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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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시는 북송 말기에서 남송 초기의 학자이자 관료이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렸으며, 불학을 공부하다 유학으로 전향했다. 정이 형제에게 학문을 배우고, 관직 생활을 거쳐 동림서원을 설립하여 저술과 강학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주희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저서로는 『이정수언』, 『귀산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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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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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양시는 남검주 장락현(현재의 푸젠성 싼밍 시 장러 현) 출신으로, 경서를 연구했다. 채경 등 신법파를 비판하여 일시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나, 47년간 지방관 생활을 하며 비서랑에서 국자제주로 승진했다. 남송 초기에는 유양, 여항, 샤오산의 지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고, 고종 때 용도각직학사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동림서원을 설립하여 저술과 강학에 힘썼으며, 호안국과 교류하며 정호와 정이의 정통을 잇는 인물로 존경받았다. 그의 학문은 라종언을 거쳐 이동에게 전해져 주희에게까지 이어졌다. 저서로는 『이정수언』 2권, 『귀산집』 42권, 『귀산어록』 4권이 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양시는 어려서 신동으로 불렸는데, 불학(佛學)을 먼저 공부하다가 유학으로 바꾸었다. 송 희녕 9년(1076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정주(汀州)의 사호참군(司戶參軍)을 역임하고, 관직은 용도각(龍圖閣) 직학사(直學士)에 이르렀다.
29세에 허난성 쉬창시에서 살던 정호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워,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학문을 완성했다. 양시를 전송하면서 정호가 주변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도가 남으로 간다”(吾道南矣)고 했다. 후에 양시는 동학 유작(遊酢, 1053~1123)과 함께 정호의 동생 정이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스승에 대한 공경이 매우 뛰어났는데, 《송사》 〈양시전〉(楊時傳)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양시와 유작이 스승 정이를 뵈러 갔는데, 정이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져 앉아 있었다. 두 제자는 스승을 모시고 서서(시립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이윽고 정이가 깨어나 보니 문밖엔 눈이 한 자가 넘게 쌓여 있었다.

2. 2. 정호, 정이 문하에서
29세에 허난성 쉬창시에서 살던 정호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워,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학문을 완성했다. 양시를 전송하면서 정호는 주변 사람에게 “내 도가 남으로 간다”(吾道南矣)고 말했다. 후에 양시는 동학 유작(1053년~1123년)과 함께 정호의 동생 정이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스승에 대한 공경이 매우 뛰어났는데, 《송사》 〈양시전〉(楊時傳)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양시와 유작이 스승 정이를 뵈러 갔는데, 정이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져 앉아 있었다. 두 제자는 스승을 모시고 서서(시립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이윽고 정이가 깨어나 보니 문밖엔 눈이 한 자가 넘게 쌓여 있었다.2. 3. 관직 생활과 신법 비판
희녕 9년(1076년)에 진사가 되었다. 정호와 정이에게 배웠다. 47년에 걸친 지방관 생활 중 비서랑에서 국자제주로 승진했지만, 채경 등 신법파를 비판하여 일시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적이 있다. 남송 초기에 유양, 여항, 샤오산의 지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고, 고종 때 용도각직학사가 되었다.2. 4. 은퇴 이후
1076년 진사가 된 후, 47년에 걸친 지방관 생활을 마치고 퇴관하여 동림서원을 설립, 저술과 강학에 종사했다. 호안국과 교류하며, 정호, 정이의 정통을 잇는 인물로 존경받았다. 그의 학문은 라종언을 거쳐 이동에게 전해져 주희에 이르렀다.3. 저서
二程粹言중국어 2권, 龜山集중국어 42권, 龜山語錄중국어 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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