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국왕
1. 개요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 왕국을 통치했던 군주를 의미한다. 757년 이후 메르시아의 오파가 '잉글랜드 왕' 칭호를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10세기 위조된 헌장에 근거한다. 웨섹스 왕조의 에그버트 이후 잉글랜드 전역에 군주권이 행사되었고, 알프레드 대왕은 데인족의 침입을 막아내고 잉글랜드 남부를 통합하여 '앵글로색슨인의 왕' 칭호를 사용했다. 1066년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고, 1707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대체되었다. 잉글랜드 국왕의 왕호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그레이트브리튼 국왕'이 공식 왕호로 사용된다.
| 왕국 | 잉글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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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군주 | 애설스탠 |
|---|---|
| 마지막 군주 | 앤 여왕 |
| 성립 | 927년 |
| 폐지 | 1707년 5월 1일 |
| 호칭 | 폐하 |
| 첫 번째 군주 | 앨프레드 대왕 |
|---|---|
| 마지막 군주 | 앤 |
| 시작 | 약 886년 (9세기 후반) |
| 종료 | 1707년 5월 1일 |
| 거주지 | 세인트 제임스 궁전 |
| 라틴어 | Rex Anglorum라틴어 Rex Anglie라틴어 |
|---|---|
| 영어 | King of England영어 |
| 참고 | 에드워드 3세는 14세에 왕이 되었다. 루들란 법령 왕실 및 의회 명칭법 (1927년)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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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목록 -
바르셀로나 백작
바르셀로나 백작은 카탈루냐 지역을 다스린 역사적 작위로,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하여 세습 작위로 독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아라곤과의 결혼을 통해 아라곤 연합왕국 형성에 기여했으며, 현재는 스페인 국왕이 계승하는 작위이다. -
군주 목록 -
이집트 국왕
1922년부터 1953년까지 이집트 왕국을 통치한 군주는 푸아드 1세, 파루크 1세, 푸아드 2세이며, 이들의 통치 기간은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루어졌고, 파루크 1세의 부패와 사치, 1952년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 푸아드 2세는 짧은 기간 동안 명목상의 왕으로 남았다.
2.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829년 에그버트가 잉글랜드를 통일한 후, 1066년 노르만 정복 이전까지 앵글로색슨 왕조가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이 시기 잉글랜드는 웨섹스 왕조와 덴마크 왕조가 번갈아 왕위를 차지하며 복잡한 왕위 계승 분쟁을 겪었다.
* 웨섹스 왕조 (829-1013): 에그버트를 시작으로 알프레드 대왕, 에드워드 1세 등 웨섹스 가문이 왕위를 계승했다. 에텔스탠은 927년 잉글랜드 전체를 통일하고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 덴마크 왕조 (1013-1014, 1016-1042): 1013년 덴마크의 스베인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에텔레드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곧 사망했다. 이후 크누트 대왕이 아산둔 전투에서 에드먼드 2세를 격파하고 잉글랜드 전체를 통치했다. 크누트 대왕은 '북해 제국'을 건설하고 잉글랜드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
* 웨섹스 왕조 복위 (1014-1016, 1042-1066): 스베인 1세 사후 에텔레드 2세가 잠시 복위했다. 크누트 대왕 사후에는 하롤드 1세와 하르데크누트가 차례로 왕위를 이었으나, 하르데크누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 왕조의 잉글랜드 지배는 막을 내리고 에드워드 참회왕이 즉위하며 웨섹스 왕조가 복위되었다.
* 고드윈 가문 (1066): 에드워드 참회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해럴드 2세가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침공,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전사시키고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 분쟁 (1066):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위텐은 에드가 에셀링을 왕으로 선출했으나, 이미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장악하여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윌리엄에게 항복했다.
2.1. 웨섹스 왕조 (886–1013)
2.2. 분쟁 (924)
에드워드 1세 사후, 그의 아들 앨프워드( Ælfweard영어)가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식을 치르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12세기 왕 목록에는 그의 재위 기간을 4주로 기록하고 있지만,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한 사본에는 아버지 사후 16일 만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앨프워드의 통치 기간과 정통성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한다. 앨프워드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경우 왕국 전체를 통치했는지, 웨섹스만 통치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에드워드가 죽었을 때 앨프워드는 웨섹스에서, 에텔스탠은 머시아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2.3. 웨섹스 왕조 (924–1013)
에드워드의 아들 에텔스탠은 924년부터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여 939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927년에 잉글랜드 전체를 통일하고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에드워드 1세와 그의 이복형제 에텔스탠 사이인 924년에 앨프워드가 국왕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으나, 즉위식은 치르지 않았다. 12세기 왕 목록에는 그의 재위 기간을 4주로 기록하고 있지만,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한 사본에는 아버지 사후 16일 만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통치했다는 사실은 모든 역사가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또한 앨프워드가 국왕으로 선포되었을 경우 왕국 전체를 통치했는지, 웨섹스만 통치했는지 불분명하다. 모호한 증거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에드워드가 죽었을 때 앨프워드가 웨섹스에서, 에텔스탠이 머시아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 앨프워드 | 에드워드 1세와 앨플래드의 아들 | 자녀 없음 | 924년 8월 2일 약 23세 | 에드워드 1세의 아들 | |
| 에텔스탠 | 894년 에드워드 1세와 에크윈의 아들 | 미혼 | 939년 10월 27일 약 45세 | 에드워드 1세의 아들 | |
| 에드먼드 1세 에드먼드 대왕 | 에드워드 1세와 켄트의 에드기푸의 아들 | 샤프츠베리의 앨프기푸 2명의 아들 데머햄의 에텔플래드 자녀 없음 | 946년 5월 26일 퍼클처치 싸움 도중 살해당함, 약 25세 | 에드워드 1세의 아들 | |
| 에드레드 | 에드워드 1세와 켄트의 에드기푸의 아들 | 미혼 | 955년 11월 23일 프롬 약 32세 | 에드워드 1세의 아들 | |
| 에드위 에드위 훌륭한 자 | 에드먼드 1세와 샤프츠베리의 앨프기푸의 아들 | 앨프기푸 확인된 자녀 없음 | 959년 10월 1일 약 19세 | 에드먼드 1세의 아들 | |
| 에드가 평화왕 | 에드먼드 1세와 샤프츠베리의 앨프기푸의 아들 | 에텔플래드 1명의 아들 앨프스리스 2명의 아들 | 975년 7월 8일 윈체스터 31세 | 에드먼드 1세의 아들 | |
| 에드워드 순교자 | 에드가 평화왕과 에텔플래드의 아들 | 미혼 | 978년 3월 18일 코프 성 살해당함, 약 16세 | 에드가 평화왕의 아들 | |
| 에텔레드 2세 (첫 번째 통치 기간) | 에드가 평화왕과 앨프스리스의 아들 | 요크의 앨프기푸 9명의 자녀 노르망디의 에마 3명의 자녀 | 1016년 4월 23일 런던 약 48세 | 에드가 평화왕의 아들 |
2.4. 덴마크 왕조 (1013–1014)
1013년, 덴마크의 스베인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에텔레드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스베인 1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에텔레드 2세가 잠시 복위했다.
2.5. 웨섹스 왕조 (복위, 1014–1016)
스베인 1세 사후 에텔레드 2세는 망명에서 귀국하여 1014년 2월 3일 다시 왕위에 올랐다. 에텔레드 2세의 아들은 잉글랜드 왕관을 빼앗으려는 덴마크인들과 대립하는 런던 시민들과 위텐(賢人会議)에서 선출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결혼 | 사망 |
|---|---|---|---|---|
| 에텔레드 2세 (Æþelræd Unræd) 1014년–1016년 (재위) | 968년 에드가와 엘프리다의 아들 | (1) 엘프기푸 4명의 자녀 (2) 알레기프 991년 6명의 자녀 (3) 에마 드 노르망디 1002년 3명의 자녀 | 1016년 4월 23일 런던 약 48세 | |
| 에드먼드 2세 (Eadmund) 1016년 4월 24일 – 11월 30일 | 993년 에텔레드 2세와 엘프기푸의 아들 | 에디스 2명의 자녀 | 1016년 11월 30일 글래스턴베리 약 23세 | |
1016년 10월 18일, 아산둔 전투(Battle of Assandun)의 결과 에드먼드 2세는 크누트 대왕이 웨섹스를 제외한 잉글랜드 전역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11월 30일 에드먼드 2세가 사망하자 크누트 대왕은 잉글랜드 전토를 통치하는 유일한 왕이 되었다.
2.6. 덴마크 왕조 (복위, 1016–1042)
Knútr덴마크어 크누트 대왕(1016년–1035년)은 아산둔 전투(1016년 10월 18일)에서 에드먼드 2세를 무찌르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에드먼드 2세가 사망하면서 크누트는 잉글랜드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크누트 대왕은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를 아우르는 '북해 제국'을 건설하고 잉글랜드의 안정과 번영을 이끌었다.
| 이름 | 초상화 | 탄생 | 결혼 | 사망 |
|---|---|---|---|---|
| 크누트 대왕 (Knútr덴마크어) 1016년 11월 30일–1035년 | 995년 스벤과 곤힐드의 아들 | (1) 엘프기프 오브 노샘프턴 자녀 2명 (2) 노르망디의 에마 1017년 에드셀레드 2세의 미망인 | 1035년 11월 12일 샤프츠베리 약 40세 | |
| 하롤드 1세 (Harald라틴어) 1035년 11월 13일–1040년 | 1016/1017년 크누트 대왕과 엘프기프 오브 노샘프턴의 아들 | 엘기후 아들 1명 | 1040년 3월 17일 옥스퍼드 23 또는 24세 | |
| 하르데크누트 (Hardeknud덴마크어) 1040년 6월 18일–1042년 | 1018년 크누트 대왕과 노르망디의 에마의 아들 | 불명 | 1042년 6월 8일 램베스 약 24세 | |
크누트 대왕의 사후, 왕위는 아들 하롤드 1세와 하르데크누트에게 차례로 계승되었다.
2.7. 웨섹스 왕조 (복위, 1042–1066)
하르다크누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 왕조의 잉글랜드 지배는 막을 내렸다. 에드워드 참회왕이 즉위하면서 웨섹스 왕조가 복위되었다. 에드워드 참회왕은 신앙심이 깊었으나,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2.8. 고드윈 가문 (1066)
에드워드 참회왕 사후, 잉글랜드 귀족들은 해럴드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침공해 왔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전사시키고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왕이 전사한 후, 위텐은 에드가 에셀링을 왕으로 선출했지만, 그때는 이미 노르만인들이 영국을 장악하고 있었고 에드가는 결코 통치하지 못했다. 그는 정복왕 윌리엄에게 항복했다.
2.9. 분쟁 (1066)
Harold Godwinson영어 해럴드 2세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전사한 후, 위텐은 에드가 에셀링을 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이미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드가는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정복왕 윌리엄에게 항복했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사망 | 주장 |
|---|---|---|---|---|
| 에드가 에셀링 | 망명자 에드워드와 아가타의 아들 | 1125년 또는 1126년 약 75세 | 아이언사이드 에드먼드의 손자 위테나게모트에 의해 선출됨 |
3. 노르만 왕조 (1066–1135)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하롤드 고드윈손이 사망한 후, 앵글로색슨 위테나게모트는 에드워드 망명자의 아들이자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손자인 에드가 애설링을 왕으로 선출했지만, 에드가 애설링은 저항을 하지 못하고 왕관을 쓰지 못했다. 윌리엄은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했으며, 오늘날 윌리엄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 1세는 수도를 윈체스터에서 런던으로 이전하였다.
윌리엄 1세의 아들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다. 헨리 1세는 딸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의 사후 조카 스티븐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내전(무정부 시대)이 발발했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 윌리엄 1세 | 팔레즈 성 | 플랑드르의 마틸다 노르망디 1053년 9명의 자녀 | 1087년 9월 9일 루앙 약 59세 | 1052년 에드워드 참회왕에 의해 상속인으로 지명됨 정복권 | |
| 윌리엄 2세 | 노르망디 | 미혼 | 1100년 8월 2일 뉴포리스트 44세 | 윌리엄 1세의 아들 | |
| 헨리 1세 | 1068년 9월 셀비 |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1100년 11월 11일 2명의 자녀 루방의 아델라이드 윈저 성 1121년 1월 29일 자녀 없음 | 1135년 12월 1일 생드니앙리옹 67세 | 윌리엄 1세의 아들 왕위 찬탈 |
4. 블루아 왕조 (1135–1154)
헨리 1세는 적장자인 아들 윌리엄 아델린이 1120년 화이트십호 난파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왕조가 단절되었다. 헨리 1세는 장녀 마틸다를 상속자로 지명했지만, 헨리가 죽자 그의 조카 스티븐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무정부 시대라고 불리는 약 20년간의 내전에 돌입했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 스티븐 (블루아의 스티븐) 1135년 12월 22일 ~ 1154년 10월 25일 | 블루아 스티븐 2세와 노르망디의 아델의 아들 | 부룬의 마틸다 웨스트민스터 1125 6명의 자녀 | 1154년 10월 25일 도버 성 약 58세 | 윌리엄 1세의 손자 임명 / 선위 | |
| 마틸다 (마틸다 황후) 1141년 4월 7일 ~ 1141년 11월 1일 | 1102년 2월 7일 서튼 쿠르트네이 저택 헨리 1세와 에디스의 딸 | 신성 로마 제국의 헨리 5세 마인츠 1114년 1월 6일 자녀 없음 앙주의 제프리 5세 르망 대성당 1128년 5월 22일 아들 3명 | 1167년 9월 10일 루앙 65세 | 헨리 1세의 딸 왕위 찬탈 |
마틸다는 아버지 헨리 1세에 의해 왕위 계승 추정 상속인으로 선포되었으나, 헨리 1세 사후 사촌 스티븐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무정부 시대 동안 마틸다는 1141년 몇 달간 잉글랜드를 통치했지만,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스티븐의 아들 외스타스 4세는 1152년 공동 국왕으로 임명되었으나, 교황과 교회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153년 사망했다.
5. 플랜태저넷 왕조 (1154–1485)
플랜태저넷 왕가는 앙주 백작 제프리 플랜태지넷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헨리 2세 이후의 잉글랜드 국왕들에게 소급 적용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을 "앙주 왕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루이 8세는 제1차 바런 전쟁이 끝난 1216년 5월부터 1217년 9월까지 잠시나마 잉글랜드 영토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잉글랜드의 루이 왕으로 선포되기도 하였으나, 1217년 9월 램버스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 왕위 주장을 포기하였다. "루이 왕"은 잉글랜드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국왕들 중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중 하나이다.
| 이름 | 초상화 | 문장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 루이 | 1187년 9월 5일 파리 프랑스의 필립 2세와 헤노의 이자벨의 아들 | 카스티야의 블랑슈 포르모르 1200년 5월 23일 13명의 자녀 | 1226년 11월 8일 몽쁘니에 39세 | 정복권 바론들에 의해 제안됨 |
플랜태저넷 가문은 잉글랜드의 왕실 문장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왕국을 장악하거나 요구하는 자 또는 그 후계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 [[잉글랜드의 헨리 2세|헨리 2세]] (Henry II)>-- | 1133년 3월 5일 르 망 | 엘레오노르 1152년 5월 18일 8명의 자녀 | 1189년 7월 6일 시농 56세 | 헨리 1세의 손자 |
| [[젊은 헨리]] (Henry the young) (공동 통치)>-- | 1155년 2월 28일 | 마르그리트 1172년 8월 27일 자녀 없음 | 1183년 6월 11일 리무주 28세 | 헨리 2세의 아들 |
|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리처드 1세]] (Richard I)>-- | 1157년 9월 8일 보몽 궁전 | 베렝가리아 리마솔 1191년 5월 2일 자녀 없음 | 1199년 4월 6일 샤토 드 샬뤼 41세 | 헨리 2세의 아들 |
| [[잉글랜드의 존|존]] (John)>-- | 1166년 12월 24일 보몽 궁전 | (1) 이자벨 말보룬 성 1189년 8월 29일 자녀 없음 |
| [[잉글랜드의 헨리 3세|헨리 3세]] (Henry III)>-- | 1207년 10월 1일 윈체스터 성 | 엘레오노르 캔터베리 대성당 1236년 1월 14일 9명의 자녀 | 1272년 11월 16일 웨스트민스터 궁전 65세 | 존의 아들 |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1세]] (Edward I)>-- | 1239년 6월 17일 웨스트민스터 궁전 | (1) 엘레오노르 1254년 10월 18일 17명의 자녀 |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에드워드 2세]] (Edward II)>-- | 1284년 8월 25일 카나번 성 | 이사벨라 1308년 1월 25일 5명의 자녀 | 1327년 9월 21일 버클리 성 43세 | 에드워드 1세의 아들 |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에드워드 3세]] (Edward III)>-- | 1312년 11월 13일 윈저 성 | 필리파 1328년 1월 24일 14명의 자녀 | 1377년 6월 21일 셰인 궁전 64세 | 에드워드 2세의 아들 |
|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리처드 2세]] (Richard II)>-- | 1367년 1월 6일 보르도 | (1) 앤 1382년 1월 14일 자녀 없음 |
랭커스터 왕조는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 랭커스터 공 존 오브 곤트의 후손이다.
요크 가는 에드워드 3세의 다섯째 아들 요크 공작랭커스터의 에드먼드의 후손이다.
1470년 헨리 6세가 잠시 복위하였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결혼 | 사망 | 주장 |
|---|
| [[헨리 6세 (잉글랜드 왕)|헨리 6세]] (Henry VI)> 윈저 성 | 마거릿트 앙주 1445년 4월 22일 1명의 자녀 | 1471년 5월 21일 런던 타워 49세 | 헨리 5세의 아들 |
1471년, 에드워드 4세가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 [[에드워드 4세 (잉글랜드 왕)|에드워드 4세]] (Edward IV)>-- | 1442년 4월 28일 루앙 | 엘리자베스 1464년 5월 1일 10명의 자녀 | 1483년 4월 9일 웨스트민스터 궁전 40세 | 에드워드 3세의 현손 |
| [[에드워드 5세 (잉글랜드 왕)|에드워드 5세]] (Edward V)>-- | 1470년 11월 2일 웨스트민스터 | 미혼 | 1483년 런던 약 12세 | 에드워드 4세의 아들 |
| [[리처드 3세 (잉글랜드 왕)|리처드 3세]] (Richard III)>-- | 1452년 10월 2일 파더링게이 성 | 앤 네빌 1472년 6월 12일 1명의 자녀 |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평원 32세 | 에드워드 3세의 현손 |
5.1. 앙주 제국 (1154–1216)
스티븐 왕은 1153년 11월 월링포드 조약을 통해 마틸다와 합의하여 헨리를 상속자로 인정했다. 마틸다와 제프리 5세로부터 이어진 왕가는 앙주 가문 또는 플랜태지넷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앙주 왕가는 12세기와 13세기에 앙주 제국을 통치했다. 존 왕이 대륙 영토 대부분을 상실할 때까지 잉글랜드는 그들의 주요 본거지였다. 헨리 2세의 직계 장자 계승자들은 대륙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후 플랜태지넷 가문으로 불린다. 장미 전쟁 중에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으로 알려진 방계 가문도 이 계보에 포함된다.
앙주 왕가는 잉글랜드 왕실 문장을 만들었으며, 이 문장은 그들이 소유하거나 주장한 다른 왕국을 보여주었다. Dieu et mon droit는 리처드 1세가 1198년 지소르 전투에서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군대를 물리쳤을 때 처음으로 전투 구호로 사용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채택한 이후로 잉글랜드 군주의 모토로 사용되어 왔다.
| 문장 | 이름 | 초상화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
| 헨리 2세 헨리 짧은 망토 1154년 12월 19일–1189년 7월 6일 | 1133년 3월 5일 르망 앙주의 제프리 5세와 마틸다 황후의 아들 | 엘레오노르 아키텐 보르도 대성당 1152년 5월 18일 자녀 8명 | 1189년 7월 6일 시농 56세 | 헨리 1세의 손자 월링포드 조약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증손자 | ||||
| 헨리 2세는 아들 젊은 왕 헨리 (1155–1183)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지만, 젊은 헨리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스스로 통치하지 않았으므로 왕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 ||||||||
| 리처드 1세 사자왕 리처드 1189년 9월 3일–1199년 4월 6일 | 1157년 9월 8일 보몽 궁전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아키텐의 아들 | 나바라의 베렌가리아 리마솔 1191년 5월 12일 자녀 없음 | 1199년 4월 6일 샤뤼 석궁 발사체에 맞아 41세 사망 | 헨리 2세의 아들 장자 상속 | ||||
| 존 존 랭클랜드 1199년 5월 27일–1216년 10월 19일 | 1166년 12월 24일 보몽 궁전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아키텐의 아들 | |||||||
| (1) 글로스터의 이사벨 말버러 성 1189년 8월 29일 자녀 없음 |
| (2) 앙굴렘의 이사벨 보르도 대성당 1200년 8월 24일 자녀 5명 |
뉴어크온트렌트
49세
지명
혈연의 근접성
프랑스의 루이 8세(루이 왕세자)는 제1차 바런 전쟁이 끝난 1216년 5월부터 1217년 9월까지 잠시 잉글랜드의 3분의 2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1217년 9월 램베스 조약에 서명하면서 루이는 1만 마르크를 받고 자신이 합법적인 잉글랜드 국왕이 아니었음을 인정했다.
5.2. 앙주 왕조 (1216-1399)
존 왕 사후, 그의 아들 헨리 3세가 즉위했다. 헨리 3세의 치세 동안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1264년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귀족 반란이 일어나 잉글랜드 최초의 의회가 소집되기도 했다.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를 정복하고, 스코틀랜드를 복속시키려 시도하는 등 잉글랜드의 영토 확장에 힘썼다.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무능한 통치로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폐위당하고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백년전쟁 초기에는 잉글랜드가 우세했으나, 장기화되면서 국력 소모가 심화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리처드 2세는 전제적인 통치로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폐위당했다.
헨리 3세 시대 이후, 플랜태저넷 가문이 대륙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그들은 본격적으로 영국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은 플랜태저넷 가문의 방계이다.
| 문장 | 이름 | 초상화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 -- | 헨리 3세 헨리 오브 윈체스터 1216년 10월 28일 – 1272년 11월 16일 | 1207년 10월 1일 윈체스터 성 존 왕과 앙굴렘의 이사벨라의 아들 |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캔터베리 대성당 1236년 1월 14일 자녀 5명 | 1272년 11월 16일 웨스트민스터 궁전 65세 | 존 왕의 아들 장자 상속 | |
|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롱샹크스 1272년 11월 20일 – 1307년 7월 7일 | 1239년 6월 17일 웨스트민스터 궁전 헨리 3세와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의 아들 | (1)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 라스 웨가스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 1254년 10월 18일 자녀 16명 (2) 프랑스의 마가레트 캔터베리 대성당 1299년 9월 10일 자녀 3명 | 1307년 7월 7일 버그 바이 샌즈 68세 | 헨리 3세의 아들 장자 상속 | ||
| 에드워드 2세 에드워드 오브 카나본 1307년 7월 8일 – 1327년 1월 20일 | 1284년 4월 25일 카나본 성 에드워드 1세와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의 아들 | 프랑스의 이사벨라 불로뉴 대성당 1308년 1월 24일 자녀 4명 | 1327년 9월 21일 벌클리 성 43세에 암살됨 |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장자 상속 | ||
| -- |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오브 윈저 1327년 1월 25일 – 1377년 6월 21일 | 1312년 11월 13일 윈저 성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사벨라의 아들 | 헤이노의 필리파 요크 대성당 1328년 1월 25일 자녀 14명 | 1377년 6월 21일 쉰 궁전 64세 | 에드워드 2세의 아들 장자 상속 | |
| 리처드 2세 리처드 오브 보르도 1377년 6월 22일 – 1399년 9월 29일 | 1367년 1월 6일 보르도 대주교궁 흑태자 에드워드와 켄트의 조앤의 아들 | (1) 보헤미아의 앤 1382년 1월 1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자녀 없음 (2) 발루아의 이사벨 칼레의 성 니콜라스 교회 1396년 11월 4일 자녀 없음 | 1400년 2월 14일 폰트프랙트 성 33세 | 에드워드 3세의 손자 장자 상속 |
5.3. 랭커스터 왕조 (1399–1461, 1470–1471)
에드워드 3세의 세 번째 아들인 존 오브 곤트에서 유래한 가문이다. 헨리 4세는 리처드 2세로부터 권력을 빼앗았고, 왕위 계승 순위에서 에드워드 3세의 두 번째 아들인 라이오넬의 후손인 에드먼드 모티머를 밀어냈다.
장미 전쟁(1455년–1485년)에서 왕위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 사이를 오갔다. 1470년, 헨리 6세가 잠시 복위했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결혼 | 사망 | 주장 |
|---|---|---|---|---|---|
| 헨리 6세 | 1421년 12월 6일 윈저 성 | 마거릿트 앙주: 1445년 4월 22일 (1명의 자녀) | 1471년 5월 21일 런던 타워 49세 | 헨리 5세의 아들 |
5.4. 요크 왕조 (1461–1470, 1471–1485)
House of York영어은 에드워드 3세의 다섯째 아들 요크 공작랭커스터의 에드먼드의 후손이다. 장미 전쟁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4세가 1461년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 에드워드 4세 (Edward IV) | -- | 1442년 4월 28일 루앙 | 엘리자베스 1464년 5월 1일 10명의 자녀 | 1483년 4월 9일 웨스트민스터 궁전 40세 | 에드워드 3세의 증손자 |
| 1470년 헨리 6세가 잠시 복위하였다. | |||||
| 헨리 6세(Henry VI) | 1421년 12월 6일 윈저 성 | 마거릿트 앙주 1445년 4월 22일 1명의 자녀 | 1471년 5월 21일 런던 타워 49세 | 헨리 5세의 아들 | |
| 1471년, 에드워드 4세가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 |||||
| 에드워드 4세 (Edward IV) | -- | 1442년 4월 28일 루앙 | 엘리자베스 1464년 5월 1일 10명의 자녀 | 1483년 4월 9일 웨스트민스터 궁전 40세 | 에드워드 3세의 현손 |
| 에드워드 5세 (Edward V) | -- | 1470년 11월 2일 웨스트민스터 | 미혼 | 1483년 런던 약 12세 | 에드워드 4세의 아들 |
| 리처드 3세 (Richard III) | -- | 1452년 10월 2일 파더링게이 성 | 앤 네빌 1472년 6월 12일 1명의 자녀 |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평원 32세 | 에드워드 3세의 현손 |
6. 튜더 왕조 (1485–1603)
House of Tudor영어는 1485년 헨리 7세가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헨리 7세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장미 전쟁을 끝내고 왕권을 강화했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결혼 | 사망 | 주장 |
|---|---|---|---|---|---|
| 헨리 7세 (Henry VII) | 1457년 1월 28일 펜브로크 성 | 엘리자베스 1486년 1월 18일 자녀 8명 | 1509년 4월 21일 리치몬드 궁전 52세 | 에드워드 3세의 7대손 | |
| 헨리 8세 (Henry VIII) | 1491년 6월 28일 그리니치 궁전 헨리 7세의 아들 | 캐서린 1509년 6월 11일 자녀 1명 | 1547년 1월 28일 화이트홀 궁전 55세 | 헨리 7세의 아들 | |
| 앤 불린 1533년 1월 25일 자녀 1명 | |||||
| 제인 시모어 1536년 5월 30일 자녀 1명 | |||||
| 앤 오브 클리브 1540년 1월 6일 | |||||
| 캐서린 하워드 1540년 1월 28일 | |||||
| 캐서린 파 1543년 6월 12일 | |||||
| 에드워드 6세 (Edward VI) | -- | 1537년 10월 12일 험프턴 코트 궁전 헨리 8세의 아들 | 미혼 | 1553년 6월 6일 그리니치 궁전 15세 | 헨리 8세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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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 왕위 계승자
| 이름 | 초상화 | 출생 | 결혼 | 사망 | 주장 |
|---|---|---|---|---|---|
| 제인 그레이 칭호의 대립 | 1537년 10월 브래드게이트 파크 | 길포드 더들리 1553년 5월 21일 미혼 | 1554년 2월 12일 런던탑 16세 (참수형) | 헨리 7세의 증손녀 |
에드워드 6세는 제인 그레이를 자신의 예상 상속자로 지명했다. 에드워드 6세 사후 4일 동안 제인은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선포 9일 후,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이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는 충분한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고, 7월 19일에 제인을 체포하여 런던탑에 가두었다. 제인은 16세에 처형되었다. 오늘날 영국 왕실은 제인을 정통한 군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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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초상화 | 출생 | 결혼 | 사망 | 주장 |
|---|---|---|---|---|
| [[메리 1세 (잉글랜드 여왕)|메리 1세]] (Mary I)> | 1516년 2월 18일 그리니치 궁전 | 필리프 2세 1554년 7월 25일 자녀 없음 | 1558년 11월 17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 42세 | 헨리 8세의 딸 |
| [[필리프 2세 (스페인 왕)|필리프 1세]] (Philipe I)> | 1527년 5월 21일 발라돌리드 | (2) 메리 1세 1554년 7월 25일 자녀 없음 | 1598년 9월 13일 엘 에스코리알 71세 | 메리 1세의 남편 |
필리프 2세와 메리 1세의 결혼 계약에 따라, 필리프 2세는 메리 1세의 칭호를 누렸고, 명성은 결혼 기간만큼 지속되었다. 의회 법률을 포함한 공문서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의회는 부부의 권위 명의로 소집되었다. (하지만 모든 곳의 의결에서 메리 1세가 "유일한" 여왕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는 메리 1세와 공동 통치를 했다. 새로운 잉글랜드 왕은 영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모든 사항을 기록한 문서는 라틴어 또는 스페인어로 작성해야 했다. 화폐에는 메리 1세와 필리프 2세의 얼굴이 새겨졌고, 잉글랜드의 문장(오른쪽)은 필리프 2세의 문장에 부부의 공동 통치를 나타내는 합쳐진 문장으로 만들어졌다. 필리프 2세의 왕권에 치우친 반역죄 법령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시행되었다. 1552년 교황 파울루스 5세는 필리프 2세와 메리 1세를 정통한 아일랜드의 왕과 왕비로 하는 교황 칙서를 발표했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결혼 | 사망 | 주장 |
|---|---|---|---|---|
|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 여왕)|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 궁전 | 미혼 | 1603년 3월 24일 리치몬드 궁전 69세 | 헨리 8세의 딸 |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단절하면서 잉글랜드의 군주는 잉글랜드 국교회와 아일랜드 국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칭호에는 잉글랜드 국교회 최고 수장이 추가되었다.
7. 스튜어트 왕조 (1603–1649)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서거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이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여 제임스 1세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헨리 7세의 장녀인 마가렛 튜더의 고손자였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동군연합 형태로 통치했지만, 두 왕국은 별개의 국가로 남아 있었다. 1604년, 제임스 1세는 "그레이트 브리튼 왕"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는 의회와의 갈등 끝에 잉글랜드 내전을 일으켰고, 결국 패배하여 1649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8. 잉글랜드 공화정 (1649–1660)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부터 1660년 찰스 2세에 의한 왕정복고까지 잉글랜드에는 군주가 없었다. 대신 1653년에 보호국주가 설치되었고, 이 기간은 보호국 시대로 알려져 있다.
9. 스튜어트 왕조 (복위, 1660–1707)
1660년에 군주제가 복고되었지만, 안정적인 해결은 의회가 마침내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군주로 선택된 모든 사람의 권리를 선언한 1688년 명예혁명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이름 | 초상화 | 출생 | 결혼 | 사망 | 주장 |
|---|---|---|---|---|---|
| 찰스 2세 (Charles II) | -- | 1630년 5월 29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 | 캐서린 1662년 5월 21일 3명의 적자를 두다 | 1685년 2월 6일 화이트홀 궁전 54세 | 찰스 1세의 자녀 |
| 제임스 2세 (James II) | -- | 1633년 10월 14일 | (1) 앤 하이드 1660년 9월 3일 8명의 자녀 (2) 메리 1673년 11월 21일 7명의 자녀 | 1701년 9월 16일 생제르맹앙레 67세 | 찰스 1세의 자녀 |
| 메리 2세 (Mary II) | 1662년 4월 30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 | 세인트 제임스 궁전 1677년 11월 4일 3명의 자녀 | 1694년 12월 28일 켄싱턴 궁전 32세 | 제임스 2세의 딸 부부 | |
| 윌리엄 3세 (William III) | -- | 1650년 11월 4일 헤이그 | 1702년 3월 8일 켄싱턴 궁전 51세 | ||
| 앤 (Anne) | -- | 1665년 2월 6일 | 조지 1683년 7월 28일 17명의 자녀 (모두 요절) | 1714년 8월 1일 켄싱턴 궁전 49세 | 제임스 2세의 자녀 |
10. 연합법 (1707)
앤 여왕의 통치하에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연합법은 1706년 7월 22일 양국 의원 대표 위원 간 협상에서 합의된 연합 조약을 발효시키기 위해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1706년부터 1707년 사이에 통과된 의원 입법이다. 이 법은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과거에는 별개의 주권 국가이자 입법부였으나, 공통의 군주를 가졌던)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하나의 왕국이 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두 나라는 1603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이래 100년 동안 군주를 공유해 왔다(「왕관의 연합」). 그러나 1707년 이전에는 사실상 두 개의 분리된 왕관이 같은 머리 위에 놓여 있었다. 1607년, 1667년, 1669년에 두 나라의 연합이 시도되었지만, 18세기 초까지 실행되지 못했다. 이는 양국의 정치 체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11. 왕호
애설스탠부터 실지왕 존까지 모든 잉글랜드 군주는 "잉글랜드인의 왕(King of the English영어, Rex Anglorum라틴어)"을 왕호로 사용했다.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이전의 왕들은 다음과 같은 왕호를 병용하기도 했다.
* 애설스탠: 전(全) 브리튼의 왕(Rex totius Britanniae라틴어)
* 에드먼드 1세 장려왕: 브리튼의 왕(Rex Britanniæ라틴어), 잉글랜드인과 다른 민족들의 왕이며 지배자이며 감독자(Rex Anglorum cæterarumque gentium gobernator et rector라틴어)
* 애드레드: 앵글로색슨인, 노섬브리아인, 이교도, 브리튼인들의 제(諸)정부 제왕국을 다스리는 이(Regis qui regimina regnorum Angulsaxna, Norþhymbra, Paganorum, Brettonumque라틴어)
* 애드위그 공평왕: 하느님의 은총으로 세우신 앵글로색슨인과 노섬브리아인의 황제이며 이교인들의 감독자이고 브리튼인의 사령관(Rex nutu Dei Angulsæxna et Northanhumbrorum imperator paganorum gubernator Breotonumque propugnator라틴어)
* 에드거 평화왕: 전(全) 알비온과 그 주변 영토의 군주(Totius Albionis finitimorumque regum basileus라틴어)
* 크누트 대왕: 잉글랜드인을 비롯 모든 브리튼권(圈)의 왕이며 지배자이며 감독자(Rex Anglorum totiusque Brittannice orbis gubernator et rector라틴어), 전(全) 브리튼 잉글랜드인의 군주(Brytannie totius Anglorum monarchus라틴어)
노르만 왕조 시기에도 "잉글랜드인의 왕(Rex Anglorum라틴어, King of the English영어)"이라는 표현이 계속 사용되었으나 "잉글랜드 국왕(Rex Anglie라틴어, King of England영어)"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성로마황후 마틸다는 스스로를 "잉글랜드인의 대부인(Domina Anglorum라틴어, Lady of the English영어)"이라고 칭했다.
실지왕 존 이후로는 "잉글랜드 국왕" 이외의 다른 칭호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1603년 잉글랜드 왕위를 상속받은 스코트인의 왕 제임스 6세는 그 이듬해인 1604년 "그레이트브리튼 국왕(King of Great Britain영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양 의회가 모두 이 칭호를 인정하지 않아 법적 근거는 없었다. 1707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 국왕위와 스코트인의 왕위가 완전히 통폐합된 앤 여왕 대에 가서야 "그레이트브리튼 국왕"이 공식 왕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