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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도슈 쥐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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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도슈 쥐노는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활약한 프랑스 군인으로, 1771년에 태어나 1813년에 사망했다. 부르고뉴 출신으로, 혁명 초기에 군에 입대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부관으로 활동하며 이탈리아,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다. 특히 1807년 포르투갈 침공을 지휘하여 아브란테스 공작 작위를 받았으나, 반도 전쟁 중 영국군의 개입으로 패배했다. 이후 러시아 원정에서 지휘 능력을 의심받았으며, 정신 질환으로 인해 몰락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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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도슈 쥐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안드레아 아피아니의 초상화, 1797년경
출생일1771년 9월 25일
출생지부시르그랑, 부르고뉴, 프랑스 왕국
사망일1813년 7월 29일
사망지몽바르, 코트도르주, 프랑스 제1제국
별칭라 템페트 (“폭풍”)
군 경력
복무 기간1791년–1813년
소속육군
충성프랑스 왕국

계급사단장
지휘포르투갈 방면군
제3군단
제8군단
주요 전투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관직
직위파리 군정 장관
재임 기간1803년–1804년
이전에두아르 모르티에
이후조아샹 뮈라
직위파리 군정 장관
재임 기간1806년–1807년
이전조아샹 뮈라
이후피에르 오귀스탱 훌랭
군주나폴레옹 1세
작위
작위명아브랑테스 공작
기타
로마자 표기Jean-Andoche Junot

2. 초기 생애 및 혁명 초기 경력

앙도슈 쥐노는 1771년 9월 25일 부르고뉴의 부시르그랑에서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났다.[1][2] 그는 미셸 쥐노(1739–1814)와 마리 앙투아네트 비에네메(1735–1806)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쥐노는 몽바르샤티용쉬르센에서 학교를 다녔고, 디종에서 법학을 공부했다.[7]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 무렵에는 쇼몽에서 법률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3] 쥐노는 혁명 대의에 동참하여 1790년 7월 14일 파리에서 열린 연맹 축제에 참석했다.[4] 이후 의용병 대대에 입대하여 군조가 되었고, 두 번의 부상을 입었다.[5]

2. 1. 혁명 초기 군 경력

쥐노는 1791년 7월 9일, 고향의 국민 방위대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제1 중대 대위로 복무했다.[4] 그해 말, 코트도르의 지원병 제2대대에 척탄병으로 입대했다.[5]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시작되자 북부군으로 보내졌고, 1792년 6월 11일 라 글리즐|라 글리즐 전투프랑스어에서 여러 부상 중 첫 번째 부상을 입었다.[5] 곧 하사관으로 진급했고, 1793년 5월 16일 라인군에서 복무하던 중 다시 부상을 입었다.[5] 이 시기에 쥐노의 동료들은 그에게 "폭풍"(la Tempête)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4][2]

1793년 말 툴롱 공방전에서 당시 대위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처음 만났다. 보나파르트는 편지를 쓸 필체가 좋은 사람이 필요했고, 쥐노가 자원하여 편지를 썼다. 포탄에 아슬아슬하게 맞지 않은 후 재치 있는 농담으로 보나파르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2][6] 공방전 이후 보나파르트는 장군이 되었고 쥐노는 그의 부관이 되었다.[2]

3. 나폴레옹 휘하에서의 활약

쥐노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고 대령 및 여단장으로 진급했다.[5][4]

3. 1. 이탈리아 원정

1796년 4월 몬테노테 전역에 참전했고, 밀레시모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대령으로 승진했다. 총재 정부에 이탈리아 전역에서 처음으로 노획한 군기를 전달하는 영예를 안았다.[5] 로나토 전투에서는 백병전으로 적군 6명을 사살하고 머리에 세 번의 칼날 부상을 입었다.[5][9]

3. 2. 이집트 원정

1798년 5월, 쥐노는 보나파르트와 함께 원정대의 기함 ''오리앙''에 탑승하여 이집트로 떠났으며, 몰타 침공에 참여했다.[4][5] 1798년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에서 여단장으로 참전했으며, 1799년 1월 9일 여단장으로 진급했다.[4]

쥐노가 나사렛 근처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병력을 이끄는 모습, 앙투안-장 그로의 ''나사렛의 전투'' (1801)


1799년 4월 8일, 아크레 포위전에서 쥐노는 클레베르 사단의 선봉을 이끌고 5배나 많은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 싸워 군기 5개를 탈취한 후 후퇴했다.[2] 이 활약으로 쥐노는 군대 내에서 인정을 받았다.[2]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수아 라뉘스 장군과의 결투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1799년 10월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에 영국 함선에 나포되어 호레이쇼 넬슨을 만나기도 했다.[2]

4. 통령 정부 및 제정 초기

1800년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보나파르트가 승리한 날에 쥐노는 프랑스에 도착했다.[2] 그 해에 쥐노는 보나파르트 가문의 오랜 친구인 로르 마르탱 드 페르몽과 결혼했다. 나폴레옹은 결혼 비용 대부분을 지불하고, 로르에게 지참금을 제공했으며, 젊은 부부에게 호화로운 선물을 주었다.[10] 쥐노는 통령 정부 하에서 사치를 일삼아 창밖으로 돈을 뿌리고 하루에 굴 300개를 먹는 것으로 유명했다.[18][11]

1801년 11월 20일 사단장이 되었다.[5] 1803년부터 1804년까지 파리 군사 지사로 근무했으며, 잠시 포르투갈 왕국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참전했고, 이후 파르마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806년 파리로 돌아와 다시 군사 지사로 임명되어 1807년까지 근무했다.[2]

주노의 프로필이 있는 동전

4. 1. 사생활 스캔들

1806년파리 지사가 되었지만, 뮈라 원수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카롤린과 관계를 맺어 스캔들을 일으켰다.[2]

5. 반도 전쟁

쥐노는 반도 전쟁에서 주로 활약했다. 1807년 포르투갈 침공을 지휘하여 리스본을 점령하고 아브란테스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게릴라전에 시달렸다.

1808년 영국군 참전 후 비메이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위되었으나, 신트라 협약으로 포로는 면하고 제한된 물품만 가지고 프랑스로 귀국했다. 이후 군법회의에 회부될 뻔했으나, 1810년 앙드레 마세나 휘하로 이베리아 반도에 복귀하여 중상을 입었다.

5. 1. 포르투갈 침공 (1807)

1807년 7월 29일, 쥐노는 나폴레옹에 의해 "지롱드 관찰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포르투갈 침공을 위한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13] 이 군대는 바욘에 집결했으며, 퐁텐블로 조약(1807년 10월 27일)에 따라 스페인 병력이 증원되었다.[13] 10월 17일, 쥐노는 약 26,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을 거쳐 힘든 행군 끝에 11월 19일 세구라에서 포르투갈로 진입했다.[13]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쥐노의 군대는 리스본으로 진격하여 11월 20일 카스텔루브랑쿠, 이틀 뒤 아브란테스를 점령했다. 11월 24일, 쥐노는 당시 섭정이었던 주앙 왕자 (훗날 주앙 6세)가 마리아 1세 여왕과 함께 브라질로 도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13] 쥐노는 왕가가 떠난 지 사흘 뒤인 11월 30일 전투 없이 리스본에 입성했다.[13]

도밍고스 세케이라의 알레고리 작품인 ''리스본을 보호하는 쥐노'' (1808)


아브란테스 공작으로서의 쥐노의 문장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은 곧 포르투갈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했다.[13] 쥐노는 이러한 공로로 나폴레옹으로부터 아브란테스 공작 (칭호)을 받았지만, 제국 원수로 임명되지는 못했다.[13] 그는 포르투갈 군정 수장으로서 리스본의 킨텔라 궁전에 사령부를 설치했다.[13] 1807년 12월 말부터 1808년 3월까지 쥐노는 포르투갈군 (약 9,000명의 병사가 ''그랑 아르메''의 포르투갈 군단에 합류)과 지방 민병대 해산, 브라간사 왕가의 폐위 선포, 왕실 자산 몰수와 같은 강경책을 시행했다.[13]

1808년 1월, 포르투갈 점령에 대한 초기 저항 사건들이 발생했다.[13] 마드리드의 5월 봉기 이후, 모든 스페인군이 포르투갈에서 철수했으며, 6월에는 대중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13] 8월 1일, 영국 원정군이 몬데구 강 어귀에 상륙했다.[13] 쥐노는 롤리사에서의 프랑스군 패배 이후, 1808년 8월 21일 비메이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프랑스로부터 고립되었다.[13]

유리한 조건의 신트라 협약을 영국과 체결한 덕분에 그는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하고, 군대가 획득한 전리품과 "무기와 짐"을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그는 10월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신트라 협약의 조건은 영국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5. 2. 영국군 개입과 패배

1808년 1월, 포르투갈 점령에 대한 초기 저항 사건들이 발생했다.[13] 마드리드의 5월 봉기 이후, 모든 스페인군이 포르투갈에서 철수했으며, 6월에는 대중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13] 1808년 8월 1일, 영국 원정군이 몬데구 강 어귀에 상륙했다.[13] 쥐노는 롤리사에서의 프랑스군 패배 이후, 1808년 8월 21일 비메이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프랑스로부터 고립되었다.[13]

유리한 조건의 신트라 협약을 영국과 체결한 덕분에 그는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고, "무기와 짐"과 군대가 획득한 전리품을 가지고 갈 수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포르투갈에서 유명해진 표현이 되었다.[13] 그는 10월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신트라 협약의 조건은 영국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6. 후기 경력 및 사망

쥐노는 제3군단 사령관으로 스페인에 파견되어 사라고사 2차 포위전에 참전했다.[2]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그랑 다르메에서 복무했지만, 게프리스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주요 지휘권을 맡지는 못했다.[2] 1810년 앙드레 마세나 원수 휘하의 제8군단 사령관으로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왔으나, 1811년 얼굴에 총상을 입어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수술을 받아야 했다.[2][14] 이 부상과 관련된 합병증은 이후 그의 정신 쇠퇴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15][16]

루브르 박물관 북쪽 정면에 있는 쥐노의 조각상

6. 1. 러시아 원정 (1812)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쥐노는 제롬 보나파르트의 후임으로 군을 지휘했지만, 그 기록은 공과가 엇갈렸다. 스몰렌스크 전투 (8월 17일) 이후,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저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아 나폴레옹에게 질책을 받았고[2] 나폴레옹은 쥐노에게 원수 지휘봉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17] 그러나 쥐노는 여러 합병증 때문에 스몰렌스크에서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주장했고,[17] 그의 라이벌인 요아킴 뮈라가 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주장했다.[18]

그는 경질되지 않고 끝까지 군 사령관으로 종군하여, 보로디노 전투 (9월 7일)에서는 제8군단을 지휘하여 활약했다.[2]

6. 2. 몰락과 죽음

1813년 5월, 쥐노는 일리리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정신 질환이 급격히 악화되었다.[19][20] 그는 라구사에서 오귀스트 드 마르몽이 개최한 무도회에 춤 구두와 훈장만 착용한 채 알몸으로 참석하고,[19][20] 자신의 거주지를 불태우고 정신병자와 함께 살기 위해 도망치는 등 기행을 벌였다.[19][20] 얼마 후, 쥐노는 뇌에 염증을 겪었는데, 이는 그의 수많은 머리 부상의 장기적인 결과일 가능성이 높았다.[18] 결국 그는 직위에서 해임되어 부르고뉴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졌다.[18]

고통에 휩싸인 쥐노는 투신자살을 시도하여 두 다리가 부러졌다.[2][21][18] 그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확신했고, 혼자 남겨졌을 때 가위로 자해했다.[2][21][18] 쥐노는 며칠 후인 1813년 7월 29일 몽바르에서 감염으로 사망했다.[2][21][18] 그는 몽바르 묘지에 묻혔으며, 1898년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7. 가족 관계

Laure Adélaïde Constance Permon|로르 아델라이드 콩스탕스 페르몽프랑스어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녀는 다음과 같다.[4][22]

이름출생일사망일비고
조제핀 쥐노 다브랑테스1802년 1월 2일1888년 10월 15일1841년 자크-루이 아메와 결혼
콩스탕스 쥐노 다브랑테스1803년 5월 12일1881년1829년 루이 앙투안 오베르(1799–1882)와 결혼
루이 나폴레옹 앙도슈 쥐노1807년 9월 25일1851년 2월 20일[23]제2대 다브랑테스 공작, 미혼
앙도슈 알프레드 미셸 쥐노1810년 11월 25일1859년 6월 24일제3대 다브랑테스 공작, 솔페리노 전투에서 전사, 1845년 마리 셀린 엘리즈 레피크와 결혼, 1853년 마리 루이즈 레오니 레피크와 결혼



이집트 원정 중 얻은 사생아 오델로(1799년경 출생)가 있었다.[4][22] 쥐노는 오델로를 프랑스로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도착하지 못했다.[8]

반도 전쟁 중에는 레오노르 드 알메이다 포르투갈, 알로르나 후작 부인의 딸인 줄리아나 드 알메이다 이 오옌하우젠과 관계를 맺었다는 설이 있다.[18]

참조

[1] 웹사이트 Ir ead visu lien https://archives.cot[...] 2024-12-07
[2] 서적 Dictionnaire Napoléon https://www.napoleon[...] Éditions Fayard
[3] 서적 Histoire de la ville de Chaumont (Haute-Marne)... par Émile Jolibois... https://gallica.bnf.[...] 1856
[4] 웹사이트 Le général Junot en Egypte https://www.napoleon[...] Foundation Napoleon 2022-04-17
[5] 간행물 JUNOT, duc d'ABRANTÈS (Jean-Andoche) https://gallica.bnf.[...] Librairie Historique et Nobilaire 1934
[6] 웹사이트 Memoirs of the life, exile, and conversations of the Emperor Napoleon. (Vol. I) https://www.gutenber[...] 2024-10-30
[7] 서적 Mémoires du maréchal Marmont, duc de Raguse (1/9) https://archive.org/[...]
[8] 서적 Memoirs of Madame Junot (Duchesse D'Abrantès) https://archive.org/[...] Paris ; Boston : Napoleon Society 1895
[9] 서적 Campagne du général Buonaparte en Italie, pendant les années IVe et V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 par un officier général https://gallica.bnf.[...] 1797
[10] 논문 Un Grand Mariage Sous Le Consulat https://www.jstor.or[...] 1949
[11] 서적 Les Joyeux propos de table, anecdotes, bons mots, traits plaisants, boutades, entremêlés de curieuses recettes culinaires. Recueillis par Louis Loire https://gallica.bnf.[...] 1879
[12] 서적 Dictionnaire de la Grande Armée Tallandier
[13] 논문 A Invasão de Junot e o Levantamento em Armas dos Camponeses de Portugal. A Especificidade Transmontana https://www.revistam[...] 2008-11
[14] 서적 Campagne de l'armée française en Portugal, dans les années 1810 et 1811, avec un précis de celles qui l'ont précédée . Par Mr. A. D. L. G****, officier supérieur employé dans l'état-major de cette armée https://gallica.bnf.[...] 1815
[15] 서적 Les boudoirs de Paris. Tome 1 / par le duc d'Abrantès https://gallica.bnf.[...] 1844–1846
[16] 서적 Memoirs Of Joseph Fouche https://archive.org/[...] 1893
[17] 논문 LES PROPOS DE LA QUINZAINE: Marie-Noël https://www.jstor.or[...] 1968
[18] 서적 La Générale Junot, duchesse d'Abrantès, 1784-1838 : d'Après ses lettres, ses papiers et son "Journal intime" inédits https://archive.org/[...] Paris : Tallandier 1900
[19] 서적 Mémoires sur la reine Hortense, mère de Napoléon III / [par Charles Bernard Derosne] https://gallica.bnf.[...] 1863
[20] 서적 Seconde Notice sur les provinces illyriennes, continuation de l'analyse du manuscrit 11600 de la Bibliothèque royale , par M. le chevalier Marchal,... https://gallica.bnf.[...] 1851
[21] 서적 Napoleon: A Life Penguin
[22] Citation L’Africaine https://fr.m.wikisou[...] Dumont 1838
[23] 웹사이트 Louis Andoche Junot D'abrantÈs http://www.geni.com/[...]
[24] 웹사이트 Family tree of Pierre LOUŸS https://gw.geneanet.[...] 202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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