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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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일신보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후 경성일보가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발행한 일간 신문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수행하며 일제의 통치에 협조적인 논조를 보였다. 1915년 한국 최초로 신춘문예를 시행했고, 1920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기자를 채용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 군정과의 충돌로 정간되었다가 서울신문으로 제호가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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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 대한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이 창간하여 일제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며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 기관지로 전락한 한국 언론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매체이다. - 1910년 창간 - 서울신문
서울신문은 1904년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역사를 잇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종합일간지로, 일제강점기 총독부 기관지 시기를 거쳐 광복 후 민족 언론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했으며, 온라인 뉴스 공급 시스템 구축, 사회 사업, 주 5일 발행 체제 도입 등 변화를 시도해왔으나 과거 정부 편향적 보도 논란도 있었다. - 1910년 창간 - TES (잡지)
《더 타임스 교육 부록》은 1905년 창간된 영국의 교육 잡지로, 교육 개혁 지지, 교육 정책 논의 촉진, 교사 정보 제공, 교육 관련 기사 게재를 통해 교육 분야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TES 학교상 및 TES 국제 학교상을 개최하여 교육 분야의 우수성을 기리고 있다. - 1945년 폐간 - 경성일보
경성일보는 1906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창간되어 통감부와 총독부의 기관지로 사용된 일본어 신문이며, 친일적 성격을 띠고 조선일보 등 민간 신문보다 규모와 영향력이 컸으나 1945년 폐간되었다. - 1945년 폐간 - 데어 앙그리프
요제프 괴벨스가 창간한 나치당의 신문 데어 앙그리프는 당의 지원을 받아 반의회주의와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을 선동하고 나치즘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으나, 나치 정권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다 1945년 폐간되었다.
매일신보 | |
---|---|
기본 정보 | |
창간일 | 1910년 8월 30일 |
폐간일 | 1945년 8월 15일 |
발행국 | 대한제국(1910) → 일제강점기(1910~1945) |
발행 언어 | 한국어, 일본어 |
성격 | 신문 |
발행 횟수 | 매일 |
역사 | |
창간 | 대한제국 말기인 1910년 8월 30일, 일제가 《경성일보》를 매수하여 창간 |
역할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 수행 |
폐간 | 1945년 광복과 함께 폐간 |
특징 | |
언어 | 한국어와 일본어의 혼용 |
내용 | 조선총독부의 정책 홍보,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기사 다수 게재 |
비판 | 언론의 본질을 저버리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대표적인 친일 매체라는 비판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미즈노 렌타로, 오카다 미요시 |
기타 | |
관련 문서 | 경성일보, 조선총독부, 친일반민족행위 |
2. 역사
매일신보는 베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를 전신으로 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경성일보가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제호에서 ‘대한’을 뺀 뒤 경성일보 자매지로 발행을 시작했다.
일본인이 사장을 맡은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협조적인 관제 일간지였다. 경성일보와의 통합, 분리를 거치며 1937년 이후 제호가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변경되고 경영 형태는 주식회사로 바뀌었으나, 주식의 과반수는 조선총독부가 소유했다.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고, 태평양 전쟁 중 두 신문이 강제 폐간되면서 1940년부터 다시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 되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과 조선총독부 해체 이후, 좌파 계열 사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던 중 미 군정과 충돌하여 11월 10일 정간되었다가, 이후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였다.
2. 1. 대한매일신보 인수와 창간 (1910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경성일보는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고 제호를 '매일신보'로 변경하여 발행을 시작했다.[1]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며 항일 언론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지만,[1] 매일신보는 일본인이 사장을 맡아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협조하는 관제 신문으로 변모했다.[1]2. 2. 일제 강점기 활동 (1910년 ~ 1945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 경성일보는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꾸고 자매지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반일 성향을 띄었지만, 매일신보는 일본인 사장을 중심으로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협조하는 관제 일간지였다.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 매일신보는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다.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0년에 두 신문이 강제 폐간되면서 다시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 되었다.
1937년 매일신보는 주식회사로 전환되었으나, 주식의 과반수는 여전히 조선총독부가 소유하고 있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해체되면서, 진보적인 사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과의 충돌로 인해 그해 11월 10일 정간 명령을 받았다. 이후 속간되면서 제호는 서울신문으로 변경되었다.
2. 2. 1. 신춘문예와 여기자 채용
1915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신춘문예를 시행했다. 1914년 12월 10일 자 3면 중앙에 '신년문예모집' 공고를 냈다. 당시 모집 분야는 '시, 문, 시조, 언문줄글, 언문풍월, 우슘거리, 가(창가), 언문편지, 단편쇼셜, 화(그림)'이었다.[1]1912년 2월 9일의 "현상모집"은 신춘문예의 정의를 바탕으로 할 때, 그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각지기문(各地奇聞), 속요(俗謠), 소화(笑話), 시(詩), 단편소설(短篇小說), 서정서사(敍情敍事)’의 6개 부문에서 작품을 모집했다. 1919년 12월 2일의 "현상모집"에서는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한시, 신체시, 시조, 미어(謎語, 수수께끼), 만화를 모집했는데, 마감일은 12월 15일이었다.[2]
1920년 7월 2일자 사고(社告)에서 한국 최초로 여기자 채용 공고를 내었으며, 이때 채용된 기자가 이각경이다. 채용 공고에서 전제조건이 “남편이 있어야 한다”였으며, 그 호칭은 “부인 기자”였다.[3]
한국 최초의 여기자 이각경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재직 중 명사의 인터뷰를 주로 썼다고 한다. 이각경이 쓴 최초의 기사는 1921년 1월 1일자 ‘신년 벽두에 제하여 조선 가정의 주부께’라는 계몽적인 내용의 논설이었다.
2. 3. 광복과 서울신문으로의 전환 (1945년)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그해 9월 2일 조선총독부가 해체되면서 좌파 계열 사원들, 즉 진보적인 정치, 사회의식을 가진 사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던 중 미군정과 충돌을 빚어 그해 11월 10일 정간 명령이 내려졌다.[1] 이후 속간되면서 제호가 서울신문으로 변경되었다.[1] 1945년 일본의 패전과 총독부 해체에 따라, 좌익 계열의 직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는 가운데, 미군정과의 충돌을 반복하면서 같은 해 11월 10일에 일시 폐간 명령이 내려졌고, 11월 23일에 현재의 『서울신문』으로 복간하였다.3. 논조
대한매일신보는 반일 성향이 강했지만, 일본인이 사장을 맡은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협조적인 논조를 펼쳤다.[1]
3. 1. 조선총독부 기관지 역할
1910년 일한 병합 조약 체결 직후, 경성일보가 대한매일신보의 경영을 이어받아 『매일신보』로 개편한 후 경성일보의 자매지로 발행을 시작하였다.[1]반일 성향이 강했던 대한매일신보와 달리, 일본인이 사장을 맡은 매일신보는 총독부의 통치에 협조적인 논조를 펼쳤다.[1] 1937년 제호를 『매일신보』로 변경하면서 주식회사로 전환되었을 때에도 주식의 과반수를 조선총독부가 소유하고 있었다.[1]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까지, 한글로 발행되는 유일한 신문이었다.[1] 태평양 전쟁 개전 전년인 1940년 전시 체제 확립에 따라 총독부의 의향으로 앞서 언급한 두 신문이 폐간되면서 다시 한글로 쓰인 유일한 신문이 되었다.[1]
4. 평가
매일신보는 대한매일신보를 경성일보가 경영을 이어받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 총독부의 통치에 협조적인 논조로 개편한 신문이다. 이는 반일 성향이 강했던 대한매일신보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1] 1937년 주식회사로 전환되었지만, 주식의 과반수를 조선총독부가 소유하여 사실상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수행하였다.[1]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 그리고 1940년 전시 체제 확립에 따라 두 신문이 폐간된 이후에는 한글로 발행되는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나, 매일신보의 친일 행적은 더욱 비판받아야 한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1]
한편, 매일신보는 1915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신춘문예를 시행하였고, 1920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기자를 채용하기도 하였다.
4. 1. 긍정적 평가
매일신보는 1915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신춘문예를 시행하였다. 1914년 12월 10일치 3면 중앙에 '신년문예모집' 공고를 냈는데, 당시 모집 분야는 '시, 문, 시조, 언문줄글, 언문풍월, 우슘거리, 가(창가), 언문편지, 단편쇼셜, 화(그림)'이었다.[1]1912년 2월 9일의 "현상모집"은 신춘문예의 정의를 바탕으로 할 때, 그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각지기문(各地奇聞), 속요(俗謠), 소화(笑話), 시(詩), 단편소설(短篇小說), 서정서사(敍情敍事)’의 6개 부문에서 작품을 모집했다. 1919년 12월 2일의 "현상모집"에서는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한시, 신체시, 시조, 미어(謎語, 수수께끼), 만화를 모집했는데, 마감일은 12월 15일이었다.[2]
1920년 7월 2일자 사고(社告)에서는 한국 최초로 여기자 채용 공고를 내었으며, 이때 채용된 기자가 이각경이다. 채용 공고에서 전제 조건은 “남편이 있어야 한다”였으며, 그 호칭은 “부인 기자”였다.[3] 한국 최초의 여기자 이각경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재직 중 명사의 인터뷰를 주로 썼다고 한다. 이각경이 쓴 최초의 기사는 1921년 1월 1일자 ‘신년 벽두에 제하여 조선 가정의 주부께’라는 계몽적인 내용의 논설이었다.
4. 2. 부정적 평가
1910년 일한 병합 조약 체결 직후, 경성일보가 대한매일신보의 경영을 이어받아 『매일신보』로 개편하면서, 매일신보는 총독부의 통치에 협조적인 논조를 펼쳤다. 이는 반일 성향이 강했던 대한매일신보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1] 1937년 『매일신보』로 제호를 변경하고 주식회사로 전환되었지만, 주식의 과반수를 조선총독부가 소유하여 사실상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수행하였다.[1]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 그리고 1940년 전시 체제 확립에 따라 두 신문이 폐간된 이후에는 한글로 발행되는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점에서, 매일신보의 친일 행적은 더욱 비판받아야 한다.[1]
참조
[1]
뉴스
신춘문예 100년과 <한겨레>
한겨레신문
2015-01-02
[2]
논문
신춘문예제도의 명칭과 기원에 관한 연구
한국시학회
2016
[3]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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