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노 쓰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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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노 쓰나나가는 히로시마번의 3대 번주로, 1673년에 가문을 상속받아 1708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이름을 하사받고 종4위하 시지주 아키노카미에 서임되었다. 쓰나나가 재임 기간 동안 번 재정이 어려워져 가신단의 영지를 삭감하고 번찰을 발행했다. 또한 아코 사건과 관련하여, 분가인 아코번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의 칼부림 사건 이후 본가에 대한 연좌를 우려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의 사후 장남 아사노 요시나가가 번주직을 이었다.

아사노 쓰나나가
기본 정보
이름아사노 쓰나나가
출생1659년 7월 28일
사망1708년 4월 1일
국적일본
관직
재임 기간
시작1673년
종료1708년
이전아사노 쓰나아키라
이후아사노 요시나가
가족 관계
배우자아테히메
아사노 쓰나아키라
구조 미치후사의 장녀, 아이히메
자녀요시나가
나가카타
나카가와 히사요시
우메
구조 모로타카 부인
이치조 가네카 정실
마쓰다이라 스케모토 계실
오미쓰
미즈노 다다모토 정실
생애
출생 (음력)만지 2년 5월 29일 (1659년 7월 18일)
사망 (음력)호에이 5년 2월 11일 (1708년 4월 1일)
관위
관위종사위하
직책아키 수
기타
씨족아사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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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히로시마번 제3대 번주 아사노 쓰나나가의 장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엔포 원년(1673년) 아버지 쓰나나가가 사망하여 가독을 상속받았다. 번정은 조부 아사노 미쓰아키라가 오랫동안 후견했지만, 겐로쿠 6년(1693년) 미쓰아키라가 사망했다. 겐로쿠 12년(1699년) 간에이지 본보 조영에 공적을 세웠다.

호에이 5년(1708년) 히로시마에서 병사했다. 향년 50세. 뒤는 장남 요시나가가 이었다.

2.1. 어린 시절과 가독 상속

엔포 원년(1673년) 1월 2일 아버지 아사노 쓰나나가가 사망했기 때문에, 2월 25일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9월 18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앞에서 원복을 치르고, 이에쓰나로부터 편휘를 받아 쓰나나가로 개명했다(아버지와 동명이인을 피하기 위해, 휘의 두 번째 글자에는 아사노 가문의 통자인 "長"을 사용했다). 이때 쓰나나가는 아직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종4위·아키노카미를 하사받지 못한 무위무관이었지만, 쇼군의 허가를 받아 특별히 먼저 아키노카미를 통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9월 23일에 처음으로 영지 히로시마에 들어갔다. 엔포 2년(1674년) 12월 27일에 정식으로 종4위하·시지주·아키노카미에 서임되었다.

2.2. 쇼군과의 만남과 이름 변경

엔포 원년(1673년) 9월 18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앞에서 원복을 치르고, 이에쓰나로부터 편휘를 받아 쓰나나가로 개명했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피하기 위해 휘의 두 번째 글자에는 아사노 가문의 통자인 "長"을 사용했다. 이때 쓰나나가는 아직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종4위·아키노카미를 하사받지 못한 무위무관이었지만, 쇼군의 허가를 받아 특별히 먼저 아키노카미를 칭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2.3. 번정 운영과 재정난

쓰나나가 번을 다스릴 때에는 상품 경제가 발달하면서 번의 재정이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가신들의 영지를 삭감하고 번찰을 발행하였다.

2.4. 아코 사건과 그 여파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아코번의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을 하여 개역 및 할복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쓰나나가는 본가에 대한 연좌를 우려하여 아코 번에 가신을 보내 오이시 구라노스케에게 온건하게 개성할 것을 압박했다. 개성 후에도 아코 낭사들의 기라 가문에 대한 복수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다음 해 12월 15일에 아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쓰나나가는 오이시 요시오의 셋째 아들 료쿄를 비롯한 아코 번의 구신들을 등용했다. 번에서는 아사노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오이시 가문을 일문으로 편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점차 오이시 가문에 대한 불신을 키워갔다.

2.5. 사망과 가독 승계

엔포 원년(1673년) 1월 2일, 아버지 아사노 쓰나나가가 사망하자, 같은 해 2월 25일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같은 해 9월 18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앞에서 원복을 치르고, 이에쓰나로부터 편휘를 받아 쓰나나가로 개명했다.(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피하기 위해, 휘의 두 번째 글자에는 아사노 가문의 통자인 "長"을 사용했다.) 이때 쓰나나가는 아직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종4위·아키노카미를 하사받지 못한 무위무관이었지만, 쇼군의 허가를 받아 특별히 먼저 아키노카미를 통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겐로쿠 12년(1699년) 간에이지 본보 조영에 공적을 세웠다.

호에이 5년(1708년) 2월 11일, 히로시마번에서 병사했다. 향년 50세. 뒤는 장남 요시나가가 이었다.

3. 아코 사건

1701년(겐로쿠 14년) 3월 14일, 아코번의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을 하여 개역 및 할복되었다. 쓰나나가는 본가에 대한 연좌를 우려하여 오이시 구라노스케에게 "온건하게 개성(開城)하라"고 압박했다. 아코 낭사들의 복수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다음 해 12월 15일에 아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오이시 요시오의 셋째 아들 료쿄 등을 등용했다. 번에서는 아사노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오이시 가문을 일문으로 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오이시 가문에 대한 불신을 키워갔다.

3.1. 사건 발생과 쓰나나가의 대응

1701년(겐로쿠 14년) 3월 14일, 분가인 아코번의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을 하여 개역 및 할복되었다. 이후, 쓰나나가는 본가에 대한 연좌를 두려워하여, 가신 이노우에 마사노부 등을 아코 번에 파견하여 아코 아사노 가문의 필두 가로인 오이시 구라노스케에게 "온건하게 개성(開城)하라"고 압박했다. 개성 후에도 아코 낭사들에 의한 기라 가문에 대한 복수를 막기 위해, 족경두인 신도 토시시게 등을 파견하여 신도 토시노리나 고야마 요시모토 등을 설득하여 동지 맹약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 일당을 와해시키려 했지만, 결국 다음 해 12월 15일에 아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요시오의 셋째 아들 료쿄(연좌를 피하기 위해 당시에는 이시즈카 요시타케)를 시작으로 아코 번의 옛 신하들을 등용하게 되었다. 번에서는 아사노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오이시 가문을 일문으로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차츰 오이시 가문에 대한 불신을 높여갔다.

3.2. 아코 낭사들의 복수 시도 저지 노력

1701년 3월 14일, 분가인 아코번의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을 하여 개역 및 할복되었다. 이후, 쓰나나가는 본가에 대한 연좌를 두려워하여, 용인 이노우에 마사노부 등을 아코 번에 파견하여 아코 아사노 가문의 필두 가로인 오이시 구라노스케에게 "온건하게 개성을 하라"고 압박했다. 개성 후에도 아코 낭사들에 의한 기라 가문에 대한 복수를 막기 위해, 족경두인 신도 토시시게 등을 파견하여 신도 토시노리나 고야마 요시모토 등을 설득하여 동지의 맹약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 일당을 와해시키려 했지만 결국, 다음 해 12월 15일에 아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요시오의 셋째 아들 료쿄(연좌를 피하기 위해, 당시에는 이시즈카 요시타케)를 시작으로 아코 번의 구신들을 등용하게 되었다. 번에서는 아사노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오이시 가문을 일문으로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차츰 오이시 가문에 대한 불신을 높여갔다.

3.3. 아코 사건 이후

1701년 아코번의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을 하여 개역 및 할복되었다. 이후, 쓰나나가는 본가에 대한 연좌를 두려워하여, 용인 이노우에 마사노부 등을 아코 번에 파견하여 아코 아사노 가문의 필두 가로인 오이시 구라노스케에게 "온건하게 개성을 하라"고 압박했다. 개성 후에도 아코 낭사들에 의한 기라 가문에 대한 복수를 막기 위해, 족경두인 신도 토시시게 등을 파견하여 신도 토시노리나 고야마 요시모토 등을 설득하여 동지의 맹약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 일당을 와해시키려 했지만 결국, 다음 해 12월 15일아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요시오의 셋째 아들 료쿄(연좌를 피하기 위해, 당시에는 이시즈카 요시타케)를 시작으로 아코 번의 구신들을 등용하게 되었다. 번에서는, 아사노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오이시 가문을 일문으로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차츰 오이시 가문에 대한 불신을 높여갔다.

4. 번정

綱長일본어 시대에는 상품 경제가 발달하면서 번 재정에 어려움이 커졌다. 이에 따라 가신단의 영지를 삭감하고 번찰을 발행하였다.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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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아버지아사노 쓰나아키라
어머니구조 아이코구조 미치후사와 마쓰다이라 쓰루히메의 딸. 1659년 사망.
부인도쿠가와 아테히메오와리 번의 2대 다이묘 도쿠가와 미쓰토모의 딸. 1666년 출생, 1683년 사망.
장남아사노 요시나가아테히메 소생.
아들아사노 나가카타1693년 출생, 1744년 사망.
아들나카가와 히사요시1708년 출생, 1743년 사망. 나카가와 히사타다의 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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