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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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미사변은 1895년 일본이 조선의 명성황후를 암살한 사건이다. 일본의 강제 개항 이후 열강의 각축장이 된 조선에서, 친러 정책을 추진하던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발생했다. 흥선대원군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등이 명성황후 암살을 계획하고, 일본 낭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침입,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일본의 조선 지배 전략에 차질을 빚게 했다. 이후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명성황후는 복권되었으며, 사건 관련자들은 처벌받거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을미사변은 한국의 반일 감정을 고조시키고, 대한제국 성립의 원인이 되었으며, 일본 측 관련자들은 영전하는 등 엇갈린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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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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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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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895년 10월 8일 |
장소 | 서울,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일대 |
결과 | 명성황후 시해 |
관련 사건 | 한반도 일본 통치의 서막 |
교전 세력 | |
교전 1 | 일본 제국 |
교전 1-1 | 일본 제국군 |
교전 1-2 | 친일 협력자 |
교전 2 | 조선 |
교전 2-1 | 조선군 |
지휘관 및 지도자 | |
일본 제국 | 미우라 고로 |
일본 제국-1 |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
일본 제국-2 |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
일본 제국-3 | 사세 쿠마테쓰(佐瀨熊鐵) |
일본 제국-4 |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
일본 제국-5 | 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 |
일본 제국-6 | 니이로 도키스케 |
일본 제국-7 |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
일본 제국-8 | 아다치 겐조 |
친일파 | 우범선 |
친일파-1 | 이두황 |
조선 | 고종 |
조선-1 | 명성황후 |
조선-2 | 홍계훈 |
조선-3 | 안경수 |
조선-4 | 이경직 |
조선-5 | 현흥택 |
조선-6 | 윌리엄 맥엔타이어 다이 |
병력 규모 | |
일본 측 | 일본 공사관 경비병 |
일본 측-1 | 훈련대: 1,000명 |
일본 측-2 | 낭인: 48명 |
조선 측 | 시위대: 300–400명 |
피해 규모 | |
기타 | 다수의 궁녀, 환관, 관리 사상 |
명칭 | |
한국어 | 을미사변 |
한자 | 乙未事變 |
로마자 표기 | Eulmi sabyeon |
영어 | Eulmi Incident |
일본어 | 언제비지헨 (いつびじへん) |
일본어(가타카나) | 울미사비옹 (ウルミサビョン) |
관련 정보 | |
원인 | 명성황후의 조선 침략 방해 |
2. 명칭
명성황후 암살 사건(明成皇后暗殺事件), 명성황후 시해 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으로도 불리며,[87][88] 당시에는 을미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으로 불렸다.[89] 일본 작전명은 여우사냥(狐狩り|기쓰네가리일본어)이다.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려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김홍집 등의 친일 내각이 득세하였고, 1894년 7월에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며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37]
3. 역사적 배경
사건의 배경에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 투쟁, 개화파와 수구파의 노선 투쟁, 더 나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의 안보 문제, 일본과 청나라의 패권 다툼, 청일 전쟁 이후 일본과 러시아 제국의 패권 다툼이 있었다.
사건 직후 조선 국내 재판에서는 흥선대원군을 사건의 주모자로 하는 등, 조선 왕조 내 권력 투쟁으로 판결했다.[56]
3. 1. 조선과 열강의 각축
일본의 강제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 제국, 청나라, 러시아 제국, 미국 등 여러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조선 내 각 열강의 세력은 자주 변동했으며, 조선 정부 내에서도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90]
3. 2.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와 권력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명성황후는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남편 고종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44]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 당시 명성황후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37]
1894년 흥선대원군은 오토리 게이스케와 협력하여 명성황후와 측근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명성황후는 다시 영향력을 회복했다.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것에 불만을 품고 공덕리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칩거하고 있었으나,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대원군을 설득하여 명성황후 암살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103]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최고 지휘자로 지목했다.[104]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105]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였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으며, 대원군은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명성황후를 암살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105]
윤치호는 암살 협력자이자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108]
1896년 4월 15일 고등재판소 판사 권재형이 법부에 제출한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입궐하던 날 간사한 무리를 몰아낸다는 요지의 유시를 내렸다고 한다.[102] 《한국통사》에서는 대원군이 입궐하는 일본인들에게 “오늘의 일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이다.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흥선대원군이 황후 시해에 동의했는지 매우 의문이다.[99]
일본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서기관 스기무라가 4개조 약조문을 초안하고, 10월 6일 오카모토가 이를 가지고 공덕리에 가서 대원군의 서약을 받았다. 주된 내용은 대원군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99]
3. 3.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려 했다.[92]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3. 4. 명성황후의 반일 정책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37] 1895년 7월,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와 러시아 군대의 힘을 빌려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37]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삼국 간섭으로 인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되자,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37]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군사 고문 오카모토 류노스케 등은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쿠데타를 실행하기로 했다.[37]
4. 준비 과정
1895년 여름, 일본 정부는 주한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군인 출신 미우라 고로로 교체했다.[2] 미우라는 외교 경험이 전무했고, 이 자리를 세 번이나 거절할 정도로 부담스러워했지만, 결국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2]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인사에 의문을 제기했다.[2]
미우라는 명성황후를 대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고, 이로 인해 일본은 한국에서 약세에 놓였다.[2] 일부 학자들은 미우라가 공격적인 성향 때문에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입지를 훼손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암살 동기가 충분했다고 주장한다.[2] 미우라의 방일, 일본 영사 경찰 및 군대의 관여 등을 근거로 일본 정부 개입 가능성을 제기한다.[2] 반면, 오르바흐는 이노우에가 명성황후에게 보호를 약속했기에 암살에 망설였다고 주장한다.[4] 이자벨라 버드는 이 약속이 명성황후의 대비를 소홀하게 했다고 지적했다.[4]
미우라는 훗날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담배 세 모금에 결정한 문제"였다고 회고하며, 본국 정부는 걱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2]
4. 1.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계략
이노우에 가오루는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9000JPY에 상당하는 선물을 바치고, 조선 정부에 대한 차관 지급을 약속하며 환심을 샀다.[97] 고종은 이노우에의 진지한 태도에 경계를 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주장이 있다.[97]4. 2. 살해 계획과 준비
1895년 9월 1일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새 공사로 부임하면서 암살 계획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2] 10월 3일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미우라 고로는 세부 계획을 수립했다.[97] 이들은 '여우사냥'[99][101]이라는 암호명 아래, 겉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위장하려 했다.[100]이날 모의에는 공사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 공사관 무관이자 포병 중좌인 구스노세 유키히코가 참여했다.[99]
미우라 고로는 한성신보(Kanjō Shinpō|한성신보영어) 직원들과 낭인들을 동원하여 무기와 장비를 준비했다.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가 낭인 자객 동원을 맡았고, 구니토모 시게아키, 고바야가와 히데오, 히라야마 이와히코 등 한성신보 직원들과 규슈 출신 낭인 30여 명이 동원되었다.[100]
1895년 9월 19일경, 미우라는 아다치를 만났다. 아다치의 증언에 따르면, 미우라는 아다치에게 "여우 사냥"(狐狩り|label=none|고카리일본어)에 동원할 젊은 남자를 알고 있는지 완곡하게 물었고, 아다치는 열정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미우라가 계획을 공유했을 때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고 적었다. 아다치는 ''간조 신포'' 직원들이 본성적으로 온순하며, 음모에 다른 사람들을 더 모집하고 싶다고 경고했다. 미우라는 이를 거절하고, 비밀 유지를 위해 아다치에게 모든 직원을 동원할 것을 요청했다. 아다치는 이 과업을 위해 모든 ''간조 신포'' 직원과 다른 ''소시''들을 모집했다.
당초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이었으나, 훈련대 해산으로 인해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겨졌다.[99]
4. 3. 조선인 협력자들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최고 지휘자로 지목했다.[104] 그는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105]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유길준은 민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였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으며,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105] 그는 또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 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면서,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105][106][107]윤치호는 암살 협력자이자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108]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쓰카가 사건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주장했다.[108]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군 1대대장 우범선, 2대대장 이두황, 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 공사관 통역관 박선, 문신 구연수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 시신을 소각하는 것을 도왔다.
;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미수
1895년 7월 박영효는 별도로 왕비 암살을 계획했다. 고종은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여 한 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명성황후는 이를 분하게 여겨 점차 군권(軍權)을 회복하기 위해 러시아와 결탁했고, 박영효는 이를 우려하였다.[109]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박영효는 단독으로 계략을 세워 왕비 암살을 계획하였다.
박영효는 왕후의 권모와 계략을 두려워하여 암살을 감행하지 않으면 화근을 근절할 수 없다 생각하고, 1895년 7월 마침내 날짜를 잡아 계책을 정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근하다고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으나,[109] 유길준은 바로 박영효의 왕비 암살 계획을 임금에게 밀고했다. 박영효는 유길준에 의해 일이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바꿔 입고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을 빠져나와 용산에서 기선을 타고 도주하였다. 그의 일당 신응희, 이규완 등도 따라 도주하였다.[109]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음모를 폭로한 유길준은 그 무렵 따로 대원군과 이준용의 왕비 암살 모의에 가담한 상태였다.
5. 진행 과정
1895년 명성황후 시해를 위해 일본은 치밀하게 준비했다.[97]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일본공사 부부는 사건 한 달 전 일본에서 돌아온 뒤 왕궁을 방문, 조선 왕실의 안전을 약속하며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9천 원 상당의 선물을 바치고, 조선 정부에 대한 차관 지급을 결정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는 고종과 황후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주장이 있다.[97]
《매천야록》과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일본은 고무라(小村室)의 딸을 명성황후의 양녀로 삼게 하였는데, 그녀는 뒤에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궁중 연희(演戱) 때 배우 중 종왜(從倭, 일본을 따르는 사람)를 시켜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97]
1895년 9월 1일, 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미우라 고로 육군 중장이 새 공사로 부임한다.[98] 우익 군인 세력의 거두였던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 두문불출하고 불경을 외우며 '염불 공사', '수도승 같다'는 평을 들었는데, 이는 경계심을 풀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97]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10월 3일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세부 계획이 세워졌다. 미우라의 참모 시바 시로는 하버드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지식인으로, 조선 내 일본 극우 낭인 단체인 천우협과 현양사 일원들과 협의하며 미우라를 보좌했다. 일본 낭인들은 동경제국대학 출신 등 고급 지식인이 많아 고도로 의식화된 지식인 테러리스트였다는 주장도 있다.[97]
모의에는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 공사관 일등서기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호리구치 구마이치 영사관보, 구스노세 유키히코 공사관 무관(포병 중좌)이 참여했다. 기밀 유지를 위해 다른 직원들과 우치다 사다쓰치(内田 定侈搥) 일등영사는 제외되었다.[99]
당시 모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시해는 일본 낭인들이 맡고, 외관상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이 일은 갑오개혁 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했던 오카모토에게 맡겼다.
-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들로 구성한다. 낭인 자객 동원은 한성신보|en|Kanjō Shinpō일본어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았다. 구마모토와 후쿠오카 등 규슈 출신 낭인 30여 명과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사사키 마사유키, 기쿠치 겐조 등이 동원되었다.[100]
-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으로, 구스노세 유키히코 등이 황후 시해에 참여한다.
-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한다.[99]
미우라는 황후 시해 음모를 "여우사냥"[99][101]이라 불렀다. 훈련대가 일찍 해산되자 거사 일시를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겼으나,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떠난 때는 새벽 3시, 경복궁 도착은 새벽 5시가 넘어 명성황후 시해 시각은 6시 경이어서 많은 목격자들이 나타나게 된다.[99]
1896년 4월 15일 권재형 고등재판소 판사가 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입궐하던 날 간사한 무리를 몰아낸다는 유시를 내렸다.[102] 《한국통사》에서는 대원군이 입궐하는 일본인들에게 "오늘의 일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이다.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흥선대원군의 황후 시해 동의 여부는 매우 의문이다.[99]
일본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바라지 않아, 스기무라 서기관이 4개조 약조문을 초안하고 10월 6일(음력 8월 18일) 오카모토가 공덕리에서 대원군의 서약을 받았다. 주된 내용은 대원군의 정치 불참이었다.[99]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교동에 유폐된 후 불만을 품고 공덕리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칩거했으나, 오카모토가 찾아가 설득했다.[103]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최고 지휘자로 지목했다.[104] 유길준은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 혹평하고,[105] 개화당 살해 배후로 보았다. 유길준은 민비가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 1894년 가을 개화당 살해 계획을 꾸미다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해 일본인 도움을 얻어 명성황후를 죽이기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105] 유길준은 대원군의 일본 협력이 큰 실수였다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덧붙였다.[105][106][107]
윤치호는 암살 협력자이자 일본 낭인 지휘자 중 하나로 유길준을 지목했다.[108]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쓰카가 사건 전말 은폐를 위해 자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한다.[108]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 우범선·이두황·이진호 등 조선군 대대장, 이주회(李周會) 전 군부협판, 윤석우(尹錫禹)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박선 일본 공사관 통역관, 구연수 문신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의 민비 시신 소각을 도왔다.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미수
1895년 7월 박영효는 별도로 왕비 암살을 계획했다. 고종은 일본 견제와 군국기무처의 독단으로 단독 결정이 불가능했다. 명성황후는 군권(軍權) 회복을 위해 러시아와 결탁하려 했고, 박영효는 이를 우려했다.[109]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 급진개화파의 독단을 두려워해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박영효는 단독으로 왕비 암살을 계획했다.
박영효는 왕후의 권모술수를 두려워해 암살 없이는 화근을 근절할 수 없다 생각, 1895년 7월 날짜를 잡아 일본에 병력을 요청했다. 유길준이 자기와 친근하다 여겨 뜻을 알렸으나,[109] 유길준은 박영효의 왕비암살 계획을 임금에게 밀고했다. 박영효는 유길준에 의해 누설된 것을 알고 일본인 호위를 받아 용산에서 기선을 타고 도주했다. 신응희, 이규완 등도 따라 도주했다.[109]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음모를 폭로한 유길준은 그무렵 대원군과 이준용의 왕비 암살 모의에 가담한 상태였다.
5. 1. 궁궐 진입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군과 낭인, 그리고 조선인 협력자들은 경복궁을 기습 공격했다. 이들은 광화문, 춘생문(경복궁 동북문), 추성문(경복궁 서북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했다.[116]윌리엄 맥킨타이어 다이가 지휘하는 조선인 경비대 500여 명이 경복궁 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나, 일본 낭인들과 조선인 병력은 이들을 쉽게 격퇴했다. 많은 사상자를 낸 다이는 경비대를 이끌고 도망쳤고, 낭인들과 조선인 길 안내자들은 쉽게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116]
새벽 5시 무렵 흥선대원군 일행이 광화문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가 사다리를 이용해 담을 넘어 빗장을 풀었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과 조선인 근위대 병력이 경복궁을 향해 돌진했다.[116]
담을 넘은 일본인들은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했고,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 상의를 벗어 던지고 도망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광화문, 춘생문,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하여 궁궐 경비병과 총격전을 벌였다.[116]
근정전까지는 쉽게 들어갈 수 있었으나, 근정전을 지키는 병사들과의 총격전 끝에 근정전이 뚫려 건청궁까지 갈 수 있었다.
5. 2. 건청궁 진입과 명성황후 시해
흉도들은 건청궁에 진입하여 명성황후를 찾기 위해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폭행하며 처소를 물었다.[121] 궁녀들은 구타당하고 내던져졌음에도 신음조차 내지 않고 저항했다.[119] 건청궁 동쪽 곤녕합 옥호루에서 황후를 발견한 낭인들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황후를 보호하려 하자 그를 살해했다. 이경직은 두 팔을 벌려 황후 앞을 막아섰다가 권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낭인들이 칼로 그의 두 팔을 베고 허리를 베어 살해했다.[119]곤녕합에 진입한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은 궁녀와 상궁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왕후를 색출했다. 이들은 궁녀들 사이에 숨어 도망치던 명성황후를 쫓아가 마룻바닥에 넘어뜨린 뒤 발로 밟고 칼로 찔러 살해했다.[115][101] 황현의 기록에 따르면, 낭인들이 왕비의 정체를 확인하자 명성황후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일본인들이 칼로 내리쳤다고 한다.[123]
명성황후가 절명한 시각은 10월 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장소는 불분명하다.[119] 낭인들은 황후를 살해한 뒤에도 확신하지 못해 용모가 비슷한 궁녀 세 명을 추가로 살해했다.[124] 낭인들은 궁녀와 태자를 불러 확인하거나,[124] 황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동원하거나, 얼굴의 마마 자국을 확인하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살해한 여인이 명성황후임을 확인했다. 당시 낭인들은 일본을 위해 충성한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으며, 남의 나라 국모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91]
5. 2. 1. 자극적인 왜곡 논란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성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과장 및 왜곡이라는 비판이 있다.[125] 에조 보고서에는 명성황후 시해 당시 일본인들이 왕비를 발가벗겨 국부 검사를 하고 기름을 부어 소실시켰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101] 그러나 이 보고서는 현장 목격자가 아닌 공무원이 작성한 것이며, 서지학자 김종옥, 서울대학교 신용하 교수 등 전문가들은 이러한 주장이 상식에 어긋나는 거짓 낭설이라고 비판한다.[125]에조 보고서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보고서는 베베르 보고서를 비롯한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과 완전히 상반된다.[126] 보고서에 쓰인 '나체', '국부'라는 단어는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가슴을 확인한 행위를 가리킬 가능성이 제기된다.[127]
6. 사후 처리
일본은 을미사변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위장하려 했고,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이 일본인 낭인들을 고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으로 꾸미려 했다.[129] 1895년 10월 8일, 고종이 미우라 고로에게 사건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 고로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128] 미우라 고로는 명성황후의 시신을 확인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화장을 지시했고,[131][132] 시신은 경복궁 동쪽 녹원에서 태워졌다.[133] 타다 남은 유골은 우범선에 의해 향원정에 뿌려질 뻔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가 수습하여 매장했다.[133]
1895년 10월 10일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위하는 조서를 발표했으나,[132] 왕태자(훗날 순종)의 반발과 국내외적인 반발로 인해 11월 26일 조칙은 취소되었다.[132]
을미사변은 1896년 아관파천의 원인이 되었고, 대한제국 성립의 계기가 되었다.[137] 1896년 2월,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하며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밝혔다. 아관파천 당일 고종은 김홍집, 유길준 등을 을미사적(乙未四賊)으로 규정하고 폐비 조칙을 무효로 했다.[136]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했으며, 다음 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137]
일본의 만행이 드러나고 열강의 견제로 일본의 조선 지배는 어려워졌다. 1895년 10월 30일,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훈련대가 해산되고 친위대와 진위대가 설치되었다. 1895년 11월 26일, 왕비가 복위되고 시해사건 관련자들이 파면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은퇴하고, 이준용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5년 12월 1일, 왕후시해 사실과 국상이 공표되어 사건의 뒷수습은 일단락되었다.[129]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후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관여된 것을 알고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6. 1. 축소 은폐와 증거 인멸
일본은 을미사변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위장하려 했다. 사건 직후 미우라 고로는 왕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는 공문을 외부에 보냈다.[132] 미우라는 외국인 목격자들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음에도, 막료인 쓰키나리를 불러 일본인 낭인 중에서 중형을 각오하고 책임을 질 자들을 물색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일본인 장사를 고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했다고 위장하기 위해서였다.[129]1895년 10월 8일 아침, 고종이 미우라 공사에게 사건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128] 일본 외무성에서도 왕비 살해 여부를 확인하고 있었지만, 미우라는 "왕비의 소재를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며 흥선대원군에 의한 쿠데타라고 보고했다.[129]
미우라는 명성황후의 시신을 확인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오기하라에게 화장을 지시했다.[131][132] 흉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경복궁 동쪽 녹원(鹿園) 숲 속으로 가져가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133] 타다 남은 유골은 우범선이 연못 향원정에 넣으려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가 수습하여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133]
6. 2. 폐서인 조칙과 취소
1895년 10월 10일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하는 조서(詔書)를 발표했다. 이 조서에는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때처럼 피난했다는 거짓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132] 조서에는 김홍집, 김윤식,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 등이 서명했으며, 탁지부 대신 심상훈(沈相薰)은 이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낙향했다.[132]왕태자(훗날 순종)는 명성황후 폐위에 반발하여 태자위 양위를 선언했고, 이에 10월 11일 명성황후는 후궁인 '빈'(嬪)으로 승격되었다.[132]
명성황후 폐위 소식은 국내외적으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내에서는 명성황후 복위를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을미의병이 일어났다.[132] 외국 공사들은 고종의 직인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는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항의하며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15]
결국 일본과 김홍집 내각은 국내외 여론에 밀려 11월 26일 폐후 조칙을 취소하였다.[132]
6. 3. 사건 이후
을미사변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90][91] 이 사건은 1896년 아관파천의 원인이 되었고, 대한제국 성립의 계기가 되었다.[137]1896년 2월, 김구는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며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했다. 김구는 살해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고, 체포된 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지시로 사형 집행이 중지되었다.
아관파천 당일 고종은 김홍집, 유길준 등을 을미사적(乙未四賊)으로 규정하고, 국모 재간택과 폐비 조칙을 무효로 하였다.[136]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13일에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선포하였다.[137]
일본의 만행이 드러나고 열강의 견제로 일본의 조선 지배는 어려워졌다. 1895년 10월 30일에는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훈련대가 해산되고 친위대(왕궁)와 진위대(지방)가 설치되었다. 1895년 11월 26일에는 왕비를 복위하고, 시해사건에 관계한 군부대신 조희연과 경무사 권형진을 파면하였다. 흥선대원군도 스스로 은퇴하고, 이준용(李埈鎔)은 일본에 유학 명목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12월 1일에는 왕후시해 사실과 국상을 공표하여 시해 사건의 뒷수습은 일단락되었다.[129]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후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관여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6. 3. 1. 장례 논란
명성황후의 장례는 사건 발생 2년 후인 1897년에야 치러졌다. 1896년 12월 1일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5일 만에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국상을 치르려 했으나,[135]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3월 10일 국상 절차가 중단되고 무기한 연기되었다.[136]대한제국이 성립된 직후인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의 유해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에 넣었다고 한다.[91]
6. 3. 2. 관련 사건
이 사건은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의 원인이 되었고, 대한제국 성립의 계기가 되었다.[137] 아관파천 당일 고종은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을미사적(乙未四賊)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추진하던 국모 재간택과 폐비 조칙을 무효로 하였다.[136]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13일에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선포하였다.[137]
6. 4.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악화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관여된 것을 알고,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고종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 부자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138] 흥선대원군의 상여가 공덕리로 가는 것을 보고 서대문 밖까지 쫓아가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138]7. 평가
을미사변에 대한 평가는 여러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895년 10월 3일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미우라 고로 공사의 주도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대한계년사》에 남아있다.[97] 시바 시로는 미우라 고로의 참모였으며, 하버드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천우협, 현양사 등 일본 극우 낭인 단체들과 긴밀히 협력했는데, 이들 중에는 동경제국대학 출신 등 고학력자가 많아 단순한 정치깡패가 아닌 고도로 의식화된 테러리스트였다는 주장도 있다.[97]
모의에는 스기무라 후카시, 오카모토 류노스케, 호리구치 구마이치, 구스노세 유키히코 등이 참여했다.[99] 이들은 낭인들을 앞세워 범행하고, 겉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미기로 했다. 아다치 겐조는 한성신보 사장으로 낭인 동원을 맡았고, 구니토모 시게아키, 고바야가와 히데오 등 한성신보 관계자들과 규슈 출신 낭인 30여 명이 이에 가담했다.[100] 구스노세 유키히코 등은 일본 수비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역할을 맡았다.[100] 당초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이었으나 훈련대 해산으로 10월 8일 새벽 4시로 변경되었고, 미우라는 이 음모를 "여우사냥"이라 불렀다.[99][101]
1896년 4월 15일 권재형 판사가 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흥선대원군이 입궐 당일 간신을 몰아낸다는 유시를 내렸다는 내용이 있다.[102] 《한국통사》는 대원군이 일본인들에게 궁중 폭거를 금지했다고 기록하여, 대원군의 시해 동의 여부는 불분명하다.[99] 일본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원치 않아 10월 6일 오카모토가 대원군에게 정치 불참 서약을 받기도 했다.[99]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사건 배후로 의심하여 1898년 흥선대원군 사망 당시 장례식에 불참하는 등 부자 관계가 악화되었다.[138] 그러나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상여가 나갈 때 대성통곡을 하였고, 그 소리가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139]
고종은 시위대를 조직하고 서양인 경비원을 고용하는 등 명성황후의 신변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117] 그러나 러시아인 경비원 사바틴은 방어 대책을 소홀히 했고, 시위대와 궁궐 경비원들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도 안이하게 대처했다.[117] 고종은 명성황후를 자신의 침전으로 불러 궁녀 복장을 입히는 등 보호 조치를 취했으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까지 침입했다.[117]
한편, 조선 군대인 훈련대 일부는 일본인 폭도들의 역모에 가담했고, 궁궐 경비병들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117]
7. 1. 역사적 평가
을미사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일본의 침략성과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인식한다. 또한 이 사건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을미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2]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도 평가된다.한국의 친일파나 일본의 극우 인사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명성황후”가 사라짐으로써 한국의 근대화가 촉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서구화만을 근대화로 오해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수구·반동으로 여기는 잘못된 시각이라는 비판이 지배적이다.[2]
사건을 조명함에 있어 흥선대원군, 유길준 등 조선인 협력자들의 존재 역시 간과하기 힘들다. 흥선대원군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명성황후 제거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유길준은 미국인 은사 모스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을 조선인 최고위 협력자로 지목했다.[105]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107]
윤치호는 유길준을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했다.[108]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쓰카가 사건의 전말을 숨기기 위해 자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주장했다.[108]
당시에도 조선인 협력자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흥선대원군과 유길준은 처벌받지 않았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관여된 것을 알고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명성황후 생존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2013년 6월 30일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독일과 영국의 외교문서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독일 외교문서가 신뢰성이 높다는 점은 수긍한다"면서도 이 문서가 아관파천이 일어난 시기와 비슷한 시점에 작성됐다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원한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왕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140][141]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본 역사가 피터 듀스는 이 암살을 "끔찍한 사건, 조잡하게 계획되고 잔혹하게 실행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13]
7. 2. 일본인 암살범 후손들의 사죄
2005년 5월,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손자인 84세의 가와노 다쓰미|川野 龍巳일본어는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명성황후의 묘소를 참배했다.[27][17] 그는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명성황후의 묘에 사죄했지만, 명성황후의 후손들은 정부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이 사과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다.[27]2009년 8월, 일본 아사히 TV의 "보도 스테이션"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는데, 범인들의 후손 중 가와노 다쓰미와 이에이리 케이코가 명성황후의 후손을 만나 사죄하는 모습을 담았다.[142][143] 아사히 TV 보도 이후, 전 독립기념관 관장 김삼웅은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외손자 가와노 다쓰미를 만나 개인적인 반성과 용서에 그치지 않고, 일본 정부가 반성하고 사죄할 수 있도록 적극 제안해 달라고 요청했다.[144] 그러나 일본의 일부 극우 성향의 네티즌들은 "역사 위조, 허위보도"라고 하기도 했으며, "황후를 살해한 것은 조선인들이었다"고 주장하였다.[142][143]
7. 3. 구마모토와 후쿠오카의 조직적 관련
을미사변에는 야마구치, 후쿠오카, 구마모토 출신 인사들이 조직적으로 관여했다.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미우라 고로 등 야마구치 출신들이 배후에서 범행을 교사하고 총괄 기획, 지휘했다. 도오가츠 아키, 츠키 나리히카루 등 후쿠오카 출신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고, 아다치 겐조, 구니토모 시게아키 등 구마모토 출신들이 실행 인력을 동원했다.[100]이러한 지역적 연결고리는 단순한 지리적 근접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후쿠오카에 본부를 둔 현양사가 천우협, 흑룡회와 함께 제국주의적 정한론에 입각하여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배후 역할을 한 것이다. 나가사키, 가고시마까지 포함하면 범행 가담자들의 절대 다수가 규슈 지역 출신이라는 동질성을 보인다.
8. 사법 처리
일본은 미우라 고로 공사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을 소환하여 재판을 진행했다. 1896년 1월 20일 히로시마 재판소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다.[132] 군법회의에 회부된 일본군 장교 8명 역시 전원 무죄 방면되어, 결국 일본 측 가담자 54명 중 누구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최근 역사가들은 일본 정부가 재판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132] 2005년 서울대학교 교수가 메이지 천황이 재판 9일 전쯤 암살 보고서를 받았다는 문서를 발견하기도 했다.[6]
8. 1. 을미사변 일본 측 관련자
범행 분류 | 이름 | 당시 직책 | 비고 |
---|---|---|---|
범행 배후/교사 | 이노우에 가오루(ja) | 전 조선공사, 외무대신 | 범행 교사 |
이토 히로부미(ja) | 총리대신 | 배후 | |
가와카미 소로쿠(ja) | 육군본부 참모차장 | 범행 총책 | |
범행 방조/사후 보고 | 우치다 사다쓰지(ja) | 조선공사관 일등영사 | 보고서 작성 |
이시즈카 에이조(ja) | 조선고문관 | 일본 법제국 보고 | |
니이로 도키스케(ja) | 공사관 수비대 해군소좌 | 일본군 본영 보고 | |
범행 기획/지휘/직접 가담 | 미우라 고로(ja) | 조선공사 | 범행 실행 총괄, 무죄[145] |
시바 시로(ja) | 조선공사 참모 | 총괄 기획, 무죄[145] | |
스기무라 후카시(ja) | 공사관 일등서기관 | 무죄[145] | |
구스노세 유키히코(ja) | 조선공사관 무관, 육군 포병중좌 | 일본 군경 총괄, 무죄[146] | |
호리구치 구마이치(ja) | 조선공사관 영사관보 | 무죄[145] | |
아사야마 겐조(ja) | 조선국 보좌관 | 무죄[145] | |
오카모토 류노스케(ja) | 조선궁내부 겸 군부고문, 육군 포병소좌 | 조선 측과 공모, 홍계훈 살해, 무죄[145] | |
시부타니 가토지(ja) | 조선내부고문 | 무죄[145] | |
시부타니 후미히데(ja) | 통역관/일련종 승려 | - | |
오오우라 시게히코(ja) | 통역관 | 무죄[145] | |
하스모토 야스마루(ja) | 통역관 | 무죄[145] | |
우마야바라 가네모토(ja) | 공사관 수비대장, 육군소좌 | 일본군 지휘, 무죄[146] | |
이시모리 요시나오(ja) | 공사관 수비대 육군대위 | 무죄[146] | |
다카마쓰 데쓰다로(ja) | 공사관 수비대 육군대위 | 무죄[146] | |
고이토 유키부미(ja) | 공사관 수비대 육군대위 | 홍계훈에 총격, 무죄[146] | |
후지토 요조(ja) | 수비대 1중대장 육군대위 | 무죄[146] | |
무라이 우소(ja) | 수비대 2중대장 육군대위 | 무죄[146] | |
마구 마사스게(ja) | 수비대 3중대장 육군대위 | 무죄[146] | |
미야모토 다케타로(ja) | 공사관 수비대 육군소위 | 왕후 시해 | |
마키 구마토라(ja) | 공사관 수비대 | - | |
오기하라 히데지로(ja) | 외무성 경부 | 일본 경찰 지휘, 왕후 시신 소각, 무죄[145] | |
와타나베 다카지로(ja) | 외무성 순사 | 무죄[145] | |
오타 토시미쓰(ja) | 외무성 순사 | 궁녀 살해, 무죄[145] | |
나루세 기시로(ja) | 외무성 순사 | 무죄[145] | |
요코오 유지로(ja) | 외무성 순사 | 궁녀 살해, 무죄[145] | |
사카이 마스다로(ja) | 외무성 순사 | 이경직 살해, 무죄[145] | |
시라이시 요시다로(ja) | 외무성 순사 | 무죄[145] | |
키노와키 요시노리(ja) | 외무성 순사 | 궁녀 살해, 무죄[145] | |
사세 구마테쓰(ja) | 경무청 의사(醫務) | 무죄[145] | |
아다치 겐조(ja) | 한성신보 사장 겸 기자 | 낭인 총괄, 무죄[145] | |
구니토모 시게아키(ja) | 한성신보 주필 | 낭인 모집책, 무죄[145] | |
고바야가와 히데오(ja) | 한성신보 편집장 | 무죄[145] | |
히라야마 이와히코(ja) | 한성신보 기자 | 무죄[145] | |
사사키 타다시(ja) | 한성신보 기자 | 무죄[145] | |
히라야마 쓰마누마(ja) | 한성신보 객원 | 이경직 살해, 무죄[145] | |
미야토모 유키(ja) | 한성신보 사원 | 무죄[145] | |
우시지마 히데오(ja) | 한성신보 사원 | 무죄[145] | |
야마다 레츠세이(ja) | 일본신문 특파원 | 무죄[145] | |
기쿠치 겐조(ja) | 국민신문 특파원 | 무죄[145] | |
요시다 유키치(ja) | 보지(報知)신문 통신원 | 무죄[145] | |
오오사키 마사요시(ja) | 천우협(天佑俠) | 무죄[145] | |
다케다 한시(ja) | 천우협(天佑俠)/문필가 | 무죄[145] | |
스기야마 시게마루(ja) | 현양사(玄洋社) | - | |
츠키나리 히카루(ja) | 현양사(玄洋社) | 일명 梶川光, 무죄[145] | |
도오가츠 아키(ja) | 현양사(玄洋社) | 왕후 시해, 무죄[145] | |
스즈키 시게모토(ja) | 晒業 | 무죄[145] | |
데라자키 다이키치(ja) | 매약상(売薬商) | 왕후 자해(刺害), 무죄[145] | |
삿사 마사시(ja) | 매약상(売薬商) | 무죄[145] | |
나카무라 다테오(ja) | 잡화상 | 왕후 참살(斬殺), 무죄[145] | |
난바 하루키치(ja) | 잡상인(薬雑行商) | 무죄[145] | |
마쓰무라 다츠키(ja) | 계동소학교 교사 | 무죄[145] | |
다나카 겐도(ja) | 농업 | 무죄[145] | |
사토 게이타(ja) | 농업 | 무죄[145] | |
히로다 토메요시(ja) | 농업, 구마모토 국권당원 | 무죄[145] | |
구마베 요네기치(ja) | 농업 | 무죄[145] | |
마에다 도시죠(ja) | 농업 | 무죄[145] | |
스즈키 준켄(ja) | 무직 | 무죄[145] | |
가타노 다카오(ja) | 무직 | 무죄[145] | |
사와무라 요시오(ja) | 무직 | 무죄[145] | |
이에이리 가키치(ja) | 무직 | 무죄[145] | |
나카지마 히데오(ja) | - | - |
- 일본 공사관 수비대는 일본 공사관의 경비를 담당한 일본 제국 육군 및 일본 제국 해군 합동 군사 부대이다.[19] 미우라 고로 공사관 서기관이 지휘했다.
- 낭인 40명 이상이 아다치 겐조를 포함하여 일본 관리로 위장했다. 이들은 선봉 역할을 했다. 이시즈카 에이조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원래 구마모토현 출신으로 일본도와 권총으로 무장했다.[20]
8. 2. 일본 측 관련자들의 영전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석방되었고, 오히려 영전하거나 영달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야마구치현 출신): 전 조선공사, 외무대신. 범행 교사 혐의가 있었으나, 총리대신 후보로 거론되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야마구치현 출신): 육군대장, 1군 사령관, 귀족원의원. 이후 총리대신이 되었다.
- 하나부사 요시모토(오카야마현 출신): 전 조선공사. 남작, 자작 작위를 받았다.
- 이토 히로부미(야마구치현 출신): 총리대신. 을미사변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이후 조선통감을 지냈다.
- 가와카미 소로쿠(가고시마현 출신): 육군중장, 육군본부 참모차장. 범행 총책으로 지목되었으며, 이후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 아다치 겐조: 한성신보 사장으로 일본에 머물며 의회 정치에 입문, 체신대신이 되었다.
이름 | 당시 직책 | 이후 경력 |
---|---|---|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일본어) | 주한 일본 공사 | 귀족원 의원 |
오카모토 류노스케 (岡本柳之助일본어) |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 육군 중장 |
스기무라 후카시 (杉村濬일본어) | 일본 공사관 서기관 | 외무성 정무국장, 국제 연맹 사무차장 |
구스노세 유키히코 (楠瀬幸彦일본어) | 주조선 공사관 무관, 육군 포병 중좌 | 육군대신 |
아다치 겐조 (安達謙蔵일본어) | 한성신보 사장 | 체신대신, 내무대신 |
구니토모 시게아키 (国友重章일본어) | 한성신보 기자 | 중의원 의원 |
시바 시로 (柴四朗일본어) | 낭인 | 중의원 의원, 도카이 산시로 필명 사용 |
데라자키 다이키치 (寺崎泰吉일본어) | 낭인 | 중의원 의원 |
호리구치 구마이치 (堀口九萬一일본어) | 낭인들의 길 안내인, 영사관보 | 외교관 |
오기하라 히데지로 (荻原秀次郎일본어) | 영사관 경찰총수 | - |
일본은 을미사변을 조선인들의 소행으로 위장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일본은 미우라 고로 공사를 비롯한 관련자 48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지만,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석방하였다.[132] 군법회의에 회부된 일본군 장교 8명 역시 전원 무죄 방면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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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을미년(乙未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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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公使三浦梧楼の指揮により日本軍人・大陸浪人らの手で閔妃が殺害された」(平凡社『世界大百科事典』)、「日本公使三浦梧楼の指揮により日本軍人・大陸浪人らは、[[反日派]]の中心人物と目された閔妃を、10月8日未明王宮内で殺害」(小学館『日本歴史大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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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年5月9日 朝鮮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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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成皇后殺人犯の子孫が謝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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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成皇后殺害凶器「肥前刀」の還収委員会発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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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成皇后殺害凶器の肥前刀、日本の神社に返還要求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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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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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군 미야모토 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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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란 단어는 자식이 부모나 직계존속을, 백성이나 신하가 왕이나 왕비를 살해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시해'란 단어가 들어간 명칭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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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만행'을 개혁이라니, 이것부터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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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유골을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우연히 발견하여 연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뒷날 친일 내각은 윤석우를 비롯한 군부 협판 이주회, 일본어 통역관 [[박선]](朴銑) 등을 무고하게 반역죄 또는 불경죄로 사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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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민간인들의 가담은 일이 세상에 알려지더라도 공사관이나 일본 정부와 무관하다고 강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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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명성황후 암살의 중요 배후의 한 사람으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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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굴|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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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연락하라고 한 까닭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이 궁궐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례로 시위대 지휘관은 퇴역 미군 대령 출신의 [[윌리엄 다이]]였고, 미국 공사관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앨런은 최초의 외국인 [[어의]]였다. 또한 미국과 러시아 외교관이 일본은 [[유럽]]을 두려워한다고 건의하자 채용한 유럽인 경비원 가운데 건축기사 사바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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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俗說과 眞實(2)- ‘에조문서 435호’의 실체] “명성황후 ‘사망 전 능욕설’… 작가의 상상력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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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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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妃시해에 사용된 칼 日本 神社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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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오후 3시 25분발 전보에서도 “한인 사망자는 부인 둘에 병졸 둘은 확실하다. 왕ㆍ세자는 안전, 왕비의 소재는 알지 못하나 달리 도망간 증거는 없다”라고 하여 본국의 상부에까지 사실을 끝까지 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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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에는 미우라가 고종을 알현한 곳이 건청궁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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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사히TV '명성황후 시해사건' 보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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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사죄하기 위해 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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