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노부유키 내각
1. 개요
아베 노부유키 내각은 1939년 8월 30일부터 1940년 1월 16일까지 140일 동안 존재했던 일본 제국의 내각이다. 히라누마 내각의 총사퇴 이후 아베 노부유키가 총리로 지명되어 육군 대신 하타 슌로쿠 등과 함께 내각을 구성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불개입 방침을 내세웠으나, 외교적 난관과 중일 전쟁의 장기화, 육해군의 비협조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정계의 불신임을 받았다. 결국 아베 노부유키는 1940년 1월 16일 내각 총사퇴를 결정하면서 내각은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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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일본 -
창씨개명
창씨개명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한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 체계에 통합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
1939년 일본 -
할힌골 전투
할힌골 전투는 1939년 만주국-몽골 국경인 할힌골 강에서 일본과 소련이 충돌한 군사 분쟁으로, 일본의 북진론과 소련의 극동 방어 전략이 맞부딪히며 대규모 전면전으로 확대, 소련군의 승리로 끝맺어 일본의 대외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
쇼와 시대의 내각 (일본 제국) -
스즈키 간타로 내각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1945년 4월 7일부터 8월 17일까지 존속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과정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쇼와 시대의 내각 (일본 제국) -
도조 내각
도조 내각은 도조 히데키가 이끈 전시 내각으로,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고 국가 동원 체제를 강화했으나, 무리한 전쟁으로 일본을 패망으로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
1940년 일본 -
창씨개명
창씨개명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한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 체계에 통합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
1940년 일본 -
삼국 동맹 조약
1940년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체결한 삼국 동맹 조약은 각국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상호 지원을 약속했으나, 실제 협력은 제한적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확대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성립 배경
히라누마 전 내각은 반소 친독(파시즘) 입장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을 추진하는 육군과 반파시즘 성향의 히라누마 총리 사이에서 대립을 벌였다. 그러나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논의의 전제가 뒤집히자, 히라누마 내각은 내각 총사직을 결정했다. 이후 육군은 아베 노부유키 육군 대장을 지지했고, 사이온지 긴모치 원로, 유아사 구라헤이 내대신 등도 동의하면서, 1939년 8월 29일 아베 노부유키 내각이 발족했다. 성내에서는 무토 아키라 군무국장 등이 아베를 적극 지지했다.
인사 과정에서 육군 대신에 대해 쇼와 천황은 신임이 두터운 우메즈 미지로 차관 또는 하타 슌로쿠 시종 무관장을 임명하길 원했고, 육군은 이를 받아들여 하타를 추천했다(우메즈는 노몬한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관동군의 재건에 힘썼다). 외무 대신도 영미 협조를 바라는 희망에 따라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 대장을 임명했다. 정당에서는 입헌 민정당, 입헌 정우회 두 주요 정당이 각각 대신 1명을 배출했다.
3. 내각 구성
1939년 8월 30일에 아베 노부유키 내각이 성립되면서 각료 명단이 발표되었다. 내각 각료 외에 정무차관과 참여관은 1939년 9월 19일에 임명되었다.
| 직책 | 이름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 내각총리대신 | 아베 노부유키 | 군인(육군)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외무대신 | 아베 노부유키 | 군인(육군) | 1939년 8월 30일 | 1939년 9월 25일 |
| 노무라 기치사부로 | 군인(해군) | 1939년 9월 25일 | 1940년 1월 16일 | |
| 내무대신 | 오하라 나오시 | 무소속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대장대신 | 아오키 가즈오 | 무소속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육군대신 | 하타 슌로쿠 | 군인(육군)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해군대신 | 요시다 젠고 | 군인(해군)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사법대신 | 미야기 초고로 | 무소속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문부대신 | 가와라다 가키치 | 무소속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농상대신 | 고도 다쿠오 | 무소속 | 1939년 8월 30일 | 1939년 10월 16일 |
| 사카이 다다마사 백작 | 무소속 | 1939년 10월 16일 | 1940년 1월 16일 | |
| 상공대신 | 고도 다쿠오 | 무소속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체신대신 | 나가이 류타로 | 입헌 민정당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철도대신 | 나가이 류타로 | 입헌 민정당 | 1939년 8월 30일 | 1939년 11월 29일 |
| 나가타 히데지로 | 무소속 | 1939년 11월 29일 | 1940년 1월 16일 | |
| 식민대신 | 가네미쓰 쓰네오 | 입헌 정우회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후생대신 | 오하라 나오시 | 무소속 | 1939년 8월 30일 | 1939년 11월 29일 |
| 아키타 기요시 | 무소속 | 1939년 11월 29일 | 1940년 1월 16일 | |
| 내각서기관장 | 엔도 류사쿠 | 무소속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 내각 법제국 국장 | 가라사와 도시키 | 무소속 | 1939년 8월 30일 | 1940년 1월 16일 |
3.1. 국무대신
| 직책 | 대수 | 성명 | 출신 등 | 특명 사항 등 | 비고 | |
|---|---|---|---|---|---|---|
| 내각총리대신 | 36 | 아베 노부유키 | 예비역육군대장 (육대 19기) | 외무대신, 흥아원 총재 겸임 | 첫 입각 | |
| 외무대신 | 53 | 아베 노부유키 | -- | 예비역 육군 대장 (육대 19기) | 내각총리대신 겸임 | 첫 입각 1939년 9월 25일 면직 |
| 54 | 노무라 기치사부로 | -- | 예비역해군대장 (해병 26기) | 첫 입각 1939년 9월 25일 임명 | ||
| 내무대신 | 52 | 오하라 나오시 | -- | 귀족원 무소속 (동화회) | 후생대신 겸임 | |
| 대장대신 | 40 | 아오키 가즈오 | --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 기획원 총재 겸임 | 첫 입각 |
| 육군대신 | 28 | 하타 슌로쿠 | -- | 육군 대장 (육대 22기) | 대만 사무국 총재 겸임 | 첫 입각 |
| 해군대신 | 20 | 요시다 젠고 | -- | 해군 중장 (갑종 13기) | 첫 입각 | |
| 사법대신 | 39 | 미야기 쵸고로 | -- | 사법성 | 첫 입각 | |
| 문부대신 | 50 | 가와라다 가키치 | --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 ||
| 농림대신 | 14 | 고도 다쿠오 | --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예비역 해군 조병 중장 | 상공대신 겸임 | 1939년 10월 16일 면직 |
| 15 | 사카이 타다마사 | --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백작 | 첫 입각 1939년 10월 16일 임명 | ||
| 상공대신 | 18 | 고도 타쿠오 | --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예비역 해군 조병 중장 | 농림대신 겸임 | |
| 체신대신 | 45 | 나가이 류타로 | --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철도대신 겸임 | |
| 철도대신 | 17 | 나가이 류타로 | --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체신대신 겸임 | 1939년 11월 29일 면직 |
| 18 | 나가타 히데지로 | -- | 귀족원 무소속 (동화회) | 1939년 11월 29일 임명 | ||
| 척무대신 | 16 | 가네미츠 츠네오 | -- | 중의원 입헌정우회 (금광파) | 첫 입각 | |
| 후생대신 | 3 | 오하라 나오시 | -- | 귀족원 무소속 (동화회) | 내무대신 겸임 | 1939년 11월 29일 면직 |
| 4 | 아키타 기요시 | -- | 중의원 무소속 (제1의원 클럽) | 첫 입각 1939년 11월 29일 임명 | ||
아베 노부유키 내각의 국무대신은 1939년 8월 30일에 임명되었으며, 재임 기간은 140일이다.
3.3. 정무차관
1939년 9월 19일에 임명된 정무차관은 다음과 같다.
| 직책 | 성명 | 출신 등 |
|---|---|---|
| 외무 정무차관 | 다다 미쓰나가 | 중의원/입헌민정당 |
| 내무 정무차관 | 가토 다이이치 | 중의원/국민동맹 |
| 대장 정무차관 | 기요세 기쿠오 | 중의원/입헌정우회 |
| 육군 정무차관 | 미야자와 다네오 | 중의원/입헌민정당 |
| 해군 정무차관 | 니시오카 다케지로 | 중의원/입헌정우회 |
| 사법 정무차관 | 모리타 후쿠이치 | 중의원/입헌정우회 |
| 문부 정무차관 | 사쿠타 고타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농림 정무차관 | 무라카미 구니요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상공 정무차관 | 요코카와 시게지 | 중의원/입헌정우회 |
| 체신 정무차관 | 다나카 만이쓰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철도 정무차관 | 하라 소헤이 | 중의원/입헌정우회 |
| 택무 정무차관 | 쓰구모 구니토시 | 중의원/입헌정우회 (구하라 파) |
| 후생 정무차관 | 미우라 도라오 | 중의원/국민동맹 |
3.4. 참여관
| 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 외무 참여관 | 요리미츠 요시아키 | 중의원/ 입헌정우회 (쿠하라파) | |
| 내무 참여관 | 후쿠이 젠조 | 중의원/ 입헌정우회 | |
| 대장 참여관 | 도요다 도요키치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 육군 참여관 | 오야마다 요시타카 | 중의원/ 입헌정우회 | |
| 해군 참여관 | 마나베 기주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 사법 참여관 | 마나베 마사루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 문부 참여관 | 이즈 토미토 | 중의원/ 국민동맹 | |
| 농림 참여관 | 오가사와라 산쿠로 | 중의원/ 입헌정우회 (나카지마파) | |
| 상공 참여관 | 코야마 쿠라노스케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 체신 참여관 | 토조 사다시 | 중의원/ 입헌정우회 (쿠하라파) | |
| 철도 참여관 | 반도 코타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 척무 참여관 | 카사이 시게하루 | 중의원/ 무소속 | |
| 후생 참여관 | 나가야마 타다노리 | 중의원/ 무소속 (제1의원구락부) |
4. 주요 정책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아베 내각은 유럽 전쟁에 대해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지나 사변(중일 전쟁) 해결에 매진한다"는 불개입 방침을 선언했다. 그러나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논의가 잠시 주춤해진 틈을 타, 노무라 기치사부로 외무대신을 통해 영국, 미국과의 협력 노선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중일 전쟁과 관련해서는, 1940년 1월 8일, 신중앙 정권 수립을 위한 기본 방침이 각의에서 결정되어, 중일 기본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5. 내각의 종말
아베 노부유키 내각은 아베 총리 본인의 행정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단명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론의 지지가 낮았던 정당들도 아베 내각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1939년 11월, 내각은 입헌민정당의 마치다 주지 총재에게 입각을 요청하며 정치 기반 강화를 시도했지만, 민정당은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연말 제75회 제국 의회 소집과 함께 내각 불신임을 제기했다.
아베 총리는 중의원 해산을 검토했으나, 육군과 해군은 예산 심의에 지장이 생기고 해산 후에도 사태 해결의 전망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육해군은 아베 총리를 "시국 담당 능력 없음"으로 일찌감치 판단하고 후임 후보를 물색하는 등, 결국 사면초가에 놓인 아베 내각은 1940년 1월 16일 총사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