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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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는 1749년 프로이센 슐레지엔에서 태어난 독일의 광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이다. 그는 프라이베르크 광산 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며, 광물학 및 지질학 연구에 기여했다. 베르너는 암석이 해양 퇴적을 통해 형성된다는 수성론을 주장하며, 층서학, 광물학 등 학술 용어를 도입했다. 그는 베르너 학파를 형성하여 당시 지질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해왕성설을 옹호하며 화성암설과의 논쟁을 겪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레오폴트 폰 부흐, 알렉산더 폰 훔볼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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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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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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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749년 9월 25일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실레시아, 베라우 (현재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 |
사망일 | 1817년 6월 30일 (향년 67세) |
사망지 | 작센 왕국, 드레스덴 |
국적 | 독일 |
학문 분야 | |
분야 | 지질학 |
모교 | 프라이베르크 광업 아카데미 라이프치히 대학교 |
지도 교수 | 요한 카를 겔러 |
제자 | 크리스티안 사무엘 바이스 크리스티안 레오폴트 폰 부흐 프리드리히 모스 헨리크 스테펜스 고트힐프 하인리히 폰 슈베르트 프란츠 폰 바더 알렉산더 폰 훔볼트 |
주요 업적 | 층서학 수성론 지층 누중의 법칙 |
2. 생애
1749년 프로이센 슐레지엔의 베라우 인근 오시에치니차(현재 폴란드 오시에치니차)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300년 동안 광산업 및 철강업에 종사해 왔으며, 아버지 아브라함 다비트 베르너는 주철 공장(제련소)의 감독관이었다. 베르너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광물 표본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다.
라이프치히 대학 재학 중이던 1774년, 베르너는 광물의 체계적인 식별과 분류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첫 논문인 Von den äusserlichen Kennzeichen der Fossilien|화석[또는 광물]의 외부 특징에 관하여de를 출판했다. 이 논문은 기술 광물학에 대한 최초의 현대 교과서로 평가받으며, 이를 계기로 1775년 프라이베르크 광산 아카데미의 광업 및 광물학 교수 겸 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베르너는 교육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베르너 학파'로 불리는 학파를 형성했다. 그의 제자로는 레오폴드 폰 부흐, 알렉산더 폰 훔볼트 등이 있다. 베르너의 역사적인 지질학 강의는 177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유럽 최초의 지구 역사 강의였으며 그의 견해는 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베르너의 광물 분류 방식과 지구과학 개념은 초기 지질학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광물 분류가 화학적 구성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당시 분석 기술의 한계로 인해 주로 외부 특징에 따른 분류 방법을 연구하고 체계화했다. 또한 광물학 등 분야에서 정확한 학술 용어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5] 그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Von den äusserlichen Kennzeichen der Fossilien|폰 덴 오이설리헨 켄차이헨 데어 포실리엔de'' (1774년, 화석[또는 광물]의 외부 특징에 관하여)에는 광물 설명과 분류를 위한 포괄적인 색상 체계가 담겨 있었으며, 이 책은 이후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널리 활용되었다.[8] 베르너는 지구의 구조, 특히 외관과 내부 구조에 대한 지질학적 연구를 지칭하기 위해 '게오그노시(geognosy)'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현대 지질학 용어 사용의 초기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1769년 프라이베르크 광산 학교에서 광산 기술을 배웠고, 1771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진학하여 광산법과 법학을 공부했다. 라이프치히 재학 시절, 그는 광물의 체계적인 식별 및 분류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1774년 첫 논문인 Von den äusserlichen Kennzeichen der Fossilien|폰 덴 오이설리헨 켄차이헨 데어 포실리엔deu(광물의 외부 특징에 관하여)을 출판했다. 이 책은 기술 광물학에 대한 최초의 현대적인 교과서로 평가받으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성과를 인정받아 1775년, 26세의 나이에 작센의 자유베르크 광업 아카데미에서 광물학 및 광업 검사관이자 교수로 임명되어 1817년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베르너는 교육자로서 뛰어난 명성을 얻었다. 비록 출판물은 적었지만, 그의 강의는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그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활용한 열정적인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지질학의 폭넓은 의미와 상호 연관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심어주었다. 특히 1779년부터 시작한 역사 지질학 강의는 유럽 최초로 지구의 역사를 다루었으며, 그의 견해는 당시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제자들은 '''베르너 학파'''를 형성하여 각자의 나라에서 그의 이론을 전파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레오폴트 폰 부흐, 알렉산더 폰 훔볼트, 로버트 제임슨, 안드레스 마누엘 델 리오(바나듐 발견자), 프리드리히 모스(베르너의 후임 교수) 등이 있다.
베르너는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고, 자유베르크 인근에서 조용한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열정적인 광물 수집가였으나, 말년에는 건강 문제 등으로 현장 연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성인이 된 후 작센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1810년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17년 드레스덴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작센이 겪었던 불행에 대한 충격과 그로 인한 내적 합병증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드레스덴 남서쪽에 위치한 노이엔 안넨프리트호프(Neuen Annenfriedhof)에 안장되었으며, 무덤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단순한 바위가 놓여 있다.
3. 학문적 업적 및 활동
베르너는 광물 분류가 화학적 구성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인정했지만, 당시 분석 기술의 한계 때문에 외부 특징에 기반한 분류 방법을 주로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광물학 등 정확한 학술 용어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러한 연구를 '게오그노시(geognosy)', 즉 '지구에 대한 지식'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지구를 이루는 층의 순서, 위치,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과학을 의미하며, 베르너는 이를 단순한 이론이 아닌 사실로 간주했다.
그는 지구의 모든 암석이 거대한 해양의 바닥에 퇴적되거나 침전되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수성암 기원설(Neptunism, 수성론)을 강력히 지지했다. 이는 당시 화성암 기원을 주장하던 층서학 연구와 대비되는 견해였다. 베르너는 지구의 지층을 다음과 같이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4]
# '''원초(Primitive, Urgebirgede) 계열''': 육지가 나타나기 전, 바다에서 처음 침전된 것으로 여겨지는 화성암 및 고등급 변성 퇴적암.
# '''전이(Transition, Übergangsgebirgede) 계열''': 더 단단한 석회암, 암맥, 암상, 두꺼운 사암 층 등으로, 전 세계에 걸쳐 형성된 보편적인 지층.
# '''이차 또는 층상(Secondary or Stratified, Flötzde) 계열''': 바다 밑에서 산이 융기하면서 형성된 침식 산물이 퇴적된 층상 화석암과 관련 "트랩" 암석.
# '''충적 또는 제3기(Alluvial or Tertiary, Aufgeschwemmtede) 계열''': 대륙에서 바다가 물러가면서 형성된 덜 굳어진 모래, 자갈, 점토층.
# '''화산(Volcanic) 계열''': 화산 활동과 관련된 젊은 용암류. 베르너는 이것이 타는 석탄층의 국지적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수성암 기원설은 보편적인 바다가 점차 물러나면서 암석과 광물을 남겼다는 믿음에 기반하며, 이는 베르너 학파의 핵심 교리가 되었다.
베르너는 평생 많은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교육자로서 뛰어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활용한 열정적인 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강의는 광물의 경제적, 의학적 이용, 토지 자원, 문화에 미치는 영향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1779년부터는 유럽 최초로 지구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베르너 학파를 형성하며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의 이론을 전파했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레오폴트 폰 부흐, 알렉산더 폰 훔볼트, 로버트 제임슨(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교 교수), 안드레스 마누엘 델 리오(바나듐 발견자), 프리드리히 모스(베르너의 후임으로 프라이베르크 광산 아카데미 교수) 등이 있다. 특히 로버트 제임슨은 스승을 기리기 위해 1808년 에든버러에 베르너 자연사 학회(Wernerian Natural History Society)를 창립하여 베르너 학파의 학문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1810년 베르너는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4. 베르너 학파와 해왕성설-화성암설 논쟁
베르너는 광물 분류가 화학적 구성에 따라야 함을 인정했지만, 당시 분석 기술의 한계로 외부 특징에 의한 분류 방법과 지리적 분포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이러한 연구를 '게오그노시'(geognosy, 지구의 지식)라 불렀으며, 광물학 등에 엄밀한 학술 용어를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지표의 단단한 암석이 화성암 기원이라는 기존 층서학 기반의 생각과 달리, 베르너는 모든 암석이 해양 바닥에 퇴적되어 생성되었다는 수성암 기원설(수성론, Neptunism)을 강력히 주장했다.
베르너 학파 지질학의 핵심은 지구 지각의 거의 모든 암석과 광물이, 점차 물러나는 거대한 원시 바다에서 침전되거나 퇴적되었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보편적인 바다에 대한 강조는 '해왕성설'이라는 용어를 낳았는데, 이는 베르너 학파의 가르침과 거의 동의어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의 장 에티엔 게타르가 먼저 제시한 견해였다. 보편적인 바다는 암석학과 중첩의 법칙을 바탕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베르너가 믿었던 보편적인 지층에 대한 아이디어로 직접 이어졌다. 그는 지구를 형성하는 층의 순서, 위치 및 관계를 인식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을 정의하기 위해 "지구과학"이라는 용어( "지구에 대한 지식"을 의미)를 만들었다. 베르너는 지구과학이 이론이 아닌 사실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추측을 거부했고, 그 결과 베르너 학파의 지구과학과 해왕성설은 교리가 되어 지구의 역사에 대한 더 이상의 이해에 기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유럽의 기존 층서학 및 우주론 전통을 바탕으로, 베르너는 요한 고틀로프 레만과 유사한 방식으로 지구를 5개의 지층으로 분류했다.[4]분류 원어 설명 원초 계열 Urgebirge 침입성 화성암 및 고등급 변성 퇴적암. 육지가 나타나기 전에 바다에서 처음으로 침전된 것으로 여겨짐. 전이 계열 Übergangsgebirge 더 단단한 석회암, 암맥, 암상, 그리고 바다에서 처음으로 질서 정연하게 퇴적된 두꺼운 사암 층. 전 세계에 걸쳐 중단 없이 뻗어있는 "보편적인" 지층으로 간주됨. 이차 또는 층상 계열 Flötz 나머지 층상 화석암과 특정 관련 "트랩" 암석. 바다 밑에서 산이 출현한 것을 나타내며, 그 결과로 형성된 침식 산물이 산기슭에 퇴적되었다고 생각함. 충적 또는 제3기 계열 Aufgeschwemmte 대륙에서 바다가 물러가면서 형성된, 덜 굳어진 모래, 자갈, 점토. 화산 계열 화산 분화구와 분명히 관련된 더 젊은 용암류. 베르너는 이 암석이 타는 석탄층의 국지적 영향을 반영한다고 믿음.
베르너의 해왕성설은 특히 현무암의 기원을 둘러싸고 즉각적인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소위 해왕성설-화성암설 논쟁으로 이어졌다.[5] 당시 베르너와 그의 제자들은 암상(sill) 형태로 형성된 현무암과 지표면의 용암류를 동일한 암석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화성 기원의 용암과 화산은 지구의 층을 형성한 보편적인 바다와 무관한 아주 최근의 현상으로 취급되었다. 베르너는 화산이 석탄층 근처에서만 발생하며, 불타는 석탄이 그 위의 현무암과 와케(wacke)를 녹여 낮은 고도에서 현무암과 용암을 생성한다고 믿었다. 반면 높은 고도에 있는 현무암은 바다의 화학적 침전물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해왕성설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는데, 바로 지구 전체를 덮었던 보편적인 바닷물이 어떻게 줄어들었는가 하는 부피 문제였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물이 지구 내부로 이동했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베르너는 이를 추측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지구 내부가 용융 상태라고 믿지 않았으며,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기보다는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부 물이 천체의 통과와 함께 우주로 사라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이차 암석 형성 시 물이 다시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베르너의 뛰어난 강의 능력은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을 끌어모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점차 추측을 거부하고 교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베르너 학파의 지구과학과 해왕성설은 더 이상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경직된 교리가 되었다. 그의 전 제자이자 후에 에든버러 대학교의 레지우스 교수가 된 로버트 제임슨은 베르너를 기리기 위해 1808년 베르너 자연사 학회를 창립했는데, 이 학회는 자연사의 여러 측면을 논의하면서도 베르너 학파의 지구관을 고수하는 보루가 되었다. 베르너의 가장 유명한 제자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1791-92년 프라이베르크에서 수학하며 처음에는 해왕성설에 동조했지만, 나중에는 이 견해에서 벗어났다.[6]
5. 현대적 평가 및 유산
그가 주장한 수성암 기원설, 즉 모든 암석은 해양 바닥에 퇴적되어 형성되었다는 이론은 현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론은 당시 현무암의 기원을 둘러싼 해왕성설-화성암설 논쟁을 촉발하는 등 지질학적 사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5]
베르너는 뛰어난 교육자로서 프라이베르크 광산 아카데미에서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활용한 열정적인 강의로 명성을 얻었으며, 유럽 전역에서 온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은 '베르너 학파'를 형성했는데, 여기에는 레오폴드 폰 부흐, 알렉산더 폰 훔볼트, 로버트 제임슨, 안드레스 마누엘 델 리오, 프리드리히 모스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 베르너의 이론과 방법론을 전파하며 지질학 연구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지명과 광물명이 명명되었다.
또한, 1805년 베르너는 광물 조이사이트를 처음으로 기술했으며, 카린티아의 자우알페 지역에서 해당 광물 표본을 보내온 지그문트 조이스 남작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7]
학술 활동으로는 1810년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6. 주요 저서
- ''[http://digi.ub.uni-heidelberg.de/diglit/werner1774 화석의 외부적 특징에 관하여]'' (라이프치히, 1774). 프랑스어로는 1790년 파리에서, 영어로는 ''[https://books.google.com/books?id=LGZYAAAAcAAJ 화석의 외부적 특징에 관한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1805년 더블린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이후 1849년에서 1850년 사이에 에든버러의 베르너 협회에서 주석을 달아 재출판하였다.
- ''[https://archive.org/details/bub_gb_DdhAAAAAcAAJ 다양한 산맥의 간략한 분류와 설명]'' (드레스덴, 1787).
- ''갱의 생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 (프라이베르크, 1791). 프랑스어로는 1803년 파리에서, 영어로는 "광산 작업 기술에 적용되는 갱의 형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1809년 에든버러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참조
[1]
EB1911
[2]
웹사이트
Friedrich Mohs in Oesterreichisches Biographisches Lexikon
https://www.biograph[...]
2019-02-12
[3]
웹사이트
Abraham Gottlob Werner - Stadtwiki Dresden
https://www.stadtwik[...]
[4]
서적
From Mineralogy to Geology: The Foundations of a Science 1650-1830
University of Chicago Press
[5]
웹사이트
The Granite Controversy: Neptunism VS Plutonism
http://historyofgeol[...]
2019-08-14
[6]
서적
Alexander von Humboldt: A Concise Biography
Princeton University Press
[7]
서적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Minerals
https://books.google[...]
McGraw-Hill Book Company
[8]
서적
German Colour Terms: A study in their historical evolution from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John Benjamins, Amsterdam & Philadelphia
[9]
웹사이트
Catalogue of place names in northern East Greenland
https://web.archive.[...]
Geological Survey of Denmark
2016-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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