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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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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구스트 마케는 독일의 화가로, 1887년 독일 메셰데에서 태어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샹파뉴 전선에서 사망했다. 그는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란츠 마르크를 통해 청기사파에 참여했다. 마케는 로베르 들로네의 오르피즘에도 영향을 받아 색채 큐비즘을 시도했으며, 튀니지 여행을 통해 광채주의적 접근 방식을 구축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파란 모자를 쓴 화가의 아내', '터키 카페', '말을 탄 인디언' 등이 있으며, 사후 그의 작품들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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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마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우구스트 마케, 1906년, 유화
자화상, 1906년, 유화
본명아우구스트 마케
출생1887년 1월 3일
출생지메셰데, 독일 제국
사망1914년 9월 26일 (27세)
사망지프랑스 샹파뉴, 페르트레뤼를 근처
묘지수앵페르트레뤼를, 독일 군인 묘지
국적독일
아우구스트 마케 서명
예술 활동
분야회화
사조표현주의
영향볼프강 마케
발터 마케
대표 작품회화 목록

2. 생애

''칸덴의 거리와 교회'', 1911


아우구스트 로베르트 루트비히 마케는 1887년 1월 3일 독일 메셰데 베스트팔렌에서 건축업자이자 아마추어 예술가였던 아버지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헤르만 마케(1845–1904)와 베스트팔렌 자우어란트 지역의 농가 출신인 어머니 마리아 플로렌틴 아돌프(1848–1922)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마케가 태어난 직후 가족은 쾰른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마케는 크로이츠김나지움에서 1897년부터 1900년까지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 예술가가 된 한스 투아와 친구가 되었다.

1900년, 마케가 13세였을 때 가족은 으로 이사했고, 마케는 레알김나지움에서 공부하며 발터 게르하르트와 그의 누이인 엘리자베스와 친구가 되었으며, 몇 년 후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소년 시절 마케에게 깊은 인상을 준 첫 번째 예술 작품은 아버지의 그림, 친구 투아의 아버지에 의해 수집된 일본 판화, 그리고 1900년 바젤을 방문했을 때 본 아르놀트 뵈클린의 작품이었다.

1904년 마케의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 해 마케는 아돌프 묀헨의 지도 아래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06년까지 수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리츠 헬무트 엠케의 야간 수업을 들었고(1905), 뒤셀도르프 극장에서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북부 이탈리아(1905)와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1906)을 방문했다. 이후 1907년에는 미술 수집가 베른하르트 쾨러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파리에 체류하며 폴 세잔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쾨러는 훗날 마케의 아내가 된 엘리자베스의 삼촌이었다. 파리 체류 후 베를린으로 옮겨 독일 인상주의 화가인 로비스 코린트의 아틀리에에서 몇 달 동안 수학했다.

아우구스트 마케는 1907년 파리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베를린에서 로비스 코린트의 작업실에서 몇 달을 보냈다. 그의 스타일은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를 거쳐 야수파 시기를 거쳤다.[2] 1909년에는 엘리자베스 게르하르트와 결혼했다.[2] 1910년, 프란츠 마르크와의 친분으로 바실리 칸딘스키를 만나 청기사파의 비대상적 미학, 신비주의적이고 상징적인 관심사를 공유했다.[2]

''로코코''(Rokoko), 1912년, 캔버스에 유채, 89 x 89 cm, 노르웨이 국립 미술 건축 디자인 박물관


''줄타기 광대''(Tightrope walker), 1913년


튀르키셰스 카페(Türkisches Café)


1912년 파리에서 로베르 들로네를 만난것은 마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고 칭한 들로네의 색채 큐비즘은 그 시점부터 마케의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상점 창문''은 들로네의 ''창문''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으로, 이탈리아 미래주의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의 동시성을 결합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2]

1914년 4월 파울 클레, 루이 모일리에와 함께 튀니지를 여행하였고, 이국적인 분위기는 그가 마지막 시기에 구축한 광채주의적 접근 방식의 근본이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그의 유명한 그림 ''튀르키셰스 카페''(Türkisches Café)와 같은 걸작으로 여겨지는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2] 아우구스트 마케의 작품은 표현주의 (1905년에서 1925년 사이의 독일 표현주의의 번성기)로 간주될 수 있으며, 야수파의 일부로도 간주될 수 있다.[2] 이 그림들은 객관적인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감정과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주로 집중하며, 일반적으로 색상과 형태를 왜곡한다.[2]

마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9월 26일 프랑스 샹파뉴 전선에서 사망하여, 수아-페르트-레-위를뤼스의 독일 군사 묘지에 묻혔다.[2] 그의 마지막 그림 ''작별''(Farewell)은 전쟁 발발 이후 짙어진 암울한 분위기를 묘사한다.[2]

마케는 1904년부터 2년 정도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07년에는 미술 수집가 베른하르트 쾨러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파리에 체류하며 특히 폴 세잔의 작품을 접하며 영향을 받았다. 파리 체류 후 베를린으로 옮겨 독일 인상주의 화가인 로비스 코린트 (1858 - 1925)의 아틀리에에 몇 달 동안 다녔다.

1910년, '청기사'의 주요 멤버 중 한 명인 프란츠 마르크를 만났다. '청기사'(데어 블라우에 라이터/Der Blaue Reiter)는 러시아 출신 화가이자 추상 회화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바실리 칸딘스키와 뮌헨 출신인 프란츠 마르크를 중심으로 뮌헨에서 활동한 전위 화가 그룹이다. 마케는 1910년, 뮌헨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 중이던 마르크를 만나고, 이듬해에는 마르크가 살고 있던 진델스도르프에 머물렀다. 또한, 191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클레와 들로네를 알게 되었다.

마케는 1911년과 1912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청기사'전 외에도 1912년 5월 존더분트전(쾰른에서 개최된 현대 미술전), 같은 해 3월 베를린 신분리파전, 1913년 9월 최초의 독일 가을 전시회(베를린) 등의 중요한 전시회에 잇따라 출품했다.

1914년 4월, 마케는 파울 클레, 루이 모일리에와 함께 튀니지를 여행했다.[2] 튀니스, 하마메트, 카이루안 등지를 방문한 이 여행은 약 2주간 진행되었는데, 튀니지의 풍경과 색채는 마케에게 강한 영감을 주어 ''튀르키셰스 카페''(Türkisches Café)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남기게 했다.[2] 이 시기 마케는 광채주의적 접근 방식을 구축해 나갔다.[2]

튀니지에서 돌아온 마케는 새로운 화풍을 모색했으나, 같은 해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2] 마케는 전쟁에 참전하여 그해 9월 26일 샹파뉴 전선에서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2] 그의 마지막 작품인 ''작별''(Farewell)은 전쟁의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2] 마케는 수아-페르트-레-위를뤼스의 독일 군사 묘지에 묻혔다.[2]

thumb 시립 미술관]]

2. 1. 초기 생애 (1887-1906)

아우구스트 로베르트 루트비히 마케는 1887년 1월 3일 독일 메셰데 베스트팔렌에서 건축업자이자 아마추어 예술가였던 아버지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헤르만 마케(1845–1904)와 베스트팔렌 자우어란트 지역의 농가 출신인 어머니 마리아 플로렌틴 아돌프(1848–1922)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마케가 태어난 직후 가족은 쾰른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마케는 크로이츠김나지움에서 1897년부터 1900년까지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 예술가가 된 한스 투아와 친구가 되었다.

1900년, 마케가 13세였을 때 가족은 으로 이사했고, 마케는 레알김나지움에서 공부하며 발터 게르하르트와 그의 누이인 엘리자베스와 친구가 되었으며, 몇 년 후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소년 시절 마케에게 깊은 인상을 준 첫 번째 예술 작품은 아버지의 그림, 친구 투아의 아버지에 의해 수집된 일본 판화, 그리고 1900년 바젤을 방문했을 때 본 아르놀트 뵈클린의 작품이었다.

1904년 마케의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 해 마케는 아돌프 묀헨의 지도 아래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06년까지 수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리츠 헬무트 엠케의 야간 수업을 들었고(1905), 뒤셀도르프 극장에서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북부 이탈리아(1905)와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1906)을 방문했다. 이후 1907년에는 미술 수집가 베른하르트 쾨러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파리에 체류하며 폴 세잔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쾨러는 훗날 마케의 아내가 된 엘리자베스의 삼촌이었다. 파리 체류 후 베를린으로 옮겨 독일 인상주의 화가인 로비스 코린트의 아틀리에에서 몇 달 동안 수학했다.

2. 2. 예술적 성장과 청기사파 활동 (1907-1914)

아우구스트 마케는 1907년 파리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베를린에서 로비스 코린트의 작업실에서 몇 달을 보냈다. 그의 스타일은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를 거쳐 야수파 시기를 거쳤다.[2] 1909년에는 엘리자베스 게르하르트와 결혼했다.[2] 1910년, 프란츠 마르크와의 친분으로 바실리 칸딘스키를 만나 청기사파의 비대상적 미학, 신비주의적이고 상징적인 관심사를 공유했다.[2]

1912년 파리에서 로베르 들로네를 만난것은 마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고 칭한 들로네의 색채 큐비즘은 그 시점부터 마케의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상점 창문''은 들로네의 ''창문''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으로, 이탈리아 미래주의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의 동시성을 결합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2]

1914년 4월 파울 클레, 루이 모일리에와 함께 튀니지를 여행하였고, 이국적인 분위기는 그가 마지막 시기에 구축한 광채주의적 접근 방식의 근본이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그의 유명한 그림 ''튀르키셰스 카페''(Türkisches Café)와 같은 걸작으로 여겨지는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2] 아우구스트 마케의 작품은 표현주의 (1905년에서 1925년 사이의 독일 표현주의의 번성기)로 간주될 수 있으며, 야수파의 일부로도 간주될 수 있다.[2] 이 그림들은 객관적인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감정과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주로 집중하며, 일반적으로 색상과 형태를 왜곡한다.[2]

마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9월 26일 프랑스 샹파뉴 전선에서 사망하여, 수아-페르트-레-위를뤼스의 독일 군사 묘지에 묻혔다.[2] 그의 마지막 그림 ''작별''(Farewell)은 전쟁 발발 이후 짙어진 암울한 분위기를 묘사한다.[2]

마케는 1904년부터 2년 정도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07년에는 미술 수집가 베른하르트 쾨러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파리에 체류하며 특히 폴 세잔의 작품을 접하며 영향을 받았다. 파리 체류 후 베를린으로 옮겨 독일 인상주의 화가인 로비스 코린트 (1858 - 1925)의 아틀리에에 몇 달 동안 다녔다.

1910년, '청기사'의 주요 멤버 중 한 명인 프란츠 마르크를 만났다. '청기사'(데어 블라우에 라이터/Der Blaue Reiter)는 러시아 출신 화가이자 추상 회화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바실리 칸딘스키와 뮌헨 출신인 프란츠 마르크를 중심으로 뮌헨에서 활동한 전위 화가 그룹이다. 마케는 1910년, 뮌헨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 중이던 마르크를 만나고, 이듬해에는 마르크가 살고 있던 진델스도르프에 머물렀다. 또한, 191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클레와 들로네를 알게 되었다.

마케는 1911년과 1912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청기사'전 외에도 1912년 5월 존더분트전(쾰른에서 개최된 현대 미술전), 같은 해 3월 베를린 신분리파전, 1913년 9월 최초의 독일 가을 전시회(베를린) 등의 중요한 전시회에 잇따라 출품했다.

2. 3. 튀니지 여행과 전사 (1914)

1914년 4월, 마케는 파울 클레, 루이 모일리에와 함께 튀니지를 여행했다.[2] 튀니스, 하마메트, 카이루안 등지를 방문한 이 여행은 약 2주간 진행되었는데, 튀니지의 풍경과 색채는 마케에게 강한 영감을 주어 ''튀르키셰스 카페''(Türkisches Café)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남기게 했다.[2] 이 시기 마케는 광채주의적 접근 방식을 구축해 나갔다.[2]

튀니지에서 돌아온 마케는 새로운 화풍을 모색했으나, 같은 해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2] 마케는 전쟁에 참전하여 그해 9월 26일 샹파뉴 전선에서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2] 그의 마지막 작품인 ''작별''(Farewell)은 전쟁의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2] 마케는 수아-페르트-레-위를뤼스의 독일 군사 묘지에 묻혔다.[2]

thumb 시립 미술관]]

3. 작품 세계

마케는 "청기사"의 멤버였기 때문에, 독일 표현주의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의 회화에는 다른 표현주의 화가에게서 보이는 정치적·사상적인 주장이나 격한 감정을 쏟아내는 듯한 색채 감각은 보이지 않는다. 마케의 회화는 오히려, 큐비즘과 들로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세잔과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지적인 화면 구성, 단순화된 형태, 그리고 들로네의 영향을 받은 선명한 색채에 그 특징이 있다. 마케의 작품 중, 순수한 추상 회화는 실험적으로 제작한 몇 점을 볼 수 있을 뿐이며, 기본적으로 구상 화가로서, 야외를 산책하는 인물 등 일상적인 소재를 즐겨 다루었다. 인물이나 나무 등의 형태는 단순화되어 있지만, 큐비즘의 형태만큼 해체되어 있지는 않으며, 현실감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독특한 색채 사용은, 자연의 색채 재현에서 벗어나, 회화 고유의 표현을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케는 1914년(사망 연도)의 튀니지 여행에서 많은 수채화를 남겼으며, 수채화가로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3. 1. 주요 작품

아우구스트 마케의 주요 작품으로는 ''파란 모자를 쓴 화가의 아내''(1909), ''테게른제(Tegernsee)의 슈타우다허 하우스''(1910), 게르마니셰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테게른제 풍경(1910), ''독서하는 남자가 있는 테게른제 풍경''(1910) 등이 있다. 본 미술관에 소장된 ''집과 굴뚝이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 (본)''(1911), 루트비히 미술관의 ''채소밭''(1911), 슈테델 미술관의 어린 발터의 장난감(1912)도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1913년 작품으로는 슈테델 예술 대학의 두 소녀, ''푸른 호숫가의 사람들'', ''산책길'', 루트비히 미술관의 ''녹색 재킷을 입은 여성''이 있다. 1914년에는 수채화 ''골목길 풍경'', 뮌스터 베스트팔렌 주립 미술 및 문화사 박물관에 소장된 수채화 ''카이루안 (III)'', ''모자 가게 III'', ''공원의 붉은 집''을 제작했다.

뮌헨 렌바흐하우스 시립 미술관에는 ''베른하르트 쾨러의 초상''(1910), ''터키 카페''(1914), ''말을 탄 인디언''(1911)이 소장되어 있다.

4. 사후 영향 및 평가

199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마케의 《정원 테이블의 커플》(1914년)은 200만 파운드에 판매되었다.[3] 《튀니스 시장》(1914년)은 2000년에 286만 파운드(410만 달러)에 판매되었다.[4] 에른스트 바일러의 유산에서 위탁된 마케의 《바자르에서》(1914년)는 201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396만 파운드에 경매되었는데, 이는 당시 최고 추정치의 4.5배에 달했다.[5]

2007년, 베를린 경매 회사 빌라 그리제바흐는 마케의 《풍경 속 앵무새를 든 여인》을 240만 유로에 판매하여 작가의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 그림은 1937년 '퇴폐 미술'로 압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6] 2008년 마케 작품 목록에는 구를리트가 출처로 언급되었다.[6]

4. 1. 아우구스트 마케 상

아우구스트 마케 상은 독일 화가 아우구스트 마케의 출생지인 아른스베르크, 브리론, 올페, 그리고 메셰데 지역에서 1959년에 처음 수여되었다.

4. 2. 아우구스트 마케 하우스

아우구스트 마케 하우스는 1991년에 설립된 아우구스트 마케를 기리는 미술관이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마케가 거주했던 의 그의 옛 집에 위치해 있다.

4. 3. 미술 시장

199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마케의 《정원 테이블의 커플》(1914년)은 200만 파운드에 판매되었다.[3] 《튀니스 시장》(1914년)은 2000년에 286만 파운드(410만 달러)에 판매되었다.[4] 에른스트 바일러의 유산에서 위탁된 마케의 《바자르에서》(1914년)는 201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396만 파운드에 경매되었는데, 이는 당시 최고 추정치의 4.5배에 달했다.[5]

2007년, 베를린 경매 회사 빌라 그리제바흐는 마케의 《풍경 속 앵무새를 든 여인》을 240만 유로에 판매하여 작가의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 그림은 1937년 '퇴폐 미술'로 압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6] 2008년 마케 작품 목록에는 구를리트가 출처로 언급되었다.[6]

참조

[1] 웹사이트 August Macke – The Complete Works – Biography http://www.augustmac[...] 2019-06-22
[2] 웹사이트 Biography http://www.august-ma[...]
[3] 뉴스 Great Substitution Game Generates High Stakes and Huge Profits https://www.nytimes.[...] 2019-06-22
[4] 뉴스 Brokerages May Alter the Art Game : Earthquakes in the Auction World https://www.nytimes.[...] 2019-06-22
[5] 뉴스 Christie's Sale Soars, Driven by Beyeler Estate https://www.nytimes.[...] 2019-06-22
[6] 뉴스 Münchner Kunstfund: August Macke aus Gurlitt-Nachlass bei Grisebach versteigert https://www.zeit.de/[...]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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