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1. 개요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은 1905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에 반대하며, 동유럽 민간인에 대한 인도적 대우를 주장했다.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후임으로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의 참모장이 되었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체포되어 벤들러블록에서 총살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유해가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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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된 7월 20일 음모자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 귀족 출신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 암살 계획인 7월 20일 음모를 주도했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으며, 전후 나치즘에 저항한 독일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
처형된 7월 20일 음모자 -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정권에 저항한 독일 군인으로, 발키리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하려다 실패하여 처형되었으며 사후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조성되었다. -
1944년 사망 -
한용운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로,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불교 혁신과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저항 문학을 대표했다. -
1944년 사망 -
마누엘 L. 케손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마누엘 L. 케손은 필리핀 코먼웰스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필리핀의 자치권 확보와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타갈로그어 국어 채택, 사회 정의 프로그램 추진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망명하여 필리핀의 완전 독립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
오토 카리우스
오토 카리우스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150대 이상의 적 전차를 격파한 독일 국방군의 전차 에이스였으며, 종전 후 약학을 공부하여 약국을 운영하다 2015년에 사망했다. -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
발두어 폰 시라흐
발두어 폰 시라흐는 나치 독일 시대 히틀러 유겐트의 국가 지도자였던 독일 정치인으로, 나치즘에 심취하여 히틀러 유겐트를 합법적인 청소년 단체로 성장시키고 빈의 가우라이터 겸 제국총독으로 활동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 생애
크비른하임은 1905년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바이에른 군 참모부 대위 헤르만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이 국립공문서관 총재로 임명되면서 1919년 포츠담으로 이사하였다. 이때부터 베르너 폰 헤프텐과 한스 베른트 폰 헤프텐 형제 등 훗날 공모 관계가 되는 인물들과 알게 되었다. 아비투어 합격 후에는 제국방위군에 입대하였다. 1925년부터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친분을 쌓았으며, 이후 슈타우펜베르크와 함께 1944년 음모에 가담하여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
이후 크비른하임은 결혼하였다.
2.1. 군 경력
크비른하임은 1923년 아비투어 합격 후 국방군(Reichswehr)에 입대하였다. 1925년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친구가 되었고, 1928년에 소위, 1931년에 중위로 진급하였다.
나치의 권력 장악을 처음에는 환영했으나 점차 반대하게 되었고, 1935년에 대위,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에 소령, 1942년에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전쟁 초반에는 참모본부의 조직부 참모를 맡았으나, 나치가 점령한 동유럽 지역 시민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자는 주장으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 우크라이나 제국판무관 에리히 코흐와 마찰을 빚었다. 1942년, 반(反) 히틀러 운동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동부 전선에 전속되어 제24군단 참모장이 되었다. 다음 해에는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후임으로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의 참모장 (Chef des Stabes im Allgemeinen Heeresamt독일어) 이 되었다. 그 해 7월 20일, 크비른하임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실행하였으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크비른하임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베르너 폰 헤프텐과 함께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과 헌병에게 체포되어 베를린의 밴들러블록에서 총살되었다. 밴들러블록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가매장 되었던 시체는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으로 파헤쳐져 화장되었고, 유회는 뿌려졌다.
2.2.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1943년 9월, 크비른하임은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하였다. 그는 상관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 그리고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함께 히틀러 암살 직후 실행될 발키리 작전을 계획하였다. 크비른하임은 베를린 육군 참모 본부에서 슈타우펜베르크의 참모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1944년 7월 20일, 동프로이센에서 히틀러 암살 시도가 있은 직후, 크비른하임은 올브리히트 장군에게 발키리 작전을 즉시 가동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올브리히트는 결국 계획을 실행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에서 그들과 합류했다. 히틀러의 생존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몇 시간 안에, 크비른하임, 슈타우펜베르크, 올브리히트, 그리고 베르너 폰 헤프텐은 체포되었다. 이들은 음모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후 그들을 배신한 프리드리히 프롬 대령에 의해 즉결 심판을 받았다. 이후 벤들러블록의 안뜰로 끌려가 총살되었는데, 크비른하임은 올브리히트 다음으로 총살되었다. 시신은 베를린 쇠네베르크 지구의 마테우스 교회 묘지에 묻혔고, 사건을 기념하는 돌이 교회 묘지에 세워졌다. 하인리히 힘러는 이후 시신을 발굴하여 화장하고 유해를 흩뿌리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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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후
1944년 7월 20일 동프로이센에서 히틀러 암살 시도가 있은 직후, 크비른하임은 히틀러가 사망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브리히트 장군에게 발키리 작전을 즉시 가동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히틀러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는 소식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브리히트는 결국 계획을 실행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에서 그들과 합류했다. 히틀러의 생존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음모는 실패했다.
몇 시간 안에, 크비른하임, 슈타우펜베르크, 올브리히트, 그리고 베르너 폰 헤프텐은 체포되었고, 음모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후 그들을 배신한 조용한 지지자였던 프리드리히 프롬 대령에 의해 즉결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벤들러블록의 안뜰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크비른하임은 올브리히트 다음으로 네 명 중 두 번째로 총살되었다. 시신은 베를린 쇠네베르크 지구의 마테우스 교회 묘지에 묻혔고, 사건을 기념하는 돌이 교회 묘지에 서 있다. 하인리히 힘러는 이후 시신을 발굴하여 화장하고 유해를 흩뿌리도록 명령했다.
며칠 후, 크비른하임의 부모와 그의 누이 중 한 명이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그의 매형 빌헬름 디크만은 1944년 9월 13일에 처형되었다.
현재 크비른하임과 그의 공모자들이 총살된 벤들러블록 벽에는 기념비가 있다.
4. 평가 및 영향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은 나치 정권에 저항하여 7월 20일 음모에 가담, 히틀러 암살 및 쿠데타를 시도한 점은 높이 평가받지만, 초기 군 경력과 나치 정권 협력은 비판받기도 한다.
그의 행동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사회에서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되었으며, 독재에 맞선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