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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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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1907년 독일 바이에른 왕국에서 태어난 독일 귀족 출신 군인으로, 1944년 7월 20일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1930년 사관학교 수석 졸업 후 군 복무를 시작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나치 정권의 인종주의와 폭력에 반대하며 히틀러 암살을 계획, 실행했으나 실패하여 즉결 처형되었다. 전후 그는 반나치 저항 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베를린의 슈타우펜베르크 거리와 독일 저항 기념관을 통해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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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슈타우펜베르크, 1944년
슈타우펜베르크, 1944년 6월
본명클라우스 필리프 마리아 유스티니아누스 셴크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
출생1907년 11월 15일
출생지예팅겐, 바이에른, 독일 제국
사망1944년 7월 21일
사망지베를린, 가우 베를린, 나치 독일
사망 원인총살형
작위(백작)
소속
충성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독일 저항 (1943–1944)
복무 기간1926–1944년
계급(참모 대령)
병과국방군
국방군 육군
전투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바르바로사 작전
튀니지 전역
가족 관계
배우자마그달레나 프라이인 폰 레르헨펠트 (1933년 9월 26일 결혼)
자녀5명 (베르톨트, 프란츠-루트비히, 콘스탄체 포함)
친척알렉산더 셴크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 (형제)
베르톨트 셴크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 (형제)

2. 생애와 유년시절

슈타우펜베르크는 프로이센 귀족 가문 출신으로, 네 아들 중 셋째였다. 쌍둥이 형 베르톨트와 알렉산더가 있었고, 막내 동생 콘라트는 태어난 직후 사망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장했으며, 문학과 미술에 재능을 보여 슈테판 게오르게에게 시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가문의 전통에 따라 밤베르크 제17기병 연대에 입대하여 사관후보생이 되었다.[77] 훗날 7월 20일 음모에 함께 가담하는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을 이때 만났다.

2. 1. 가문 배경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은 독일 남부 지역에서 명망 있는 귀족 가문으로, 그의 증조부는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인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 장군이다.[77] 슈타우펜베르크는 1907년 11월 15일 예팅겐의 슈타우펜베르크 성에서 태어났으며 클라우스 필리프 마리아 유스티니아누스로 세례를 받았다.[1][2][3]

Stauffenberg (Adelsgeschlecht)|슈타우펜베르크 가문de의 역사는 13세기 슈바벤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촐레른 백작 가문을 섬기던 귀족이 "시종"(Schenk, 쉔크)으로 임명되면서 "쉔크"를 가문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귀족은 "슈타우펜베르크"를 포함한 다양한 성을 사용했는데, 이는 슈바벤의 산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15세기 말, "쉔크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영구적인 가문 이름이 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은 169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로부터 남작(Freiherr) 작위를 받으며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슈타우펜베르크 남작가는 네 개의 분가로 나뉘었으나, 두 분가는 18세기에 단절되었고, 빌프링겐과 아멜딩겐을 영지로 하는 두 분가만이 남았다. 1791년 빌프링겐 분가는 레오폴트 2세로부터 제국 백작(Reichsgraf)으로 서임되었지만 1833년 단절되었다. 결국 아멜딩겐 분가만이 남았으며, 이들은 17세기18세기에 그라이펜슈타인, 예팅겐, 라우틀링겐 등을 영지로 삼았다.

클라우스의 증조부인 프란츠 루트비히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1874년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로부터 백작(Graf) 작위를 받았다. 이후 프란츠 루트비히의 후손들은 백작 가문을 이루었다.

프란츠 루트비히의 장남은 클레멘스이며, 클레멘스의 차남이 클라우스의 아버지인 알프레트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이었다. 알프레트는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의 영지 중 뷔르템베르크 왕국 영토에 속하는 라우틀링겐을 영지로 삼았다.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은 대대로 가톨릭 신앙을 지켜왔다.

2. 2. 출생과 성장

클라우스 셴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은 1907년 11월 15일 독일 제국바이에른 왕국의 예팅겐에 있는 에서 태어났다.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은 독일 남부지역에서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77]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태어난 예팅겐 성(Schloss Jettingen).


아버지 알프레트 셴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은 뷔르템베르크 왕국 라우틀링겐의 영주이자, 뷔르템베르크 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한 인물이며, 빌헬름 2세의 슈투트가르트 궁전에서 시종장으로 왕가를 섬겼다. 어머니 카롤리네는 중령 알프레트 리하르트 아우구스트 폰 유크스퀼-길렌반트 백작의 딸이었으며, 카롤리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프로이센 원수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 백작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네 아들 중 셋째였으며, 쌍둥이 형 베르톨트와 가 있었고, 동생 콘라트는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어린 시절 슈타우펜베르크는 바이에른에서 성장했으며, 독일 스카우트 연맹인 노이파프트핀더de와 독일 청년 운동의 일원이었다.[7][8][9][10] 1916년에는 슈투트가르트 최고의 명문 김나지움인 에 입학하여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황 악화로 학교가 폐쇄되기도 했지만, 전쟁 이후 형들과 함께 학교로 돌아갔다. 허약했던 슈타우펜베르크는 가정교사에게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1923년경,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의 세 자녀는 낭만주의·신비주의·귀족주의적인 철학자·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의 제자가 되어 그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문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결국 가족의 전통에 따라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26년, 그는 가족의 전통적인 부대인 밤베르크의 제17기병연대(Reiterregiment 17)에 입대했다.[11] 알브레히트 폰 블루멘탈은 세 형제를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의 영향력 있는 모임인 ''게오르게크라이스''에 소개했는데, 여기서 나중에 독일 저항 운동의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12]

1930년, 슈타우펜베르크는 소위de(소위)로 임관했으며, 프로이센 군사 학교(Kriegsakademie)에서 현대 무기를 공부했지만, 말을 현대전에 사용하는 것에 집중했다.[13]

3. 군 경력

1930년 슈타우펜베르크는 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 동료와 교관들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니나 폰 레르헨펠트'와 약혼하고 1933년에 결혼했다.

1933년 나치스 정권 수립 후, 슈타우펜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국 독일을 재건하려는 국가주의적 정책에 관심을 보였다. 한때 히틀러를 '독일 민족을 구할 지도자'로 존경했으나, 나치스의 가톨릭 부정, 인종주의, 극단적 일당 독재에 갈등하며 모순점을 인식했다.[78]

1936년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학, 1938년 수석 졸업 후 대위로 진급하여 육군 참모본부에 보직되었다. 히틀러의 호전성이 심화되면서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등 군부 내 '반나치주의' 세력이 히틀러 제거를 모색했으나, 당시 히틀러의 높은 지지로 인해 미온적으로 끝났다.

1938년~1939년 사이 슈타우펜베르크는 주변국 침략과 유대인 탄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나치스의 인명 경시와 극단적 인종주의에 반대, 유대인 학살이 심해지자 히틀러 암살 및 나치스 타도를 결심했다.

1943년 중령으로 진급, 북아프리카에서 제10 기갑사단 참모장을 맡았다.[80] 같은 해 4월 7일 영국 전투기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고 뮌헨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왼쪽 눈, 왼쪽 손,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81][82] 이후 히틀러 암살 계획 가담을 결심, 루트비히 베크 중심의 '반나치세력'에 합류했다.

1943년 7월 1일 대령으로 진급, 베를린 국방군 본부 예비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프리드리히 프롬을 상관으로 만났다. 프롬은 '반나치세력'을 알면서도 협조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슈타우펜베르크는 패전을 확신하고 즉각 휴전만이 조국을 구할 길이라 믿었다. 1943년 말, 그는 독일의 즉각 휴전 조건으로 1914년 국경( 폴란드의 비엘코폴스카와 포즈나뉴 포함) 인정,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 유지, 알자스-로렌 자치권 부여, 티롤, 볼자노, 메라노 병합 등을 요구했다. 또한 연합군의 독일 점령 불허, 전범 인도 거부 등을 요구했으나, 이는 서방 연합국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은 서쪽, 북쪽, 남쪽에서만 물러나고 동쪽 점령지 유지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베크 중심의 '반나치세력'과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이 전쟁 종결 방법임을 깨달았다.[83]

3. 1. 바이마르 공화국군 시절

1926년 4월 1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바이에른 주 밤베르크에 주둔한 바이마르 공화국군 제17기병연대에 입대했다.[78] 군인의 길을 선택하기 전에는 음악가나 건축가를 지망하기도 했다. 1927년 8월 18일 병장사관후보생이 되었고, 드레스덴 보병학교와 하노버 기병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1930년 1월 1일, 장교 임관 시험에 기병 수석으로 합격하여 소위로 임관했다.[78]

1930년 슈타우펜베르크는 상관과 동료들로부터 군사적, 지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이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78] 쾌활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는 경우가 많았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인물이었다.[78]

1930년 11월 15일, Nina Schenk Gräfin von Stauffenberg|니나 쉔크 그라핀 폰 슈타우펜베르크|니나 폰 슈타우펜베르크de 남작 영애와 약혼하고, 1933년 9월 밤베르크에서 결혼했다.[78] 그녀의 아버지는 바이에른 왕실의 시종장이었다.

1930년 11월부터 1931년 2월까지 포츠담에서 박격포 연수를 받았고, 이후 제17기병연대의 박격포 부대 지휘관이 되었다.[78]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슈타우펜베르크는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보수적인 애국자로서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독일 육군 재건을 원했다. 그는 군인은 어떤 정부에서든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충성했다.[78]

3. 2. 나치 독일군 시절

1930년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슈타우펜베르크는 동료와 교관들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바이에른 귀족 가문 출신인 '니나 폰 레르헨펠트'와 약혼하고 1933년에 결혼했다.

1933년 나치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슈타우펜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을 재건하려는 국가주의적 정책에 관심을 가졌다. 한때 히틀러를 '독일 민족을 구할 지도자'로 존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스의 가톨릭 부정, 인종주의, 극단적 일당 독재 경향에 종교적, 도덕적 갈등을 겪으며 나치스의 모순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78]

1936년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1938년 수석 졸업 후 대위로 진급, 육군 참모본부에 보직되었다. 히틀러의 호전성이 심화되면서 군부 내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등 '반나치주의' 세력이 결집하여 히틀러 제거를 모색했으나, 당시 히틀러의 높은 지지 때문에 미온적으로 끝났다.

1938년~1939년 사이 슈타우펜베르크는 주변국 침략과 유대인 탄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그는 나치스의 인명 경시와 극단적 인종주의에 반대하며, 유대인 학살이 심해지자 히틀러 암살 및 나치스 타도를 결심했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슈타우펜베르크는 6사단 참모장교로서 1939년 폴란드 전선과 1940년 서부전선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1940년 5월 31일 프랑스 함락 후 1급 철십자 훈장을 받고 육군 최고 수뇌부로 전직했다.

1941년 독소전쟁 발발 후 병참장교로 임명된 그는 러시아 전선에서 나치 무장친위대의 만행에 충격을 받았다.[79] 1941년 독소전쟁 발발과 함께 페도르 폰 보크의 참모 '트레슈코프' 소장 등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히틀러 암살 계획'이 다시 시작되었다. 트레슈코프는 비밀 조직을 만들고 1942년에는 베를린 주둔 예비군 사령관 올브리히트 장군을 포섭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트레슈코프의 포섭 제안에 동의했다. 1942년 히틀러의 군사적 무능함에 실망한 그는 히틀러 제거만이 독일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육군 총사령부 관리 부서에서 근무하며 히틀러의 학살 명령에 반대하고 소련 점령지 정책 완화를 위해 노력했다.

1942년 11월,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횃불작전)과 엘 알라마인 전투 승리 후, 슈타우펜베르크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에르빈 롬멜아프리카 군단 제10 기갑사단 작전장교로 부임했다.[80] 1943년 중령으로 진급하여 제 10 기갑사단의 참모장을 맡게 되었다.[80] 1943년 4월 7일 영국 전투기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고 뮌헨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왼쪽 눈, 왼쪽 손,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81][82] 그는 히틀러 암살 계획 가담을 결심하고, 퇴원 후 루트비히 베크 중심의 '반나치세력'에 합류했다.

1943년 7월 1일 대령으로 진급, 베를린 국방군 본부 예비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프리드리히 프롬을 상관으로 만났다. 프롬은 '반나치세력'에 대해 알면서도 협조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슈타우펜베르크는 패전을 확신하고 즉각 휴전만이 조국을 구할 길이라 믿었다. 1943년 말, 그는 독일의 즉각 휴전 조건으로 폴란드의 비엘코폴스카와 포즈나뉴를 포함하는 1914년 국경 인정,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 유지, 알자스-로렌 자치권 부여, 티롤, 볼자노, 메라노 병합 등을 요구했다. 또한 연합군의 독일 점령 불허, 전범 인도 거부 등을 요구했으나, 이는 서방 연합국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은 서쪽, 북쪽, 남쪽에서만 물러나고 동쪽 점령지 유지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베크 중심의 '반나치세력'과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이 전쟁 종결 방법임을 깨달았다.[83]

슈타우펜베르크는 폴란드 식민지화와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극단적 발언을 했지만, 나치당 가입은 자제했다.[14][15][16]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를 잠정 지지했으나, 그는 히틀러의 정책에 대한 혐오와 군사적 수완에 대한 존경 사이에서 갈등했으며, 장검의 밤수정의 밤 이후 정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이 사건들을 히틀러가 정의를 추구할 의사가 없다는 증거로 여겼다.[18] 유대인 학대와 종교 탄압은 그의 강한 가톨릭적 도덕심과 정의감을 거슬렀다.[19][20]

슈타우펜베르크는 국방군(Wehrmacht) 내 비밀 저항 운동에 참여했지만, 의회 민주주의에는 반대했다.[21] 1939년 전쟁 발발 후, 그는 폴란드 침공에 참여하여 폴란드 점령, 식민지화, 착취, 폴란드인 노예 노동력을 통한 독일 번영을 지지했다.[14] 그는 "우리는 폴란드에서 체계적인 식민지화를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라고 언급했다.[15] 이후 제6 기갑사단 참모 장교로 프랑스 공방전에 참전하여 철십자 훈장 1급을 받았다.[22]

그의 삼촌 니콜라우스 그라프 폰 위스큄-길렌반트는 프리츠-디에트리프 폰 데어 슐렌부르크와 함께 저항 운동 참여를 제안했지만, 슈타우펜베르크는 폴란드 전역 이후에야 고려했다. 페터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와 울리히 빌헬름 그라프 슈베린 폰 슈바넨펠트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 부관이 되어 쿠데타를 용이하게 할 것을 촉구했으나, 그는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 대한 맹세 때문에 거절했다.[23]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육군 최고 사령부(Oberkommando des Heeres)de (OKH) 조직 부서로 전출되어 소련 침공과 동부 전선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쿠데타를 계획하지 않았지만, 형제 베르톨트와 알렉산더는 크라이자우 서클 등 반정부 인물들과 연락을 유지했다.[24]

슈타우펜베르크는 1942년 여름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 "유대인 학대에 분노와 충격을 표명"하며 유대인 학대를 공개적으로 언급했다.[25] 붉은 군대에 포로로 잡힌 그의 친구 요아힘 쿤 소령은 슈타우펜베르크가 1942년 8월 "그들은 유대인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는 계속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26] 1942년 11월, 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자, 제10 기갑 사단은 비시 프랑스 점령 (안톤 작전) 후 튀니지 전역에서 아프리카 군단(Afrika Korps) 일원으로 참전했다. 1943년 슈타우펜베르크는 상급 대령de i.G.[27](참모 대령)으로 진급, 제10 기갑 사단 작전 장교(Ia)로 아프리카에 배치되었다. 롬멜은 카세린 고개 전투에서 반격했다.[28] 전투 중 슈타우펜베르크는 제10 기갑 사단과 함께 이동했다.[29] 제10 기갑 사단은 제21 기갑 사단과 함께 4월 8일 메주나 근처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30]

1943년 4월 7일, 슈타우펜베르크는 부대 간 이동 지시 중 사막 공군의 P-40 키티호크 전투 폭격기(아마도 호주 공군 제3 비행대)[32]에 의해 차량이 사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31] 뮌헨 병원에서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 치료를 받으며 3개월을 보냈고, 왼쪽 눈, 오른손, 왼쪽 손 두 손가락을 잃었다.[33] 그는 부상으로 4월 14일 부상장 금장, 5월 8일 독일 십자 훈장 금장을 받았다.[34]

1933년 1월 30일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어 독일 정권을 장악했다. 히틀러의 군사 이념은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군비 확장이었기에 슈타우펜베르크도 찬성했다. 스승 슈테판 게오르게도 나치당을 일정 부분 평가했다(게오르게는 히틀러 내각 과학예술 국민교육상 베른하르트 루스트의 정부 요직 제안을 거절했다). 제17기병연대 연병장에서 히틀러 총리 취임을 알았을 때, 그는 "저 녀석, 드디어 해냈군!"이라고 외치며 기뻐했고, 그날 밤 장교 클럽에서 "새로운 당"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나치당 반유대주의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나치당 집회 참석 시,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의 유대인 비방에 퇴장했다. 1934년 6월 말~7월 초 "장검의 밤" 사건은 "투명성을 위한 자정 작용"으로 긍정 평가했다. 그러나 하켄크로이츠 군 국장 계승과 힌덴부르크 사후 군의 히틀러 충성 서약은 부정적이었다. 1938년 2월 국방상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와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상급대장 해임(블롬베르크 해임 사건)에 격렬히 반발했다.

1938년 11월 9일 나치당의 반유대주의 폭동 "수정의 밤"은 그가 반나치파가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는 "큰 치욕이 독일에 초래되었다"고 느꼈고, 그의 나치당 및 당 간부 비판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격렬해졌다. 나치의 야만적 행위는 슈타우펜베르크의 귀족, 부르주아, 가톨릭 도덕심과 정의감에 반했다. 그는 유대인 정책과 종교 탄압에 반감을 가졌다.

나치 정권 하에서도 군에서 승진했다. 1933년 5월 1일 중위로 승진했다. 1934년 10월~1936년 10월 하노버 기병학교 훈련 장교 조수를 맡았다. 1936년 6월 군사대학 진학 군관구 시험 합격, 영어 통역 시험 우수로 1936년 9월 영국을 방문했다. 1936년 10월~1938년 7월 베를린 베를린-모아비트 육군대학 수석 졸업. 1937년 1월 1일 기병 대위로 승진했다.

1938년 8월 1일 에리히 혚너 지휘 부퍼탈 주둔 제1경보병사단 (후에 제6기갑사단 개편) 보급 담당 장교로 배속되었다. 뮌헨 회담에 근거, 1938년 10월 1일 독일군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 무혈 진주 시 제1경보병사단도 10월 4일 수데텐 진입, 체코슬로바키아군 동원 해제 수데텐 병사 및 피난민 유도 임무를 맡았다. 2주 후 부퍼탈 귀환. 슈타우펜베르크는 부퍼탈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프롤레타리아적"이라며 싫어했지만, 1938년 12월 가족을 불러 거처 마련, 1943년 7월까지 거주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에 참가했다. 제1 경사단은 9일 만에 200킬로미터 이상 진격, 비스와강에 가장 먼저 도착, 수천 명 포로를 잡았다. 10월 12일 제6 기갑사단 재편성. 슈타우펜베르크는 보급 확보와 폴란드인 포로 급여 지급으로 표창받았다. 11월 1일 참모 대위(Hauptmann i.G)가 되어 참모 본부 전임, 제6 기갑사단 보급 담당 장교가 되었다.

1940년 5월 10일 대불전 참가. 제6 기갑사단은 5월 12일 벨기에 국경 넘어 9일 만에 270킬로미터 이상 진격, 그는 보급 확보. 5월 31일 1급 철십자 훈장 수여, 육군 총사령부(OKH) 참모 본부 편성과 2그룹(평시 조직 및 명령 계통) 장 임명.

슈타우펜베르크는 영국군 덩케르크 철수 허용에 대해 히틀러 비판했지만, 전쟁 성공으로 히틀러 긍정 평가. 히틀러 측근 참모 본부 간 후 칭찬이 많아졌다. "히틀러는 군사적 감각이 있다. 모든 것을 큰 관련성으로 파악하고 독일 미래 위해 노력. 그의 곁에 있으면 창조적 사고 자극. 협력하여 승리하게 만들자"라고 말했다.

1941년 1월 1일 참모 소령(Major i.G.) 진급. 6월 독소전 시작, 전선 군대 보급 상태 빈번 시찰. 겨울, 독일군 혹한으로 진격 불가, 소련 태세 재정비. 1942년 봄,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 단독 소련군 격파 불가, 소련 주민 협력 필요 확신. 이오시프 스탈린 폭정 시달리는 소련 주민 다수 독일군 해방군 환영. 점령 지역 주민 감정 상하게 하는 행동 좋게 보지 않았다. 4월, 소련 포로 및 점령 지역 시민 잔혹 행위, 아인자츠그루펜 유대인 학살 분노 표했다. 점령 지역 지원병 슬라브인 차별 의식 강한 친위대 (SS) 아닌, 국방군 관리 하에 두도록 노력했다.

전황 악화 1942년 여름 이후 "총통 제거" 본격 언급. 히틀러 "범죄성" 고발 발언 증가. 8월 "저들은 유대인을 집단으로 쏴 죽이고 있어. 이런 죄 용서 안 돼"라고 말했다. 9월 26일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 그 제거 없이는 근본 개혁 불가. 나에게 그럴 준비 되어 있다" 외쳤다.

전선 시찰 시 B 집단군 참모장 대장과 돈 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에게 히틀러 저항 운동 지도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육군 반 히틀러 기운 강해, 발언 흘려 들었지만, 게슈타포 귀에 들어가면 위험. 참모 본부 안 신변 위험 느껴, 1942년 가을 무렵 참모 본부 떠나고 싶어했다. 그 해 허가 나지 않았다.

1943년 1월 1일 참모 중령(Oberstleutnant i.G.) 진급. 2월 3일 베를린 단기 휴가 중 북아프리카 전선 튀니지 제10 기갑사단 수석 참모 장교(Ia) 배속 인사 이동 통지. 동 사단 1942년 11월 알제리, 모로코 상륙 미국-영국군과 교전. 염원하던 전선 근무였지만, 2개월 후 4월 7일 차량 영국군기 기관총 사격으로 중상. 스팍스 근처 야전 병원 이송, 오른쪽 손목 위, 왼쪽 약지, 소지 절단. 왼쪽 눈 적출. 리보르노 이송, 병원 열차 뮌헨 육군 병원, 3개월 입원.

4.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1944년 7월 20일 13시, 슈타우펜베르크는 '늑대의 굴' 회의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헬무트 슈티프 소장, 베르너 폰 헤프텐 중위와 함께 융커스 Ju52 수송기로 베를린 남쪽 랑스도르프 비행장을 이륙했다.[80][81][82]

10시 15분,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 비행장에 도착한 그는 마중 나온 차를 타고 '늑대의 굴'로 향했다. 그는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에서 육군 참모총장 주최 예비 회의에 참석, 히틀러의 예상 질문에 대비했다. 11시 30분, 빌헬름 카이텔 원수 관저에서 작전 회의 최종 준비를 했다.[83]

12시 직전, 히틀러 수행원이 카이텔에게 전화, 작전 회의가 12시 30분으로 당겨졌다고 알렸다. 베니토 무솔리니 방문 예정으로 히틀러는 회의를 일찍 끝내려 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카이텔 부관에게 셔츠를 갈아입을 방을 요구, 헤프텐과 함께 폭탄을 준비했다. 폭탄 두 개 중 하나만 서류 가방에 넣었는데, 에리히 펠기벨 대장 전화와 전령 포겔 상사의 방문으로 당황했기 때문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두 개 모두 넣었다면 회의실 전원이 사망했을 것이다.

12시 30분 직후, '총통 봉쇄 구역'에 도착했다. 높은 기온으로 회의는 지하가 아닌 지상 회의실에서 열렸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총통 가까이 자리를 달라"고 요청, 아돌프 호이징어 중장이 동부 전선 상황을 보고하는 동안, 그는 호이징어 뒤 장교에게 자리를 바꿔달라 요청, 히틀러와 자신 사이에 호이징어만 남게 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폭탄 가방을 지도 책상 지지대 측면에 놓았다. 하인츠 브란트 대령이 가방을 안쪽으로 밀어 히틀러와 폭탄 사이에 지지대가 놓였다.

이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밖에서 이야기하겠다며 회의실을 나왔다. 펠기벨과 통화 후, 벨트와 군모를 둔 채 회의동을 나와 펠기벨, 헤프텐과 부관부 813호동에서 만났다. 12시 40분경, 회의동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차를 타고 '늑대의 굴'을 떠나 13시 15분, 하인켈 He111로 베를린으로 향했다.

히틀러 암살은 실패했다. 폭탄 근처 장교와 속기사만 사망·부상, 히틀러는 경상이었다. '늑대의 굴' 통신 기능은 펠기벨이 마비시키기로 했으나, 완전 고립은 불가능했다. 힘러와 SS 수사관은 회의에서 사라진 슈타우펜베르크를 의심, 게슈타포에 체포를 명령했다.

4. 1. 반나치 저항 운동

1933년 나치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슈타우펜베르크는 국가주의적 양상에 관심을 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군비확장 등의 정책을 취한 나치스 정권에 대한 기대와 독일군 장교들의 전반적 정서를 반영한 성향이었다.[78] 그는 히틀러를 '독일민족을 구할 진정한 지도자'로 존경하면서 나치스에 관심을 보였었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1933년, 나치스 정권이 가톨릭을 부정하고 인종주의를 내세우면서, 히틀러의 나치스 정당이 극단적인 일당 독재로 흘러가자 그는 종교적 도덕성과 정의감에 갈등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나치스 정당의 이념적 모순점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78]

히틀러가 권력의 정상에서 광적인 호전성을 드러낼 무렵, 군부내에서는 '반나치주의' 세력이 결집하여 히틀러 제거를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 첫 계획의 주동세력은 독일군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던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과 독일군 서부군 사령관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등이었다. 민간인으로서 정치인 출신인 크라이자우어 크라이스 등이 가담했다. 그러나, 그 당시 히틀러는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으므로 이들 독일 핵심 군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대화 수준에서 끝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히틀러 암살계획의 첫 시도는 1941년도에 싹을 틔웠다.

1938년~1939년사이 슈타우펜베르크는 정신적으로 변화를 일으켰는데, 외부적으로는 주변국을 침략하고 내부적으로는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히틀러와 나치스에 대해 점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깊은 가톨릭 종교적 신앙 때문에, 그는 인명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극단적 인종주의'를 내세우면서 유태인, 집시, 그리고 점령국 국민들까지도 학살하는 나치스와 히틀러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유태인 학살이 극에 달해 갈 무렵에 내부의 반감을 히틀러 암살과 나치스 정당 타도로 방향을 돌리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1943년 슈타우펜베르크는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제 10 기갑사단의 참모장을 맡게 되었다.[80]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슈타우펜베르크는 작전 지역을 시찰하던 중, 1943년 4월 7일 영국 전투기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다. 그는 독일 본토로 이송되어 뮌헨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석달동안 입원하였다. 여기서 그는 왼쪽 눈과 왼쪽 손,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게 된다.[81][82] 뮌헨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여 자신의 손으로 히틀러를 해치우기로 결심하게 된다. 히틀러 제거 계획은 이미 재활 치료를 거의 마친 이후 독일 육군 본부에 보직을 받고 루트비히 베크를 중심으로 한 22명의 가담자들을 만나고 난 뒤부터였다.

1943년 7월 1일 슈타우펜베르크는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독일 베를린 국방군 본부의 예비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올브리히트장군의 군사령관 후임인 프리드리히 프롬을 상관으로 만나게 되는데, 프롬도 이미 히틀러 제거 음모에 묵시적으로 가담했었다. 즉, 프롬은 '반나치세력'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체 하면서 슈타우펜베르크의 거사에 협조했다.

1944년 6월 6일, 미국, 영국, 캐나다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이때 슈타우펜베르크도 다른 고위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패배로 돌아갈 것을 확신했다. 그는 즉각 휴전하는 것만이 인명의 불필요한 희생을 막고 독일과 독일 국민, 그리고 유럽 대다수 국가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자신의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1943년 말에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의 즉각 휴전 조건으로서 연합국이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요구서로 적어 보냈다. 요구서에는 독일 국경을 폴란드의 비엘코폴스카와 포즈나뉴가 포함되는 1914년 국경으로 인정해 줄 것을 비롯해,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 지방을 독일 영토로 유지하며, 알자스-로렌 지방에는 자치권을 부여하고, 남쪽으로는 현 전시 국경에서 확장해 티롤, 볼자노, 메라노 등까지 병합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영토 관련 요구는 연합군의 독일 점령을 일절 불허할 것과, 전범 인계를 거부한 것 등이 있었다. 전범 인계 거부는 자국 범죄자는 그 나라가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요구 사항들은 서방 연합국에만 국한된 것일 뿐 동부전선(러시아 전선)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은 서쪽, 북쪽, 남쪽 지역에서만 물러나고, 동쪽 점령지에 대해서는 군사적 점령 상태를 유지할 권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한 뒤, 루트비히 베크를 주축으로 한 '반나치세력'들과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러한 위기에 서방연합군과의 휴전 협상 시도가 명목적이었을 뿐임을 깨달았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83]

재활을 위해 슈타우펜베르크는 고향인 라우틀링겐 성(현재 박물관)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당시 남부 독일의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의 성 중 하나였다. 메스슈테텐 부엘로흐 인근의 토르펠스는 여러 번 방문했다.[35] 처음에는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킬 입장이 아니라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나 1943년 9월 초, 부상에서 다소 느리게 회복된 후, 그는 공모자들의 제안을 받았고, 베를린의 벤들러 거리de(나중에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de)에 위치한 Ersatzheerde("예비군" - 최전선 부대를 강화하기 위해 훈련된 병사를 담당) 본부의 참모 장교로 헤닝 폰 트레츠코프에게 소개되었다.[36]

그곳에서 슈타우펜베르크의 상관 중 한 명은 저항 운동에 헌신한 장군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였다. Ersatzheerde는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기능 중 하나가 발키리 작전을 준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부 혼란으로 인해 군 지휘부와의 통신이 막히는 경우 Reichde(제국)을 통제하기 위한 비상 조치였다. "발키리" 계획은 히틀러의 동의를 받았지만, 그의 죽음 시 정권의 나머지를 제거하기 위해 비밀리에 변경되었다. 1943년에 헤닝 폰 트레츠코프는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저항 운동을 통제하게 되었다. (트레츠코프는 음모 실패를 알고 1944년 폴란드 크루로비 모스트에서 자살했기 때문에 다시는 독일로 돌아오지 않았다.)[37]

베를린을 점령할 뿐만 아니라 동프로이센의 독일군과 히틀러의 각 본부를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한 상세한 군사 계획이 개발되었는데, 이는 1943년 11월 말 악셀 폰 데어 부쉬의 자살 암살 시도 이후였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폰 데어 부쉬에게 이 서면 명령을 라스텐부르크 인근 볼프스샨체 (늑대 굴)에 도착한 마이어 쿤에게 직접 전달하도록 했다. 그러나 히틀러와의 회담이 취소된 후 폰 데어 부쉬는 늑대 굴을 떠나 동부 전선으로 갔고, 시도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38]

쿤은 7월 20일 음모 이후 소련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1945년 2월에 소련군을 문서 은신처로 안내했다. 1989년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 문서를 독일 총리 헬무트 콜 박사에게 전달했다. 음모자들의 동기는 전쟁 이후 수년 동안 독일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음모자들이 전쟁을 끝내고 직업 장교 및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 히틀러를 죽이려 했다고 생각했다.[39]

D-Day, 1944년 6월 6일에 연합군은 프랑스에 상륙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다른 대부분의 독일 직업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졌다는 것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불필요한 유혈 사태와 독일, 국민,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에 대한 더 이상의 피해를 피하려면 즉각적인 휴전만이 가능했다. 그러나 1943년 말, 그는 독일이 즉각적인 평화에 동의하기 위해 연합군이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요구 사항을 작성했다. 이러한 요구에는 독일이 대폴란드 및 포즈난 지역을 포함한 1914년 동부 국경을 유지하는 것이 포함되었다.[40]

다른 요구 사항에는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와 같은 영토적 이득을 제국 내에 유지하고, 알자스-로렌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심지어 보젠과 메란까지 티롤을 합병하여 남쪽으로 현재의 전쟁 중 독일 국경을 확장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비영토적 요구 사항에는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거부, 그리고 "자신의 범죄자를 다룰 국가의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전쟁 범죄자 인도 거부와 같은 사항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제안은 서방 연합군에게만 전달되었으며,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이 서부, 남부, 북부 지역에서만 철수하고 동부에서 독일이 얻은 영토적 이득에 대한 군사 점령을 계속할 권리를 요구했다.[41]

1934년 6월 30일 부터 7월 2일까지 벌어진 장검의 밤 사건에 대해서는 "투명성을 위한 자정 작용"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하켄크로이츠가 군의 국장으로 계승된 것과 힌덴부르크 사후에 군이 히틀러에게 충성 서약을 한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1938년 2월 4일 국방상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와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상급대장의 해임(블롬베르크 해임 사건)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발하며 불만을 여러 번 토로했다.

1938년 11월 9일 나치당이 일으킨 반유대주의 폭동 "수정의 밤"을 기점으로 슈타우펜베르크의 반 나치 성향이 강해졌다. 이 참사를 본 슈타우펜베르크는 "큰 치욕이 독일에 초래되었다"라고 느꼈다. 그의 부관에 따르면 그의 나치당 및 당 간부 개인에 대한 비판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격렬해졌다고 한다.

서민 출신이 많은 나치의 야만적인 행위는 슈타우펜베르크의 귀족, 부르주아, 가톨릭으로서의 도덕심과 정의감에 반했다. 그는 유대인 정책과 종교 탄압에 반감을 품게 된다.

1939년 9월 1일부터 시작된 폴란드 침공에 참가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소속된 제1 경사단은 9일 만에 200km 이상 진격하여 비스와강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10월 12일 사단은 평시 기지로 귀환하여 제6 기갑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보급을 확보한 점과 수천 명의 폴란드인 포로들에게도 모범적으로 급여를 지급한 점에 대해 여러 차례 표창을 받았다. 11월 1일 자로 참모 대위(Hauptmann i.G)가 되어 정식으로 참모 본부로 전임하여 다시 제6 기갑사단의 보급 담당 장교가 되었다.

1940년 5월 10일부터 시작된 대불전에도 참가했다. 그가 소속된 제6 기갑사단은 5월 12일벨기에 국경을 넘어 9일 만에 270km 이상 진격했는데, 그 중에서도 그는 보급을 확실하게 확보했다. 5월 31일에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육군 총사령부(OKH)의 참모 본부 편성과 2그룹(평시 조직 및 명령 계통) 장으로 임명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대불전에 대해 영국군에게 덩케르크 철수를 허용한 것에 대해 히틀러를 비판했지만, 전쟁이 전체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특히 히틀러 측근의 참모 본부에 간 이후에는 그를 칭찬하는 일이 많아졌다. "히틀러는 군사적인 감각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큰 관련성으로 파악하고 독일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곁에 있으면 창조적인 사고가 자극된다. 그를 협력하여 승리하게 만들자" 등과 같이 말했다.

1941년 1월 1일 참모 소령(Major i.G.)으로 진급했다. 6월 22일 독소전이 시작되자 빈번하게 전선의 군대 보급 상태를 시찰했다. 같은 해 겨울, 독일군은 혹한으로 거의 진격할 수 없었고, 그 동안 소련이 태세를 재정비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1942년 봄에는 독일이 단독으로 소련군을 격파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며, 소련 주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폭정에 시달리는 소련 지배하의 주민들 중 많은 수가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래서 점령 지역 주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그는 좋게 보지 않았다. 4월에 그는 다른 참모 본부 장교들과의 대화에서 소련 포로 및 점령 지역 일반 시민에 대한 잔인한 행위,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한 유대인 학살 등에 분노를 표했다. 또한 편성과 2그룹장으로서 점령 지역으로부터의 지원병을 슬라브인에 대한 차별 의식이 강한 친위대 (SS)가 아닌, 국방군 관리 하에 두도록 노력했다.

전황이 진흙탕에 빠진 1942년 여름 이후에는 "총통의 제거"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또한 히틀러의 "범죄성"을 고발하는 발언도 다시 늘었다. 8월에는 편성과의 다른 장교에게 "저들은 유대인을 집단으로 쏴 죽이고 있어. 이런 죄가 용서되어서는 안 돼"라고 말했다. 9월 26일 편성과의 회의 자리에서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 그가 제거되지 않으면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하다. 나에게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외쳤다.

전선 시찰 시에 B 집단군 참모장 대장과 돈 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에게 히틀러 저항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육군은 원래 반 히틀러 기운이 강했고, 그의 이러한 발언도 흘려 들었지만, 게슈타포의 귀에 들어가면 위험했다. 점점 그는 참모 본부 안에서도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되어, 1942년 가을 무렵부터 참모 본부를 떠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해 안에는 허가가 나지 않았다.

1943년 1월 1일 참모 중령(Oberstleutnant i.G.)으로 진급했다. 2월 3일, 베를린에서 단기 휴가를 보내던 중 북아프리카 전선의 튀니지 제10 기갑사단에 수석 참모 장교(Ia)로 배속하는 인사 이동이 통지되었다. 동 사단은 1942년 11월 8일알제리와 모로코에 상륙한 미국-영국군과 싸우고 있었다. 염원하던 전선 근무가 되었지만, 2개월 후인 4월 7일에는 타고 있던 차량이 영국군기에 의해 기관총 사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스팍스 근처의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오른쪽 손목 위, 그리고 왼쪽 약지와 소지를 절단했다. 또한 왼쪽 눈도 적출해야 했다. 이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배로 리보르노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병원 열차로 뮌헨의 육군 병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입원 생활을 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더 이상 전황이 악화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히틀러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미국과 영국과 강화를 맺고 소련으로부터 지켜야만 독일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깨달았다. 입원 중, 문병을 온 외가 친척 니콜라우스 폰 윅스퀼-길렌반트 백작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히틀러 암살 계획(루트비히 베크 예비 대장 대장을 중심으로 한 '검은 오케스트라'라고 불린 저항 그룹)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저항 그룹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인 국내 예비군 일반 군무국 국장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대장은 일반 군무국 참모장에 슈타우펜베르크 중령을 임명하도록 육군 인사국에 손을 썼다. 슈타우펜베르크는 7월 3일에 뮌헨 병원에서 퇴원했다. 부퍼탈의 가족을 불러 라우트린겐 성으로 돌아갔다.

1943년 9월 초에는 베를린으로 가서, 저항 그룹의 멤버인 헤닝 폰 트레스코우 소장으로부터 쿠데타 준비 절차를 통지받았다. 그 쿠데타는, 히틀러를 암살한 후에 국내 예비군 사령부가 국내외 17개 군관구 사령부에 대해 '발키리 작전'(독일 국내 유사에 대비한 작전)을 발령하여 친위대, 게슈타포, 당 기관의 책임자를 '반역자'로 구속하는 것이었다.

9월 15일, 국내 예비군 일반 군무국 참모장으로 취임하여, 베를린의 벤들러블록 (국방성 청사) 내 국내 예비군 사령부에 근무했다(정식 임명은 11월 1일. 직무 인수인계와 공부를 위해 취임이 빨라졌다). 이 직책을 얻게 됨으로써, 이후에는 '발키리 작전'의 입안을 담당하는 입장이 된 슈타우펜베르크가 계획의 중심이 되었다.

쿠데타 계획의 성공은 '발키리 작전'을 발동했을 때 각 군관구 사령부가 그것을 따를지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슈타우펜베르크는 각 군관구에 정보 제공자가 될 장교를 최소한 한 명은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설득력, 타고난 귀족의 위엄, 명석한 논리 등으로 17개의 군관구 중 15개의 군관구에서 정보 제공을 해줄 장교를 확보했다.

또한 쿠데타 후에는 저항 그룹으로 통일된 정권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율리우스 레버, 카를 괼러,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 백작, 요하네스 포피츠, 울리히 폰 하셀, 빌헬름 로이슈너, 울리히 빌헬름 슈베린 폰 슈바넨펠트 백작 등 시민 레지스탕스 멤버들과도 교류를 돈독히 했다. 레버를 통해 지하에 잠복하고 있는 독일 공산당과도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는 다른 레지스탕스 멤버(특히 괼러와 몰트케 백작)와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난제는 쿠데타 계획뿐만 아니라, 그 전제인 히틀러 암살도 있었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히틀러는 거의 공공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엄중히 경비된 총통 대본영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제한된 측근 외에는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슈타우펜베르크 등 저항 그룹 중에도 히틀러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아주 드물게 히틀러가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기회 등을 노려, 각오가 된 장교에게 암살을 실행하게 하려고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겁을 먹거나, 또는 계획이 어떤 우연으로도 성취되지 않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944년 5월 중순에 기회가 찾아왔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그는 1944년 4월 1일에 참모 대령으로 승진했다.)이 국내 예비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상급 대장의 참모장으로 취임하는 것이 내정되었다. 이 지위에 오르면 국내 예비군의 임무인 육군의 인원 보충과 국내 치안 유지를 전면적으로 관할하게 된다. 히틀러 앞에 나가 보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총통 대본영에서는 전상자는 SS에 의한 신체 검사를 면제받고 있었다. 게다가 상관인 프롬은 저항 그룹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부하인 올브리히트와 슈타우펜베르크 등의 음모를 묵인할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저항 그룹은 슈타우펜베르크를 히틀러 암살의 실행자로 선택했다. 암살 쿠데타 성공의 다음 날 그는 신정부에서 군무 장관이 될 올브리히트를 보좌하는 군무 차관에 취임할 예정이었다.

4. 2. 발키리 작전

1943년 말,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국과의 즉각적인 휴전을 위한 요구 조건을 작성했다. 이 조건에는 독일 국경을 1914년 국경(폴란드의 비엘코폴스카와 포즈나뉴 포함)으로 인정,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 유지, 알자스-로렌 자치권 부여, 남쪽으로는 티롤, 볼자노, 메라노까지 영토 확장 등이 포함되었다. 비영토 관련 요구로는 연합군의 독일 점령 불허, 전범 인계 거부(자국 범죄자는 자국에서 심판)가 있었다. 이는 서방 연합국에만 해당되었고, 동부전선(러시아 전선)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는 '독일은 서쪽, 북쪽, 남쪽에서만 물러나고, 동쪽 점령지는 군사적 점령 상태 유지'를 요구했다.[83]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루트비히 베크 중심의 '반나치세력'과 슈타우펜베르크는 서방 연합군과의 휴전 협상이 명목적일 뿐임을 깨달았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83]

발키리 작전은 본래 연합군 폭격 등으로 인한 혼란 발생 시 질서 유지를 위해 예비군을 출동시키는 계엄령과 유사한 작전이었다. 베를린 주둔 예비군의 '발키리 작전' 전개 권한은 '반나치세력'의 쿠데타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승인했다. 이후 '반나치주의자'들은 '히틀러 사후 정계에서 히틀러와 잔재를 제거하는 것'으로 비밀리에 수정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히틀러 암살 후 '발키리 작전' 발동, 쿠데타를 통해 게슈타포와 나치스 SS를 무력화, 전군 장악, 군정 실시, 서방 연합국에 일방적 휴전 선언이었다.

1942년 9월 초,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의 후임으로 한스 게오르크 슈미트 폰 알텐슈타트를 고려했다.

1943년 9월 초부터 1944년 7월 20일까지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 암살 및 독일 장악 음모의 핵심이었다. 그의 결단력, 조직 능력, 급진적 접근은 오랜 논의로 인한 무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헤닝 폰 트레츠코의 도움으로 공모자들을 결집, 행동에 나서게 했다.[42]

슈타우펜베르크는 반역죄를 범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1943년 말, 악셀 폰 뎀 부쉬에게 "나는 내 수단으로 반역을 저지르고 있다..."라고 말했다.[43] 그는 히틀러의 범죄적 침략으로부터 수백만 명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자연법에 따른 권리를 언급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했다.[44]

1944년 7월 7일, 헬무트 슈티프 장군이 암살을 포기하자, 슈타우펜베르크는 직접 히틀러를 암살하고 베를린에서 음모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품었지만, 트레츠코는 "암살을 시도해야 한다. 실패하더라도 베를린에서 행동해야 한다"라고 설득했다. 이는 히틀러 정권과 독일이 동일하지 않으며, 모든 독일인이 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44]

당초 계획은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 사무실에 머물며 유럽 전역 정규군 부대에 전화, 보안국게슈타포 등 나치 정치 조직 지도자 체포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군 최고사령부 작전 참모장 헬무트 슈티프 장군이 히틀러 암살 약속을 철회하면서,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 암살과 베를린 군사 기계 작동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그는 히틀러에게 정기적 접근이 가능하고, 히틀러 사후 쿠데타 동참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장교였다. 이는 쿠데타 성공 가능성을 크게 높였다.[36]

슈타우펜베르크는 전황 악화 이전에 히틀러 암살 및 쿠데타를 통해 미국, 영국과 강화를 맺고 소련으로부터 독일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니콜라우스 폰 윅스퀼-길렌반트 백작을 통해 루트비히 베크 중심의 '검은 오케스트라'에 합류했다.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대장은 슈타우펜베르크를 일반 군무국 참모장에 임명하도록 육군 인사국에 요청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7월 3일 퇴원, 가족과 라우트린겐 성으로 돌아갔다.

1943년 9월 초, 베를린에서 헤닝 폰 트레스코우 소장으로부터 쿠데타 준비 절차를 전달받았다. 쿠데타는 히틀러 암살 후 국내 예비군 사령부가 국내외 17개 군관구 사령부에 '발키리 작전' 발령, 친위대, 게슈타포, 당 기관 책임자를 '반역자'로 구속하는 것이었다.

9월 15일, 국내 예비군 일반 군무국 참모장으로 취임, 베를린 벤들러블록 (국방성 청사) 내 국내 예비군 사령부에 근무했다(정식 임명은 11월 1일). '발키리 작전' 입안을 담당하게 된 슈타우펜베르크가 계획의 중심이 되었다.

쿠데타 성공은 '발키리 작전' 발동 시 각 군관구 사령부의 협조에 달려 있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각 군관구에 정보 제공 장교를 확보하려 노력, 17개 중 15개 군관구에서 정보 제공 장교를 확보했다.

쿠데타 후 통일 정권 수립을 위해 율리우스 레버, 카를 괼러,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 백작, 요하네스 포피츠, 울리히 폰 하셀, 빌헬름 로이슈너, 울리히 빌헬름 슈베린 폰 슈바넨펠트 백작 등 시민 레지스탕스와 교류했다. 레버를 통해 지하 독일 공산당과도 접촉했다.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는 괼러, 몰트케 백작 등 일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히틀러 암살도 문제였다. 전황 악화로 히틀러는 공공장소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총통 대본영에 틀어박혀 측근 외 접근이 어려웠다. 저항 그룹 중 히틀러 접근 가능자는 없었다. 드문 공식 행사 참석 기회를 노렸지만, 계획은 실패했다.

1944년 5월 중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1944년 4월 1일 참모 대령 승진)이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의 참모장으로 내정되었다. 이 지위는 육군 인원 보충, 국내 치안 유지를 총괄하며 히틀러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총통 대본영에서는 전상자는 SS 신체 검사를 면제받았다. 프롬은 저항 그룹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올브리히트와 슈타우펜베르크의 음모를 묵인했다. 이로 인해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 암살 실행자로 선택되었다. 암살 쿠데타 성공 다음 날, 그는 신정부 군무 장관 올브리히트 보좌 군무 차관에 취임할 예정이었다.

4. 3. 암살 시도와 실패

1943년 슈타우펜베르크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제10기갑사단 참모장을 맡았으나, 4월 7일 영국 전투기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고 독일 뮌헨의 병원에서 석 달간 치료를 받으며 왼쪽 눈과 손,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81][82] 그는 이 기간 동안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여 직접 히틀러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루트비히 베크를 중심으로 한 22명의 가담자들을 만났다.

1943년 7월 1일 대령으로 진급한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 국방군 본부의 예비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프리드리히 프롬을 상관으로 만났는데, 프롬 역시 히틀러 제거 음모에 암묵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슈타우펜베르크는 전쟁의 패배를 확신하고 즉각적인 휴전만이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 조국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1943년 말, 독일의 즉각 휴전 조건으로 1914년 국경 인정,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 유지, 알자스-로렌 자치권 부여, 티롤, 볼자노, 메라노 병합 등을 요구했다. 또한 연합군의 독일 점령 불허와 전범 인계 거부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서방 연합국에만 국한된 것이었고, 루트비히 베크를 비롯한 '반나치세력'은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83]

슈타우펜베르크의 예비군 참모직은 히틀러에게 직접 브리핑을 할 수 있어 암살 실행에 유리했으며, 그는 장애인이라 신체 수색 없이 히틀러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에 위치한 '볼프샨체(늑대소굴)'에서 열리는 전시 최고회의에 참석하여 시한폭탄으로 히틀러를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7월 11일7월 15일의 암살 시도는 여의치 않아 연기되었고, 7월 20일에 실행되었다.

회의실 당시 상황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는 볼프샨체 회의에 참석하여 시한폭탄을 작동시키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폭탄은 12시 40분경 폭발했지만, 히틀러의 전속부관 하인츠 브란트 대령이 가방을 옆으로 밀어놓아 폭탄이 두꺼운 목제 테이블 다리 뒤에서 터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가 사망했다고 판단했지만, 실제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고, 회의실은 대파되어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의 외투로 덮인 사람이 들것에 운반되는 것을 보고 히틀러 사망을 확신, 하인켈 He 111 폭격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베를린 본부에서는 히틀러 사망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발키리 작전'이 발동되지 않았다. 슈타우펜베르크와 동료들이 혼란을 수습하고 '발키리 작전'을 발령했지만, 이미 늦었고 프리드리히 프롬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히틀러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쿠데타 가담자들은 동요했고, 라디오를 통해 전 독일에 알려졌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 등 몇몇 가담자들은 몇 시간 동안 베를린을 통제했지만, 밤 9시경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오토 에른스트 레머 소령의 예비군 부대로부터 도주를 시도하다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1944년 7월 20일 볼프스샨체에서 두 개의 폭탄 중 하나만 장전하여 암살을 시도했다. 더위 때문에 회의 장소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나무 오두막으로 변경되었고, 그는 펜치로 폭탄을 장전하려 했으나 경비병의 재촉으로 하나만 장전했다. 그는 서류 가방을 히틀러 가까이 놓았으나 하인츠 브란트 대령이 가방을 옮겼다.[45]

폭발 후,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가 사망했다고 확신했지만, 히틀러는 튼튼한 참나무 테이블 다리 덕분에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45] 슈타우펜베르크와 베르너 폰 해프텐은 베를린으로 돌아와 쿠데타 2단계를 시작하려 했으나, 요제프 괴벨스의 라디오 방송과 히틀러의 연설로 쿠데타 실패를 깨달았다. 그들은 벤들러 거리 사무실에서 제압되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46]

5. 체포와 처형

프리드리히 프롬은 '반나치세력'에 동조하였으나, 다시 예비군을 장악한 후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가담자들을 체포하고 즉결 처형했다. 이는 훗날 1945년 3월에 밝혀져 프롬 자신도 총살당하는 원인이 되었다.[84]

1944년 7월 21일 오전 12시 30분, 슈타우펜베르크는 즉결 처분을 언도받고 다른 세 명의 주모자와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조명된 가운데 집행된 총살 현장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위대한 독일이여 영원하라! (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라고 외쳤다.[84]

형 집행 후 슈타우펜베르크는 급히 매장되었지만, 나치스 SS 무장친위대는 그의 시체를 발굴하여 화장했다. 현재 그 자리에는 기념비만 남아있다.


  • -|]]|thumb|upright|알터 성 마테우스 교회 묘지에 있는 추모비. "여기에 시신이 묻혔고, 후에 알려지지 않은 장소로 옮겨졌다"]]


벤들러블록에 주둔한 예비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은 즉석 군법회의에서 공모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슈타우펜베르크, 베르너 폰 해프텐 중위,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키른하임 대령은 1944년 7월 21일 오전 1시 전에 벤들러블록 안뜰에서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 아래 사형 집행 분대에 의해 처형되었다.[46]

  • -|]]|thumb|upright|벤들러블록의 명판 "1944년 7월 20일, 독일을 위해 여기에서 사망...클라우스 그라프 쉔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슈타우펜베르크의 차례가 되자, 폰 해프텐 중위는 사형 집행 분대와 슈타우펜베르크 사이에 서서 총알을 대신 맞았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마지막으로 Es lebe das heilige Deutschland!|신성한 독일 만세!de[47][48] 또는 Es lebe das geheime Deutschland!|비밀스러운 독일 만세!de[48][49]라고 외쳤다.

프롬은 처형된 장교들을 알터 성 마테우스 교회에 즉시 매장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다음 날, 슈타우펜베르크의 시신은 친위대에 의해 발굴되어 훈장과 휘장이 제거된 후 화장되었다.[50]

6. 사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 이후 독일 군부 내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어 7000여 명이 체포되고 이 중 4980명이 처형되었다. 처형 대신 자살을 권유받고 음독한 에르빈 롬멜과 히틀러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베를린으로 소환되던 중 음독한 귄터 폰 클루게 육군 원수도 포함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반나치 운동'의 대표적 인물로서 독일 국민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하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의 기념비가 베를린 국방성 자리에 세워졌고, 예비군 사령부가 있던 거리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개명되었다. 또한 '반나치 세력'들이 처형당한 곳인 베를린에 있는 전 국방부 예비군 사령부는 '독일 저항 추모관'이 되어 그들을 추모하고 있다.

최근에는 슈타우펜베르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이 제작되어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08년에는 톰 크루즈가 슈타우펜베르크 역할을 맡은 영화 '''발키리'''가 개봉하였다.

벤들러블록(국방성) 안뜰. 여기서 슈타우펜베르크 등은 총살되었다.


전후,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에 대한 저항 운동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국내 예비군 사령부가 있던 벤들러블록 정면의 거리가 벤들러 거리에서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개명되었고, 벤들러블록 내에는 기념관이 개설되어 히틀러 저항 운동에 관한 5,000점이 넘는 사진과 문서가 전시되어 있다. 암살 계획에 관여한 장교들이 총살당한 안뜰에는 손을 쇠사슬로 연결된 젊은이의 청동상이 상징으로 놓여 있다.

또한, 벤들러블록에는 국방부의 베를린 청사가 위치해 있다(국방부 본체는 현재도 라인 강변의 에 있다). 매년 7월 20일 이곳에서 외국에서 온 귀빈을 맞이하여 독일 연방군의 충성 맹세식이 거행된다. 나치 정권 하의 독일에서는 군인은 "독일과 독일 민족의 총통인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한다"고 선서했다. 만슈타인 원수의 대사 "프로이센 군인은 반역하지 않는다"는 유명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일 연방군에서는 특정 개인이 아닌 "독일 연방 공화국에 충성을 다하며, 독일 민족의 자유와 정의를 수호할 것을 맹세한다"고 선서한다. 승진할 수 없는 것을 조건으로 충성 맹세를 거부할 권리도 인정된다.

7. 가족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1933년 9월 26일 밤베르크에서 엘리자베트 막달레나 "니나" 프라이인 폰 레르헨펠트와 결혼했다.[62] 레르헨펠트 가문은 오래된 바이에른 귀족 가문으로, 니나는 엘리자베스 2세의 배우자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사촌이었다.[63]

슈타우펜베르크 부부는 베르톨트, 하이메란, 프란츠루트비히, 발레리, 콘스탄체의 다섯 자녀를 두었다. 콘스탄체는 슈타우펜베르크가 처형된 지 7개월 후 오데르강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슈타우펜베르크 가족은 베를린-반제에서 살았다.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아이들은 아버지의 행위에 대해 듣지 못한 채[64]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위탁 가정에 맡겨졌으며, '슈타우펜베르크'라는 성은 금기로 여겨져 새로운 성을 사용해야 했다.[65]

니나는 2006년 4월 2일 밤베르크 근처 키르히라우터에서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4월 8일에 그곳에 묻혔다. 장남 베르톨트는 서독의 전후 Bundeswehrde에서 장군이 되었다. 삼남 프란츠루트비히는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 연합을 대표하여 독일 및 유럽 의회 의원이 되었다. 2008년, 막내딸 콘스탄체는 어머니에 관한 책 ''니나 쉔크 그라핀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썼다.[66]

키르히라우터에 있는 니나 쉔크 그라핀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묘와 남편 클라우스 쉔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 기념관

8. 평가와 유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반나치운동'의 대표적 인물로서 독일 국민들에게 존경받게 되었다. 베를린 국방성 자리에는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하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의 기념비가 세워졌고, 예비군 사령부가 있던 거리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개명되었다. '반나치세력'들이 처형당한 베를린의 전 국방부 예비군 사령부는 '독일저항 추모관'이 되어 그들을 추모하고 있다.[68][69]

전후, 벤들러블록 정면의 거리가 벤들러 거리에서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개명되었고, 벤들러블록 내에는 기념관이 개설되어 히틀러 저항 운동에 관한 5,000점이 넘는 사진과 문서가 전시되어 있다. 암살 계획에 관여한 장교들이 총살당한 안뜰에는 손을 쇠사슬로 연결된 젊은이의 청동상이 상징으로 놓여 있다. 벤들러블록에는 국방부의 베를린 청사가 위치해 있으며(국방부 본체는 현재도 라인강변의 에 있다), 매년 7월 20일 이곳에서 외국에서 온 귀빈을 맞이하여 독일 연방군의 충성 맹세식이 거행된다.

나치 정권 하의 독일에서는 군인은 "독일과 독일 민족의 총통인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한다"고 선서했다. 만슈타인 원수의 "프로이센 군인은 반역하지 않는다"는 말은 유명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일 연방군에서는 특정 개인이 아닌 "독일 연방 공화국에 충성을 다하며, 독일 민족의 자유와 정의를 수호할 것을 맹세한다"고 선서하며, 승진할 수 없는 것을 조건으로 충성 맹세를 거부할 권리도 인정된다.

최근에는 슈타우펜베르크를 소재로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이 제작되어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08년에는 톰 크루즈가 슈타우펜베르크 역할을 맡은 영화 '''작전명 발키리'''가 개봉하였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묘사한 드라마로는 1967년작 《장군의 밤》, 1970년과 1971년에 개봉된 러시아 영화 시리즈 《해방》, 《전쟁과 기억》(1988), 《히틀러 암살 음모》(1990), 《슈타우펜베르크》(2004) 등이 있다.

전쟁 후, 나치 장교 심문에 관여했던 미국 정보 장교 어니 블레이크는 뉴멕시코주 타오스에 스키장을 설립했다. 그는 웨스트 베이슨 능선에 있는 스키 코스에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이름을 따서 "슈타우펜베르크"라고 명명했으며, 암살 시도에 참여한 다른 독일 장교들의 이름을 따서 세 개의 코스(오스터, 폰 트레츠코프, 파비안)를 더 만들었다.

참조

[1] NDB Schenk von Stauffenberg, Claus Graf
[2] 서적 Die Schenken von Stauffenberg Müller & Gräff
[3] 웹사이트 Gräfin von Stauffenberg: Abschied von einer Zeitzeugin https://www.augsburg[...] Augsburger Allgemeine 2018-06-23
[4] 웹사이트 Alfred Klemens Schenk von Stauffenberg https://gw.geneanet.[...] geneanet 2018-06-23
[5] 웹사이트 First Chapter: The Individual http://www.zum.de/ps[...] The Reich Constitution of 11 August 1919 (Weimar Constitution) with Modifications 2018-06-23
[6] 뉴스 Countess von Stauffenberg https://www.telegrap[...] 2018-06-23
[7] 웹사이트 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1907–1944): Leben und Würdigung- Vortrag anläßlich der Gedenkveranstaltung zum 100.Geburtstag von 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Ketrzyn/Rastenburg, 22.Juli 2007 http://www.forschung[...] 2008-02-07
[8] 웹사이트 Im Porträt: Claus Graf Schenk von Stauffenberg http://www.br-online[...] 2008-02-07
[9] 서적 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Der Täter und seine Zeit Das Neue Berlin Verlagsgesellschaft mbH
[10] 서적 Oberst Claus Graf Stauffenberg Ferdinand Schönin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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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웹사이트 Herbert Ammon: Vom Geist Georges zur Tat Stauffenbergs – Manfred Riedels Rettung des Reiches, in: Iablis 2007 http://www.iablis.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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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문서 The family's original name was Stauffenberg, and they held the noble titles of ''[[Schenk]]'' and ''[[Graf]]'' (Count). After 1918, when the [[Weimar Republic]] abolished all noble titles, the Stauffenberg family, like the other formerly noble German families, added the words ''Schenk'' and ''Graf'' to their surname. Stauffenberg's formal surname was th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though by convention he is usually referred to in English simply as Count von Stauffenberg.
[78] 웹사이트 GDW - Biographies - 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http://www.gdw-berli[...]
[79] 서적 Stalingrad Penguin 2001
[80] 문서 im Generalstab
[81] 웹인용 America in WWII magazine: Erwin Romme, Desert Fox, Afrika Korps, II Corps, Kasserine Pass, Sidi bou Zid, von Arnim https://web.archive.[...] 200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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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서적 "Resistance and Conformity in the Third Reich" Routledge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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