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센과 페터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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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센과 페터르의 난은 12세기 후반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아센과 페터르 형제가 일으킨 반란이다. 이사키오스 2세의 과도한 세금 부과에 반발하여 시작되었으며, 형제는 터르노보에 교회를 세우고 성 디미터르가 비잔티움을 버리고 불가리아 편에 섰다고 선언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1185년 시작된 반란은 일시적으로 진압되기도 했지만, 쿠만족의 지원을 받아 다시 세력을 확장하여 모에시아 전역을 탈환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1187년 불가리아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성립을 가져왔으며, 불가리아 민족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아센과 페터르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이름아센과 페터르의 난
다른 이름Въстание на Асен и Петър불가리아어 (불가리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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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당시 불가리아
날짜1185년 – 1187년
장소발칸 반도
결과불가리아-블라흐족의 승리, 불가리아 제국의 재건
교전 세력
교전국 1불가리아인
교전국 1 지원 세력블라흐족
쿠만족
교전국 2동로마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 지휘관이반 아센 1세
페터르 4세
교전국 2 지휘관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요안니스 두카스 (세바스토크라토르)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 (카이사르)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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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2세기 후반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헝가리 왕 벨러 3세의 딸과의 결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가리아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는 불가리아 주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고, 특히 하이모스 산맥(발칸 산맥) 거주민들의 불만이 컸다. 쿠만족 계열이자 왈라키아계라고도 불리는 아센과 페터르 형제가 이러한 불만을 바탕으로 반란을 조직하였다.

3. 반란의 전개

아센과 페터르 형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이사키오스 2세에게 헝가리의 벨러 3세의 딸과의 결혼을 위해 부과된 무거운 세금에 대해 항의하고,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 하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거절당했고, 형제는 모욕을 당했다.

이에 1185년, 형제는 터르노보(현 벨리코 터르노보)에 테살로니키의 수호성인 성 디미터르에게 봉헌하는 교회를 건립하고, 성인이 비잔티움을 버리고 불가리아인의 편에 섰다고 선언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은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였던 프레슬라프를 공격했고, 페터르는 자신을 '차르(황제)' 페터르 4세로 선포하며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탄생을 알렸다.

1186년 봄, 이사키오스 2세는 반격에 나섰고, 일식 동안 반란군을 공격하여 도나우 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으나,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들은 쿠만족 동맹과 함께 돌아와 모에시아 전역을 되찾았다.

이후 이사키오스 2세는 그의 삼촌 요한네스, 처남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으나, 이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는 산지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에 익숙하지 못해 큰 피해를 입었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는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도 했다.

1187년 봄, 이사키오스는 로베치 요새를 공격했으나 3달 간의 포위 끝에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사실상 불가리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하이모스 산과 도나우 강 사이의 지역을 상실했다. 이후 이반 아센 1세는 트랴브나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하여 불가리아의 독립을 확고히 했다.

3.1. 비잔티움 제국의 반격과 초기 진압

3.2. 반란의 재개와 불가리아의 독립

반란군은 다뉴브 연안을 점령하고 트라키아까지 진격하여 요하네스 칸타쿠지노스가 이끄는 토벌군을 격파했다. 이를 본 황제 이삭 2세 앙겔로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 반란군을 토벌하여 다뉴브 강 이북으로 패주시킨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쿠만족의 원군을 얻은 페타르와 아센은 불가리아 북부를 해방시켰다. 동로마 제국군은 불가리아군이 농성하는 로베치 요새를 공격했으나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화약을 맺고 불가리아에서 철수했다. 차르로 즉위한 이반 아센 1세는 불가리아를 침공한 동로마군을 트랴브나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로써 불가리아의 독립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4. 불가리아 제국의 발전과 의의

4.1.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성립

이사키오스 2세가 헝가리의 벨러 3세의 딸과의 결혼을 위해 하이모스 산 거주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비잔티움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비잔티움 군대의 봉급 인상과 세금 납부에 필요한 수도원 수입 확보를 위한 토지 하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무례하게 대우받았다.

형제가 돌아온 후, 많은 이들이 반란에 동참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터르노보에 테살로니키의 수호성인 성 디미터르의 교회를 짓고 성인이 비잔티움 제국을 돕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주장하며, "신은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을 해방하기로 결정하셨고 그들이 오랫동안 지고 있던 멍에를 벗겨내셨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를 공격하게 만들었고, 프레슬라프 공격 후 페터르는 자신을 불가리아의 차르 페터르 4세로 선언했다.

1186년 봄, 이사키오스 2세는 반격에 성공하여 반란군을 도나우 강 이북으로 몰아냈으나, 이들은 쿠만족과 연합하여 모에시아 전역을 되찾았다. 이는 새로운 불가리아, 즉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이사키오스 2세는 이후 여러 장군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187년로베치 요새 공격도 3개월 간의 포위 끝에 실패했다. 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하고 하이모스 산과 도나우 강 사이의 지역을 상실했다.

4.2. 불가리아 민족 정체성 형성

4.3. 중세 불가리아의 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