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모토 스케토모
1. 개요
아키모토 스케토모는 에도 시대 중기의 다이묘이다. 1717년에 태어나 아키모토 사다토모의 셋째 아들로, 아키모토 다카모토의 양자가 되었다. 간포 2년(1742년)에 가와고에 번을 상속받았고, 소자반, 지샤 부교, 니시노마루 로주, 혼마루 로주를 역임했다. 다누마 오키쓰구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마가타 번으로 전봉된 후 은거했으며, 1775년에 사망했다.
| 씨명 | 아키모토 씨 |
|---|---|
| 이름 | 아키모토 스케토모 |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 출생 | 교호 2년 (1717년) |
| 사망 | 아네이 4년 5월 25일 (1775년6월 22일) |
| 개명 | 가즈토모 (초명) → 스케토모 |
| 자 | 만시로, 우에몬, 이치가쿠, 도쇼 (통칭), 규겐 (호) |
| 계명 | 화성원전 규겐 스케토모 대거사 |
| 묘소 | 도쿄도다이토구의 고코쿠인 군마현마에바시시의 고겐지 |
| 관위 | 종5위하 셋쓰노카미, 다지마노카미, 종4위하 시종, 이키노카미 |
| 막부 | 에도 막부 소자반, 지샤부교, 니시노마루 와카도시요리, 니시노마루 로주, 혼마루 로주 |
| 주군 | 해당 사항 없음 |
| 번 | 무사시국가와고에번 번주 → 데와국야마가타번 번주 |
| 씨족 | 아키모토 씨 |
| 부모 | 아버지: 아키모토 사다토모, 양아버지: 아키모토 다카토모 |
| 형제 | 사다히데, 우에다 요시마사, 스케토모 |
| 배우자 | 해당 사항 없음 |
| 자녀 | 딸 (아베 마사치카 정실), 양자: 쓰네토모, 나가토모', 양녀 (아키타 노부스에 딸, 교고쿠 다카나카 정실) |
| 가와고에 번 (아키모토 가문) | 전임: 아키모토 다카토모 후임: 마쓰다이라 도모노리 대수: 4 임기: 1742년 ~ 1767년 |
|---|---|
| 야마가타 번 (아키모토 가문) | 전임: 마쓰다이라 노리스케 후임: 아키모토 쓰네토모 대수: 1 임기: 1767년 ~ 176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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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고에번주 -
홋타 마사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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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고에번주 -
마쓰이 야스히데
마쓰이 야스히데는 에도 시대 말기의 일본 무사로, 다나쿠라 번과 가와고에 번의 다이묘를 역임하고 외국 봉행, 유럽 사절단 참여 등 막부의 요직을 거쳐 로주에 임명되었으며, 보신 전쟁 이후 은퇴했다. -
에도 막부 와카도시요리 -
오타 스케무네
오타 스케무네는 에도 시대 초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다이묘가 된 인물로, 쇼군 측근인 육인중으로 활동하고 막부의 중요 사업에 참여하였다. -
에도 막부 와카도시요리 -
사카이 다다요시 (1714년)
사카이 다다요시는 데와 마쓰야마 번의 3대 번주로, 번정 개혁 시도 실패, 막부의 재정 지원 및 영향력 행사, 영지 확장, 장기 명인으로 알려졌으며, 74세에 사망하여 차남이 뒤를 이었다. -
1717년 출생 -
장 르 롱 달랑베르
장 르 롱 달랑베르는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이자 음악 이론가로서, 달랑베르의 원리를 제시하여 역학 발전에 기여하고 드니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를 편찬하며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1717년 출생 -
레 현종 (27대)
레 현종은 정씨 세력의 영향력 아래 실권 없이 47년간 재위한 대월 레 왕조의 27대 황제로, 떠이선 농민 운동 이후 친정을 시도했으나 곧 사망했다.
2. 생애
4,000석을 영유한 거물 하타모토 아키모토 사다토모의 셋째 아들로 교호 2년(1717년)에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가즈토모(員朝)였다. 간포 원년(1741년)에 일족인 아키모토 다카모토의 양자가 되었고, 간포 2년(1742년)에 다카모토가 은퇴하면서 가독을 이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막부 정치에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다카모토의 차남 미치토모를 양자로 삼았으나 요절하여, 조카인 나가토모를 다시 양자로 맞이했다.
안에이 4년(1775년)에 사망했다. 묘소는 도쿄도 다이토구의 고코쿠인 및 군마현 마에바시시의 고겐지에 있다.
2.1. 관직 생활
간포 원년(1741년)에 일족인 아키모토 다카모토의 양자가 되었고, 이듬해 간포 2년(1742년)에 다카모토가 은퇴하자 그 뒤를 이었다.
엔쿄 원년(1744년)에 소자반으로 임명되었으며, 엔쿄 3년(1746년)부터는 지샤 부교를 겸임했다. 같은 해 조선 통신사 내일에 대비하여 여러 다이묘와 사찰에 대한 영지 판결 및 주인(朱印) 발급 업무를 담당했다. 엔쿄 4년(1747년)에는 니시노마루 와카도시요리로 승진했고, 곧이어 니시노마루 로주로 진급하여 단바노카미(丹波守) 관직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종4위하로 승진했으며, 간엔 원년(1748년)에는 시주(侍従)에 임명되었다. 호레키 10년(1760년)에는 로주(혼마루 로주)로 취임했다. 이에하루가 쇼군으로 취임함에 따라 호레키 11년(1761년)에는 법령 관련 업무를 맡았고, 이에시게 사후에는 니노마루의 여러 일을 집행했다. 호레키 13년(1763년)에는 요시무네 13주기 법회의 부교를 맡았다.
메이와 원년(1764년)에 로주직을 사임했으나, 메이와 2년(1765년)에 다시 니시노마루 로주가 되었다. 그러나 메이와 4년(1767년)에 다시 사임하고 데와국 야마가타성으로의 전봉을 명받았다. 스케토모의 니시노마루 로주 사임과 야마가타 전봉 배경에는 다누마 오키쓰구와의 정치적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봉 명령을 받은 스케토모는 이듬해 메이와 5년(1768년)에 치사(致仕, 은퇴)하였고, 에도 저택에 머물렀다. 양자인 나가토모가 가독을 이어받아 임지인 야마가타로 부임했다.
처음에는 선대 다카모토의 차남 미치토모를 양자로 삼았으나 일찍 사망하여, 조카인 나가토모를 새로운 양자로 삼았다.
2.2. 도쿠가와 이에하루 시대
호레키 10년(1760년)에 로주(혼마루 로주)로 취임했다. 이에하루가 쇼군으로 취임하자 호레키 11년(1761년)에는 법령에 대해 듣고, 이에시게가 사망한 후에는 니노마루의 여러 일을 처리했다. 호레키 13년(1763년)에는 요시무네 13주기 법회의 부교를 맡았다. 메이와 원년(1764년)에 로주 자리에서 물러났다. 메이와 2년(1765년)에 다시 니시노마루 로주가 되었으나, 메이와 4년(1767년)에 사임하고 데와국 야마가타성으로 전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케토모의 니시노마루 로주 사임과 야마가타 전봉 배경에는 다누마 오키쓰구와의 대립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전봉 명령을 받은 스케토모는 메이와 5년(1768년)에 관직에서 물러났고(치사), 에도 저택에서 계속 머물렀다. 그의 양자인 나가토모가 뒤를 이어 야마가타로 부임했다.
2.3. 다누마 오키쓰구와의 갈등 및 은퇴
아키모토 스케토모는 당시 권력을 키워가던 다누마 오키쓰구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 스케토모는 오키쓰구의 세력 확장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한 일화로, 에도성 안에서 당시 쇼군의 측근에 불과했던 오키쓰구가 로주인 스케토모에게 예를 갖추지 않자, 스케토모가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메이와 원년(1764년), 스케토모는 로주 직을 사임했는데, 이는 다누마 오키쓰구의 전횡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후 메이와 2년(1765년)에 다시 니시노마루 로주가 되었으나, 메이와 4년(1767년)에 다시 사임하고 데와국 야마가타로의 전봉 명령을 받았다. 이 갑작스러운 전봉은 오키쓰구의 보복성 조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다만 스케토모는 전봉 명령을 받은 뒤 에도의 저택에 머물다가 메이와 5년(1768년)에 세상을 떠났고, 실제로 야마가타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양자 나가토모가 야마가타로 부임했다.
또한 스케토모는 메이와 3년(1766년)에 히라가 겐나이를 초빙하여 당시 영지였던 가와고에번 내 오쿠치치부 나카쓰 협곡의 광산 개발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누마 오키쓰구의 정치적 개입을 우려하여 본격적인 채굴은 먼 훗날인 쇼와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다누마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3. 다누마 오키쓰구와의 관계
스케토모는 다누마 오키쓰구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오키쓰구가 아직 측근에 불과했을 때, 덴추(殿中)에서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하지 않자, 스케토모가 노중에 대한 예의가 없다며 그 무례함을 지적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메이와 원년(1764년)에 노중 직을 사임했는데, 이는 다누마의 권세에 대한 항의 표시로 여겨진다. 이후 가와고에에서 야마가타로 영지가 바뀐 것은 오키쓰구에 의한 보복 조치였다는 설도 있다. 메이와 3년(1766년)에는 히라가 겐나이를 초빙하여 당시 영지였던 가와고에번 내 오쿠치치부 나카쓰 협곡의 광산 개발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누마 오키쓰구의 개입을 우려하여 지치부 광산의 본격적인 채굴은 먼 훗날인 쇼와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4. 연보
4,000석을 영유한 거물 하타모토 아키모토 사다토모의 셋째 아들로 1717년(교호 2년)에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가즈토모(員朝)였다. 1741년(간포 원년)에 일족인 아키모토 다카모토의 양자가 되었으며, 1742년(간포 2년)에 다카모토가 은퇴하자 가와고에번 번주직을 계승했다.
1744년(엔쿄 원년)에 소자반이 되었고, 1746년(엔쿄 3년)부터 지샤 부교를 겸임했다. 같은 해 조선 통신사 방문 준비 과정에서 여러 다이묘와 사찰에 대한 영지 판결 및 주인장 발급을 담당했다. 1747년(엔쿄 4년)에는 니시노마루 와카도시요리를 거쳐 니시노마루 로주로 승진하며 다지마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종4위하로 승서되었으며, 1748년(간엔 원년)에는 시종(侍従)에 임명되었다. 1760년(호레키 10년)에는 혼마루 로주로 취임했다. 1761년(호레키 11년)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쇼군으로 취임하자 법령 관련 업무를 맡았으며, 도쿠가와 이에시게 사후에는 니노마루 관련 업무를 집행했다. 1763년(호레키 13년)에는 도쿠가와 요시무네 13주기 법회의 부교를 맡았다. 1764년(메이와 원년) 로주직을 사임했으나, 1765년(메이와 2년) 다시 니시노마루 로주가 되었다. 하지만 1767년(메이와 4년) 다시 사임하고 데와국 야마가타번으로의 전봉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스케토모는 전봉 명령을 받은 이듬해인 1768년(메이와 5년)에 은거했으며, 에도 저택에 머물렀다. 양자인 아키모토 나가토모가 가독을 잇고 야마가타로 부임했다. 스케토모의 로주 사임과 야마가타 전봉 배경에는 다누마 오키쓰구와의 정치적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스케토모는 선대 번주 아키모토 다카모토의 차남 아키모토 미치토모를 양자로 들였으나 요절하여, 조카인 나가토모를 다시 양자로 삼았다.
1775년(안에이 4년)에 사망했다. 묘소는 도쿄도 다이토구의 고코쿠인과 군마현 마에바시시의 고겐지에 있다.
* 1717년(교호 2년): 출생
* 1741년(간포 원년): 종5위하 셋쓰노카미 서임
* 1742년(간포 2년): 가와고에번 번주직 계승
* 1746년(엔쿄 3년): 소자반 겸 지샤 부교 임명
* 1747년(엔쿄 4년): 니시노마루 와카도시요리, 니시노마루 로주 임명. 다지마노카미로 개칭 후 종4위하 승서
* 1748년(간엔 원년): 시종(侍従) 임명
* 1760년(호레키 10년): 혼마루 로주 임명
* 1764년(메이와 원년): 혼마루 로주 사임
* 1767년(메이와 4년): 데와국 야마가타번으로 전봉 명령 받음
* 1768년(메이와 5년): 은거. 이키노카미로 개칭
* 1775년(안에이 4년): 사망
5. 가계
6. 배우
* 오코치 덴지로 - 《자두 두건》(195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