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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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상호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의사로,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1902년 일본 동경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지석영의 의학교 등에서 서양의학을 가르쳤으며, 순종의 전의를 역임했다. 개인 진료소를 운영하며 의친왕과 친분을 쌓았으나, 고종의 사망 당시 독살설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후 한성의사회 회장을 역임하며 의료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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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상호 | |
|---|---|
| 기본 정보 | |
![]() | |
| 본관 | 순흥(順興) |
| 호 | 벽산(碧山) |
| 출생 | 1872년 12월 25일 |
| 사망 | 1946년 10월 25일 (향년 73세) |
| 배우자 | 이씨 |
| 자녀 | 아들 2명, 딸 2명 |
| 학력 | |
| 수학 | 사서(四書)와 오경(五經) |
| 경력 | |
| 1919년 |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 |
| 1921년 |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
| 1923년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서리 |
2. 생애
안상호는 안건영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광무 6년) 일본 도쿄 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2][1] 귀국 후 지석영이 세운 의학교 등에서 서양의학을 가르쳤고, 순종의 전의(典醫)로 임명되기도 했다. 서울 종로에 개인 진료소를 열어 많은 환자를 진료했으며, 의학교 교관, 의사연구회 부회장, 한성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의료계 발전에 기여했다. 1910년 통정대부에 올랐고, 비서원 승지를 역임했다. 1927년 12월 31일 사망했으며, 묘는 군포시 금정동에 있었다가 1990년 4월 산본신도시 개발로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당목리로 이장되었다.[1]
2. 1. 초기 생애 및 의학 수학
안건영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했다.1902년(광무 6년) 일본 도쿄 자혜의학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하였다.[2][1]
모교에서 수련을 마치고 1904년(광무 8년)에 귀국하여 지석영이 세운 의학교와 동담한의학교에서 서양의학을 강의하였다.[1] 이어 순종의 전의(典醫)로 임명되어[1] 의친왕과 친분이 두터웠다.
2. 2. 귀국 후 의료 활동
1904년 지석영이 세운 의학교(醫學校)와 동담한의학교(東憺漢醫學校)에서 서양의학을 강의하였다.[1] 순종의 전의(典醫)로 임명되어[1] 의친왕과 친분이 두터웠다. 서울 종로 3가 16에 개인진료소를 차렸는데 환자가 쇄도하여 차례를 주어 진찰할 만큼 크게 붐볐다. 이때 진료 관계로 학교와 전의를 사임하였다. 진료는 오전에는 외래, 오후에는 왕진과 입원 환자를 보살폈는데, 궁중이나 북촌 대가(北村大家)집 왕진이 큰 고역이었다. 국왕이나 비빈(妃嬪) 진찰 시 대기 시간이 길고, 대가에서는 환자를 보기 전 술상이 나오는 등 시간 낭비가 많았기 때문이다. 안상호는 술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드름을 떠는 이들에게는 대충 말대꾸하고 빨리 돌아와 진료소 환자를 돌보았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냉정하고 쌀쌀하며 교활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1904년 의학교 교관으로 취임하여 판임관 6등에 보임되었고, 이해 12월 주임관 6등으로 승진하였으나, 1905년 임상개업에 전념하고자 교관직을 사임하였다. 1908년 일본인들이 조직한 경성의사회에 대항하여 의사연구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10년 동서의학강습소에서 서양의학 강의를 담당했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조직한 경성의사회가 단체 행동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를 좌지우지하는 행세를 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긍선, 박종항 등과 한성의사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뽑혔다.[1]
2. 3. 의료계 활동
1902년 일본 동경자혜(慈惠)의학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하였다.[2][1] 모교에서 수련을 마치고 1904년에 귀국하여 지석영이 세운 의학교(醫學校)와 동담한의학교(東憺漢醫學校)에서 서양의학을 강의하였다.[1] 이어 순종의 전의(典醫)로 임명되어[1] 의친왕과 친분이 두터웠다. 서울 종로 3가 16에 개인 진료소를 차렸는데, 환자가 쇄도하여 차례를 주어 진찰할 만큼 크게 붐볐다. 이때 진료 관계로 학교와 전의를 사임했다. 진료는 오전에는 외래 진료, 오후에는 왕진과 입원 환자를 보살폈는데, 궁중이나 북촌 대가집 왕진이 큰 고역이었다.1904년 의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판임관 6등에 보임된 후 이해 12월에 주임관 6등으로 승진하였으나, 임상 개업에 전념하고자 1905년에 교관직을 사임하였다. 1908년 일본인들이 조직한 경성의사회에 대항하여 의사연구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10년 동서의학강습소에서 서양의학 강의를 담당했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조직한 경성의사회가 단체 행동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를 좌지우지하는 행세를 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긍선, 박종항 등과 한성의사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뽑혔다.[1]
2. 4. 사망
1927년 12월 31일에 사망했다. 묘는 군포시 금정동에 있었는데, 1990년 4월 산본신도시 개발로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당목리로 이장되었다.[1]3. 고종 독살설 연루 논란
1919년 고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일제의 사주를 받은 안상호가 독약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안상호는 당시 고종의 전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 독살설은 당시 정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
3. 1. 고종 승하와 독살설
1919년 고종 황제의 환후(患後)가 위중해지자 궁중 전의가 정성을 다해 치료했으나, 갑자기 의식을 잃고 회복되지 않자 이왕직(李王職) 촉탁의 안상호에게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을 했다. 그러나 궁중 진료는 수속이 복잡하고, 진료를 해 보면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주위의 의관(醫官)·관리·궁녀들이 법석을 떠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덕수궁에서 온 입진 요청 전화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른 환자를 보고 있었는데, 곧이어 의친왕의 급한 전화를 받고 급히 진료했으나 끝내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한때 일본인의 사주로 독약을 올렸다는 무고(誣告)를 입어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2] 이 사건은 경찰의 제지로 별일이 없었으나, 그 후 십여 년이 지난 뒤인 1920년대 말경 한국 의학계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정구층 박사가 서울 종로에서 의친왕을 만나 당시 상황을 물어보았다. "안상호 선생이 태황제(고종 황제)께 독약을 드려 승하하셨다는 소문을 아세요?"하고 묻자 의친왕은 "원 천만에, 내가 안상호를 불러 입진하는 것을 옆에서 시립(侍立)하고 있었는데요."하며 말 같지 않은 세평이라는 듯이 말했다고 한다.[2]안상호가 독살설에 연루된 까닭은 당시 대중에게 그의 가정사가 노출됐던 전력과 연관되어 있다. 당시 왕세자의 결혼 예정일 직전에 《매일신보》는 “이 경사로운 가례(嘉禮)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때에 조선에서 남보다 일찍 내지인과 결혼을 하여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 온 사람의 가정을 방문하여 보는 것”을 취지로 한 〈왕세자 전하 가례 전에 일선동체의 가정 방문〉(《매일신보》, 1918.12.8~12)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이 중에 안상호의 가정도 끼어 있었다.[2] 기자가 방문한 안상호의 집은 안상호가 기자에게 조선어로 말하는 것 외에는 완전한 일본 가정이었다. 안상호는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지요. 나는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본인 아내와 함께 오남매를 일본식으로 키우는 행복을 자랑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본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민족을 배반한 골수 친일 분자로 보게 되었다.[2] 당시 조선인들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충격적 소식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 독살과 같은 음모가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그때 쉽게 눈에 띈 것이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 친일파로 낙인 찍힌 전의 안상호였던 것이다.[2]
그러나 고종이 죽은 1919년 1월은 일제가 전 세계에 한일 병합 조약을 조선과 일본의 ‘행복한 결합’이라고 선전하기 위해 왕세자 이은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 마사코를 정략결혼시키려던 때였다. 그러니 그들의 계획상 고종은 죽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안상호가 독살을 했을 가능성뿐 아니라 고종이 독살됐다는 설 자체도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한다.[3]
3. 2. 독살설의 배경
1919년 고종 황제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궁중의 전의들이 치료했으나, 갑자기 의식을 잃고 회복되지 않았다. 이에 이왕직 촉탁의 안상호에게 급히 연락했으나, 궁중 진료는 절차가 복잡하고 하루 진료를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안상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의친왕의 급한 전화를 받고 진료했으나,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일본인의 사주로 독약을 올렸다는 모함을 받아 곤욕을 치렀다.[2]이 사건은 경찰의 제지로 별일 없었으나, 1920년대 말 한국 의학계의 선구자인 정구층 박사가 의친왕에게 당시 상황을 묻자, 의친왕은 "내가 안상호를 불러 진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라며 세간의 소문을 부인했다.[2]
안상호가 독살설에 연루된 까닭은 그의 가정사가 대중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왕세자의 결혼 예정일 직전에 《매일신보》는 〈왕세자 전하 가례 전에 일선 동체의 가정 방문〉(1918.12.8~12)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이 중에 안상호의 가정도 포함되었다. 안상호의 집은 완전한 일본 가정이었고, 안상호는 일본인 아내와 함께 오남매를 일본식으로 키우는 행복을 자랑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당시 사람들에게 그를 민족을 배반한 친일 분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독살과 같은 음모가 있다고 믿었고, 친일파로 낙인찍힌 안상호가 주목받게 된 것이다.[2]
그러나 고종이 죽은 1919년 1월은 일제가 한일 병합 조약을 '행복한 결합'이라고 선전하기 위해 왕세자 이은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 마사코를 정략결혼시키려던 때였다. 따라서 일제의 계획상 고종은 죽어서는 안 되었기에, 안상호의 독살설과 고종 독살설 자체의 신빙성은 낮다.[3]
3. 3. 독살설에 대한 반론
1919년 고종 황제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궁중의 전의들이 치료했으나, 갑자기 의식을 잃고 회복되지 않자 이왕직 촉탁의였던 안상호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궁중 진료는 절차가 복잡하고, 별것 아닌 일로 법석을 떠는 경우가 많아 안상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후 의친왕의 전화를 받고 급히 진료했으나, 고종 황제가 사망하자 일본인의 사주를 받아 독약을 올렸다는 모함을 받아 곤욕을 치렀다.[2]이 사건은 경찰의 제지로 별일 없었으나, 1920년대 말 한국 의학계의 선구자인 정구층 박사가 의친왕에게 당시 상황을 묻자, 의친왕은 "내가 안상호를 불러 진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라며 소문을 부인했다.[2]
안상호가 독살설에 연루된 것은 그의 가정사가 대중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왕세자의 결혼 예정일 직전에 《매일신보》는 〈왕세자 전하 가례 전에 일선동체의 가정 방문〉(1918.12.8~12)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이 중에 안상호의 가정도 있었다. 안상호의 집은 완전한 일본 가정과 같았고, 안상호는 일본인 아내와 함께 오남매를 일본식으로 키우며 행복을 자랑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당시 사람들에게 그를 민족을 배반한 친일분자로 인식하게 했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당시 조선인들은 독살과 같은 음모가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이때 언론을 통해 친일파로 낙인찍힌 전의 안상호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2]
그러나 고종이 사망한 1919년 1월은 일본 제국이 한일 병합 조약을 전 세계에 '행복한 결합'으로 선전하기 위해 왕세자 이은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 마사코를 정략결혼시키려던 때였다. 따라서 일본의 계획상 고종은 죽어서는 안 되었기에, 안상호의 독살 가능성뿐만 아니라 고종 독살설 자체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한다.[3]
참조
[1]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안상호
[2]
뉴스
"[이영아의 여론女論] 안상호의 고종독살설은 왜"
http://www.joongang.[...]
중앙일보
2011-08-18
[3]
서적
왕세자 혼혈결혼의 비밀
푸른역사
2017-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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