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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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겐의 난은 1156년 일본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퇴위한 스토쿠 천황과 고시라카와 천황 사이의 권력 다툼이 주요 원인이었다. 도바 천황 사후, 두 아들 간의 갈등은 귀족 가문과 무사 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다. 고시라카와 천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스토쿠 상황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교토 전투에서 고시라카와 천황 측이 승리하며 스토쿠 천황은 유배되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사망했다. 이 사건은 겐지와 헤이시 두 무사 가문을 부상시켰으며, 섭관가의 몰락과 무가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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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겐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
분쟁 개요 | |
분쟁 이름 | 호겐의 난 |
영어 명칭 | Hōgen rebellion |
일본어 명칭 | 호겐노란 (保元の乱) |
시기 | 1156년 7월 28일 – 1156년 8월 16일 |
장소 | 교토 |
원인 | 황위 계승 및 조정 권력 다툼 |
결과 | 고시라카와 천황 세력의 승리; 미나모토-다이라 라이벌 관계의 확립; 스토쿠 천황 유배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고시라카와 천황 |
교전국 2 | 스토쿠 상황 |
지휘관 (고시라카와 천황) |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다이라노 기요모리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아시카가 요시야스 미나모토노 시게나리 다이라노 노부카네 신제이 |
지휘관 (스토쿠 상황) |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미나모토노 다메요시 다이라노 다다마사 |
병력 규모 (고시라카와 천황) | 불명 |
병력 규모 (스토쿠 상황) | 불명, 기병 600명 포함 |
피해 규모 | |
피해 (고시라카와 천황) | 불명 |
피해 (스토쿠 상황) | 미나모토노 요리카타: 참수 미나모토노 다메요시: 참수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유배 |
관련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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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전쟁 목록 | 38년 전쟁 덴교노란 도이의 입구 젠쿠넨 전쟁 고산넨 전쟁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 겐페이 전쟁 |
2. 배경
1155년, 궁중에서는 도바 천황, 스토쿠 천황, 고노에 천황을 중심으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노에 천황의 이른 죽음 이후, 권력의 역학 관계가 변화했다.
- '''1155년 8월 23일''' (''규쥬(久寿) 2년 7월 24일): 고노에 천황이 재위 14년 만에 승하했다. 이후 황위 계승을 두고 분쟁이 있었지만, 도바 천황의 넷째 아들인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소쿠이'')했다.[3]
고시라카와 천황의 즉위는 권력 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도바 천황의 두 아들, 스토쿠 상황과 고시라카와 천황 사이의 격렬한 분쟁은 여러 귀족(''쿠게'') 가문 및 기타 세력 내 분열과 맞물려 있었다. 1142년 이후 스토쿠 상황은 자신의 아들이 고노에 천황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하면서 좌절되었다.[4]
- '''1156년 7월 20일''' (''호겐(保元) 원년 7월 2일): 도바 천황이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도바 천황 사후, 고시라카와 천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스토쿠 상황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했고, 상황정치의 지속 여부를 놓고 다투었다.[5]
날짜 | 내용 | 출전 |
---|---|---|
5월 22일 | 도바 상황, 위독해짐 | 병범기 |
5월 30일 | 도바 상황의 서거(붕어) 논의 시작 | 병범기 |
6월 1일 |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야스 등 무사, 원선에 따라 내리, 원어소의 수호를 시작함 | 병범기 |
7월 2일 | 도바 상황 붕어 | 병범기 |
7월 5일 | 경중의 무사들의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칙명이 내려짐 | 병범기 |
7월 6일 |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가신, 미나모토노 친지 체포됨 | 병범기 |
7월 8일 | 섭관가 쇼엔의 무사 동원 금지 륜지 타카이나카 토시나리,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히가시산죠덴을 접수함 토바 상황 초칠일 법요 | 병범기 |
7월 9일 | 스토쿠 상황, 시라카와 호쿠덴에 들어감 | 병범기 |
7월 10일 |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시라카와 호쿠덴에 들어감. 스토쿠 상황 휘하에 병사가 모임 타카마쓰덴의 고시라카와 천황 휘하에 무사들이 집결 | 병범기 |
7월 11일 | 고시라카와 천황측 군세가 시라카와 호쿠덴을 향해 출격, 스토쿠 상황측과 전투를 벌여 고시라카와 천황측이 승리함 | 병범기 |
7월 12일 | 스토쿠 상황 출가 | 병범기 |
7월 13일 | 스토쿠 상황, 고시라카와 천황측으로 신병이 옮겨짐 | 병범기 |
7월 14일 | 스토쿠측의 중심인물・후지와라노 노리나가가 우대변 등에 의해 조사를 받음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사망 | 병범기 |
7월 15일 | 후지와라노 타다자네,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와 접촉을 시작함 | 병범기 |
7월 18일 | 구 후지와라노 타다자네 영지, 고시라카와 천황의 륜지에 의해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에게 주어짐 | 병범기 |
7월 23일 | 스토쿠 상황, 사누키로 옮겨짐 | 병범기 |
7월 27일 | 스토쿠측 체포자에 대한 죄명 선하(판결)가 내려짐 | 병범기 |
7월 28일 | 타이라노 타다마사 등이 처형됨 | 병범기 |
7월 30일 | 미나모토노 타메요시, 타이라노 케이히로 등이 처형됨 | 병범기 |
8월 3일 | 후지와라노 노리나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자식 등 스토쿠측에 속한 자들의 유형이 집행됨 | 병범기 |
== 고노에 천황 즉위와 섭관가의 내분 ==
永治元年(1141년) 12월 7일, 도바 법황은 스토쿠 천황을 퇴위시키고 총비 나리코(비후쿠몬인)에게서 얻은 나리히토 친왕(체인 친왕)을 고노에 천황으로 즉위시켰다.[46] 나리히토 친왕은 스토쿠 천황의 중궁 세이코의 양자였기에 황태자로 즉위해야 했으나, 양위 선명에는 황태제로 기록되었다.[10] 이는 스토쿠 상황에게 큰 원한을 남겼다. 이듬해 다이켄몬인이 나리코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출가하면서, 스토쿠 상황의 외척 세력은 후퇴했다. 한편, 후지와라노 이에나리를 중심으로 비후쿠몬인 지지파가 정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시라카와인의 원정 아래서 불우했던 후지와라 셋칸케는 도바인의 원정이 시작되고 다다자네의 딸 야스코(다카노인)가 도바인의 비가 되면서 숨통이 트였다. 간파쿠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이복동생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를 양자로 들였으나,[13] 1143년에 모토자네가 태어나면서 셋칸 지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다자네, 요리나가와 대립하게 되었다.[47]
1150년, 고노에 천황의 원복 후 요리나가의 양녀 마사루코가 입궁하여 뇨고가 되었다. 그러나 다다미치가 고레미치의 딸이자 비후쿠몬인의 양녀였던 시메코를 양녀로 들여 입궁시키려 하면서 대립이 격화되었다. 다다자네는 다다미치의 행동에 분노하여 우지쵸자 지위를 박탈하고 요리나가에게 주었으며, 다다미치와 의절했다. 도바인은 다다미치를 간파쿠에 유임시키는 한편 요리나가에게 나이란 선지를 내려, 간파쿠와 나이란이 병립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1155년, 고노에 천황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3]
== 고노에 천황의 죽음과 후계 문제 ==
닌표 3년(1153년) 고노에 천황이 중병으로 쓰러졌다. 후계자로는 스토쿠 상황의 첫째 황자인 시게히토 친왕이 유력했으나,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비후쿠몬인의 양자인 모리히토 친왕(훗날의 니조 천황)에게 양위할 것을 도바 법황에게 주상했다. 당시 고노에 천황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간파쿠(関白) 다다미치 등 일부 제한된 인물뿐이었고, 도바 법황은 다다미치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제안을 거절했다.[48] 그러나 비후쿠몬인과 다다미치는 스토쿠 상황의 원정을 막기 위해 모리히토 친왕 옹립을 추진했다.
규주 2년(1155년) 7월 23일, 고노에 천황이 붕어했다.[3] 후계 천황을 결정하는 왕자의정(王者議定)에는 미나모토노 마사사다와 산조 기미노리 등 비후쿠몬인과 가까운 구교(公卿)들이 참석했다. 시게히토 친왕, 모리히토 친왕, 쇼시 내친왕이 후보로 거론되었고, 모리히토 친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마사히토 친왕(고시라카와 천황)이 태자 책봉도 없이 29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49]
이러한 고시라카와 천황의 즉위에는 그의 유모의 남편이자 인세이(院政) 측근이었던 신제이의 책략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50] 아버지인 친왕이 있음에도 아들이 즉위하는 것은 서열상 맞지 않았고,[49] 어린 모리히토가 즉위한 후 도바 법황이 붕어하면 스토쿠 상황이 치천(治天)의 군(君)이 되어 원정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마사히토 친왕의 변칙적인 즉위가 필요했다고 여겨진다.[50]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아내의 상을 치르느라 조정에 출사하지 못했다. 세간에는 고노에 천황의 죽음이 후지와라노 다다자네와 요리나가 부자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요리나가는 사실상 실각 상태에 놓였다. 다다자네는 요리나가를 근신시키고 다카노인을 통해 법황의 신뢰를 회복하려 했지만, 12월에 다카노인이 사망하면서 좌절되었다.
== 도바 법황의 죽음 ==
1156년 5월, 도바 법황이 병으로 쓰러지면서, 그동안 도바 법황의 권위를 방패삼아 스토쿠 상황과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를 억압해오던 비후쿠몬인(다이라노 도키코)과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인세이 측근들은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51] 구칸쇼에 따르면, 정세 불안을 우려한 후지와라노 무네요시의 요청으로 도바 법황은 미나모토노 다메요시, 다이라노 기요모리 등 북면무사 10명에게 제문(맹약서)를 쓰게 해 비후쿠몬인에게 보냈다.[51] 이들은 도바 법황 사후 비후쿠몬인을 따를지 불확실했기에, 생전에 충성을 맹세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6월 1일, 도바 법황의 거처인 도바도노는 미나모토노 미쓰야스, 다이라노 모리카네를 중심으로 한 유력 북면무사들이, 고시라카와 천황의 거처 사토 다이리・다카마쓰도노는 가와치 겐지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야스가 각자 병사를 거느리고 경호했다.[52]
7월 2일 신각(오후 4시경), 도바 법황은 붕어했다.[5] 스토쿠 상황은 임종 직전 병문안을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고지단에 따르면, 도바 법황은 측근 후지와라노 고레카타에게 자신의 유해를 스토쿠 상황에게 보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53] 스토쿠 상황은 분개하며 도바 다나카도노로 돌아갔고,[53] 장례 의식은 유각(오후 8시경)부터 소수의 인세이 측근들이 거행하였다.[54]
고노에 천황의 죽음 이후,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하면서 권력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도바 천황의 두 아들 사이의 격렬한 분쟁은 여러 귀족 가문 및 기타 세력 내 분열과 맞물려 있었다. 도바 천황은 자신의 아들을 다른 후궁의 아들에게 퇴위시켰고, 1142년 이후 스토쿠 상황은 자신의 아들이 고노에 천황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하면서 스토쿠 상황의 희망은 좌절되었다.[4] 도바 천황 사후, 고시라카와 천황에게 충성하는 세력과 스토쿠 상황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했고, 상황정치의 계속 여부를 놓고 다투었다.[5]
2. 1. 고노에 천황 즉위와 섭관가의 내분
永治元年(1141년) 12월 7일, 도바 법황은 스토쿠 천황을 퇴위시키고 총비 나리코(비후쿠몬인)에게서 얻은 나리히토 친왕(체인 친왕)을 고노에 천황으로 즉위시켰다.[46] 나리히토 친왕은 스토쿠 천황의 중궁 세이코의 양자였기에 황태자로 즉위해야 했으나, 양위 선명에는 황태제로 기록되었다.[10] 이는 스토쿠 상황에게 큰 원한을 남겼다. 이듬해 다이켄몬인이 나리코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출가하면서, 스토쿠 상황의 외척 세력은 후퇴했다. 한편, 후지와라노 이에나리를 중심으로 비후쿠몬인 지지파가 정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시라카와인의 원정 아래서 불우했던 후지와라 셋칸케는 도바인의 원정이 시작되고 다다자네의 딸 야스코(다카노인)가 도바인의 비가 되면서 숨통이 트였다. 간파쿠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이복동생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를 양자로 들였으나,[13] 1143년에 모토자네가 태어나면서 셋칸 지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다자네, 요리나가와 대립하게 되었다.[47]
1150년, 고노에 천황의 원복 후 요리나가의 양녀 마사루코가 입궁하여 뇨고가 되었다. 그러나 다다미치가 고레미치의 딸이자 비후쿠몬인의 양녀였던 시메코를 양녀로 들여 입궁시키려 하면서 대립이 격화되었다. 다다자네는 다다미치의 행동에 분노하여 우지쵸자 지위를 박탈하고 요리나가에게 주었으며, 다다미치와 의절했다. 도바인은 다다미치를 간파쿠에 유임시키는 한편 요리나가에게 나이란 선지를 내려, 간파쿠와 나이란이 병립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1155년, 고노에 천황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3]
2. 2. 고노에 천황의 죽음과 후계 문제
닌표 3년(1153년) 고노에 천황이 중병으로 쓰러졌다. 후계자로는 스토쿠 상황의 첫째 황자인 시게히토 친왕이 유력했으나,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비후쿠몬인의 양자인 모리히토 친왕(훗날의 니조 천황)에게 양위할 것을 도바 법황에게 주상했다. 당시 고노에 천황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간파쿠(関白) 다다미치 등 일부 제한된 인물뿐이었고, 도바 법황은 다다미치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제안을 거절했다.[48] 그러나 비후쿠몬인과 다다미치는 스토쿠 상황의 원정을 막기 위해 모리히토 친왕 옹립을 추진했다.규주 2년(1155년) 7월 23일, 고노에 천황이 붕어했다.[3] 후계 천황을 결정하는 왕자의정(王者議定)에는 미나모토노 마사사다와 산조 기미노리 등 비후쿠몬인과 가까운 구교(公卿)들이 참석했다. 시게히토 친왕, 모리히토 친왕, 쇼시 내친왕이 후보로 거론되었고, 모리히토 친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마사히토 친왕(고시라카와 천황)이 태자 책봉도 없이 29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49]
이러한 고시라카와 천황의 즉위에는 그의 유모의 남편이자 인세이(院政) 측근이었던 신제이의 책략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50] 아버지인 친왕이 있음에도 아들이 즉위하는 것은 서열상 맞지 않았고,[49] 어린 모리히토가 즉위한 후 도바 법황이 붕어하면 스토쿠 상황이 치천(治天)의 군(君)이 되어 원정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마사히토 친왕의 변칙적인 즉위가 필요했다고 여겨진다.[50]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아내의 상을 치르느라 조정에 출사하지 못했다. 세간에는 고노에 천황의 죽음이 후지와라노 다다자네와 요리나가 부자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요리나가는 사실상 실각 상태에 놓였다. 다다자네는 요리나가를 근신시키고 다카노인을 통해 법황의 신뢰를 회복하려 했지만, 12월에 다카노인이 사망하면서 좌절되었다.
2. 3. 도바 법황의 죽음
1156년 5월, 도바 법황이 병으로 쓰러지면서, 그동안 도바 법황의 권위를 방패삼아 스토쿠 상황과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를 억압해오던 비후쿠몬인(다이라노 도키코)과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인세이 측근들은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51] 구칸쇼에 따르면, 정세 불안을 우려한 후지와라노 무네요시의 요청으로 도바 법황은 미나모토노 다메요시, 다이라노 기요모리 등 북면무사 10명에게 제문(맹약서)를 쓰게 해 비후쿠몬인에게 보냈다.[51] 이들은 도바 법황 사후 비후쿠몬인을 따를지 불확실했기에, 생전에 충성을 맹세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6월 1일, 도바 법황의 거처인 도바도노는 미나모토노 미쓰야스, 다이라노 모리카네를 중심으로 한 유력 북면무사들이, 고시라카와 천황의 거처 사토 다이리・다카마쓰도노는 가와치 겐지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야스가 각자 병사를 거느리고 경호했다.[52]
7월 2일 신각(오후 4시경), 도바 법황은 붕어했다.[5] 스토쿠 상황은 임종 직전 병문안을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고지단에 따르면, 도바 법황은 측근 후지와라노 고레카타에게 자신의 유해를 스토쿠 상황에게 보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53] 스토쿠 상황은 분개하며 도바 다나카도노로 돌아갔고,[53] 장례 의식은 유각(오후 8시경)부터 소수의 인세이 측근들이 거행하였다.[54]
고노에 천황의 죽음 이후,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하면서 권력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도바 천황의 두 아들 사이의 격렬한 분쟁은 여러 귀족 가문 및 기타 세력 내 분열과 맞물려 있었다. 도바 천황은 자신의 아들을 다른 후궁의 아들에게 퇴위시켰고, 1142년 이후 스토쿠 상황은 자신의 아들이 고노에 천황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하면서 스토쿠 상황의 희망은 좌절되었다.[4] 도바 천황 사후, 고시라카와 천황에게 충성하는 세력과 스토쿠 상황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했고, 상황정치의 계속 여부를 놓고 다투었다.[5]
3. 경과
고시라카와 천황과 스토쿠 천황은 토바 천황의 형제였으나, 권력을 두고 대립했다. 섭정 후지와라노 다다자네의 장남인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고시라카와 천황을, 동생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스토쿠 천황을 지지했다. 각 진영은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의 사무라이들을 끌어들였다. 미나모토 씨의 당주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와 다이라 씨의 일파 당주 다이라노 다다마사는 스토쿠 천황과 요리나가를 지지했다. 반면, 미나모토 다메요시의 장남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다이라 씨의 당주이자 다이라 다다마사의 조카인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천황과 다다미치를 지지했다.[6]
- '''1156년 7월 28일''' (호겐 원년 7월 10일): 양측 군대는 교토에서 대치했다. 스토쿠 천황 측에서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미나모토 다메요시의 아들, 요시토모의 동생)가 적의 궁궐을 야습할 것을 제안했으나, 후지와라 요리나가는 이 전략을 거부했다. 한편, 고시라카와 천황 측의 미나모토 요시토모는 같은 제안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6]
- '''1156년 7월 29일''' (호겐 원년 7월 11일): 밤에 기요모리와 요시토모는 기병 600명을 이끌고 시라카와덴 공방전에서 스토쿠 천황을 공격했다. 기요모리는 다메토모가 방어하고 있던 서쪽 문을 공격했다. 다메토모는 뛰어난 궁술 부대를 이끌고 기요모리의 군대를 물리쳤다.
그러자 요시토모가 다메토모를 공격했으나 역시 물리쳤다. 스토쿠 천황의 사무라이들은 필사적으로 싸웠고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요시토모는 적의 궁궐에 불을 지르자고 제안했고, 이는 실행되었다. 스토쿠 천황의 사무라이들은 화염과 고시라카와 천황 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주했고, 고시라카와 천황의 동맹군이 전투에서 승리했다.[6]
=== 도발과 스토쿠 상황의 탈출 ===
도바 법황이 붕어한 직후, "상황(스토쿠 상황)과 좌부(후지와라노 요리나가)가 한마음으로 군사를 일으켜 국가를 전복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20] 이에 7월 5일, 칙령으로 게비이시(検非違使) 다이라노 모토모리(기요모리의 둘째 아들) ・ 다이라노 고레시게 ・ 미나모토노 요시야스가 소집되었고, 수도 안 무사들의 움직임을 중지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20] 7월 6일에는 요리나가의 명으로 교토에 잠복해 있었다는 용의로 야마토 겐지(大和源氏)의 미나모토노 지카야스가 모토모리에게 체포되었다.[24]
7월 8일, 후지와라노 다다자네 ・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부자가 장원에서 병사를 모으는 것을 정지한다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어교서(윤지)가 여러 구니에 내려졌고, 구란도(蔵人) ・ 다카시나노 도시나리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수병들이 히가시산조도노(東三条殿)에 난입해 저택을 몰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는 모반인에 대한 재산 몰수 처분으로, 요리나가를 모반죄로 다스리겠다는 의미였다. 셋칸케의 우지쵸자가 모반인으로 몰린 전대미문의 사태에 셋칸케의 게시(家司)였던 다이라노 노부노리는 자신의 책에서 "일일이 필설로 다 적을 수 없구나"라고 개탄했다.[26]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칙명과 윤지에 따른 것이었으나, 실제로 배후에서 모든 일을 꾸미고 실행한 것은 천황의 측근이었던 신제이(信西)로 추측된다.[55][27] 고시라카와 천황 측은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를 지지하였고, 요리나가는 스토쿠 천황을 지지하며 대립하였다.[6] 다다자네 ・ 요리나가가 어떠한 행동을 일으킨 것은 보이지 않았고, 무사 동원에 성공해 압도적인 우위에 선 고시라카와 천황 진영이 노골적으로 도발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156년 7월 9일 밤, 스토쿠 상황은 몇몇 측근만을 거느린 채 도바 다나카도노(鳥羽田中殿)를 탈출, 시라카와기타도노(白河北殿)로 피신했다.[25] 『효한키(兵範記)』는 이 날의 기록에 "위아래로 어수선하였고 친소(親疎)도 알아볼 수 없었다"고 적었다. 스토쿠 상황의 행동은 시게히토 친왕도 대동하지 않았을 정도로 돌발적이었다. 스토쿠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없었으나, 이미 세간에 "상황과 좌부가 한 마음으로" 나라를 뒤엎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진 상황에서 도바 다나카도노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신병 구속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탈출을 결행한 것으로 보인다. 시라카와는 군사거점으로는 맞지 않는 곳이었지만, 남쪽으로는 헤이시(平氏)의 본거지인 로쿠하라(六波羅)가 있었고, 자신이 새로운 '치천의 군'이 되는 것을 선언해서 북면무사(北面武士) 가운데 최대 병력을 지닌 세력이었던 다이라노 기요모리나 거취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귀족층의 지지를 기대한 것으로 추측된다.
=== 양측의 대립과 군사 동원 ===
1156년 7월 10일(호겐 원년 7월 10일) 초저녁,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우지에서 교토로 상경하여 시라카와기타도노(白河北殿)로 들어갔다. 모반인으로 낙인찍힌 요리나가는 거병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스토쿠 상황을 옹립하려 했다.[56] 시라카와기타도노에는 스토쿠 천황의 측근 후지와라노 노리나가와 요리나가의 외가 친척 후지와라노 모리노리 ・ 쓰네노리 형제 등 귀족들과, 다이라노 이에히로 ・ 미나모토노 다메쿠니 ・ 미나모토노 다메요시 ・ 다이라노 다다마사(기요모리의 숙부) ・ 미나모토노 요리노리 등의 무사들이 결집했다.[56] 이들 무사는 대부분 후지와라노 다다자네 ・ 요리나가와 주종관계에 있었으며, 스토쿠 천황 진영의 무사는 셋칸케의 사병 집단으로 한정되어 병력이 매우 약소했다.[56]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거처인 다카마쓰도노(高松殿)에 대한 야간기습을 제안했으나,[57] 요리나가는 이를 듣지 않고 고후쿠지 승병들이 야마토에서 원군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한편, 고시라카와 천황 진영에서도 스토쿠 상황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무사들을 동원했다. 다카마쓰도노에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 미나모토노 요시야스에 더해 다이라노 기요모리 ・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 미나모토노 시게나리 ・ 미나모토노 스에자네 ・ 다이라노 노부카네 ・ 다이라노 고레시게가 잇따라 소집되었다.[29][30]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 모토자네 부자도 다카마쓰도노에 합류했다.[30] 그러나 대부분의 구교들은 도바 법황의 상중임을 구실로 출사하지 않고 정세를 관망했다.[31]
기요모리와 요시토모는 천황에게 작전을 아뢴 뒤 출격 준비에 들어갔다. 신제이와 요시토모는 선제공격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나, 다다미치는 신중론을 펼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8]
=== 야간 기습 작전과 전투 ===
1156년 7월 11일 새벽, 다이라 기요모리가 이끄는 300기의 군세가 니조대로를, 미나모토 요시토모가 이끄는 200기가 오오이고몬대로를, 요시야스가 이끄는 100기가 고노에 대로를 동쪽으로 지나 인각(오전 4시경)에 스토쿠 상황측과 전투가 벌어졌다.[59] 고시라카와 천황측은 삼종신기와 함께 다카마쓰도노 가까이 있던 히가시산조도노로 옮겨서 미나모토노 요리모리가 수백 명의 병사로 주변을 방어하였다.[59]
전투는 『호겐 이야기』에 따르면,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의 뛰어난 궁술과 분전으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측의 유력 노토였던 후지와라노 다다나오(이토 다다나오) ・ 야마다 고레유키가 희생되고 요시토모군도 50명 넘는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고 한다.[60] 다메토모의 궁술은 훗날 그의 화살에 맞고 물러났던 오오바 가게요시가 "(다메토모는) 본조에 비길 자가 없는 활의 달인이었다"[60]고 칭찬할 정도로 뛰어났다. 한편, 『호겐 이야기』에는 시라카와 기타도노의 문에서 있었던 분투를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모가와를 끼고 일진일퇴의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61]
고시라카와 천황측은 새로운 군세로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 시게나리 ・ 노부카네를 투입하는 동시에 요시토모의 헌책대로 시라카와기타도노 서쪽에 있던 후지와라노 이에나리 저택에 불을 질렀다. 불은 진각(오전 8시경)에 시라카와기타도노로 옮겨붙었고 상황측은 무너졌다. 스토쿠 상황이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고쇼를 탈출해서 행방을 감추었고, 천황측은 잔적 소탕을 위해 홋쇼지를 수색하면서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엔가쿠지 주거에 불을 질렀다.[62] 고시라카와 천황은 전승을 보고받고 다카마쓰도노로 돌아왔고 오각(오후 12시경)에 기요모리 ・ 요시토모도 돌아와서 전투는 종료되었다. 요리나가의 패주를 알게 된 후지와라노 다다자네는 우지에서 난토로 달아났다.
3. 1. 도발과 스토쿠 상황의 탈출
도바 법황이 붕어한 직후, "상황(스토쿠 상황)과 좌부(후지와라노 요리나가)가 한마음으로 군사를 일으켜 국가를 전복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20] 이에 7월 5일, 칙령으로 게비이시(検非違使) 다이라노 모토모리(平基盛, 기요모리의 둘째 아들) ・ 다이라노 고레시게(平維繁) ・ 미나모토노 요시야스가 소집되었고, 수도 안 무사들의 움직임을 중지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20] 7월 6일에는 요리나가의 명으로 교토에 잠복해 있었다는 용의로 야마토 겐지(大和源氏)의 미나모토노 지카야스(源親治)가 모토모리에게 체포되었다.[24]7월 8일, 다다자네 ・ 요리나가 부자가 장원에서 병사를 모으는 것을 정지한다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어교서(윤지)가 여러 구니에 내려졌고, 구란도(蔵人) ・ 다카시나노 도시나리(高階俊成)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의 수병들이 히가시산조도노(東三条殿)에 난입해 저택을 몰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는 모반인에 대한 재산 몰수 처분으로, 요리나가를 모반죄로 다스리겠다는 의미였다. 셋칸케의 우지쵸자가 모반인으로 몰린 전대미문의 사태에 셋칸케의 게시(家司)였던 다이라노 노부노리(平信範)는 자신의 책에서 "일일이 필설로 다 적을 수 없구나"라고 개탄했다.[26]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칙명과 윤지에 따른 것이었으나, 실제로 배후에서 모든 일을 꾸미고 실행한 것은 천황의 측근이었던 신제이(信西)로 추측된다.[55][27] 고시라카와 천황 측은 다다미치를 지지하였고, 요리나가는 스토쿠 천황을 지지하며 대립하였다.[6] 다다자네 ・ 요리나가가 어떠한 행동을 일으킨 것은 보이지 않았고, 무사 동원에 성공해 압도적인 우위에 선 고시라카와 천황 진영이 노골적으로 도발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156년 7월 9일 밤, 스토쿠 상황은 몇몇 측근만을 거느린 채 도바 다나카도노(鳥羽田中殿)를 탈출, 시라카와기타도노(白河北殿)로 피신했다.[25] 『효한키』(兵範記)는 이 날의 기록에 "위아래로 어수선하였고 친소(親疎)도 알아볼 수 없었다"고 적었다. 스토쿠 상황의 행동은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도 대동하지 않았을 정도로 돌발적이었다. 스토쿠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없었으나, 이미 세간에 "상황과 좌부가 한 마음으로" 나라를 뒤엎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진 상황에서 도바 다나카도노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신병 구속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탈출을 결행한 것으로 보인다. 시라카와는 군사거점으로는 맞지 않는 곳이었지만, 남쪽으로는 헤이시(平氏)의 본거지인 로쿠하라(六波羅)가 있었고, 자신이 새로운 '치천의 군'이 되는 것을 선언해서 북면무사(北面武士) 가운데 최대 병력을 지닌 세력이었던 다이라노 기요모리나 거취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귀족층의 지지를 기대한 것으로 추측된다.
3. 2. 양측의 대립과 군사 동원
1156년 7월 10일(호겐 원년 7월 10일) 초저녁,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우지에서 교토로 상경하여 시라카와기타도노(白河北殿)로 들어갔다. 모반인으로 낙인찍힌 요리나가는 거병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스토쿠 상황을 옹립하려 했다.[56] 시라카와기타도노에는 스토쿠 천황의 측근 후지와라노 노리나가와 요리나가의 외가 친척 후지와라노 모리노리 ・ 쓰네노리 형제 등 귀족들과, 다이라노 이에히로 ・ 미나모토노 다메쿠니 ・ 미나모토노 다메요시 ・ 다이라노 다다마사(기요모리의 숙부) ・ 미나모토노 요리노리 등의 무사들이 결집했다.[56] 이들 무사는 대부분 후지와라노 다다자네 ・ 요리나가와 주종관계에 있었으며, 스토쿠 천황 진영의 무사는 셋칸케의 사병 집단으로 한정되어 병력이 매우 약소했다.[56]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거처인 다카마쓰도노(高松殿)에 대한 야간기습을 제안했으나,[57] 요리나가는 이를 듣지 않고 고후쿠지 승병들이 야마토에서 원군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한편, 고시라카와 천황 진영에서도 스토쿠 상황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무사들을 동원했다. 다카마쓰도노에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 미나모토노 요시야스에 더해 다이라노 기요모리 ・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 미나모토노 시게나리 ・ 미나모토노 스에자네 ・ 다이라노 노부카네 ・ 다이라노 고레시게가 잇따라 소집되었다.[29][30]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 모토자네 부자도 다카마쓰도노에 합류했다.[30] 그러나 대부분의 구교들은 도바 법황의 상중임을 구실로 출사하지 않고 정세를 관망했다.[31]
기요모리와 요시토모는 천황에게 작전을 아뢴 뒤 출격 준비에 들어갔다. 신제이와 요시토모는 선제공격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나, 다다미치는 신중론을 펼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8]
3. 3. 야간 기습 작전과 전투
1156년 7월 11일 새벽, 다이라 기요모리가 이끄는 300기의 군세가 니조대로를, 미나모토 요시토모가 이끄는 200기가 오오이고몬대로를, 요시야스가 이끄는 100기가 고노에 대로를 동쪽으로 지나 인각(오전 4시경)에 스토쿠 상황측과 전투가 벌어졌다.[59] 고시라카와 천황측은 삼종신기와 함께 다카마쓰도노 가까이 있던 히가시산조도노로 옮겨서 미나모토노 요리모리가 수백 명의 병사로 주변을 방어하였다.[59]전투는 『호겐 이야기』에 따르면,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의 뛰어난 궁술과 분전으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측의 유력 노토였던 후지와라노 다다나오(이토 다다나오) ・ 야마다 고레유키가 희생되고 요시토모군도 50명 넘는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고 한다.[60] 다메토모의 궁술은 훗날 그의 화살에 맞고 물러났던 오오바 가게요시가 "(다메토모는) 본조에 비길 자가 없는 활의 달인이었다"[60]고 칭찬할 정도로 뛰어났다. 한편, 『호겐 이야기』에는 시라카와 기타도노의 문에서 있었던 분투를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모가와를 끼고 일진일퇴의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61]
고시라카와 천황측은 새로운 군세로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 시게나리 ・ 노부카네를 투입하는 동시에 요시토모의 헌책대로 시라카와기타도노 서쪽에 있던 후지와라노 이에나리 저택에 불을 질렀다. 불은 진각(오전 8시경)에 시라카와기타도노로 옮겨붙었고 상황측은 무너졌다. 스토쿠 상황이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고쇼를 탈출해서 행방을 감추었고, 천황측은 잔적 소탕을 위해 홋쇼지를 수색하면서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엔가쿠지 주거에 불을 질렀다.[62] 고시라카와 천황은 전승을 보고받고 다카마쓰도노로 돌아왔고 오각(오후 12시경)에 기요모리 ・ 요시토모도 돌아와서 전투는 종료되었다. 요리나가의 패주를 알게 된 후지와라노 다다자네는 우지에서 난토로 달아났다.
4. 결과
현직 천황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의 군대는 퇴위한 스토쿠 천황(崇德天皇)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이로써 고시라카와는 퇴위하면서도 여전히 제한 없는 황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고시라카와는 1158년 새로운 상황제(인세이(院政))를 시작했으며, 니조 천황(二条天皇), 로쿠조 천황(六条天皇), 타카쿠라 천황(高倉天皇), 안토쿠 천황(安徳天皇),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 등 다섯 명의 천황 재위 기간 동안 권력을 행사했다. 그의 영향력은 1192년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스토쿠 천황은 시코쿠(四国)의 사누키 국(讃岐国)으로 유배되었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는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와 타이라노 타다마사(平忠正)는 처형되었다. 미나모토노 타메토모(源為朝)는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도망쳐야 했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는 아버지의 죽음 후 미나모토 씨의 당주가 되었고,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와 함께 두 무사 가문을 교토(京都)의 새로운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7]
날짜 (선명력 장력) | 내용 | 출전 |
---|---|---|
5월 22일 | 토바 상황, 위독해짐 | 병범기 |
5월 30일 | 토바 상황의 서거(붕어) 논의 시작 | 병범기 |
6월 1일 |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야스 등 무사, 원선에 따라 내리, 원어소의 수호를 시작함 | 병범기 |
7월 2일 | 토바 상황 붕어 | 병범기 |
7월 5일 | 경중의 무사들의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칙명이 내려짐 | 병범기 |
7월 6일 |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가신, 미나모토노 친지 체포됨 | 병범기 |
7월 8일 | 섭관가 쇼엔의 무사 동원 금지 륜지 | 병범기 |
7월 9일 | 스토쿠 상황, 시라카와 호쿠덴에 들어감 | 병범기 |
7월 10일 |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시라카와 호쿠덴에 들어감. 스토쿠 상황 휘하에 병사가 모임 | 병범기 |
7월 11일 | 고시라카와 천황측 군세가 시라카와 호쿠덴을 향해 출격, 스토쿠 상황측과 전투를 벌여 고시라카와 천황측이 승리함 | 병범기 |
7월 12일 | 스토쿠 상황 출가 | 병범기 |
7월 13일 | 스토쿠 상황, 고시라카와 천황측으로 신병이 옮겨짐 | 병범기 |
7월 14일 | 스토쿠측의 중심인물・후지와라노 노리나가가 우대변 등에 의해 조사를 받음 | 병범기 |
7월 15일 | 후지와라노 타다자네,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와 접촉을 시작함 | 병범기 |
7월 18일 | 구 후지와라노 타다자네 영지, 고시라카와 천황의 륜지에 의해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에게 주어짐 | 병범기 |
7월 23일 | 스토쿠 상황, 사누키로 옮겨짐 | 병범기 |
7월 27일 | 스토쿠측 체포자에 대한 죄명 선하(판결)가 내려짐 | 병범기 |
7월 28일 | 타이라노 타다마사 등이 처형됨 | 병범기 |
7월 30일 | 미나모토노 타메요시, 타이라노 케이히로 등이 처형됨 | 병범기 |
8월 3일 | 후지와라노 노리나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자식 등 스토쿠측에 속한 자들의 유형이 집행됨 | 병범기 |
4. 1. 패배한 측의 처벌
스토쿠 상황은 시코쿠(四国)의 사누키 국(讃岐国)으로 유배되었고, 8년 후인 1164년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는 전투 중 목에 화살을 맞고 센카쿠의 방으로 옮겨졌으나, 14일에 사망하였다.(源為義)와 (平忠正)를 포함한 패전 측 무사들은 처형되었다. 이 처벌은 야쿠시의 변(薬子の変) 이후 공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던 사형의 부활이었다. 28일에 타다마사(忠正)가, 30일에 타메요시(為義)와 이에히로(家弘)가 일족과 함께 참수되었다.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는 도망쳤으나, 오미(近江)에 은신해 있다가 (源重貞)에게 잡혀 이즈오시마(伊豆大島)로 유배되었다.
4. 2. 겐지와 헤이시의 부상
호겐의 난으로 겐지와 헤이시 양대 무사 가문은 교토의 새로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7] 고시라카와 천황의 군대가 스토쿠 상황의 군대를 패배시키면서 고시라카와는 퇴위 후에도 상황(上皇)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7] 고시라카와는 1158년부터 니조 천황(二条天皇), 로쿠조 천황(六条天皇), 타카쿠라 천황(高倉天皇), 안토쿠 천황(安徳天皇),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 등 다섯 천황의 재위 기간 동안 1192년 사망할 때까지 인세이(院政)를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한편, 스토쿠 상황은 시코쿠(四国)의 사누키 국(讃岐国)으로 유배되었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는 전투 중 사망했으며,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와 타이라노 타다마사(平忠正)는 처형되었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는 아버지 타메요시의 죽음 이후 겐지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는 헤이시 가문의 수장으로서 각각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7]4. 3. 셋칸케의 몰락과 무가 정치의 시작
섭관가(摂関家)는 호겐의 난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40] 그들은 영지(所領)와 인사에 대한 결정권을 천황에게 빼앗겨 자립성을 잃고,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하였다.[40] 이 난은 궁정 내의 대립을 무력으로 해결하고, 수백 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사건으로, 실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중세 시대의 도래를 보여주었다. 지엔(慈円)은 『구관초(愚管抄)』에서 이 난을 "무사의 시대"의 시작이자, 역사의 전환점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후지와라 셋칸케의 몰락과 무가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는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와 타이라노 타다마사(平忠正)는 처형되었다.[7]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는 아버지의 죽음 후 미나모토 씨의 당주가 되었고,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와 함께 두 무사 가문을 교토(京都)의 새로운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7]
섭관가의 사실상 총수였던 후지와라노 다다자네(藤原忠実)가 관리하는 영지는 막대하여 몰수될 경우 섭관가의 재정 기반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자, 아들 후지와라노 다다미치(藤原忠通)는 아버지의 사면을 청원했다. 그러나 조정은 다다자네를 반역 주모자로 인식하고 그의 영지를 몰수하려 했다.[40] 다다미치는 결국 우지(宇治)의 영지와 평등원(平等院)을 포함한 섭관가 영지를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장의 자리를 수락해야만 했다.[40][41]
난 이후, 다다미치는 관백(関白) 지위는 유지했지만, 후지와라 노 요리타다(藤原信頼)와의 소요 사건에서 책임을 지고 폐문(閉門) 처분을 받는 등[43] 정치 중추에서 멀어졌다.
5. 참여자 목록
5. 1. 천황 측 (고시라카와 천황)
고시라카와 천황 측에는 귀족과 무사가 참여했다.귀족으로는 후지와라 다다미치, 고시라카와 천황의 젖모이 남편 신제이, 도쿠다이지 사네요시 등이 있었다.
무사로는 다이라 기요모리, 미나모토 요시토모, 미나모토 요시야스, 미나모토 요리마사 등이 있었다. 다이라 기요모리는 안게슈(安芸守)로 이세 헤이시 마사히라류 였으며, 미나모토 요시토모는 시모쓰케슈(下野守)로 가와치 겐지였다. 미나모토 요시야스는 우에몬조(右衛門尉)로 아시카가씨의 조상이었고, 미나모토 요리마사는 효고노카미(兵庫頭)로 셋쓰 겐지였다.
기요모리 군에는 그의 장남 다이라 시게모리, 차남 다이라 모토모리를 비롯하여 여러 무사들이 참여했다. 요시토모 군에는 그의 젖형제 가마타 마사키요를 비롯하여, 사사키 히데요시 등 여러 무사들이 있었다.
5. 2. 상황 측 (스토쿠 상황)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좌대신이자 시장자였으며, 전 내람이었다. 후지와라노 노리나가는 좌경대부로 스토쿠 상황의 측근이었다. 후지와라노 사네키요(藤原実清)는 우마권두로 스토쿠 상황의 측근이었으며, 한원류였다. 미나모토노 다메요시는 전 대부위였으며,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동생이다. 다이라노 다다마사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숙부이다.6. 후일담
고시라카와 천황은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고자 보겐신제(保元新制)를 발령하고, 석청수하치만궁(石清水八幡宮)에 난의 승리를 보고하는 선명(宣命)을 작성하였다. 이 선명은 난의 책임을 스토쿠 상황황제(崇徳上皇)와 요리나가에게 돌리고, 요리나가의 죽음을 신벌(神罰)로, 상황의 유배와 관련자 처벌은 법에 따른 정당한 조치였다고 선언하는 등 천황 측의 승리를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안겐(安元) 연간(1175년~1177년)에 켄슌몬인(建春門院), 다카마쓰인(高松院), 다카쿠라인(高倉院), 구조인(九条院) 등 고시라카와 및 다다미치와 가까운 인물들이 잇따라 사망하고, 1177년에는 엔랴쿠지(延暦寺)의 강소(强訴), 안겐의 큰 불, 시카가야의 음모 등 큰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호겐의 난의 원령에 의한 것이라 여겨 두려워했다.
이에 1177년 7월 29일, 고시라카와 천황은 보겐의 선명을 파기하고, "사누키인(讃岐院)"을 "스토쿠인(崇徳院)"으로 고쳐 부르도록 명하고, 요리나가에게는 정1위(正一位) 태정대신(太政大臣)을 추증했다. 이는 호겐의 난이 끝난 지 약 20년 만의 일이었다.
호겐의 난의 결과는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 사이에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여 1159년 헤이지의 난으로 이어졌다.[8] 가마쿠라 시대의 서사시 『호겐모노가타리(保元物語)』는 호겐의 난에 참여한 무사들의 활약상을 다루며,[5] 『헤이지모노가타리(平治物語)』,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와 함께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 무사 가문의 흥망성쇠를 묘사한다.[9]
참조
[1]
서적
The Tale of the Heike
[2]
문서
Hōgen Rebellion
[3]
서적
Jinnō Shōtōki
[4]
서적
Seeds in the Heart
[5]
서적
[6]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Inc.
[7]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8]
문서
Heiji Rebellion
[9]
서적
The Tale of the Heike
[10]
서적
愚管抄
[11]
서적
長秋記
1110-10-10
[12]
논문
懐妊の身体と王権-平安貴族社会を中心に-
臨川書店
[13]
문서
[14]
서적
中世王権の形成と摂関家
吉川弘文館
[15]
논문
中世前期の摂関家と天皇
吉川弘文館
[16]
서적
山槐記
1166-12-04
[17]
서적
東京大学出版会
[18]
문서
[19]
논문
白河・鳥羽院政期における京都の軍事警察制度-院権力と軍事動員-
[20]
서적
兵範記
1156-07-05
[21]
문서
[22]
문서
[23]
서적
兵範記
1156-07-02
[24]
서적
兵範記
1156-07-06
[25]
문서
[26]
서적
兵範記
1156-07-08
[27]
문서
[28]
문서
[29]
서적
兵範記
1156-07-10
[30]
서적
兵範記
1156-07-10
[31]
문서
[32]
문서
[33]
서적
吾妻鏡
1191-08-01
[34]
문서
[35]
문서
[36]
문서
平清盛に比べて恩賞が少なかったことに不満を抱いた源義朝が後に平治の乱に加担することになったとされているが、これについては現任の官位(従五位下下野守)と比較すれば明らかに昇進しており、かつ河内源氏で初めて内昇殿が認められた義朝は厚遇された恩賞を受けていたとする元木泰雄の説と、この時代には謀叛の鎮圧の功績に対する恩賞の基準が既に確立されており、その基準に当てはめると明らかに低いもので冷遇された恩賞であったとする古澤直人の説がある(→[[平治の乱#保元の乱における源義朝への恩賞と平治の乱の関係を巡る説|平治の乱]])。
[37]
서적
今鏡の研究
桜楓社
1980
[38]
간행물
兵範記
7월 21일
[39]
간행물
兵範記
7월 15일
[40]
간행물
兵範記
7월 17일
[41]
논문
藤氏長者宣旨の再検討
吉川弘文館
2011
[42]
서적
河内源氏 頼朝を生んだ武士本流
中公新書
2011
[43]
간행물
兵範記
8월 4일
[44]
논문
院政期の近衛官人と武士の関係--平実俊を通して
2010
[45]
서적
源氏と坂東武士
吉川弘文館
2007
[46]
문서
『고지단』(古事談)에는 부자 대립의 원인으로 스토쿠 천황이 시라카와 법황(白河法皇)의 아들로 도바 법황이 스토쿠 천황을 「숙부 아들」(叔父子)이라 부르며 미워하였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일화에 대해서는 사실이라는 설(角田文衛)과 소문일 뿐이라는 부정설(美川圭・河内祥輔)이 있다. 또한 도바 법황과 스토쿠 천황의 정치적 대립의 존재를 지적하는 연구(元木泰雄 ・ 安原功 ・ 下郡剛 ・ 佐伯智広 등)도 있다. 한편으로 후지와라노 쇼시의 입궐은 시라카와 법황이 도바 천황과 자신 사이의 연락역을 기대했기 때문으로 법황과 쇼시의 관계도 『고지단』이 전하는 남녀관계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로써의 결합이 강한 것으로 쇼시의 양아버지였던 시라카와 법황이야말로 스토쿠 천황의 외할아버지였다는 지적(樋口健太郎)도 있다.
[47]
문서
통설에는 다다미치가 요리나가와의 약속을 깬 것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역사학자 히구치 겐타로(樋口健太郎)는 본래 다다미치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면 요리나가는 그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의 「중개」가 될 예정이었고 시라카와인의 인세이 시기 실각해 있던 다다자네가 복권하고 요리나가의 후견인이 되었기 때문에 다다미치 ・ 요리나가의 관계가 미묘해졌으며(셋칸케 가정직원들도 다다자네 ー 요리나가파와 다다자네파로 분열되었다) 거기다 다다미치에게 아들 모토자네가 태어난 것에 위기감을 느낀 다다자네・요리나가가 요리나가의 아들 가네나가(兼長)를 다다미치의 양자로 맞게 해서 셋칸케를 다다미치 ー 요리나가 ー 가네나가 순으로 잇게 해서 다다미치의 자녀를 셋칸케 계승에서 배제하고 모토자네는 다카쿠라인의 양자로 삼아 그 소유 영지를 잇게 하려고 하였으며 다다자네 ・ 요리나가로부터 약속 파기(모토자네의 폐적)을 강요당한 다다미치와 그를 지지하던 가정직원들은 이에 반발해서 다다자네 ・ 요리나가 부자와 대립하게 된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樋口健太郎『中世王権の形成と摂関家』(吉川弘文館、2018年) ISBN 978-4-642-02948-3 、第Ⅱ部第一章・第三章・第Ⅲ部第一章 각 논문 참조)
[48]
논문
中世前期の摂関家と天皇
吉川弘文館
2014
[49]
간행물
山槐記
에이로쿠永暦 원년 12월 4일
[50]
논문
鳥羽院政期の王家と皇位継承
東京大学出版会
2012
[51]
논문
白河・鳥羽院政期における京都の軍事警察制度-院権力と軍事動員-
2002
[52]
문서
고노에 천황이 붕어했을 때와 똑같은 경비진들이었는데 이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는 설(河内祥輔)、동원 규모가 큰 다카마쓰도노도 경비 대상이었기 때문에、도바인이 사망한 뒤에 스토쿠 상황이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가 병사를 일으킬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설(元木泰雄)이 있다.
[53]
문서
다만 고시라카와 천황도 스토쿠 상황처럼 도바 법황의 병문안에 갈 수 없었고, 스토쿠 상황만이 도바 법황의 임종을 참관하는 자리에 거절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가와치 쇼스케(河内祥輔)의 지적이 있다.
[54]
간행물
効範記
7월 2일
[55]
문서
한편 배후에서 계획한 것은 요리나가와 대립하고 있던 다다미치였다는 가와치 쇼스케의 설도 있으나, 아무리 요리나가를 제거하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자신이 속한 후지와라 셋칸케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우지쵸자의 모반인 인정」이라는 처치까지 행하려 들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한편 신제이는 낮은 신분으로 출세해서 사형 부활이나 지샤(寺社) 통제를 단행하는 등 전통이나 권위에 구애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셋칸케에 대해서도 외경하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을 넘어서고 쓰러뜨려야 할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56]
간행물
구간쇼
[57]
간행물
호겐 이야기
[58]
문서
가와치 쇼스케는 합전 그 자체에 대해, 야마다 구니카즈(山田邦和)는 야간기습이라는 전술에 대한 신중함을 주장했을 뿐 군사행동 자체에는 적극적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야마다는 야간기습에 수반되는 방화에 대해 홋쇼지(法勝寺) 등으로 불이 옮겨 붙을 경우 귀족 사회 내부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라는 위기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59]
문서
히가시산조도노로 고쿄(皇居)를 옮긴 것에 대해서 다카마쓰도노가 좁아서 군사 거점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셋칸케의 굴복을 보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과거 구스코의 변(薬子の変) ・ 조와의 변(承和の変)의 선례에 따랐다는 등의 설이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60]
간행물
아즈마카가미
1191-08-01
[61]
간행물
호겐 이야기
[62]
문서
역사학자 야마다 구니카즈(山田邦和)는 스토쿠 상황이 다이리가 있던 다카마쓰도노 주변, 요리나가도 헤이안쿄(平安京)를 가로질러 눈에 띄기 쉬운 경로를 따라 도망쳤는데 잔적 소탕을 지휘했던 요시토모가 이를 고려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실수 정도의 레벨로는 보기 어렵다」며 요시토모를 「10여 기 정도의 사사(私事, 무사들 간의 개인적인 전투)」 같은 작은 싸움에나 능했을 뿐인 무능력한 인물로 혹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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