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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카이 후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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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유카이 후사노신은 1864년 현재의 미야기현 게센누마시에서 태어난 인물로,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를 전공하고 미야기현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1894년 조선으로 건너가 교육자로 활동했으며, 러일 전쟁 공로로 훈6등을 수여받고 조선총독부 박물관 협의원,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을 지냈다. 1931년 대표 저서인 『잡고』를 출판했고, 1942년 조선 문화 공로상을 받았으나, 1895년 을미사변에 가담한 사실이 비판받는다. 그는 언어학적, 민속학적 연구를 수행했으며, 1946년 귀국 도중 하카타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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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카이 후사노신
기본 정보
출생일1864년 2월 11일
출생지일본 미야기현게센누마시
사망일1946년 2월 24일
주요 관심사동양사, 언어학
모교도쿄외국어학교
직장조선총독부 박물관

2. 생애

아유카이 후사노신은 1864년 센다이 번의 다테 가문 어일가 필두인 아유카이 가문에서 태어나,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던 중 하카타에서 중풍으로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시기주요 내용
1864년미야기현게센누마시에서 출생[1]
1878년센다이 현립 사범학교 졸업
1884년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 입학
1890년미야기현 의회의원 당선 (1기)
1894년조선 서울(당시 경성) 5개 사립 초등학교 설립 책임자
1895년 10월 8일을미사변 가담, 명성황후 시해[1]
1906년러일 전쟁 공로로 훈6등 수여
1916년조선총독부박물관 협의원
1931년『잡고』 출판 시작
1933년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
1942년조선총독부 조선 문화 공로상 수상
1946년하카타에서 중풍으로 사망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1864년 센다이 번다테 가문 어일가 필두 아유카이 가문에서 아유카이 타로헤이 모리후사의 셋째 아들로 현재의 미야기현게센누마시에서 태어났다.[1] 1878년 센다이현립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884년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에 입학했다.

2. 2. 관료 및 교육자 생활

1890년 미야기현 의회의원에 당선되어 1기만 활동했다.[1] 1894년 조선으로 건너가 서울(당시 경성)에 있는 5개의 사립 초등학교 설립 책임자가 되었다.[1] 이 무렵, 아유카이가 근무했던 일본인 학교 을미의숙의 동료로는 시인 요사노 텟칸이 있다.[1]

2. 3. 을미사변 가담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에 가담하여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 가담한 자 중 한 명이다.[1]

2. 4. 일제 강점기 활동

1906년 러일 전쟁에서의 공로로 훈6등을 받았다.[1] 191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 협의원이 되었다.[1] 1931년 대표적 저작인 『잡고』 출판을 시작했다.[1] 1933년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이 되었다.[1] 19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 문화 공로상을 받았다.[1]

2. 5. 사망

1945년 광복으로 일본으로 귀국하던 중 하카타에서 중풍으로 82세에 사망했다.[1]

3. 가족


  • 장남은 초대 게센누마정 정장 아유카이 모리노리이다.
  • 차남은 아사카사를 창업한 시인 오치아이 나오부미이다.

4. 연구 업적

아유카이 후사노신은 언어학적 방법으로 고대 조선의 지명, 왕호 등을 연구하고, 민속학적인 연구에도 힘썼다. 그의 연구는 잡고 9집으로 묶여 현재까지도 중요한 선행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조선 시대의 금서였던 『정감록』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교토 하타씨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파단"(하다) 설을 주장했다. 1986년 대한민국 경상북도에서 발견된 신라 고비에 "파단"이라는 고지명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어, 그의 학설이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교토 대학 명예 교수인 우에다 마사아키는 현지를 방문하여 아유카이의 학설을 지지했다.

4. 1. 주요 저서


제목
제1집신라 왕위호 및 추봉 왕호에 관하여
제2집 상권·하권일본의 한(韓)·신라·임나·백제·고려·한(漢)·진(秦) 등의 고훈에 관하여
제3집속자고 부속훈자·속음자
제4집화랑고
제5집(내용 미상)
제6집 상편·하편속문고 부서 연월일 예
제7집 상권일본서기 조선 지명고
제7집 하권일본서기 조선 지명고 속
제8집성씨고 및 족제고
제9집노비고


  • 1971년: 『잡고 일본서기 조선 지명고』, 국서간행회
  • 1972년: 『잡고 신라왕호고 조선국명고』, 국서간행회
  • 1972년: 『잡고 속자고·속문고·차자고』, 국서간행회
  • 1973년: 『잡고 성씨고 및 족제고·시전고』, 국서간행회
  • 1973년: 『잡고 화랑고·백정고·노비고』, 국서간행회
  • 1987년: 『일본서기 조선 지명고』, 국서간행회
  • 1987년: 『조선 국명고』, 국서간행회
  • 1987년: 『조선 성씨·족제고』, 국서간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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