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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18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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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하여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실업가로 활동했다. 그는 16세에 노동자로 시작하여 사업가로 성장, 평양 자기회사와 태극서관 등을 설립하며 국내 굴지의 실업가가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받아 교육 사업에 헌신,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며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여 투옥되었고, 출옥 후에는 오산학교 운영과 민립대학 기성회 발족 등 교육 및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1930년 사망했으며, 사후 건국훈장이 수여되고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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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1864년)
기본 정보
이승훈
이승훈
한글 이름이승훈
한자 이름李昇薰
가나 이름이・슨훈
로마자 표기Lee Seung-Hun
출생1864년
사망1930년
본관驪州 李氏
자(字)이인환(李寅煥)
호(號)남강(南岡)
아명(兒名)승일(承一)
주요 활동독립운동
교육
기업
업적오산학교 설립
생애
출생1864년에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남.
교육기독교 교육을 받고 개화파의 영향을 받음.
사업평양에서 상업 활동을 시작하여 큰 돈을 벌었음.
독립운동1907년 안창호를 만나 신민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함.
오산학교 설립1907년 정주오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활동에 힘씀.
105인 사건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름.
만주 망명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감.
사망1930년 사망.
평가
평가독립운동가, 교육자, 기업가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함. 민족 교육과 실력 양성에 힘씀.
참고 자료
참고 자료[[http://changwon.grandculture.net/changwon/toc/GC02207072]]

2. 생애

남강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 1930년 5월 9일 사망했다. 이승훈의 생애는 초기 생애와 기업 활동, 민족 운동 투신과 교육 활동, 일제 강점기 투옥과 독립운동, 광복 이후 활동과 최후로 나눌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읜 이승훈은 16세에 놋그릇 가게 점원으로 시작하여 10여 년간 놋그릇 행상과 공장 경영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생산성을 높였으나, 국제 무역 사업은 러일 전쟁으로 인해 실패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받은 이승훈은 민족 운동에 투신,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신민회 활동 중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고,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다시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여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 조만식을 교사로 영입하고 학교 경영권을 물려주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

1930년 사망 당시 경성제국대학에 시신 기증을 약속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되지 못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수여되었고,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기업 활동

남강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유기상(놋그릇 가게)의 노동자가 되었으며, 10여 년 동안 유기(놋그릇) 행상과 공장 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평양 자기회사, 태극서관을 설립하였다.

이승훈은 뛰어난 사업가로서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하여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노동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대접하여 노동자들의 생산능률은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이 날로 번창하였다.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일 전쟁의 발발로 파산하게 되었다. 1910년에는 평양에 마산도자기회사를 설립했다.[2]

2. 2. 민족 운동 투신과 교육 활동

남강 이승훈은 1905년(광무 8년) 을사조약 체결로 정세가 뒤숭숭하던 시기에 평양 만민공동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40대의 나이에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다.[2] 강명의숙(講明義塾)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2] 오산학교안창호대성학교와 함께 이 지역 민족주의 교육의 두 축이 되었다.[2]

1910년 장로교 신자가 되었으며, 1916년 장로로 선출될 정도로 성실한 신자였다.[3] 105인 사건으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계열, 신민회 인사들이 체포될 때,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이승훈도 서울에서 검거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2]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불교, 천도교와 더불어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종교계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였으며,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다.[2]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도 교원들이 모두 검거되고, 민족교육의 온상인 오산학교와 교회가 불타는 탄압을 면하지 못했으나, 조만식, 유승모, 박우병, 장지영, 백봉제, 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19년 7월 학교가 재건되었다.

1922년 가출옥한 이승훈은 용동에 자면회를 세우고 1천여 평의 땅을 기증하여 공동경작제를 실시하였으며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2] 또한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자신이 교장과 이사장을 지내며 분신처럼 생각했던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2]

학교를 운영하며 실력양성론을 주창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조만식을 영입해서 교사로 삼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에게 학교의 경영권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조선총독부 당국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의 오산학교에서는 류영모, 함석헌 등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4]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2. 3. 일제 강점기 투옥과 독립운동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정세가 뒤숭숭하던 시기에 평양 만민공동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이승훈은 40대의 나이에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교육 사업을 시작했으며, 한평생 독립운동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2] 강명의숙(講明義塾)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워서 인재 양성에 힘썼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오산학교안창호대성학교와 함께 이 지역 민족주의 교육의 두 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흐름은 일본의 경계를 샀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계열, 신민회 인사들이 한꺼번에 체포되었다.[3] 용산을 출발하던 경의선 열차에 탑승할 때 변장을 하고 여행하였으나, 동료 김구, 양기탁, 윤치호, 옥관빈, 이동휘 등 동료 신민회 회원들이 일본 경찰에 줄줄이 체포되어 강제로 하차당하는 것을 보고, 신문을 보던 그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뒤 창밖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창밖을 보며 눈물흘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총독부의 일본 경찰은 변복하고 신문을 읽던 장년 남성이 이승훈임을 알아보고 바로 체포했다. 105인 사건이 적발될 당시 그는 이미 이전의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나, 서울에서 검거되자 법원으로 압송,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불교, 천도교와 더불어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종교계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였으며,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다.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도 교원들이 모두 검거되고, 민족교육의 온상인 오산학교와 교회가 불타는 탄압을 면하지 못했으나, 조만식, 유승모, 박우병, 장지영, 백봉제, 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19년 7월 학교가 재건되었다.

1922년 가출옥한 이승훈은 용동에 자면회를 세우고 1천여 평의 땅을 기증하여 공동경작제를 실시하였으며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자신이 교장과 이사장을 지내며 분신처럼 생각했던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

2. 4. 광복 이후 활동과 최후

1922년 가출옥되었고, 1924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여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물산 장려 운동 등을 펼쳤다.[1]

1930년 사망하였다.(1864년 3월 25일 ~ 1930년 5월 9일).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수여되었고,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1]

3. 사후

1930년 李承薰|이승훈중국어이 사망하자,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을 수여했으며, 서울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1]

4. 평가

이승훈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놋쇠 제품 상점 점원이 되었다. 10년 이상 놋쇠 제품 행상과 공장 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최고의 거대 실업가가 되었다.[1]

뛰어난 경영자로서 공장 경영 방식 개선에 힘썼고, 근로 환경을 일신했다. 직원의 신분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직원을 평등하게 평가함으로써 공장의 생산성과 제품 품질을 향상시켜 사업을 더욱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1] 그러나 국제 무역 회사를 설립하여 세계 무대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한국 최초의 국제 투자를 시도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로 실패하고 파산했다.[1]

이후 지방으로 거처를 옮겨 학문의 길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1907년 평양에서 안창호의 교육 진흥론 관련 연설에 감명을 받고 평생을 독립 운동과 민족 교육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고, 특히 오산학교는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함께 평안남도 민족주의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이어 신민회 발기인으로도 참여했고, 이 무렵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1910년에는 평양에 마산도자기회사를 설립했다.[1]

1911년 안악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같은 해 9월 105인 사건으로 평안도의 기독교 및 신민회 관계자들이 대거 체포되어 경성으로 호송되어 4년 2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기독교계 대표로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여 징역 3년형을 받았다.[1]

1922년 가출옥되었고, 1924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추진하고, 물산 장려 운동 등을 펼쳤다.[1]

1930년 사망(1864년 3월 25일 ~ 1930년 5월 9일).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수여되었고, 서울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주기용 - 디지털창원문화대전 http://changwon.gran[...] 2023-12-13
[2] 위키
[3] 웹사이트 한국컴퓨터 선교회 인명사전 http://kcm.kr/dic_vi[...]
[4] 서적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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