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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 슌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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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 슌로쿠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장, 원수를 역임했다.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국에서 학살을 지휘했다. 1939년 육군대신을 역임했으며, 1945년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당시 생존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가석방되었으며, 1962년 사망했다. 한국인에게는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위안부 동원 등 전쟁 범죄를 저지른 용서받을 수 없는 전범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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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 슌로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야전 원수 하타 슌로쿠가 [[제2총군]]에서 복무 중
야전 원수 하타 슌로쿠가 제2총군에서 복무 중
이름하타 슌로쿠
일본어 이름畑 俊六 (はた しゅんろく)
출생일1879년 7월 26일
사망일1962년 5월 10일
출생지후쿠시마현, 일본 제국
사망지도쿄도, 일본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1년 – 1945년
최종 계급[[파일:元帥徽章.svg|25px]] 야전 원수 (겐스이)
지휘제14사단
대만군
지나 파견군
제2총군
참전 전투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쉬저우 전투
우한 전투
타이얼좡 전투
저장-장시 작전
이치고 작전
제2차 세계 대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소속 부대제3군
서훈욱일장 1등
금치훈장 1등
보물장 1등
정치 경력
직책육군대신
임기 시작1939년 8월 30일
임기 종료1940년 7월 22일
천황쇼와
총리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이전이타가키 세이시로
이후도조 히데키
기타 정보
별명(정보 없음)
소속해행사 회장
묘소모로야마정의 무사시노 묘원

2. 생애

하타 슌로쿠는 구 아이즈번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12세 때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하코다테로 이사를 갔다. 1900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12기로 졸업하였고, 졸업 후에는 러일 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다. 1910년에는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군인이 된 이후에는 작전 관련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1936년에는 타이완 주둔군 사령관이 되었고, 1937년에는 육군대장으로 승진하여 군사참의관 및 육군 교육총감을 겸임하였다.

1962년 5월 10일, 후쿠시마현 다나구라정에서 열린 전몰자 위령비 제막식에 참석하던 중 뇌내출혈로 쓰러져 향년 82세로 사망했다.[23] 다나구라 성터에는 "하타 슌로쿠 종언의 땅"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2. 1. 유년 시절

하타 슌로쿠는 구 아이즈번 사무라이였던 하타 요시카타[7]의 아들로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요츠야 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2세 때 아버지의 전근으로 하코다테로 이사하여 하코다테 야요이 소학교 고등과에 다녔다. 13세 때는 이 학교에서 일등상을 받기도 했다.

러일전쟁 출정 직전의 하타 형제(왼쪽: 슌로쿠, 오른쪽: 에이타로)


14세 때 아버지가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도쿄로 돌아와 명문으로 알려진 도쿄부 보통중학교(후의 도쿄부립 제일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망으로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길을 선택했다.

2. 2. 군 경력



하타 슌로쿠는 후쿠시마현의 옛 아이즈번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홋카이도 하코다테로 이주했고, 14세에는 명문 (구)제1 도쿄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학비 문제로 중퇴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01년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 제12기를 포병 소위로 졸업했으며[1], 동기 중 포병과에서는 4등이었다. 졸업 후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1910년에는 일본 육군대학교 제22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1]

1912년 3월 독일 주재 무관보좌관으로 파견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유럽에 머물며 군사 관측관으로 활동했다. 유럽 체류 중인 1914년 9월 소령으로, 1918년 7월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919년 2월에는 베르사유 조약 협상에 참여한 일본 대표단의 일원이었다.[1]

일본 귀국 후 1921년 7월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16 야전포병연대장을 맡았고, 1926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4중포병여단장이 되었다. 이후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의 전략 기획 부서로 자리를 옮겨 1927년 7월 제4국장, 1928년 8월 제1국장을 역임하며 작전 관련 요직을 거쳤다.[1]

1931년 8월 중장으로 승진하여 포병감찰관이 되었고, 1933년 8월에는 제14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야전 지휘관을 경험했다. 1935년 12월 일본 제국 육군항공대 사령관을 거쳐, 1936년 타이완 주둔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듬해인 1937년 11월 1일 육군대장으로 승진했다.[1]

'''하타 슌로쿠 진급 내역'''[1]
계급진급일
소위1901년 6월
중위1903년 11월
대위1905년 6월
소령1914년 4월
중령1918년 7월
대령1921년 7월 20일
소장1926년 3월 2일
중장1931년 8월 1일
대장1937년 11월 1일
원수1944년 6월 2일


2. 2. 1. 주요 보직

1936년(쇼와 11년) 타이완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듬해 1937년(쇼와 12년) 육군대장으로 승진하여 군사참의관 및 육군 교육총감을 겸임했고, 최고전쟁회의 군사참의, 육군훈련감찰관도 맡았다. 같은 해 난징 대학살이 발생하자 책임자인 마쓰이 이와네 대장의 경질을 육군대신에게 건의하였다.[8]

1938년 2월, 난징 대학살의 책임을 물어 소환된 마쓰이 이와네의 후임으로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쉬저우에서 벌어진 전투와 우한 전투를 지휘하였다.

하타(왼쪽)와 테라우치 히사이치 원수(쉬저우에서)


1939년 5월 쇼와 천황의 시종무관장이 되었으나, 천황의 신임 아래 불과 3개월 만인 같은 해 8월 아베 노부유키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취임했다. 천황은 온화하고 성실한 하타를 통해 육군의 독주를 제어하려 했으나[10]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육군대신 재임 중 전진훈을 고안하기도 했다. 아베 내각이 무너진 후 후계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9]

이후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에서도 천황의 협력 명령에 따라 육군대신직을 유임했다.[10] 그러나 육군 내 도각(倒閣, 내각 전복) 움직임과 일독이 삼국동맹 체결 압력이 거세지자, 1940년 7월 하타는 육군대신직을 단독으로 사임했고 육군은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아 결국 요나이 내각은 붕괴되었다.[10][11] 이 사건은 하타가 육군의 압력에 굴복하여 내각 붕괴에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다.[2]

1941년 3월,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이 되어 다시 중국으로 갔다. 그는 약 25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저장 장시 작전(浙贛作戦일본어)과 창자오 대학살(厂窖惨案중국어) 당시 일본군의 최고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1944년 6월 2일, 이치고 작전에서의 일본군 승리 이후 원수(元帥)로 승진했다.

1944년 말부터 1945년까지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에 대비하여 히로시마시에 사령부를 둔 제2총군 사령관직을 맡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생존하였고, 이후 도시 수습과 구호 활동을 지휘했다.[3] 항복 직전인 1945년 8월 14일 원수 회의에서 스기야마 하지메, 나가노 오사미와 달리 유일하게 본토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항복 결정에 동의했다. 이후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원수 계급을 반납하겠다고 요청하기도 했다.[3]

2. 2. 2. 중일 전쟁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같은 해 난징 대학살이 발생하자 당시 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 대장의 경질을 건의했다.[8] 연말에는 최고전쟁회의 군사참의관, 육군훈련총감을 거쳐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1938년 2월, 난징 대학살의 책임으로 일본으로 소환된 마쓰이 이와네의 후임으로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쉬저우와 우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다.

1939년 5월 쇼와 천황의 시종무관이 되었으나, 천황의 신임 아래 불과 3개월 만인 같은 해 8월 아베 노부유키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발탁되었다. 천황은 하타가 육군의 독주를 견제하기를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큰 변화를 이끌지 못했다. 이후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에서도 육군 대신으로 유임되었다. 그러나 1940년 7월, 일독이 삼국동맹 체결을 강행하려는 육군의 압력 속에서 하타는 육군 대신직을 단독으로 사임했다. 육군이 후임 대신을 추천하지 않으면서 요나이 내각은 총사퇴했는데[10], 이는 하타가 사실상 육군의 강경 노선에 동조하여 내각 붕괴를 유도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2][11] 이 사건은 훗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그의 주요 죄목 중 하나로 다루어졌다.

1941년 3월, 하타는 다시 중국 전선으로 복귀하여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총사령관 재임 기간 동안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25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된 저장-장시 작전浙贛作戦일본어과 창자오 대학살厂窖惨案중국어 당시 일본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3], 이들 학살 사건에 대한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1944년 6월 2일, 이치고 작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후 원수(元帥) 계급으로 승진했다.[3] 1945년 4월에는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에 대비하여 히로시마시에 사령부를 둔 제2총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히로시마역 부근에서 피폭되었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3] 그는 피폭 이후 도시 수습과 구호 활동을 지휘했다.[3]

일본의 항복 결정 직전인 1945년 8월 14일, 히로히토가 소집한 원수 회의에서 스기야마 하지메, 나가노 오사미 두 원수는 본토 결전을 주장했으나, 하타는 유일하게 본토 결전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일본의 항복 결정에 동의했으며, 전쟁 패배의 책임을 통감하며 스스로 원수 계급장을 반납하겠다고 요청했다.[3]

2. 2. 3. 태평양 전쟁

1941년 3월, 하타는 다시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이 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약 25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저장 장시 작전(<0xEC><0xA0><0x80><0xEA><0xB0><0x95><0xEC><0x9E><0x91><0xEC><0xA0><0x84>)(浙贛作戦일본어)과 창자오 대학살(<0xEC><0xB0><0xBD><0xEC><0x9E><0x90><0x98><0x20><0xEB><0x8C><0x80><0xED><0x95><0x99><0xEC><0x82><0xB4>)(厂窖惨案중국어) 당시 일본군의 주요 지휘관이었다.[2] 같은 해 7월, 독일소련 침공에 호응하여 관동군 특별훈련이 발동되고 대소 전쟁이 계획되자, 하타는 참모들을 참모본부에 파견하여 "현재로서는 중일전쟁 해결에 전념해야 한다"고 건의하며 대소 전쟁 개시 중지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태평양 전쟁 개전에 대해서도 "일미 협상은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으며[12], 다시 참모들을 파견해 중일전쟁 해결 우선을 주장했으나, 참모본부로부터 "중일전쟁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영국장제스 지원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는 반론을 듣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버마 전투 등에서 일본군이 열세에 놓인 1944년 6월 2일, 하타는 이치고 작전에서의 일본군 승리 이후 원수로 승진했다.[3] 그는 일본 육해군에서 마지막으로 원수 계급에 오른 군인이었다. 같은 해 말에는 중국 전선에서 대륙타통작전을 지휘하여 중화민국군과 미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945년 4월, 본토 결전에 대비해 히로시마시에 사령부를 둔 제2총군(서일본 방위 담당)이 창설되면서 하타는 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하타는 히로시마역 부근에서 피폭되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3] 그는 피폭 직후부터 히로시마시에서 피해자 구호 활동의 지휘를 맡았다.[3]

일본의 항복 결정 직전인 1945년 8월 14일 오전 10시, 히로히토 천황은 최고 회의 개최에 앞서 원수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는 하타 슌로쿠, 스기야마 하지메(제1총군 사령관), 나가노 오사미(전 군령부 총장) 세 원수가 참석했다. 스기야마와 나가노는 전쟁 계속을 주장했지만, 하타는 유일하게 "맡은 전선의 방어에 있어서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는 확신은 유감스럽게도 없다"고 솔직하게 현 상황을 설명하며 본토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13][14] 이는 히로히토 천황이 본토 결전의 불가능을 확신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13][14] 하타는 일본의 항복 결정에 동의했으며, 이후 전쟁 패배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자신의 원수 작위를 박탈해 줄 것을 요청했다.[3]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8월 18일, 관동군 시찰차 만주를 방문했던 하타 슌로쿠는 붉은 군대의 공세로 하얼빈에 발이 묶였다. 당시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보다 상급자였기 때문에, 소련 측은 하타에게 항복 문서 조인을 요구했다. 하타는 8월 19일 소련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와 만나 항복 절차를 밟았다.

하타 슌로쿠( Hata Shunroku) 재판 당시


종전 후, 하타는 연합군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인 미군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유일한 생존 일본 제국 육군 원수였다.[4] 재판 결과 "음모, 침략전쟁 수행, 잔학행위 방지 의무 불이행" 혐의 등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4]

6년간의 복역 후, 1954년에 가석방 허가를 받아 출소하였다.[5] 이후 1958년부터는 전직 군인들의 복지 및 상조 단체인 카이코샤 회장을 맡았다. 1962년, 후쿠시마현에서 열린 전몰자 위령비 제막식에 참석하던 중 갑작스럽게 쓰러져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3. 1. 극동 국제 군사 재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하타 슌로쿠는 연합군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인 미군 당국에 체포되어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다른 피고들과 함께 기소된 유일한 생존 일본 제국 육군 원수였다.[4]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재판)에서 하타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주요 기소 사유 중 하나는 미나미 내각 붕괴에 대한 책임이었다. 연합군 측은 미나미 내각을 태평양 전쟁 이전 마지막 친영미파 내각으로 간주했고, 하타가 이 내각을 붕괴시킨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음모, 침략전쟁 수행, 잔학행위 방지 의무 불이행" 등의 혐의도 받았다.[4]

재판 과정에서 변호측 증인으로 출석한 미나미는 당시 내각 붕괴 음모가 진행 중이었으며, 오히려 하타 역시 삼국 동맹에 반대했기 때문에 육군대신 사임을 강요당했다고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검찰 측이 당시 신문 기사 등을 증거로 제시하며 하타가 삼국 동맹에 적극적이었고 미나미에게 총사퇴를 요구하지 않았냐고 추궁했지만, 미나미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모릅니다", "(증거 서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등으로 일관하며 혐의를 부인했다.[15][16] 수석 검사 키넌은 미나미의 증언에 대해 "그것은 미나미가 하타를 감쌌던 것이다. 일본 측 증인을 수백 명이나 보았지만, 저런 사람은 없다. 국제군사재판에서 보통 사람이 저 정도의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미나미의 의도를 간파했다고 전해진다. 키넌은 미나미를 "파시스트에 저항한 평화주의자" 중 한 명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재판 막바지에는 A급 '평화에 대한 죄'만으로는 사형이 선고되지 않고, BC급 전쟁범죄(포로 및 민간인 학대, 학살 등)에 관여해야 사형이 선고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17] 하타는 A급 혐의 외에도 BC급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구체적으로 54번째 혐의인 "위반 행위의 명령, 권한, 허가에 의한 법규 위반"과 55번째 혐의인 "위반 행위 방지 책임 무시에 의한 법규 위반"이었다.

최종 판결에서 하타는 장고봉 사건이나 노몬한 사건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A급 전쟁 공동 모의 및 수행 책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BC급 혐의에 대해서는 54번째 혐의는 무죄, 55번째 혐의는 유죄가 인정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8][4] 그는 사형을 면하고 6년간 복역한 후, 1954년 가석방되었다.[5]

2. 3. 2. 전범으로서의 평가 (한국의 관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하타 슌로쿠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미군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당시 기소된 피고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일본 육군 원수였다.

1948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하타 슌로쿠는 "평화에 대한 죄(음모)", "침략 전쟁 수행", 그리고 "전쟁 법규 및 관례 위반(잔학 행위 방지 의무 불이행)"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4] 이는 그가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 수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점령지 등에서 발생한 잔학 행위를 막아야 할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음을 국제 재판소가 인정한 결과이다.

그러나 하타는 1955년에 가석방되었으며,[5] 1958년부터는 구 일본군 장교들의 복지 및 상조 단체인 카이코샤(偕行社)의 회장을 맡았다. 그는 1962년 전몰자 추모식에 참석하던 중 사망했다.

3. 연보


  • 1896년(메이지 29년) 9월 - 육군유년학교 입학
  • 1898년(메이지 31년) 11월 - 육군유년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입학(12기)
  • 1900년(메이지 33년) 11월 - 육군사관학교 졸업
  • 1901년(메이지 34년) 6월 - 소위 임관, 야포병 제1연대 배속
  • 1903년(메이지 36년) 11월 - 중위 진급
  • 1905년(메이지 38년)
  • * 4월 - 야포병 제1연대 보충대대 대대장
  • * 6월 - 대위 진급
  • 1906년(메이지 39년) 12월 - 육군포공학교 고등과 졸업
  • 1907년(메이지 40년) 12월 - 육군대학교 입학(22기)
  • 1910년(메이지 43년)
  • * 11월 - 육군대학교 졸업
  • * 12월 - 참모본부
  • 1912년(메이지 45년) 3월 - 주독일대사관 부무관 보좌관
  • 1914년(다이쇼 3년)
  • * 4월 - 소좌 진급
  • * 8월 - 스웨덴 주재
  • 1916년(다이쇼 5년) 5월 - 참모본부원
  • 1918년(다이쇼 7년)
  • * 7월 - 중좌 진급
  • * 8월 - 군령부 참모
  • * 12월 - 유럽 출장(파리 강화회의 전권 수행원)
  • 1919년(다이쇼 8년)
  • * 4월 - 육군대학교 교관
  • * 12월 25일 - 참모본부 작전반장
  • 1921년(다이쇼 10년) 7월 20일 - 대좌 진급, 야포병 제16연대장
  • 1922년(다이쇼 11년) 8월 15일 - 육군야전포병학교 교도연대장
  • 1923년(다이쇼 12년) 8월 6일 - 참모본부 작전과장 겸 군령부 참모
  • 1926년(다이쇼 15년) 3월 2일 - 소장 진급, 야전중포병 제4여단장
  • 1927년(쇼와 2년) 7월 26일 - 참모본부 제4부장
  • 1928년(쇼와 3년) 8월 10일 - 참모본부 제1부장
  • 1931년(쇼와 6년) 8월 1일 - 중장 진급, 포병감
  • 1933년(쇼와 8년) 8월 1일 - 제14사단
  • 1935년(쇼와 10년) 12월 2일 - 항공본부
  • 1936년(쇼와 11년) 8월 1일 - 타이완군 사령관
  • 1937년(쇼와 12년)
  • * 8월 2일 - 군사참의관
  • * 8월 26일 - 교육총감
  • * 11월 1일 - 육군대장 진급
  • 1938년(쇼와 13년)
  • * 2월 14일 -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
  • * 12월 15일 - 군사참의관
  • 1939년(쇼와 14년)
  • * 5월 25일 - 시종무관장
  • * 8월 30일 -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 육군대신 취임, 다음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에서도 유임
  • 1940년(쇼와 15년) 7월 22일 - 육군대신 단독 사임, 군사참의관
  • 1941년(쇼와 16년) 3월 1일 -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
  • 1944년(쇼와 19년)
  • * 6월 2일 - 원수에 서임
  • * 11월 23일 - 교육총감
  • 1945년(쇼와 20년)
  • * 4월 6일 - 제2총군 사령관
  • * 8월 6일 -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폭
  • * 11월 - 예비역 편입
  • * 12월 2일 - A급 전범으로 체포 명령
  • 1948년(쇼와 23년)
  • * 1월 31일 - 공직추방 가처분을 받음[24]
  • * 11월 12일 -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 선고
  • 1954년(쇼와 29년) 10월 - 가석방
  • 1958년(쇼와 33년)
  • * 4월 - 사면
  • * 7월 - 해행사 회장
  • 1962년(쇼와 37년) 5월 10일 - 후쿠시마현 타나구라에서 전몰자 위령비 제막식 참석 중 쓰러져 사망, 향년 82세

4. 저서

하타 슌로쿠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출간된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주로 그의 일기와 회고록을 편집한 것이다.


  • 고미야마 노보루(小見山登) 편저, 巣鴨日記|스가모 일기일본어, 일본문화연합회(日本文化連合会), 1977년.
  • 고미야마 노보루(小見山登) 편저, 元帥畑俊六獄中獄外の日誌 前篇(巣鴨日記)|원수 하타 슌로쿠 옥중옥외의 일지 전편 (스가모 일기)일본어, 일본인도주의협회(日本人道主義協会), 1992년.
  • 고미야마 노보루(小見山登) 편저, 元帥畑俊六獄中獄外の日誌 後篇(陋廬日誌)|원수 하타 슌로쿠 옥중옥외의 일지 후편 (누추일지)일본어, 일본인도주의협회(日本人道主義協会), 1992년.
  • 이토 다카시(伊藤隆)·데루누마 야스타카(照沼康孝) 편, 陸軍 畑俊六日誌|육군 하타 슌로쿠 일지일본어, 미스즈 쇼보(みすず書房), 1983년. (속 현대사 자료 4)
  • * 2004년에 온디맨드판(オンデマンド版)으로 재발행되었다.
  • 군사사학회(軍事史学会) 편, 이토 다카시(伊藤隆)·하라 다케시(原剛) 감수, 元帥畑俊六回顧録|원수 하타 슌로쿠 회고록일본어, 니시키마사샤(錦正社), 2009년.

5. 일화

하타 슌로쿠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스가모 구치소에서 복역했다. 같은 시기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시게미쓰 마모루에 따르면, 하타는 복역 중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언제나 “馬上五十年夢又夢 俊六(말 위에 오십 년 꿈 또 꿈 준로쿠)”라는 글귀를 썼다고 한다. 그 뛰어난 서예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본인도 이것만큼은 자랑할 만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참조

[1]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2] 뉴스 Japan: Imitation of Naziism? https://web.archive.[...] Time 1940-07-22
[3] 웹사이트 Pacific War Online Encyclopedia
[4] 서적 Judgement at Tokyo
[5] 웹사이트 The Tokyo War Crimes Trial: Field Marshal Shunroku Hata https://web.archive.[...] 2015-09-06
[6] 서적 忠鑑 畑元帥
[7] 문서 畑家の遠祖は畑時能。白虎隊士として飯盛山で自刃した西川勝太郎は畑能賢の従弟である。
[8] 서적 陸軍 畑俊六日誌 みすず書房 2004
[9] 뉴스 後継首班に畑大将 内府と枢相奏請に傾く 問題は軍の反対気勢 大阪朝日新聞 1940-01-14
[10] 서적 海軍戦争検討会議記録 (株)KADOKAWA 2022-10-10
[11] 문서 軍部大臣現役武官制により内閣の運営は困難となる。
[12] 서적 日本人はなぜ戦争へと向かったのか メディアと民衆・指導者編
[13] 서적 暗闘 スターリン、トルーマンと日本降伏(下) 中央公論新社 2011
[14] 문서 参謀次長河辺虎四郎の日記8月14日の項
[15] 웹사이트 A級極東国際軍事裁判速記録(和文)・昭和22.9.11~昭和22.11.20(第269~318号)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館 2023-11-24
[16] 문서 米内光政の東京裁判における証言に関する記述
[17] 서적 秘録大東亜戦史 東京裁判篇 富士書苑 1953
[18] 웹사이트 A級極東国際軍事裁判速記録(和文)・昭和23.11.4~昭和23.11.12(判決) https://www.jacar.ar[...] 国立公文書館 2023-11-27
[19] 서적 続・現代史資料(4)陸軍 畑俊六日誌 みすず書房 1983-03-01
[20] 서적 元帥畑俊六回顧録 錦正社 2009
[21] 서적 新版 米内光政 光人社 1975
[22] 서적 米内光政 新潮文庫 2002
[23]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010
[24]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1949
[25] 문서 法廷証第106号: [畑俊六履歴書關スル人事局履歴書]
[26] 간행물 官報 1901-10-11
[27] 간행물 官報 1904-02-20
[28] 간행물 官報 1905-08-17
[29] 간행물 官報 1910-10-01
[30] 간행물 官報 1915-11-01
[31] 간행물 官報 1920-12-01
[32] 간행물 官報 1926-02-20
[33] 간행물 官報 1931-01-31
[34] 간행물 官報 1933-09-07
[35] 간행물 官報 1936-10-03
[36] 간행물 『官報』1913年06月02日 敍任及辭令
[37] 간행물 『官報』第2431号「授爵・叙任及辞令」 1920-09-08
[38] 간행물 『官報』第4438号・付録「辞令二」 1941-10-23
[39] 간행물 『官報』第5214号「叙任及辞令」 1944-06-03
[40] 아카이브 陸軍中将畑俊六外九千三百六十八名満洲国建国功労章受領及佩用ノ件
[41] 아카이브 畑俊六外七十二名
[42] 문서 구 일본의 육군 장교 친목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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