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랑기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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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랑기아인은 중세 그리스어와 고대 동슬라브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맹세한 동료' 또는 '동맹자'를 의미하며, 주로 새로운 군주와 충성 맹세 조약을 맺고 봉사에 들어간 외국인을 지칭했다. 스칸디나비아, 특히 스웨덴에는 바랑기아인과 관련된 룬석이 다수 존재하며, 이들은 동쪽으로의 항해나 전사들의 죽음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랑기아인들은 키예프 루스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세기에는 루스족의 족장 류리크가 스타라야 라도가를 지배하며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무역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친위대인 바랑기아 근위대는 키예프 루스 출신을 중심으로 스칸디나비아인, 앵글로색슨인 등으로 구성되어 황제의 안전을 지키고 전쟁에 참여했다. 바랑기아인과 관련된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이 존재하며, 루스 건국에 노르만인이 관여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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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기아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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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명칭 | |
고대 노르드어 | Væringjar |
고대 그리스어 | Βάραγγοι (Várangoi) |
고대 동슬라브어 | варяже (varyazhe) варязи (varyazi) |
기타 표기 | |
기본 정보 | |
민족 | 바랑기아인 |
언어 | 고대 노르드어 |
종교 | 노르드 이교 |
민족 계통 | 북게르만족 |
분파 | 루스인 |
역사적 역할 | |
주요 활동 지역 | 키예프 루스 비잔티움 제국 |
비잔티움 제국 내 역할 | 황제 친위대 |
특징 | |
군사적 특징 | 용맹한 전사, 숙련된 선원 |
문화적 특징 | 상인 탐험가 |
2. 어원
væringinon에서 유래한 중세 그리스어 Βάραγγος (''Várangos'')와 고대 동슬라브어 варягъ (''varjagŭ'')는[1] 원래 '맹세' 또는 '신의'를 뜻하는 várnon과 '동료'를 뜻하는 genginon의 합성어이다. 이는 '맹세한 동료', '동맹자'를 의미하며, '새로운 군주와 충성 맹세 조약을 맺고 그의 봉사에 들어간 외국인' 또는 '피보호자'를 의미하도록 확장되었다.[14] 일부 학자들은 일반적인 접미사 ''-ing''이 붙은 várnon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15] 그러나 이 접미사는 고대 노르드어에서 다르게 활용되며, 이 단어는 초기 중세 시대에 ''-gangia''와 다른 게르만어 동족어로 증명된다. 예를 들어 고대 영어 wærgengaang, 고대 프랑크어 wargengusfrk, 롬바르드어 이 있다.[16] 단어의 후반부 축약은 고대 노르드어 foringinon('지도자')와 유사하며, 이는 고대 영어 foregengaang와 고트어 𐍆𐌰𐌿𐍂𐌰𐌲𐌰𐌲𐌲𐌾𐌰got (''fauragaggja'')('집사')에 해당한다.[17][18]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는 룬석이라 불리는 기념비적인 돌 조각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 룬석들 중 상당수는 바이킹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바랑기아 근위대와 관련된 것들도 있다. 바랑기아인 룬석들은 새겨진 룬 문자를 통해 다양한 전사들의 죽음을 기념하고, 동쪽(''Austr'')이나 동쪽 길(''Austrvegr'') 또는 가르다리키(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같은 동쪽 지역으로의 항해를 언급한다. 바랑기아 근위대의 손실은 해외 항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장 큰 룬석 그룹(예: 그리스 룬석)에 반영되어 있다.[19] 이 룬석들은 바랑기아 근위대 출신 또는 그들을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더 작은 그룹으로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사망한 바랑기아 근위대원들을 기리는 네 개의 이탈리아 룬석이 있다.
3. 룬스톤
가장 오래된 그리스 룬석은 RAK 양식의 여섯 개 돌로, 서기 1015년 이전 시대의 것이다.[20] 이 그룹에는 스케프투나 룬석 U 358, 베스트라 레딩에 룬석 U 518, 넬베르가 룬석 Sö 170, 에릭스타드 룬석 Sm 46이 포함된다.[21]
Pr4 양식의 후대 룬석 중 하나는 에드 룬석 U 112이다. 에드 호수 서쪽 해안의 큰 바위에 새겨진 이 룬석은 바랑기아 근위대 대장인 라그날드르가 고향으로 돌아와 죽은 어머니를 기리는 비문을 새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21]
Pr5 양식의 가장 어린 룬석들(예: 에드 룬석 U 104(현재 옥스퍼드의 애슈몰린 박물관에 소장됨))은 1080년~1130년 사이로 추정되며, 그 이후로 룬석은 유행하지 않게 되었다.[21]
바랑기아인들은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귀국했는데, 11세기 초 리스빌레 룬석 U 161에 새겨진 비잔틴 십자가가 이를 보여주는 예시이며,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주 테뷔 시의 문장이다.[22] 룬은 룬마스터 바이킹 울프 오브 보레스타가 오르케스타 룬석 U 344에서 볼 수 있듯이, 스콜함라의 또 다른 울프를 기리고 후자의 아버지의 요청으로 만들었다.[22]
바랑기아인들의 행적은 스웨덴 국내외에서 발견된 룬석비를 통해 후대의 연구에 의해 명확해지고 있다.[40]
4. 키예프 루스
9세기, 루스족은 북부 루스(가르다리키)와 중동(세르클랜드)를 연결하는 볼가 강 무역로를 운영했다. 9세기 말 볼가 강 무역로는 쇠퇴했고, 드네프르 강과 드네스트르 강 무역로가 빠르게 중요성을 넘어섰다. 라도가와 노브고로드 외에도 그뇨즈도보와 고틀란드는 바랑기아인 무역의 주요 중심지였다.[23]
750년대에 알데이갸(라도가)에 정착한 노르스인 식민자들은 초기 루스인의 민족 형성과 루스 카가네이트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랑기아인(''바랴그'', 고대 동슬라브어로)은 『원초연대기』에 859년 슬라브족과 핀족 부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처음 언급되었다. 이는 북유럽에서 바이킹의 급속한 확장 시기였고, 잉글랜드는 859년 덴마크세를 지불하기 시작했고, 쿠로니아의 그로빈은 거의 같은 시기에 스웨덴의 침략에 직면했다.
''바랑기아인''이라는 단어는 11세기 이전의 1차 출처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하지만 이전 시기를 묘사하는 후대 출처에는 자주 나타난다). 이는 ''루스''라는 용어가 슬라브 문화를 수용한 키예프 루스의 후대 엘리트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기 전까지 스칸디나비아인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그 시점에서 새로운 용어 ''바랑기아인''이 스칸디나비아인, 아마도 대부분 현재 스웨덴 출신일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부르는 데 점점 더 선호되었다.[24] 이들은 발트해와 흑해 및 카스피해 사이의 강 수로를 이용했다.[25]
주로 지리적 고려 사항으로 인해, 동부 발트해, 현 러시아 및 남쪽 지역의 땅을 여행하고 정착한 대부분의 바랑기아인은 현재 스웨덴 지역 출신이라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바랑기아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스웨덴에 자신들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스, 벨라루스 여정을 이야기하는 룬스톤을 남겼다. 이러한 룬스톤 대부분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으며, 중요한 역사적 증거이다. 바랑기아인 룬스톤은 많은 주목할 만한 바랑기아인 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심지어 개별 전사와 여행자들의 운명까지 설명한다.[26]
4. 1. 키예프 루스의 성립과 발전
『원초연대기』(지나간 날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바이킹은 동슬라브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바랴그의 각 부족은 루스(루스족), 스베아인(스웨알, 스웨덴인), 노르만(노르만인)=앵글(앵글인) 및 고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연대기에 따르면, 바다 건너에서 온 그들이 키예프 루스(루스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용병, 해적, 무역 등에서 활약한 그들을 지배자로 맞이했다고 여겨진다[36](루스 국가의 성립에 대해서는, 특히 건국자인 루스족의 기원을 둘러싸고 노르만족 기원설과 반노르만족 기원설이 있다→바이킹 참조). 루스(루스 국가)의 국가 형성에 깊이 관여했지만, 소련의 연구사에서는 바랴그는 반드시 스칸디나비아인(노르만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위와 같이 다른 게르만인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바랴그는 슬라브인의 땅에 정착하여 1세기 정도 만에 동슬라브인에게 동화되었다. 그들의 특징은 특히 상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바랴그의 특징으로는 무장 선단을 이끌고 있었으며[37], 배(롱십)를 매장하는 등 바이킹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들도 전해진다. 그들은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중반에 걸친 “루스 카간국”의 지배 계급이었다고 여겨지며, 노르만계로 여겨지지만 기원이 불명확한 루스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전해진다.
키예프 대공국이 완성한 육상 교통망인 “바랴그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은 바랴그에서 유래한다. 이 통상로는 바이킹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발트해에서 흑해로 이어지는 경제망이기도 했다. 또한 볼가 강에서 카스피해로 향하는 통상로의 개척에 의해 이슬람 제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졌다. 이것만으로도 바랴그가 루스에서 수행한 공적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행위에 의해 후대 키예프 대공국의 번영의 기초가 되고, 루스라는 대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스웨덴과도 어떤 형태의 연계를 유지하며, 북유럽과 지중해 세계, 이슬람 세계의 중개 역할도 수행했다. 바랴그의 세력이 약해진 후에도 키예프 대공국이 스웨덴 등에서 노르만인의 식민이나 용병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서 볼 때, 북유럽과 동유럽의 연계 역할을 수행한 바랴그의 정치적으로 중대한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38]. 또한, 키예프 대공국에서의 측근 제도(하스칼)는 스칸디나비아 출신으로 여겨지며,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는 실제로 키예프 대공이 되기 위해 스웨덴에서 병사를 모집했다. 그는 루스에서 바랴그 시대의 마지막 군주였으며, 스웨덴에서 온 바랴그들을 동로마 제국에 근위대로 수출했다(바라기아스(Varangias))[39]. 이것으로 키예프 대공국은 기독교(정교회)화되었고, 바랴그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물론, 노르웨이 바이킹인 하랄 3세나 올라프 트리그바손이 류리크 왕조의 보호하에 있었던 적도 있다).
바랴그의 활동은 연대기 이외의 기록에 의한 증거가 부족하지만, 그들의 행적은 스웨덴 국내외에서 발견된 룬석비에 의해 후대의 연구에 의해 명확해지고 있다[40].
5. 이슬람 세계
루스인들은 9세기에 처음으로 세르클랜드에 등장하여 볼가 강 무역로를 따라 상인으로 여행하며 모피, 꿀, 노예뿐만 아니라 호박, 프랑크 검, 바다코끼리 상아와 같은 사치품을 판매했다.[27] 이러한 상품들은 대부분 디르함이라고 불리는 아랍 은화와 교환되었다. 9세기 바그다드 주조 은화가 스웨덴, 특히 괴틀란드에서 발견되었다. 은화 매장량의 크기 변화는 은화 수입이 증가한 시기와 매우 적은 은화가 수입된 수십 년 동안의 시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28]
루스인과 이슬람 세계 간의 경제적 관계는 무역로 네트워크로 빠르게 발전했다. 초기 루스인들은 발트해에서 카스피해와 흑해로 이어지는 최초의 중심지로 스타라야 라도가를 건설했다. 9세기 말 스타라야 라도가는 노브고로드에 가장 중요한 중심지의 자리를 내주었다. 이러한 중심지에서 루스인들은 바그다드까지 상품을 보낼 수 있었다. 바그다드는 9세기와 10세기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으며, 은화와 상품을 교환하기 위해 거기에 간 루스인 상인들은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북아프리카의 문화와 상품과도 상호 작용했다.[29]
루스인과 흑해와 카스피해 남쪽 지역 간의 무역은 루스인과 이슬람 세계 사이에 문화적 상호 작용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다. 아흐마드 이븐 파들란이 바그다드에서 불가르 왕국의 수도로 921~922년 여행하면서 쓴 기록은 두 집단 간의 문화적 상호 작용을 보여주는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이븐 파들란은 루스인의 일상 습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복잡한 배를 태워서 하는 장례식 의식에 대한 유일하게 알려진 1인칭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기록, 특히 의식의 대화와 루스인 개인과의 개인적인 대화에 나오는 특정 세부 사항은 루스인과 무슬림이 서로의 문화에 관심이 있었고 상당히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0]
볼가 지역의 지리와 (서쪽 바이킹 습격의 표적과 비교하여) 약탈할 수 있는 물질적 부의 상대적 부족으로 인해 동쪽에서 루스인/바랑기안 활동에서 약탈은 덜 중요한 측면이 되었다. 경제 활동의 중심지로 발전시킨 도시와 지역에 대한 초기 통제권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약탈이 필요했다.[31] 최초의 소규모 습격은 9세기 후반과 10세기 초에 일어났다. 루스인들은 913년에 최초의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500척의 배로 도착하여 오늘날 이란 영토에 있는 고르간과 인근 지역을 약탈하고 노예와 상품을 가져갔다. 북쪽 약탈자들은 귀환길에 볼가 삼각주에서 카자르 무슬림들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했고, 탈출한 자들은 중앙 볼가 지역의 지역 부족에게 살해당했다.
943년 다음 원정에서 루스인들은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있는 아란의 수도 바르다를 점령했다. 루스인들은 몇 달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도시 주민들을 많이 죽이고 상당한 약탈품을 모았다. 루스인들 사이에 이질이 발생하여 약탈품을 가지고 떠나게 된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키예프의 왕자 스비야토슬라프 1세는 965년 카자르 국가를 파괴한 다음 공격을 지휘했다. 스비야토슬라프의 원정은 남북 무역로에 대한 루스인의 통제를 확립하여 지역 인구 통계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 1041년 잉바르 원정이 이끄는 카스피해로 가는 루스인의 루트 재건 시도까지 약탈은 계속되었다. 바랑기안인들은 조지아에서 조지아-비잔티움 사시레티 전투(1042년)에 참여했다.
6.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러스'에 대한 가장 오래된 비잔티움 제국 기록은 842년 이전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있는 그리스어로 된 《아마스트리스의 성 게오르기우스 전기》에 보존되어 있으며, 파플라고니아까지 확장된 습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러스'의 당시 비잔티움 제국 내 존재는 프랑크의 생 베르탱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다. 839년 잉겔하임에서 황제 경건왕 루이의 궁정을 방문한 비잔티움 황제의 사절단에는 자신을 '''로스'''(''Rhos vocari dicebant'')라고 부르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루이는 그들이 스웨덴인임을 알게 되었다.
860년, 아스콜드와 디르 지휘하의 러스'는 키예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바랑기아인들은 드네프르 강을 따라 흑해로 정기적으로 모노실라를 항해했다. 러스'의 카스피해 습격은 870년대와 910년, 912년, 913년, 943년, 그리고 그 이후에 무슬림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러스'는 비잔티움 제국과 주로 평화로운 무역 관계를 맺었지만, 키예프의 통치자들은 907년 해상 원정과 941년의 원정을 감행했고, 스비아토슬라프 1세는 968년에서 971년 사이에 발칸 반도에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다.
1043년, 야로슬라프는 그의 아들 블라디미르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보냈으나, 비잔티움 제국은 공격하는 함선들을 파괴하고 블라디미르를 물리쳤다.[32] 이러한 습격은 비잔티움 제국이 무역 협정을 재정비하도록 강요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사적으로 바랑기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의 불 사용으로 인해 바다에서는 대개 패배했다.
『원초연대기』에 따르면, 바이킹은 동슬라브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바랴그의 각 부족은 루스(루스족), 스베아인(스베알, 스웨덴인), 노르만(노르만인)=앵글(앵글인) 및 고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바다 건너에서 온 그들이 키예프 루스(루스 국가) 건설에 참여했으며, 용병, 해적, 무역 등에서 활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6] 루스(루스 국가)의 국가 형성에 깊이 관여했지만, 바랴그는 반드시 스칸디나비아인(노르만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다른 게르만인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바랴그는 슬라브인의 땅에 정착하여 1세기 정도 만에 동슬라브인에게 동화되었다. 그들의 특징은 특히 상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무장 선단을 이끌고 있었으며[37], 배(롱십)를 매장하는 등 바이킹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들도 전해진다. 그들은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중반에 걸친 “루스 카간국”의 지배 계급이었다고 여겨진다.
키예프 대공국이 완성한 육상 교통망인 “바랴그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은 바랴그에서 유래한다. 이 통상로는 바이킹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발트해에서 흑해로 이어지는 경제망이기도 했다. 또한 볼가 강에서 카스피해로 향하는 통상로의 개척에 의해 이슬람 제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졌다. 바랴그의 세력이 약해진 후에도 키예프 대공국이 스웨덴 등에서 노르만인의 식민이나 용병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북유럽과 동유럽의 연계 역할을 수행한 바랴그의 정치적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38]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는 스웨덴에서 온 바랴그들을 동로마 제국에 근위대로 수출했는데(바라기아스(Varangias)),[39] 이를 통해 키예프 대공국은 기독교화(정교회)되었고, 바랴그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발트 지방(에스토니아, 리보니아)을 바이킹이 지배했다고 북유럽의 전승인 사가에 묘사되어 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바이킹이 이른바 바랴그인지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 시대 스웨덴계 바이킹이 발트해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을(현재의 제해권과는 다르다)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기 때문에 동유럽 진출이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다. 바랴그의 활동은 연대기 이외의 기록에 의한 증거가 부족하지만, 그들의 행적은 스웨덴 국내외에서 발견된 룬석비에 의해 후대의 연구에 의해 명확해지고 있다.[40]
다음은 바랑기아 인들의 주요 활동을 정리한 표이다.
시기 | 주요 활동 |
---|---|
8세기경 | 발트해를 장악. 바리야그 해라고도 불림. |
9세기 중반 | 류리크가 라도가를 지배. 드네프르 강과 볼가 강을 따라 내려가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 등과의 무역망을 구축. 동슬라브인의 땅을 "가르다리케"라고 부름. 포로츠크, 스몰렌스크, 체르니고프, 페레야슬라블 등의 도시를 건설했다고 여겨짐(루스 카간국 참조). |
860년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당함. 이 땅을 미클라가르드라고 부름(루스-비잔티움 전쟁). |
862년 | 슬라브인들의 간청을 받아 류리크가 노브고로드를 정복. 노브고로드 공국(홀름가르드) 성립. |
882년 | 류리크의 아들로 여겨지는 이고리가 동족 올레그의 후견하에 키예프 대공국을 건설. |
911년 | 올레그가 동로마 제국과 루스 최초의 조약을 맺어 동유럽의 무역망을 완성. |
924년 | 이고리 1세가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 이후 루스는 지배자가 노르만계에서 슬라브계로 이동. |
980년 | 노브고로드 공 블라디미르 1세가 노르만인을 이끌고 키예프 대공국으로 귀환. 키예프 대공에 즉위한 블라디미르 1세는 친 스칸디나비아 정책을 펼침. |
988년 | 기독교(정교회)를 국교로 정함으로써 루스에서의 바리야그 시대는 막을 내림. |
1019년 | 스웨덴 왕 오로프의 공주가 노브고로드 공 야로슬라프 1세와 결혼. 그 대가로 스웨덴 귀족이 라도가의 지배자가 됨. 라도가에는 11세기까지 바리야그의 영향이 남아 있었음. |
6. 1. 바랑기아 근위대

바랑기아 근위대(그리스어: Τάγμα τῶν Βαράγγων, ''Tágma tōn Varángōn'')는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비잔티움 제국군의 일부였으며 비잔티움 황제의 친위대였다. 초기에는 키예프 루스 출신의 바랑기아인들로 구성되었다.
스칸디나비아(주로 스웨덴[24] 출신이었지만, 덴마크와 노르웨이 출신도 포함[25]되었다) 출신 이민자들은 11세기 후반까지 거의 전적으로 노르드계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스웨덴의 역사가 알프 헨릭손은 저서 ''Svensk Historia''(''스웨덴 역사'')에서 노르드 바랑기아 근위대원들은 긴 머리카락, 왼쪽 귀에 박힌 붉은 루비, 그리고 사슬 갑옷에 수놓은 장식용 용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 시기에 스웨덴 남성들이 비잔티움 바랑기아 근위대에 입대하기 위해 너무 많은 수로 떠나자, 중세 스웨덴 법인 베스트예탈라겐은 베스트예탈란드에서 "그리스"—당시 스칸디나비아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부르던 명칭—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아무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조항을 두어 이민을 막았다.[34] 키예프 루스(약 980~1060년)와 런던(1018~1066년)(팅갈리드)등 다른 두 유럽 궁정에서도 동시에 스칸디나비아인들을 모병했기 때문이다.[35]
처음 백 년 동안 주로 스칸디나비아인들로 구성되었던 근위대는 성공적인 잉글랜드 노르만 정복 이후 앵글로색슨인들이 점점 더 많이 포함되었다. 11세기 후반 알렉시오스 콤네노스 황제 시대에는 바랑기아 근위대는 대부분 앵글로색슨인과 "바이킹과 그들의 사촌인 노르만인들에게 고통을 받은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앵글로색슨인과 다른 게르만 민족들은 바이킹들과 충실하고 맹세에 얽매인 봉사(필요하다면 죽음까지)의 전통을 공유했고, 잉글랜드의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땅과 이전의 주인을 잃은 많은 전사들이 다른 곳에서 생계를 찾고 있었다.
바랑기아 근위대는 비잔티움 황제의 안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이 관련된 많은 전쟁에 참여했으며, 종종 전투의 중요한 순간에 투입되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3세기 후반에는 바랑기아인들이 대부분 비잔티움인들과 동화되었지만, 근위대는 적어도 14세기 중반까지 운영되었고, 140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여전히 자신을 "바랑기아인"이라고 밝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7. 대중문화
- 러시아의 보호순양함이었던 바랴크는 1905년 젬풀포 해전에서 승무원들의 불굴의 정신으로 유명해졌다.[1]
- 로즈메리 서트클리프의 1976년 역사 소설 블러드 피드는 바실 2세가 드네프르 강 무역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여행한 반(半)색슨족 고아의 관점에서 바랑기아 경비대를 편성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2]
- 헨리 트리스의 바이킹 3부작은 바랑기아 경비대 복무를 포함한 하랄드 시구르드손(Harald Sigurdson)의 모험을 기록하고 있다.[3]
- 마이클 에니스의 ''비잔티움''은 하랄드 하르드라다의 삶을 허구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바랑기아 경비대에서의 생활을 보여준다.[4]
- 폴 앤더슨의 ''마지막 바이킹''은 하랄드 하르드라다의 삶을 다룬 또 다른 작품으로, 바랑기아 경비대에서의 그의 생활과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 여성과의 비극적인 사랑을 보여준다.[5]
- 스웨덴 작가 프란스 G. 벵트손의 바이킹 사가 ''긴 배''(또는 ''붉은 오름'')에는 주인공의 형제가 바랑기아인으로 복무하고 비잔티움 궁정의 음모에 휘말려 매우 불쾌한 결과를 맞이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6]
- H. G. 웰스의 ''블러핑턴 오브 블럽''(1933)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수년 동안 자신이 "도티를 능가하는 바랑기아인의 역사"를 집필하고 있다는 허구를 유지한다.[7]
- 존 링고의 그림자의 팔라딘 시리즈는 조지아 산맥에 있는 오랫동안 잊혀진 바랑기아 경비대의 허구적인 거점을 보여준다.[8]
- 투리사스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바랑기아 방식''은 중세 러시아의 강 수로를 따라 라도가, 노브고로드, 키예프를 거쳐 비잔티움 제국으로 여행하는 스칸디나비아인 그룹의 이야기를 담은 컨셉 앨범이다. 그들의 세 번째 앨범 일어서서 싸워라는 비잔티움 제국에 봉사한 바랑기아 경비대의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9]
- "바리아그"로 알려진 수염이 많은 도끼를 든 이스터링이 톨킨의 판타지 소설 ''왕의 귀환''에 등장한다.[10]
- PC 게임 시리즈 ''마운트 앤 블레이드''에서 바에기르(Vaegirs)의 이름과 위치는 바랑기아인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세력은 "바에기르 경비대"라는 독특한 부대를 가지고 있다.[11]
- 비디오 게임 ''중세: 토탈 워''와 ''중세 2: 토탈 워''에서 바랑기아 경비대는 비잔티움 제국의 도끼를 든 정예 보병 부대이다.[12]
- 아몬 아마스의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천둥의 신의 황혼''의 5번째 트랙은 "미클라가르드의 바리아그(Varyags of Miklagaard)"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13]
- 그랜드 매거스의 여덟 번째 스튜디오 앨범 ''검의 노래''의 2번째 트랙 제목은 "바랑기안(Varangian)"이다.[14]
- 바랑기아인 병사들은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레벨레이션''의 일반적인 적이다.[15]
- 비디오 게임 ''마운트 앤 블레이드 2: 배너로드''의 멀티플레이어 모드에서 러시아에서 영감을 받은 스투르기안 세력에 속한 유닛 계급을 '바리아그(Varyag)'라고 부른다.[16]
- 러시아 작가 드미트리 비코프의 소설 ''살아있는 영혼'' (''ЖД'')은 러시아의 지배권을 놓고 바랑기아인과 카자르 간의 내전을 다루고 있다.[17]
8. 반(反)노르만설
동슬라브인, 특히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발전한 러시아 제국은 루스 건국에 있어 노르만인의 개입을 부정하려 했다. 루스 또는 라틴어의 루테니아를 동슬라브인의 기원으로 돌리려는 시도였다(특히 "루스"라는 단어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며, 현재도 동유럽 역사가와 서유럽 역사가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루스 국가의 파괴자, 침략자로 간주했다. 이러한 주장은 20세기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도 강조되었다.[41]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그 후의 연구, 고고학 조사를 통해 근거 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루스족 항목 참조). 다만 바랴그들의 활동은 주로 루스 또는 동슬라브인 측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정복자로서의 측면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동슬라브인의 친스칸디나비아적 관점에서, 비록 류리크 등의 존재가 반전설적이라 할지라도, 노르만인은 루스 국가의 성립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했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현재에도 이 설은 존재하며, 동유럽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참고로 스웨덴에 수천 개 남아 있는 룬 문자로 새겨진 룬석 중에는 "아버지는 동쪽으로 향한 동료들과 함께 먼 남쪽 나라에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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