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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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덕영은 1873년 출생하여 1894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적극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조카인 순정효황후의 옥새를 탈취하고, 고종 독살 의혹을 받는 등 친일 행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1935년에는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되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 결과 토지가 국가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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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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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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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윤덕영 |
한자 표기 | 尹德榮 |
한글 표기 | 윤덕영 |
로마자 표기 | Yun Deok-yeong |
본관 | 해평 윤씨 |
출생일 | 1873년 12월 27일 |
사망일 | 1940년 10월 18일 |
아버지 | 윤철구 |
배우자 | 김복환 |
친척 | 윤택영 (동생) 순정효황후 (조카) |
작위 정보 | |
작위 | 자작 |
후임자 | 윤강로 |
관직 정보 | |
기타 | |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관련 기사 | 옥인동 ‘벽수산장’ 敵産인가 유산인가 |
2. 생애
1873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2] 189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경기도와 황해도 관찰사, 철도원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1908년 조카딸 순정효황후가 황후로 책봉된 후 시종원경에 임명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가담하여 일본 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병합 후에는 이왕직 찬시, 장시사장,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대제학, 왕공족 심의관, 귀족원 의원 (1939년 12월 19일[3] ~ 1940년 10월 18일[4])을 역임했으며, 1940년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38년에는 욱일대수장을 받았다.[1]
2. 1. 관직 생활
1894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다. 1895년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총리대신 비서관 겸 참서관, 시독관, 내부 지방국장, 법무국장 등에 임명되었다.1901년 경기도관찰사로 궁내부특진관을 겸임하였다. 그 후 경기도, 황해도 관찰사와 대한제국 광무 4년에 설치된 관청인 철도원 부총재 등을 지냈다. 조카 순정효황후가 황후에 책봉된 다음해인 1908년 시종원경에 임명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에 사망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회를 열었다.[8]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에는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국새를 빼앗는 따위의 방법으로 늑약 체결에 가담하여 일본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그가 한일 합방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그의 조카 딸인 순정효황후는 자신의 치마 속에 옥새를 숨겨두었으나 그는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하였다.
훈1등 자작으로 합방 은사금 50000JPY을 받았으며, 이왕직찬시(李王職贊侍)가 되었고 곧 장시사장(掌侍司長)이 되었다.
1917년 순종의 일본 다이쇼 천황 방문 추진에 관여하였다. 2년 후 영친왕의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소문으로 떠돌던 고종 독살설에서 윤덕영은 고종을 독살한 인물로 의심 받고 있다.[9]
1919년 고종의 사망 당시 조선총독부의 임명장인 첩지를 위조하여 물의를 빚었다. 고종의 부묘의식 때는 수고한 민간에게 참봉 등 상작을 주던 옛 법을 이용하여 차비원(差備員) 명목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여사군(轝士軍)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서 문제가 되었다.
1925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0년 사망 직전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0][11] 1939년 창씨 개명을 놓고 해평 윤씨 문중 종친회가 열렸을 때 강력하게 창씨 개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윤치호에 의하면 그의 자존심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 한다.
2. 2. 한일 병합 조약 체결 가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국새를 빼앗는 등의 방법으로 조약 체결에 가담하여 일본 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8] 순정효황후는 자신의 치마 속에 옥새를 숨겼으나, 윤덕영은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하였다.2. 3. 일제 강점기 활동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국새를 빼앗는 방법으로 조약 체결에 가담하여 일본 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8] 순정효황후는 옥새를 치마 속에 숨겼으나, 윤덕영은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빼앗았다.훈1등 자작으로 합방 은사금 50000JPY을 받았으며, 이왕직 찬시(李王職贊侍)와 장시사장(掌侍司長)을 역임했다.
1917년 순종의 다이쇼 천황 방문 추진에 관여하였다. 1919년 영친왕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고종 독살설에서 윤덕영은 고종을 독살한 인물로 의심받고 있다.[9]
1919년 고종 사망 당시 조선총독부의 임명장인 첩지를 위조하여 물의를 빚었다. 고종의 부묘 의식 때 수고한 민간인에게 참봉 등 상작을 주던 옛 법을 이용, 차비원(差備員) 명목으로 총독부 인가를 받은 여사군(轝士軍)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 문제가 되었다.
192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0년 사망 직전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0][11] 1939년 창씨개명을 놓고 해평 윤씨 문중 종친회가 열렸을 때 강력하게 창씨개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의 자존심 때문에 반대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2. 4. 창씨개명 반대
1939년 창씨 개명을 놓고 해평 윤씨 문중 종친회가 열렸을 때 강력하게 창씨 개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윤치호에 의하면 그의 자존심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 한다.[10][11]2. 5. 사망
192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0년 사망 직전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0][11] 1939년 창씨개명을 놓고 해평 윤씨 문중 종친회가 열렸을 때 강력하게 창씨개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윤치호에 의하면 그의 자존심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 한다.3. 논란 및 비판
윤덕영은 여러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고종은 고영희에게 명나라의 황릉을 본떠 경기도 금곡에 왕릉을 조성할 것을 명했으나, 윤덕영은 고종 사후 비용 문제를 이유로 명성황후의 홍릉에 합장할 것을 주장했다. 곤도 시로스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주장이 한일병합 이후 '능(陵)'이라는 존칭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2]
윤덕영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에 1910년부터 땅을 매입하여 10년 넘게 걸려 '벽수산장'이라는 대저택을 건설, 1935년에 완공했다. 그러나 1940년에 사망하여 실제로 사용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3. 1. 홍릉 합장 주장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은 생전 고영희에게 명나라의 황릉을 본떠 경기도 금곡에 왕릉을 조성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윤덕영은 고종 사후 비용 문제를 이유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홍릉에 합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곤도 시로스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주장이 한일병합 이후 '능(陵)'이라는 존칭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12]3. 2. 벽수산장
윤덕영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1910년부터 계속 매입하여 넓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10년 넘는 기간 동안 ‘벽수산장’이라는 대저택을 건설하여 1935년 완공시켰다. 그러나 5년 뒤인 1940년에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가 사용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4. 사후 평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3]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부인 김복수, 자신의 작위를 습작 받은 양손자 윤강로도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윤덕영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13]
5. 가족 관계
6. 일화
이왕궁 비사의 저자 곤도 시로스케(権藤四介)는 윤덕영의 행동을 "옛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리한 시도까지 하면서 한일 병합 이후 중대한 안건을 해결하였다", "그 집요함, 대담함, 거칠 것 없음 그리고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는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그 수단의 신랄함, 냉혹함, 거기에 끈질김은 참으로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12]
6. 1. 순종의 천황 알현 강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대한제국 황제가 천황을 알현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민심이나 황실 분위기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데라우치는 자신의 후임으로 제2대 조선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천황 알현이라는 중대 사안은 모두 하세가와에게 맡긴다는 말을 남겼다. 하세가와는 대한제국 황제의 천황 알현을 직접 지휘하여, 처음에는 이완용을 시켜서 성사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12]이후 하세가와는 윤덕영을 통해 이를 추진하였다. 윤덕영은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을 일주일간 대면하여 압박하였는데, 고종이 피곤하여 누우면 윤덕영은 별실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종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결정을 독촉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윤덕영은 이왕직 차관 고쿠부 쇼타로와 공모하여 당시 이왕직 장관인 민병석의 동의와 하세가와 총독의 뜻에 따라 덕수궁 내의 십보기구를 정리한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덕수궁 내의 크고 작은 창고부터 고종의 신변에 있는 문고와 서함까지 엄밀히 검사하여 개개마다 봉인을 붙였다. 또 이 물건들을 보관하던 상궁을 파면하여 궁 밖으로 쫓아내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크게 분노하였으나, 윤덕영은 상시사장의 직권이라고 말하였다.[12]
윤덕영은 30여 년 전 명성황후 사후 왕후를 다시 맞기 위하여 김씨 가문의 규수가 간택되었지만 왕실 사정으로 30여 년간 규방에 머물고 있던 일을 고종에게 꺼내며 압박하였다. 매일 오후 2~3시부터 오전 2시 무렵까지 고종 앞에 똑바로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 고종이 결정하도록 하였다. 윤덕영은 당시 47세가 된 김씨 규수를 덕수궁에 입궁시켰으나 고종은 정화당이라는 당호만을 내리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결국 천황 알현을 허락하였는데, 자신 대신 창덕궁에 머물던 순종에게 알현하도록 하였다.[12]
참조
[1]
서적
子爵斎藤実伝. 第2巻
https://dl.ndl.go.jp[...]
斎藤子爵記念会
1942
[2]
웹사이트
윤덕영(尹德榮)
http://encykorea.aks[...]
2022-06-21
[3]
서적
貴族院要覧(丙)
1946-12
[4]
서적
貴族院要覧(丙)
1946-12
[5]
웹사이트
議会制度七十年史. 第1
https://dl.ndl.go.jp[...]
1960-12
[6]
간행물
官報
1916-12-13
[7]
웹인용
[책의 향기]옥인동 ‘벽수산장’ 敵産인가 유산인가
https://www.donga.co[...]
2023-10-03
[8]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9]
뉴스
일본인들도 “저하 납시오!” - 강점기 ‘일본인 황족’으로 존엄한 대우 … 영친왕은 일본 군부에서 출세 거듭
http://www.donga.com[...]
주간동아
2006-10-24
[10]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8-04-16
[11]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8-04-16
[12]
서적
대한제국 황실 비사
이마고
2007-08-06
[13]
뉴스
민영휘 등 친일파 재산 257억 국가귀속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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