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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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년간 투옥되었다. 그는 불교 혁신과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저항 문학을 대표했다. 그의 사상은 불교 사회 혁신주의와 보편화를 추구했으며, 만해 한용운은 민족독립, 불교 유신, 자유 문학의 3대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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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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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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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용운 |
출생일 | 1879년 8월 29일 |
출생지 | 홍성군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잠방골 |
사망일 | 1944년 6월 29일 |
사망 장소 | 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 |
묘소 | 망우 역사 문화공원 |
국적 | 대한민국 |
아명 | 한유천 |
아명 | 한봉완 |
호 | 만해 |
개인 정보 | |
본관 | 청주 |
속명 | 한정옥 |
종교 | 조계종 |
배우자 | 유숙원(재혼), 전정숙(이혼) |
자녀 | 한보국(아들), 한영숙(딸) |
부모 | 한응준(부), 방숙영(모) |
친척 | 한윤경(형) |
직업 | |
직업 |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
활동 | |
주요 경력 | 신간회 중앙위원장 |
웹사이트 | |
웹사이트 | 만해 기념관 |
2. 생애
만해 한용운은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2] 출가 전에는 일본의 국내 영향력 확대에 대한 저항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2]
1905년 조계종 승려가 되었고, 190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6개월 동안 여러 사찰을 방문하며 불교와 동양 철학을 연구했다.[3] 1919년에는 3·1 운동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선언에 서명했다.[4]
한용운은 한국 불교 개혁을 촉구한 사회주의적 성향의 작가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민족주의와 애정을 다루었으며, 종종 둘을 혼합하기도 했다. 1926년에 출판된 그의 대표적인 시집 『님의 침묵』은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중심으로 3·1 운동에서의 비폭력 저항 정신을 담고 있다.
1913년,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조선 불교의 시대착오적인 폐쇄성과 당시 현실과의 부조화를 비판했다.[5] 이 글에서 그는 평등, 자기발견, 불교의 세계 구원 가능성, 진보의 원리를 제시했다.[5] 1918년에는 청년 계몽을 목표로 한 "유심"을 출판했고, 이듬해 3·1 운동에 참여하여 3년간 투옥되었다. 투옥 중에는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했다. 1922년 무죄 석방된 후 전국 강연 순회를 통해 청년들을 참여시키고 고무했으며, 1924년에는 불교 청년회 회장이 되었다.
1937년 불교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으며,[12] 징용과 보국대 참여를 거부했다. 일본군 찬양 관련 글이나 강연도 하지 않았으며,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도 거부했다.[13]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13]
1940년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14]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2]
2. 1. 유년기
한명회의 동생으로 전구서승을 지낸 한명진의 20대손이다. 한응준의 차남으로, 형은 한윤경(1860~1929)이다. 자필이력서와 승적부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홍주군 주북면 옥동이다. 3.1운동 후 재판 때 고향을 홍성의 '남문리'라고 답하였다. 현재 출생지로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는 그의 아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른 것이다.아버지 한응준(韓應俊, ?~1895)은 1885년(고종 22년) 종4품 선략장군 행충무위부사용자의 교지를 받았고, 종5품[10] 충훈부 도사 관직을 수행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농민운동 때 홍주목사 이승우의 참모관으로 활약하여 홍주성에서 동학군을 물리쳤으나, 이듬해 3월 15일 사망하였다.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본인이 직접 남긴 기록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름은 '''유천(維天)'''으로 불렸고 본적명은 정옥(貞玉)이다. 6세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받았다. 16세인 1894년부터 홍성읍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1894년 갑오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아버지 한응준은 동학농민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병으로 사망하였다. 회고록에 따르면 18세인 1896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가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아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르면,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른 후 20세인 1898년 2월 10일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1904년 12월 21일 아들 한보국(1904~1977)을 얻었으나, 그는 이미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하였다.
2. 2. 소년 시절
1894년 16살 되던 해, 한용운은 홍성읍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해에 갑오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홍주성에서 관군의 참모관으로 활약하며 동학농민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용운은 회고록에서 18세였던 1896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가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밝혔다.[2]한용운의 아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르면, 그는 부친의 3년상을 치른 후 20세였던 1898년 2월 10일에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1896년 한용운은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훗날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글에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 방편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들어가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간략히 언급했다. 출가 원인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벌어진 것으로 보아,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암에서 그는 불교의 기초 지식을 익히고 선(禪)을 닦았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공부했다.
2. 3. 방랑 생활
1896년 한용운은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훗날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글에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 방편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출가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 지식을 섭렵하고 선(禪)을 닦았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다.[2]
2. 4. 대한제국(1897년~1910년) 활동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 때를 전후해서 [영환지략], [음빙실문집] 등을 읽고 세계 동향을 알기 위해 백담사에서 하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으나 밀정으로 인해 귀국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생활을 하였다.1908년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에서 수학 후 일본의 신문물을 시찰하였고,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駒澤大學)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하였다. 최린 등과 교류 후 귀국, 서울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 설립에 참여했다.[12] 1909년 초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기 시작, 1913년 간행하였다. 1910년 한문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교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2. 4. 1. 출가와 문학
1905년 1월 26일 강원도 백담사에서 김연곡(金蓮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전영제(全泳濟)에게 계(戒)를 받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용운(龍雲)''', 아호는 '''만해(萬海·卍海)'''였다.[2] 이 시기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통해 근대사상을 수용하였다.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영환지략(瀛環志略)],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을 읽고 세계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밀정으로 인해 귀국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생활을 하였다.
1908년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 보조과(일어, 측량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신문물을 시찰, 동경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駒澤大學)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하였다. 최린(崔麟) 등과 교류 후 귀국하여, 1908년 10월 20일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서울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 설립에 참여했다.[12] 1908년 12월 10일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고 소장에 취임하였다. 1909년 초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기 시작, 1913년 회동서관에서 간행하였다. 1910년부터 한문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교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09년 초부터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 1910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백담사에서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910년부터 승려의 결혼 허용을 주장하며, 1910년 3월 [중추원 헌의서]를 대한제국 중추원에,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9월에는 조선총독부 통감부에 [승려취처에 관한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부처님이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11]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당했다.
2. 4. 2.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 주장
1910년부터 한용운은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10년 3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내용의 [중추원 헌의서]를 청원서 형식으로 대한제국 중추원에 제출했고,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9월에는 조선총독부 통감부에 [승려취처에 관한 건백서]를 테라우치 통감에게 제출했다.[11] 그는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가 가르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한용운은 대중의 결혼생활과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묵살당했다.
한일합방 직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상좌였던 춘성스님에 따르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라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2. 5. 일제강점기 활동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체결 이후, 한용운은 일본 불교와 통합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며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11년 1월,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 등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이회광 등의 친일 행위를 규탄하고,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방문하여 독립군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었다. 1913년에는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불교 개혁을 촉구했다.[5]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선언에 서명하고[4],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12] 수감 중에도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여 독립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며, 이 글은 상하이로 전달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 게재되었다.[13]
1922년 출옥 후에는 강연과 저술 활동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15]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15]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 당시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되어 무산되었다.[15]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며 불교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15]
한용운은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며,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 강연에서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 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일갈했다.[4]
2. 5. 1. 불교 사회 혁신 운동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방 조약 체결 이후, 한용운은 일본 불교와의 통합에 반대하며 불교 혁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원종의 이회광이 일본과 맺은 한일불교동맹조약인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1910년 12월 광주 증심사로 내려갔다.[12] 1911년 1월 석전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하고 저지하였다.[12]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소를 설치하고 [조선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취임하였다.[12] 1911년 11월 서울에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조선선종포교당) 건립을 착수하였다.[12]1911년 6월 3일, 일제는 한국 불교를 억압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사찰령]을 제정·공포하였고, 한국불교교단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에 귀속되었다.[12] 이에 맞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으로 1912년 4월 10일 중앙포교당이 준공되자, 1912년 5월 26일 한용운, 백용성, 이화능 등은 중앙포교당을 개설하였다.[12] 1912년 6월 21일에 경서부 관청에 소환된 이후 이회광의 원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임제종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개칭되었다.[12]
1912년 9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방문하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진회 첩자로 오해받아 목에 총을 맞고 마취 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12] 부상에도 불구하고 귀국 후 동래부 범어사로 내려가 불교 개혁 활동을 이어갔다.[12]
1914년 4월, 서울에 유학 온 불교 '고등강숙' 학생들이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불교강구회(朝鮮佛敎講究會)''' 총재에 취임하였다.[12] 경전 대중화를 위해 [불교대전]을 편찬할 계획으로 양산 통도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을 열람하였고, 1914년 4월 30일 범어사에서《불교대전 (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12]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12]
1914년 8월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12]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불교유신을 직접 수행하고자, 30본산 주지들을 배제하고, 승려와 신도를 융합한 통일기관을 창립하였다.[12] 그러자 30본산 주지들의 반발로 '''[불교동맹회]'''로 개칭하여(매일신보8.22. 동소문밖 청수동 근처 청암사에 모여 협의), 서울 낙원동에 본부를 두겠다고 경성북부경찰서에 1914년 9월 10일경 신고했으나, 30본산 주지의 권한을 벗어났다며 등록 거부 당하였다.[12] “고등강숙”의 학생들이 만해를 따르자, 이회광은 공문을 보내 상경을 막으려다 결국 학교를 폐쇄시켰다.[12]
1915년 6월 20일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12] 1915년 10월에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여 계몽활동, 근대화 필요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12] 1915년 개교한 중앙학림 학생들이 만해를 따랐다.[12] 불교강구회, 각황사 등에서 강연하였다.[12]
2. 5. 2. 불교포교 대중화와 선교진흥론
1914년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의 강령은 한용운이 직접 작성하였는데, 첫째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 필요 등이었다.[12] 이는 대중불교 확산을 위해 청년 운동을 중시한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하여 불교 역시 대중, 특히 청소년과 청년층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을 위해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제시하였다.[12]한용운은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 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해야 한다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 진흥을 위해서는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조선 불교가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으로 나뉘어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지만,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라고 주장했다. 선은 불교의 마음이고, 교는 불교의 언어이므로, 이 둘은 서로 배치되지 않으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가 불교 진흥과 포교 확산의 핵심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 이론, 실수(實修) 등에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하며, 속된 것을 완전히 배척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2]
그는 해외포교에도 관심을 가져 미국, 중국 등지에 해외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승려들과 불자들은 중국은 조선보다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고, 미국인들은 대부분 개신교나 천주교 신자라고 인식하여 그의 주장을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12]
2. 5. 3. 불교 경전의 한글화
한용운은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12]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는데,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어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었다. 그는 현대 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라고 생각했다.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 《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5. 4. 잡지 발행
1918년 9월 1일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 (惟心)》을 창간하여 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었으나,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12]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 은둔주의를 비판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월간 《유심》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했다. 불교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
2. 5. 5. 3.1 만세 운동과 투옥
1919년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12]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선사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12]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수감중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부었다."고 한다.[12]

그는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한편 체포된 만해는 동대문 시장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13]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13]
1921년 12월 22일 3.1독립운동 민족대표자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함께 가출옥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 하고 대성질타하였다.[14]
2. 5. 6. 수감과 석방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일설에는 용성 선사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고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12]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했으나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했다. 이종일의 회고에 따르면, 수감 중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부었다고 한다.경무국 순사들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졌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옥중에서 변호사, 사식, 보석을 거부하며 수감생활을 했고,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 발각되어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조선독립의 서'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 갈피에 넣어 외부로 전달했다.[13] 이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선언서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 평등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도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패망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21년 12월 22일, 3.1독립운동 민족대표자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함께 가출옥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마중 나온 인사들에게 "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 하고 크게 질타하였다.[14]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고,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았다.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열린 독립사상 고취 강연회에서 연사로 초빙되었는데, 그의 강연에 청중이 열광하여 다음 연사가 강연을 포기하는 일도 벌어졌다. 1922년 9월 잡지 《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
2. 5. 7. 사회 단체 활동과 님의 침묵
1922년 출옥 후에도 한용운은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을 통해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였다.[14] 1920년대에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승려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14] 1924년부터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칼럼을 기고하였다.[14]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하였다.[14] 1924년 1월 6일에는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하여 청년 조직을 항일 운동에 적합하게 개편하였다.[14]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섰다.[15] 5월 15일에는 <십현담주해>를 법보회에서 발행하였고, 5월 20일에는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였다.[15]
님의 침묵에서 한용운은 한글 표준어 대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를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 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5]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 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 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 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15]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15]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15]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 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15]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15]
1927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15]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학생 시위를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되어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15]
1930년 5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15]
1931년 6월 [불교]지를 인수,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15]
또한 주량 조절만 가능하다면 승려들도 음주를 하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30년 잡지《불교(佛敎)》의 필진이 되었다. 1931년 6월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전까지는 권상로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1년 6월부터 2년 남짓 동안은 친일로 전향한 권상로에게 인수한 《불교》를 발간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1933년 9월 결국 권상로에게 재인계하고 만다.[15]
2. 5. 8. 신간회 창설에 참여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신간회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로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17] 1928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다시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에 선출되어 허정숙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17]1927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하여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17]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시위를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되어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17]
1930년 5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의 영수로 추대되었다.[17]
1931년 6월 [불교]지를 인수,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17] 이후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쓴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였다.[17]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17]
2. 5. 9. 반일 강연 활동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체결 이후, 한용운은 일본과 맺은 한일불교동맹조약인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1년 1월,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 등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하고 저지했다.[2] 1912년 9월부터 10월까지는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방문하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며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활동을 펼쳤다.[3]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며,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 강연에서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 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일갈하며 친일 승려들을 질타했다.[4]
조선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최남선이 인사를 건네자, "당신이 누구요?"라며 냉정하게 답하고는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라고 말하며 그를 외면한 일화는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5]
2. 6. 생애 후반
1931년 53세의 나이에 동지들의 소개로 13살 연하의 유숙원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 전까지 단성사 옆 진성당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12] 1933년 김벽산 스님이 기증한 집터에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의 지원을 받아 심우장을 짓기 시작했다. 총독부 건물을 마주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34년 딸 영숙이 태어났고, 1935년 심우장이 완공되자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 활동을 했다.1936년 비밀리에 입국한 신채호의 시신을 방응모와 함께 수습하여 묘비를 건립하고, 정약용 서세 100년 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7년 불교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같은 해 4월 13일 서간도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였던 김동삼이 경성감옥에서 사망하자, 아무도 거두지 않는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한용운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작가이자 시인으로, 한국 불교 개혁을 촉구했다. 그의 시는 민족주의와 애정을 다루었으며, 종종 둘을 혼합하기도 했다. 1926년 출판된 시집 『님의 침묵』은 평등과 자유 사상을 중심으로 3·1 운동의 비폭력 저항 정신을 담고 있다.
1913년 발표한 "조선불교유심론"에서는 조선 불교의 시대착오적인 폐쇄성과 현실과의 부조화를 비판하며 평등, 자기발견, 불교의 세계 구원 가능성, 진보의 원리를 제시했다.[5] 1918년에는 청년 계몽을 위한 "유심"을 출판했고, 1919년 채린과 함께 3·1 운동에 참여하여 3년간 투옥되었다. 투옥 중 "조선독립의 이유"를 집필했고, 1922년 석방 후 전국 강연 순회를 통해 청년들을 참여시키고 고무했다. 1924년에는 불교 청년회 회장이 되었다.[5]
『님의 침묵』은 백담사에서 쓰여졌으며, 문학 비평가들과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중국시, 시조, 『유심』에 실린 시, 소설 『흑풍』, 『후회』, 『박명』 등 많은 저서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그의 가장 중요하고 오래 지속되는 문학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5]
한용운의 시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비주의와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인도 전통을 따르고 있다.[7] 2007년 한국시인협회는 그를 한국 현대 시인 10인에 선정했다.[8]
2. 6. 1. 소설 집필 활동
1931년 53세의 나이로 재혼한 한용운은 1933년 심우장을 지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을 연재하며 여성 해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12] 1936년에는 신채호의 장례를 돕고 정약용 기념회에 참여했으며,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를 연재했다.[12] 1937년 만당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고,[12] 같은 해 김동삼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12]2. 6. 2. 태평양 전쟁 전후
1937년 중일전쟁과 1938년부터 시작된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12] 징용과 보국대 참여를 거부하고, 일본군 찬양 관련 글이나 강연도 하지 않았다.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으며,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13]1940년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14] 말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이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며, 성북동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에서 회갑을 맞이하여 몇몇 동지들과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1933년 심우장을 지어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을,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를 연재하였다. 1938년에는 장편 《박명》을 발표하였다.
2. 6. 3. 사망
1940년 5월부터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2] 말년에는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며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았다.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고, 6월 29일 심우장에서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입적하였다.[2]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2]3. 사후
-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한용운은 1년 전에 사망하여 광복을 보지 못했다.
- 동지들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훗날 부인 유숙원 여사의 묘소가 오른편에 매장되었다.
- 한용운은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님에 대한 그리움과 곧은 지조를 표현한 작품들로 해방 이후에도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부터는 학자들이 그의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15]
- 1967년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승려 운허에 의해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
-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과 홍성읍내 장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만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 1989년 12월 24일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
-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18]
- 후에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만해 생가지에는 생가 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4. 작품성
만해 한용운의 작품은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민족정신과 불교적 이상을 담아냈다는 특징이 있다. 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님'은 단순한 연인을 넘어 조국, 부처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15][16] 이는 당시의 억압적인 민족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단순한 저항 문학을 넘어선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님의 침묵에서 그는 한글 표준어 대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를 사용하여 민중적인 정서를 드러냈다.[9] 이는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시는 산문시 형식을 띠면서도 내재율을 지니고 있어,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면서도 자연스러운 리듬감을 보여준다. 이는 근대 자유시 발전에 기여한 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한용운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영향을 받아, 긴 호흡의 시를 통해 열정적인 헌신을 표현했다.[7] 그의 시는 신비주의와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인도 전통의 영향을 보여주기도 한다.[7] 2007년 한국시인협회는 그를 한국 현대 시인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8]
5. 저서
1913년에 출간한 《조선불교유신론》은 당시 조선 불교의 시대착오적인 폐쇄성과 현실과의 괴리를 비판하며 평등, 자기 발견, 불교의 세계 구원 가능성, 진보의 원리 등을 제시하여 지식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5]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였다.
1918년 9월 1일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을 창간하여 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었으나,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월간 유심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15]
그의 주요 저서로는 《불교대전 (佛敎大典)》(1913년), 《조선불교유신론》(1913년), 시집 《심》, 시집 《님의 침묵》,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1933년),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 《불교와 고려제왕 (高麗諸王)》,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 등이 있다.
5. 1. 번역서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는데,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어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는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이며,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이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읽고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 《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 각종 금석문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제목 | 출판 연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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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대전 (佛敎大典)》 | 1913년 | |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 | 1913년 | |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 | 1933년 | |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 | ||
《불교와 고려제왕 (高麗諸王)》 | ||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 | ||
《정선강 채근담》 | ||
강영희 & 프랜시스 킬리, 『연인의 명상』(Meditations of the Lover) | 1970 | 연세대학교 출판 |
김재희, 『사랑의 침묵 그리고 다른 시들』(Love's Silence and other poems) | 1999 | 밴쿠버 B.C. 출판 |
프란치스카 조, 『모든 갈망: 만해의 사랑과 동경의 시』(Everything Yearned For: Manhae's Poems of Love and Longing) | 2005 | 위즈덤 퍼블리케이션즈 출판 |
5. 2. 소설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을 연재하였다.[15]《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배경을 청나라로 설정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었다. 또한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를 연재하였다.[15]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소설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으로 이해된다.[15]한용운의 작품들은 당시 문학 비평가들과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시조와 《유심》에 실린 시, 그리고 《흑풍》, 《후회》, 《박명》과 같은 소설 등 많은 저서에도 불구하고, 시집 님의 침묵은 그의 가장 중요하고 오래 지속되는 문학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5]
5. 3. 시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15] 《님의 침묵》에서 그는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를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6]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그는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1918년 9월 1일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 (惟心)》을 창간하여 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었으나,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5. 4. 수필
한용운은 여러 수필을 집필했는데, 그 중 1913년에 출간한 《조선불교유신론》은 당시 조선 불교의 시대착오적인 폐쇄성과 현실과의 괴리를 비판하며 평등, 자기 발견, 불교의 세계 구원 가능성, 진보의 원리 등을 제시하여 지식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5] 1918년에는 청년 계몽을 위한 《유심》(Whole Mind)을 출판하였다.[5]6. 사상과 신념
1905년 1월 26일 강원도 백담사에서 김연곡을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한용운은,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 등을 접하며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12] 1908년에는 일본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이후에는 친일 불교 행위에 맞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불교계의 개혁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한용운은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불교 대중화 작업에 힘썼다.[19] 그는 경전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어 일반 대중이 읽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을 통해 불교를 쉽게 전파하고자 하였다.
또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만인의 평등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고 현실에서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불교 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의 강령은 정교분리(政敎分離),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이다. 그는 불교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하며,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을 펼쳤다. 그는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며,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므로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하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해외포교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 중국 등지에 해외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승려들과 불자들은 그의 해외 포교 주장을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취급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년간 투옥되기도 하였다.[4] 그의 시는 민족주의와 애정을 다루었으며, 종종 둘을 혼합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 정치적 시집 중 하나는 1926년에 출판된 『님의 침묵』이다.[5] 이 작품들은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3·1 운동에서의 비폭력 저항 경향에 영감을 주었다.
6. 1. 불교 사회혁신주의와 보편화
만해 한용운의 불교 사상은 흔히 불교사회혁신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조선 민중이 역사 대대로 지배자들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해왔음을 인식하고,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거나 현실에서 민중을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저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혁신론을 주장하며, 산사로 들어가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는 점을 비판하고 한국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 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19]그는 어떠한 진리와 진실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는 불교가 미래 인류 문명에 가장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산에 들어가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사원 운영의 혁신을 주장하는 내용에서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라는 기본 사상이 도출되었으며,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일부 고위층 승려들이나 종단이 독식하지 말고 민중화,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년 불교를 제창하고 젊은이들의 불교 포교 및 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 작업에 착수했으며, 금강경, 화엄경 등 불교 서적의 한글 번역과 불교 서적 해석서, 해석 칼럼 및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한편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 편찬에 참여하고, 불교 잡지 《유심》, 《불교》 등의 간행에 힘쓰며 불교 학교와 강연회를 주최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 보편화를 위해 노력했다.
6. 2. 대처승 운동
만해 한용운은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고 현실에서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불교사회혁신주의를 내세웠다.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혁신론을 주장하며, 한국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비판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불교 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19]만해는 승려가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은 편견이며,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중의 결혼 생활과 가장의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대중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승려의 결혼이 불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주장하며, 원효 등 대처승의 사례를 제시했다. 또한, 윤리적, 생물학적 논거를 통해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하지만 만해의 대처승 허용 운동과 승려 결혼 허가 주장에 대해 불교계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해방 직후 조계종단에서는 만해의 주장을 거북스럽게 여겼다. 다만, 불교 개혁을 추구했던 운동권 승려 그룹과 재가불교청년단체에서는 만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0]
6. 3. 불교 사회 혁신 주의와 도시화
만해 한용운은 불교사회혁신주의를 주장하며, 조선 민중이 억압받는 현실에서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국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비판하며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불교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불교가 대중에게 진리를 강요하지 않지만, 조선에서는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산속에 갇혀 낙후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를 위해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소수 승려나 종단이 독식하지 말고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년 불교를 제창하고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에 힘썼으며, 금강경, 화엄경 등의 한글 번역과 해석 칼럼을 발표했다. 또한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 편찬에 참여하고, 불교 잡지 발행과 강연회를 통해 불교 대중화에 노력했다.
사원 운영에 있어서 그는 염불당(念佛堂)을 폐지하고 도시에 사찰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당이 산에 있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을 비판하고, 사찰이 사람이 사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승려들이 노동에 참여하여 스스로 곡식을 생산하고, 불자들의 시주에만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승려들이 동냥을 그만두고 생산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교 사상 측면에서 그는 소승적인 소극주의나 현세 부정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생의 삶과 일상에서 정토를 구하고, 정토로 인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6. 3. 1. 불교조직 혁신론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사찰령에 반대하며 불교 조직의 혁신을 주장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관리 감독과 간섭을 막기 위해 통일된 불교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19]그는 통일종단의 조직, 규약, 재정 확보 등을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기존의 본말사 제도(本末寺制度)를 유지하면서 중앙에 통제 기구를 신설하는 방안을 제시했다.[19]
이러한 주장은 김법린(金法麟)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 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비록 당시 승려들의 개혁 의지가 부족하여 반대와 비방에 시달렸지만, 이는 불교 행정 조직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6. 4. 조선불교 독립 운동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 불교는 일본 불교에 예속될 위기에 처했다. 1911년 친일 승려 이회광이 조계종을 일본 임제종에 통합하려는 시도에 맞서, 한용운은 박한영 등과 함께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이를 저지하고 조선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다.[2]한용운은 불교를 통한 민족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1918년 청년 계몽 운동을 위해 잡지 '유심'을 창간하고 주재했다.[5] 1919년 3·1 운동에는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선언에 서명하고,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4]
1924년에는 불교청년회 회장 및 총재를 역임하며 불교 청년 운동을 이끌었다. 1927년에는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 1928년에는 경성지부장을 맡아 민족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에는 민중대회를 개최하여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31년에는 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하여 당수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또한,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여 2년간 간행하며 불교 대중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한용운은 종교가 체제의 하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종교 정책에 맞서 정교분립을 주장하며 불교의 독립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7. 연보
-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생[9]
- 1904년 출가
- 1905년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수계
- 1906년 명진학교 입학
- 1908년 명진학교 졸업, 조동종대학림에서 연구
- 28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불문에 귀의
- 1911년 박한영 등과 친일불교에 맞서 승려대회 개최
-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惟心)』을 창간, 주재
- 1919년 3월 1일 불교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9]
-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
- 1926년 시집 '''님의 침묵''' 출판
-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
- 1928년 신간회 경성지부장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 개최
- 조선불교동맹 지도자
- 1931년 만당 당수, 월간 불교지를 인수, 2년간 간행[9]
- 1944년 서울에서 중풍으로 사망
8. 세계(世系)
한용운은 조선 전기 한명회의 동생으로 전구서승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命溍)의 이양공파 20대손이다.[10] 자필이력서와 승적부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홍주군 주북면 옥동(玉洞)이다. 3.1운동 후 재판 때 고향을 홍성의 '남문리'라고 답변하였다. 현재 출생지로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는 그의 아들인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
한용운의 아버지 한응준(韓應俊, 1856~1895)은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고종 22년(1885년) 종4품 선략장군 행충무위부사용자의 교지를 받았고, 종5품[10] 충훈부 도사(都事)의 관직을 수행하였다. 고종 31년(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령(傳令)을 받고 호연초토사 이승우(홍주목사)의 참모관으로 활약하여 홍주성에서 동학군을 물리치는 데 일조하였다.
한용운의 유년 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름은 '''유천(維天)'''으로 불리었고 본적명은 정옥(貞玉)이다. 6세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받았다.
시조부터 한용운까지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미확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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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蘭) | 영(頴) | 상휴(尙休) | 혁(奕) | 희유(希愈) | 광윤(光胤) | 강(康) | 사기(謝奇) | 악(渥) | 공의(公義) | 수(脩) | 상질(尙質) | 기(起) | 명진(明溍) | 종옥(宗玉) | 익량(益良) | 재혁(載爀) | 광후(光厚) | 영우(永祐) | 응준(應俊) | 용운(龍雲) |
한용운의 자녀는 첫 번째 아내 전정숙 사이에서 얻은 아들 한보국과 두 번째 아내 유숙원 사이에서 얻은 딸 한영숙이 있다. 한보국은 고향인 홍성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한국 전쟁 때 월북하였다.[21]
가족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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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한응준(韓應俊, 1856년 ~ 1905년) | |
어머니 | 방숙영(方淑英, 1859년 ~ 1912년) | |
형 | 한윤경(韓允慶, 1876년 ~ 1929년) | |
배우자 | 전정숙(全貞淑, 1877년 ~ 1950년) | |
장남 | 한보국(韓報國, 1904년 ~ 1977년) | |
며느리 | 강창옥(姜昌玉, 1917년 ~ ?) | |
손녀 | 한명숙(韓明淑, 1936년 ~ ) | |
손녀 | 한명계(韓明界, 1939년 ~ ) | |
손자 | 한명진(韓明進, 1942년 ~ ) | |
손녀 | 한명자(韓明子, 1943년 ~ ) | |
손녀 | 한명세(韓明世, 1947년 ~ ) | |
손녀 | 한명심(韓明心) | |
배우자 | 유숙원(兪淑元, 1898년 ~ 1965년) | |
장녀 | 한영숙(韓英淑, 1934년 ~ ) |
9. 가족 관계
손녀: 한명숙(韓明淑, 1936년 ~ )
손녀: 한명계(韓明界, 1939년 ~ )
손자: 한명진(韓明進, 1942년 ~ )
손녀: 한명자(韓明子, 1943년 ~ )
손녀: 한명세(韓明世, 1947년 ~ )
손녀: 한명심(韓明心)
한용운은 14세에 조혼 풍습에 따라 전정숙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하였고, 1931년 승려 생활 도중 53세에 21세 연하의 유숙원과 결혼하여 대처승이 되었다. 첫 번째 아내 전정숙과의 사이에서는 아들 한보국을, 두 번째 아내 유숙원과의 사이에서는 딸 한영숙을 얻었다.[21] 한보국은 홍성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한국 전쟁 때 월북하였다.[21] 월북한 한보국은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으나 아들 1명은 어릴 때 요절하였다. 한보국의 다른 부인은 1960년대 무렵 인천에 거주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0. 평가와 비판
한용운은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21] 강렬한 현실 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혁명 사상을 가졌다는 평가와 함께, 불교 이념에 의한 자유와 평등의 국가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으로는 그의 사상이 자유민주주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입각한 소극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제기된 승려의 결혼 허용 주장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제자 중에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반일 인사였고 해방 이후에도 승려로 활동한 춘성이 있었다.
11. 기타
- 승려의 결혼 허용 주장은 1920년대 1930년대 화제가 되어 사회적 이슈거리와 논란이 되었다.[2]
- 친하던 벗 또는 호형호제하던 사이로는 이시영, 백용성, 최남선, 최린, 김동삼, 방응모, 신채호,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정인보, 김규식, 박광, 홍명희, 만공, 이광수, 김일엽, 최범술 등이 있었다.[2]
- 그의 제자 중에는 춘성도 있었다. 춘성 역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반일 인사이자 해방 후에도 승려로 활동하였다.[2]
- 그의 아들 한보국은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자이자 해방 후에는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1980년대까지 그에게는 아들이 한 사람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들과 본부인 전정숙의 존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2]
12. 만해 한용운을 연기한 배우들
참조
[1]
웹아카이브
Han Yong-un LTI Korea Datasheet
http://klti.or.kr/ke[...]
2013-09-21
[2]
서적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Hollym
[3]
웹아카이브
Han Yong-un LTI Korea Datasheet
http://klti.or.kr/ke[...]
2013-09-21
[4]
웹사이트
Han Yong'un
https://web.archive.[...]
Korean Literature
2013-11-20
[5]
웹아카이브
Han Yong-un LTI Korea Datasheet
http://klti.or.kr/ke[...]
2013-09-21
[6]
서적
Poems from Korea
University Press of Hawaii
[7]
웹아카이브
Revisiting Han Yong-un's Buddhist Texts and their Nationalist Contexts
http://congress.aks.[...]
2016-02-02
[8]
뉴스
Top Ten Korean Modern Poets Selected
https://www.koreatim[...]
2020-02-16
[9]
웹사이트
한용운(韓龍雲)
https://encykorea.ak[...]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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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홍성넷
https://web.archive.[...]
2013-05-22
[11]
서적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12]
서적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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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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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만해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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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
한국교육방송공사
2009-01-05
[16]
서적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
한국교육방송공사
2009-01-05
[17]
뉴스
독립운동가 만해 선사 속가 후손들 날품팔이 생활
경향신문
1986-06-02
[18]
웹사이트
네팔 민주화·문학의 뿌리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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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
서적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1]
웹아카이브
만해와 외아들 한보국
http://www.minjog21.[...]
민족21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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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8일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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