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앙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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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앙 6세는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으로, 1767년에 태어나 1826년에 사망했다. 그는 1799년부터 모친 마리아 1세의 섭정을 시작했고,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천도하여 브라질을 통치했다. 1816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1821년 포르투갈로 귀국하여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다. 그는 브라질 독립을 인정하고, 브라질에 다양한 제도와 문화를 도입하여 브라질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치세는 논란이 많았으나 브라질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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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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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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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브라질 황제 (법률상) |
재위 기간 | 1816년 3월 20일 – 1826년 3월 10일 |
선임 | 마리아 1세 |
후임 | 페드루 1세 |
대관식 종류 | 칭송 |
대관식 | 1818년 2월 6일 왕실 예배당 |
브라질 국왕 재위 기간 | 1816년 3월 20일 – 1822년 10월 12일 |
대관식 종류 | 칭송 |
대관식 | 1818년 2월 6일 왕실 예배당 |
선임 (브라질 국왕) | 마리아 1세 |
후임 (브라질 국왕) | 페드루 1세 (황제로서) |
섭정 | 페드루, 왕세자 (1821–1822) |
배우자 | 카를로타 조아키나 데 에스파냐 (1785년 5월 8일 결혼) |
자녀 | 마리아 테레사,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대공 안토니우, 베이라 공작 마리아 이사벨, 스페인의 여왕 페드루 1세 및 4세, 브라질 황제 및 포르투갈 국왕 마리아 프란시스카, 스페인의 여대공 이사벨 마리아, 포르투갈의 여왕 섭정 미겔 1세, 포르투갈 국왕 마리아 다 아순상 대공녀 아나 데 제수스 마리아, 롤레 후작부인 |
전체 이름 | 주앙 마리아 조제 프란시스쿠 자비에르 데 파울라 루이스 안토니우 도밍구스 하파엘 |
왕가 | 브라간사 |
아버지 | 페드루 3세 |
어머니 | 마리아 1세 |
출생일 | 1767년 5월 13일 |
출생지 | 켈루스 궁전, 켈루스, 포르투갈 |
사망일 | 1826년 3월 10일 |
사망지 | 벤포스타 궁전, 리스본, 포르투갈 |
매장지 | 브라간사 왕가의 판테온, 리스본, 포르투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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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로마 가톨릭교 |
통치 | |
별칭 | 관대왕 주앙, 브라질 황제 주앙 1세 |
2. 생애
포르투갈 국왕 마리아 1세와 페드루 3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88년 형 조제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7] 스페인의 카를로타 조아키나와 결혼했다.[6]
어머니 마리아 1세의 정신 질환 악화로 1799년부터 섭정을 맡았다. 나폴레옹 전쟁 중 1807년 프랑스군 침공을 피해 왕실과 정부를 이끌고 식민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피신했다.[15][18][19] 이 결정은 포르투갈 본토에 혼란을 야기했으나, 브라질의 발전을 촉진하고 독립의 기초를 마련했다.[33][34]
1816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브라질에서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베스 연합 왕국의 국왕 주앙 6세로 즉위했다.[12] 브라질의 제도적 기반 마련에 기여했으나,[43][48] 포르투갈 본국의 1820년 자유주의 혁명으로 귀국 요구를 받았다. 1821년 포르투갈로 돌아오면서 아들 페드루를 브라질 섭정으로 남겼다.[7][12][54]
포르투갈 귀국 후 1822년 입헌 군주제 헌법에 선서했으나,[12][55] 절대 왕정 복고를 시도한 아들 미겔 등 보수 세력과의 갈등을 겪었다.[12][57] 브라질에 남은 페드루는 1822년 독립을 선언하고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으며, 주앙 6세는 1825년 이를 인정했다.[12][60]
1826년 리스본에서 사망했으며, 사인으로는 비소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된다.[61][62][63] 그의 통치는 포르투갈과 브라질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João Maria José Francisco Xavier de Paula Luís António Domingos Rafael|주앙 마리아 조제 프란시스쿠 자비에르 드 파울라 루이스 안토니우 도밍구스 라파엘pt은 1767년 5월 13일, 외조부인 조제 1세 국왕 재위 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국왕의 장녀이자 상속녀였던 마리아 1세(브라질 공주)와 그녀의 남편이자 외삼촌인 페드루 3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
주앙은 외조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왕위에 오를 때 열 살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마리아 1세 여왕의 장남이자 왕세자였던 형 조제(브라질 왕세자, 브라간사 공작)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보냈다. 민담에는 인판테 주앙이 다소 교양 없이 자란 청년으로 묘사되지만, 조르제 페드레이라 이 코스타(Jorge Pedreira e Costa)에 따르면 그는 그의 형 조제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프랑스 대사는 그를 주저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이 시기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은 역사가들이 어떤 확정적인 그림을 형성하기에는 너무 모호하다.[4] 그의 교육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분명 종교, 법률, 프랑스어, 에티켓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두아르테 누네스 드 레옹과 주앙 드 바로스의 저술을 통해 역사를 배웠을 것이다.[5]
1788년 형 조제가 사망하면서 주앙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2. 2. 결혼과 계승

1785년, 루리살 후작 앙리크 드 메네세스(Henrique de Meneses, 3rd Marquis of Louriçal)는 주앙과 스페인의 인판타 카를로타 조아키나(Carlota Joaquina of Spain)의 결혼을 주선했다.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당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Charles IV of Spain)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 of Parma) 여왕의 딸이었다. 포르투갈 궁정 일부에서는 스페인 왕녀와의 결혼이 새로운 이베리아 연합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결혼 계약이 확정되기 전 포르투갈 대사들에게 4일간의 검증을 받아야 했다. 주앙과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친척 관계였고, 신부의 나이가 매우 어려(당시 10세) 교황의 특별 허가가 필요했다. 결혼 계약은 스페인 궁정에서 양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서명되었고, 곧이어 대리 결혼식이 거행되었다.[6] 실제 결혼 생활은 5년 후에야 시작되었다.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1785년 5월 초 빌라 비소사 공작궁(Ducal Palace of Vila Viçosa)에 도착했고, 6월 9일 부부는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주앙이 여동생 마리아나와 자주 주고받은 편지에는 어린 아내에 대한 불편함과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난다. 그는 아내를 여동생과 비교하며 "그녀는 매우 똑똑하고 판단력이 뛰어나지만, 당신(마리아나)은 다소 부족하다. 나는 그녀를 매우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만큼 사랑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 주앙의 어린 신부는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때때로 마리아 여왕의 지도가 필요했다. 또한 나이 차이(주앙은 17세)는 주앙에게 불편함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카를로타 조아키나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바로 시작되지 않았고, 주앙은 "인판타와 많이 놀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대한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면, 6년 후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처음 왔을 때보다 조금 더 성장한 후가 더 좋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결혼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1790년이었다. 1793년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아홉 명의 자녀 중 첫째인 베이라 공주 테레사(Teresa, Princess of Beira)를 낳았다.[6]
1788년 9월 11일, 주앙의 형 조제가 사망하면서 주앙은 브라질 왕세자이자 브라간사 공작의 칭호를 물려받아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7] 형 조제는 계몽주의의 진보적인 사상과 연관되어 있었고,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조제 드 카르발류 이 멜루(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 1st Marquis of Pombal)의 반 성직자 정책에 기우는 모습을 보여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반면 주앙은 깊은 신앙심과 절대주의에 대한 애착으로 알려져 있었다. 1788년 11월, 여왕의 고해 신부이자 테살로니키(Thessalonica)의 명목상 대주교였던 이냐시오 드 상 카에타누(Inácio de São Caetano)가 사망하면서 계승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냐시오 대주교는 강력한 정치적 인물로, 주앙에게 유리하게 여왕의 장관 임명에 영향을 미쳤으나, 그의 자리를 노리던 중요한 귀족(''피달고s'', fidalgo)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형과 대주교가 사망한 지 1년 만에 주앙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 회복했지만, 1791년에 다시 "입과 장에서 출혈"을 일으켰다고 마리알바 후작 페드루 조제 조아킴 비투 드 메네세스 쿠티뉴(Pedro José Joaquim Vito de Meneses Coutinho, 6th Marquis of Marialva)의 사제는 기록했다. 이 기록에는 주앙의 정신 상태가 항상 우울했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어, 당시의 긴장된 분위기와 그의 미래 통치에 대한 불확실성을 엿볼 수 있다.[8]
2. 3. 섭정 통치 (1799-1816)
어머니 마리아 1세의 정신 질환이 악화되자 1799년부터 어머니를 대신하여 섭정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격동 속에서 포르투갈의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1807년 나폴레옹 군대의 포르투갈 침공을 피하기 위해 왕실 전체와 정부 주요 인사들을 데리고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피신하는 결정을 내렸다.
1808년 1월 22일, 주앙 왕세자가 탄 배를 포함한 함대가 브라질의 바이아두스산투스 만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살바도르 총독이 왕세자의 허락 없이 백성들이 그를 맞이하는 것을 주저했으나, 주앙은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환영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27] 다음 날, 왕실 일행은 성대한 환영 행렬과 살바도르 대성당에서의 ''테 데움'' 축하 속에서 상륙했다. 주앙은 며칠간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러 온 모든 이들을 받아 ''베이자망''(군주의 손에 입맞추는 의식)을 베풀고 여러 혜택을 하사했다.[28] 이 시기 중요한 조치 중 하나는 경제학 강좌 개설과 외과 학교 설립 포고령이었다.[29]

그러나 이때 그의 가장 결정적인 행동은 우호국에 대한 항구 개방 포고령(''Decreto de Abertura dos Portos às Nações Amigas'')이었다. 이는 브라질의 경제적 고립을 끝내고 식민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으나, 해상 무역에 크게 의존하며 포르투갈을 보호국처럼 여기던 영국에게 가장 직접적인 이익을 안겨주었다.[30]
살바도르 주민들은 왕실을 머물게 하기 위해 궁전 건설까지 제안했지만, 주앙은 이미 리우데자네이루를 새로운 수도로 정했음을 알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1808년 3월 7일 과나바라 만에 도착하여 다음 날 상륙했고, 9일간의 축제가 이어졌다.[31] 당시 연대기 작가 페레레카 신부는 포르투갈 본토의 비극을 슬퍼하면서도, 브라질 땅에 궁정이 도착한 의미에 대해 "슬픔과 고통의 동기가 그토록 컸다면, 위로와 기쁨의 원인 또한 그만큼 컸습니다. 남반구의 이 지역에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것입니다. 브라질 제국의 설계는 이미 자리 잡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왕세자 전하의 강력한 손이 미래의 위대함, 번영, 새로운 제국의 힘의 첫돌을 놓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라고 예견했다.[32]

주앙의 궁정 이전은 브라질이 단순한 식민지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리우데자네이루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면서 고위 관료, 성직자, 군인, 귀족, 전문직 종사자, 장인 등 다양한 계층이 등장했고, 주권 국가에 필요한 행정 기구들이 속속 들어섰다. 많은 학자들은 이때 브라질이 실질적인 독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평가한다.[33] 브라질은 법적으로 여전히 포르투갈 식민지였지만, 역사가 카이우 프라두 주니어는 "브라질에 군주제의 중심지를 세움으로써, 섭정은 그때까지 나라가 살아왔던 식민 체제를 ''사실상'' 폐지했습니다. 그 [식민지] 체제의 모든 특징은 사라졌고, 식민지 상황의 유일하게 남은 부분은 외국 정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식민 행정의 오래된 방식은 하나씩 폐지되고 주권 국가의 방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경제적 제약은 사라지고 국가 이익에 대한 생각이 정부 정책의 최전선으로 이동했습니다."라고 지적했다.[34]

하지만 갑작스러운 궁정 이전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당시 약 7만 명의 주민이 살던 리우데자네이루는 수많은 이주민을 수용하기에 비좁았고,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기존 주민들의 집을 강제로 징발하는 일이 빈번했다. 주앙 자신은 부왕궁(파수 임페리알)에 머물렀으나 불편함을 느껴, 상인 엘리아스 안토니우 로페스가 기증한 별장 킨타 다 보아 비스타를 개조하여 파수 지 상 크리스토반으로 삼았다. 왕비 샤를로트 조아키나는 남편과 떨어져 보타포구 해변 근처 농장에서 지냈다.[35] 도시 인구가 급증하면서 임대료가 두 배가 되고 세금이 인상되었으며, 식량 부족 현상까지 발생하여 초기 환영 분위기는 점차 불만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건물 건설과 도시 기반 시설 개선이 이루어졌고, 궁정의 존재는 새로운 예절, 유행, 사회 질서를 가져왔다.[36][37][38][39]

주앙은 브라질에서도 포르투갈의 전통 의식인 ''베이자망''을 계속 시행했는데, 그는 이 의식을 매우 존중했고 브라질인들은 이에 매료되어 브라질 민속의 일부가 되었다.[40] 그는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신하들을 받았다. 존경을 표하고 호의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긴 줄에는 귀족과 평민이 섞여 있었다. 화가 앙리 르베크에 따르면, "왕세자는 국무장관, 궁내장관, 그리고 몇몇 가정 관리들의 동행하에 모든 청원서를 받았고, 모든 불만과 모든 신청자의 요청에 주의 깊게 귀 기울였으며, 한 사람은 위로하고, 다른 사람은 격려했습니다. ... 태도의 저속함, 말투의 친밀함, 어떤 사람들의 고집, 다른 사람들의 장황함, 이런 것들 중 어느 것도 그를 지루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의 주인임을 잊고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임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41] 올리베이라 림은 그가 "얼굴이나 간청을 결코 혼동하지 않았고, 신청자들은 그가 그들의 삶, 가족, 심지어 과거에 일어난 사소한 사건까지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놀랐는데, 그들은 그것이 왕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기록했다.[42]
브라질 체류 기간 동안 주앙은 수많은 기관과 공공 서비스의 설립을 공식화하고 경제, 문화 및 국가 생활의 다른 분야를 촉진했다. 이러한 조치는 모두 주로 이전에는 이러한 자원이 부족했던 지역에서 대제국을 통치하는 실질적인 필요성 때문에 취해졌는데, 이는 유럽 정치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궁정이 구 수도로 돌아올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브라질이 식민지로 남을 것이라는 것이 주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브라질의 미래 자치권의 기반이 되었다.[43][48] 모든 것이 편의 시설과 진보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련의 정치 위기는 왕세자의 도착 직후 포르투갈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1809년 프랑스령 기아나의 카옌 침공[44], 심각한 경제 문제, 그리고 1810년 영국 정부와 협상한 불리한 무역 협정(실제로는 작은 내수 시장에 무용한 장신구가 넘쳐나고 수출에 불리하며 새로운 국가 산업의 창출에 불리함)으로 시작되었다.[45][46] 로랑티누 고메스는 주앙이 브라질에서 처음 8년 동안 포르투갈 군주제의 이전 300년 동안 수여된 것보다 더 많은 세습 작위를 수여했으며, 5천 개가 넘는 포르투갈의 명예 훈장의 휘장과 표창은 포함하지도 않았다고 썼다.[47][68]
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유럽 열강은 대륙의 정치 지도를 재편하기 위해 빈 회의를 개최했다. 포르투갈은 이 협상에 참여했지만, 브라간사 가문의 이익에 반하는 영국의 제안을 고려하여 회의에 참석한 포르투갈 대사인 팔멜라 백작은 수도와 식민지 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브라질을 포르투갈과 연합된 왕국으로 격상시키는 제안을 포함하여, 주앙이 브라질에 남아 있도록 조언했고, 강력한 탈레랑 공작도 그렇게 했다. 회의에 참석한 영국 대표도 결국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고, 그 결과 1815년 12월 16일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베스 연합 왕국이 설립되었고, 이는 다른 국가들에 의해 즉시 인정받는 법적 기관이 되었다.[48] 이로써 브라질은 법적으로 식민지 지위에서 벗어나 포르투갈과 대등한 왕국이 되었다.
2. 4. 연합 왕국 국왕 (1816-1822)

1816년, 어머니 마리아 1세가 사망하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인해 포르투갈 궁정이 브라질로 피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주앙 6세는 즉위 후에도 브라질에 머물며 통치했다.
당시 포르투갈 본국에서는 프랑스군을 격퇴한 후 영국의 윌리엄 베레스퍼드 장군이 군정을 펼치고 있었다. 사실상 영국의 보호국 신세가 된 모국 상황 속에서, 1820년 포르투에서 1820년 자유주의 혁명이 발발했다. 혁명 정부는 주앙 6세에게 귀국을 요청했고, 베레스퍼드 장군은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영국 정부는 포르투갈 문제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822년, 주앙 6세는 왕위 계승자인 페드루 왕자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남겨두고 리스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주앙 6세는 양원 의회가 제정한 1822년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선서했다. 이 헌법은 왕의 절대 권력 대신 삼권 분립을 규정하여, 포르투갈은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한편, 브라질에 남은 섭정 페드루는 포르투갈 본국의 통제 강화 움직임에 반발하여 1822년 브라질 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초대 황제 페드루 1세 (브라질)로 즉위했다.
2. 5. 포르투갈 귀국과 통치 (1821-1826)
1820년 포르투에서 1820년 자유주의 혁명이 발발하자, 혁명 세력은 일반 특별 및 입헌 코르테스(''Cortes Gerais Extraordinárias e Constituintes'')를 구성하고 주앙 6세에게 즉각적인 귀국을 요구했다.[7] 이 혁명은 포르투갈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영국 장군 윌리엄 베레스퍼드의 귀국과 영국 정부의 불개입 결정으로 이어졌다. 국내외의 압박 속에서 주앙 6세는 1821년 4월 25일, 13년간 머물렀던 브라질을 떠나 리스본으로 귀환했다. 그는 장남 돈 페드루 왕자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남겨두었다.[7][12][54]귀국 후 주앙 6세는 1822년 코르테스가 제정한 새로운 헌법을 승인하고 준수할 것을 선서했다. 이 헌법은 왕의 절대 권력을 제한하고 삼권 분립 원칙을 도입하여, 포르투갈은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주앙 6세는 새 헌법에 따라 정부를 구성하고 차남 돈 미겔 왕자를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절대 왕정 복고를 신봉했던 미겔 왕자는 자유주의 내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벤포스타 궁을 포위하고 주앙 6세를 사실상 구금 상태에 두었다. 리스본 주재 외국 외교단의 개입으로 주앙 6세는 테주 강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으로 피신하여 전권을 회복하고 미겔 왕자를 직위 해제했다. 미겔 왕자는 이후 왕의 허가를 받아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섭정으로 남아있던 돈 페드루 왕자가 포르투갈 코르테스의 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1822년 9월 7일 브라질 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는 브라질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여러 갈등 끝에 1825년 리우데자네이루 조약을 통해 브라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주앙 6세는 명목상의 브라질 황제 칭호를 유지했다.
병을 앓던 주앙 6세는 섭정 평의회를 설립하여 "왕가의 정통 후계자가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정무를 위임하도록 명령하고, 1826년 리스본에서 사망했다.
3. 유산과 평가
주앙 6세는 포르투갈과 브라질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이끈 군주로, 그에 대한 평가는 복합적이다. 브라질에서는 리우데자네이루 천도 이후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브라질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97][43][98] 질베르투 프레이리는 그를 "국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했으며,[97] 올리베이라 리마, 로렌티누 고메스 등 많은 학자들은 만약 주앙 6세가 아메리카로 오지 않았다면 브라질이 여러 국가로 분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43][98]
반면, 포르투갈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보인 우유부단함과 결단력 부족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1820년 자유주의 혁명 이후 귀국하여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였으나,[7] 아들 미겔 왕자가 일으킨 절대주의 반란(빌라프랑카다, 아브릴라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켰다는 지적도 있다.[12][57][59] 또한, 세금 인상, 국가 부채 증가, 행정 부패 문제 등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43][82][96]
이처럼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주앙 6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를 게으르고 무능하며 변덕스러운 아내 카를로타 조아키나에게 휘둘리는 군주로 묘사하는 희화화된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지만,[43][81][82]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83][84][85] 올리베이라 리마는 주앙 6세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며 그의 긍정적인 면모와 정치적 비전을 조명했고,[82][90] 당시 외교관들의 기록에서도 그의 친절함, 정의감, 진보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89][91][93] 심지어 그의 최대 적수였던 나폴레옹조차 말년에 그를 "나를 속인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99]
개인적으로 주앙 6세는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품이었으나,[64] 우울증을 앓고 변화를 싫어하는 경향도 보였다.[65][66] 통치에 있어서는 리냐레스 백작, 바르카 백작 등 유능한 보좌관들에게 크게 의존했지만,[88] 때로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89]
결론적으로 주앙 6세는 포르투갈-브라질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87] 그의 통치 아래 브라질은 독립 국가의 기틀을 다졌고, 포르투갈은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전환하는 격동기를 겪었다. 그의 사후 카라벨라스 후작은 브라질 상원에서 "주앙 6세 국왕은 브라질을 왕국으로 승격시키고 우리를 큰 애정으로 대했으며, 모든 브라질인은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추모했다.[100]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계속 진행 중이며, 희화화된 이미지를 벗겨내고 그의 실제 모습을 조명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43][82]
3. 1. 브라질에 대한 기여

브라질에서 생활하는 동안 주앙 6세는 국가 발전에 기여한 여러 제도, 프로젝트, 서비스를 명령하여 설립했다. 여기에는 국가 최초의 출판사인 인프렌사 레지아(Imprensa Régia), 리우데자네이루 식물원[69], 해군 조선소, 파브리카 지 폴보라(Fábrica de Pólvora, 화약 공장)[77], 리우 소방서, 브라질 상선, 카사 도스 익스포스토스(Casa dos Expostos, 자선 병원) 등이 포함된다.[75] 그러나 이폴리투 조제 다 코스타(Hipólito José da Costa)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모든 시도가 성공적이거나 효율적이었던 것은 아니다.[68]
주앙 6세는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리우데자네이루, 페르남부쿠, 바이아 등지에서 교의 신학, 윤리 신학, 미적분학, 역학, 유체역학, 화학, 산술, 기하학, 프랑스어, 영어, 식물학, 농업 등을 가르치는 다양한 교육 과정을 설립했다. 또한 종두 접종을 관리하는 훈타 바시니카(Junta Vacínica)를 비롯하여 왕립 바이엔세 문학회, 과학 및 미술 아카데믹 연구소, 플루미넨세 과학 및 예술 아카데미[70] 등 과학, 문학, 예술 연구를 위한 여러 학회 및 기관 설립을 장려했다. 리우데자네이루 해부학, 외과 및 의학 학교[71], 왕립 포병, 요새 및 디자인 아카데미[72], 해군 아카데미, 육군 사관학교[77], 브라질 국립 도서관[73], 왕립 박물관(현재 브라질 국립 박물관)[74], 상주앙 왕립극장(현재 주앙 카에타누 극장)[75] 등 주요 문화 및 교육 기관들도 그의 재위 기간에 설립되었다. 그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들을 초청하고, 조제 마우리시우 누네스 가르시아(José Maurício Nunes Garcia)[75]와 같은 브라질 작곡가들을 포함한 왕실 예배당 음악가들을 후원했다. 또한 프랑스 예술 사절단의 도착을 지원하여 왕립 과학, 예술 및 기술 학교(Escola Real de Ciências, Artes e Ofícios) 설립에 기여했는데, 이는 훗날 리우데자네이루 연방대학교의 브라질 국립 미술학교로 발전하며 브라질 예술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76]
경제 정책 면에서는 항구를 개방하고 포르투갈의 상업 독점을 철폐하는 등 광범위한 변화를 추진했다. 이로 인해 영국이 큰 이익을 얻었지만, 브라질 상인들은 강력한 외국 경쟁에 직면해야 했다. 반면, 이전에는 브라질에서 금지되었거나 미미했던 새로운 제조업 및 기타 경제 활동이 장려되는 계기가 되었다. 행정적으로는 전쟁부, 외무부, 해군 및 해외부와 같은 중앙 부처와 국무원, 재무원, 최고 군사위원회, 군사 기록 보관소, 사법 및 양심 및 명령국, 카사 지 수플리카상(Casa de Suplicação, 대법원), 경찰 총국, 최초의 브라질 은행[77], 왕립 상공, 농업, 공장 및 항해 위원회[78], 일반 우편 행정부[77] 등을 설립하여 국가 운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브라질인을 행정 및 참모 직책에 임명하여 식민지 주민과 포르투갈인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자 노력했다.[79] 농업 분야에서는 면화, 쌀, 사탕수수 생산을 장려하고 도로를 개설하며 내륙 수로 개발을 장려하여 지역 간 인구 이동과 물자 교류를 촉진했다.[80]
3. 2. 포르투갈에서의 논란

주앙 6세는 포르투갈 역사상 대중의 기억 속에 복합적인 이미지를 남긴 군주이다. 페드레이라와 코스타에 따르면,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경우보다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으며, 특히 그의 결혼 생활, 개인적인 습관 등이 풍자의 대상이 되곤 했다.[81] 그는 종종 게으르고, 우둔하며, 변덕스러운 아내 카를로타 조아키나에게 휘둘리고, 주머니에 구운 닭고기를 넣고 다니며 탐식하는 모습으로 희화화되었다.[43][82] 이러한 이미지는 1995년 브라질 영화 ''카를로타 조아키나: 브라질 공주''를 통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으나,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43][83][84][85] 시각적 묘사 역시 과체중의 단정치 못한 모습부터 위엄 있는 모습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86]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평가는 엇갈린다. 그를 가까이에서 겪었던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친절함과 상냥함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통치 능력에 대해서는 유능한 정치가였다는 시각과 통치 준비가 미흡하고 소심했다는 시각이 공존한다.[87] 프랑스 장군 장앙도슈 주노는 그를 "약한 사람,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사람, 그의 권위에 질투심을 느끼지만 그것을 존중할 수 없는 사람. 그는 신부들에게 지배당하며 두려움 때문에 행동할 수 있다"라고 묘사했고,[94] 일부 포르투갈 및 브라질 역사가들도 그를 부정적으로 그렸다.[82][94][95]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1926년 보수주의 부흥 이전까지 희화화된 인물로 여겨졌다.[82][94] 실제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세금이 인상되고 국가 부채가 늘어났으며, 행정 부패를 근절하지 못했고, 포르투갈로 귀환하면서 브라질 국고를 거의 파산 상태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43][82][96]
반면, 존 루크콕과 같은 인물은 주앙 6세가 알려진 것보다 더 큰 감수성과 강인함을 지녔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내심을 보였고 필요할 때는 활력 있게 행동했다고 평가했다.[89] 그의 친절함과 배려심을 칭찬하는 기록도 있다.[93] 올리베이라 리마는 주앙 6세에 대한 재평가를 이끈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당시 외교 문서 등을 통해 그에 대한 긍정적인 기록들을 발굴했다. 영국 영사 헨더슨이나 미국 장관 서머 등은 주앙 6세가 신하들보다 진보적이었으며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평가했다.[91] 그의 국제 관계 운영은 때때로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브라질 식민지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92][93] 나폴레옹조차 말년에 그를 "나를 속인 유일한 사람"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99]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는 주앙 6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침공을 피해 왕실 전체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천도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포르투갈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 마리아 1세가 사망하자 그는 브라질에서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했다. 한편, 본국 포르투갈에서는 프랑스군을 몰아낸 후 영국의 윌리엄 베레스퍼드 장군이 사실상 군정을 실시하며 영국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20년, 포르투에서 1820년 자유주의 혁명이 발발하자 혁명 정부는 주앙 6세에게 귀국을 요청했다. 베레스퍼드 장군은 영국으로 돌아갔고, 영국 정부는 포르투갈 문제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822년, 주앙 6세는 왕세자 페드루 왕자를 브라질 섭정으로 남겨두고 리스본으로 귀환했다.
귀국 후 주앙 6세는 양원제 의회가 제정한 1822년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선서했다. 이 헌법은 국왕의 절대 권력을 제한하고 삼권분립을 규정함으로써, 포르투갈은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주앙 6세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정부를 구성했지만,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특히 절대 왕정을 신봉하던 둘째 아들 미겔 왕자는 새로운 체제에 불만을 품고 반란(아브릴라다, Abrilada)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왕궁을 포위하고 주앙 6세를 사실상 구금 상태에 두었다. 이 사태에 리스본 주재 외교단이 개입하여 주앙 6세는 테주강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다시 전권을 회복한 주앙 6세는 미겔 왕자를 군 총사령관 직에서 파면했고, 미겔은 국왕의 허락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섭정으로 남아 있던 페드루 왕자가 포르투갈 의회의 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브라질 제국의 독립을 선언하며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1822년). 포르투갈은 1825년에 이르러서야 브라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주앙 6세는 말년에 병을 앓다가 섭정 평의회를 설립하여 후계자가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정무를 맡도록 한 뒤 1826년에 사망했다. 그의 통치는 포르투갈과 브라질 양국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으며, 특히 브라질의 국가 형성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97][43][98] 그의 죽음 이후, 조제 조아킴 카르네이루 드 캄푸스 후작은 브라질 상원에서 "주앙 6세 국왕은 브라질을 왕국으로 승격시키고 우리를 큰 애정으로 대했으며, 모든 브라질인은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추모했다.[100] 최근의 전기들은 그를 둘러싼 희화화된 이미지와 실제 역사적 사실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43][82]
4. 가족
주앙 6세는 1785년 스페인의 카를로타 조아키나(1775년 4월 25일 – 1830년 12월 7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브라간사의 마리아 테레사 | 1793년 4월 29일 | 1874년 1월 17일 | 첫 번째 남편은 사촌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페드루 카를루스였고, 두 번째 남편은 여동생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남편이었던 외삼촌 몰리나 백작 카를루스였다. |
베이라 왕자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 1795년 3월 21일 | 1801년 6월 11일 | 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그의 남동생 페드루가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
브라간사의 마리아 이사벨 | 1797년 5월 19일 | 1818년 12월 26일 |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와 결혼하였다. |
페드루 1세 / 페드루 4세 | 1798년 10월 12일 | 1834년 9월 24일 | 포르투갈의 반도 전쟁 이후 브라질에 남았다. 1822년 브라질 독립을 선포하고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가 되었다. 1826년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가 되기도 했다. |
브라간사의 마리아 프란시스카 | 1800년 4월 22일 | 1834년 9월 4일 | 외삼촌인 몰리나 백작 카를루스와 결혼했다. |
브라간사의 이사벨 마리아 | 1801년 7월 4일 | 1876년 4월 22일 | 1826년부터 1828년까지 포르투갈의 섭정을 역임했으며, 미혼으로 사망했다. |
미겔 1세 | 1802년 10월 26일 | 1866년 11월 14일 | 자유주의자들에게 위선자로 알려졌으며, 1828년부터 1834년까지 포르투갈 국왕이었다. 자유주의 전쟁 이후 퇴위당했다. |
브라간사의 마리아 다 아순상 | 1805년 6월 25일 | 1834년 1월 7일 | 미혼으로 사망했다. |
브라간사의 아나 드 예수스 마리아 | 1806년 10월 23일 | 1857년 6월 22일 | 루레 후작(Marquis of Loulé)이자 발레 데 레이스 백작(Count of Vale de Reis), 이후 포르투갈의 총리와 결혼했다. 루레 후작과 후작 부인은 자녀를 두었다. 아나 공주의 사망 후, 그녀의 증손자인 루이스 1세는 루레 후작을 초대 루레 공작으로 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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