] 분로쿠 원년(1592년)에는 요시히로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갔지만(임진왜란), 이듬해 귀국했다.[4]게이초 2년(1597년)에는 시미즈에서 타네가시마로 옮겼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인 게이초 4년(1599년) 3월 5일, 요시히로에게서 오스미 다루미 11,687석을 받아 타네가시마에서 다루미로 거처를 옮겼다.
2. 4. 사도와라 번주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가문은 서군에 가담하여 시마즈 도요히사가 전사했다.[3]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시마즈 가문 간의 전후 교섭에서, 도요히사의 옛 영지인 휴가국 나카군 사도와라 3만 석을 받았다.[3] 게이초 8년(1603년), 휴가 사도와라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장남 시마즈 아키히사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아키히사의 아들 시마즈 히사노부(다다나가)에게 가독을 양도했다.2. 5. 사망
게이초 13년(1608년), 슨푸성 축성을 도운 공으로 상예의 어서를 받았다.[3] 게이초 15년(1610년), 단바국 사사야마성의 축성을 위해 교토로 가던 중 사망했다.[3] 향년 61세였다.[3] 법명은 조요소슈 코게츠인이다.[3] 교토시 시조테라마치의 다이운인에 매장되었으며, 이때 주지에게 신세를 진 것으로부터 사도와라 번 시마즈씨는 조동종에서 정토종으로 종교 변경했다. 장남 시마즈 아키히사는 임진왜란 때 병사했고, 차남 이리키인 시게토키는 양자로 갔으며, 뒤를 삼남 시마즈 다다오키가 이었다. 이후 장남 아키히사의 자손은 스이추 시마즈 가문으로, 삼남 다다오키의 자손은 사도와라 번주 시마즈 가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3. 가계
시마즈 타다마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타 타다나리의 딸이다.[5] 정실은 기타고 토키히사의 장녀 이케가미였으나, 이후 이혼하였다.[5] 측실로는 하라 씨, 마쓰키 씨, 이와모토 씨가 있었다.[5][2]
참조
[1]
서적
入来村史
[2]
기타
花庭玉蓮大姉
[3]
Kotobank
島津以久
2020-07-10
[4]
서적
垂水市史
[5]
문서
入来院重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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