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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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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경은 107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북송 신종, 선인태후, 휘종 시대에 걸쳐 재상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신법과 구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권력을 유지했고, 휘종 시대에는 화석강 정책 등을 통해 재정을 탕진하여 간신으로 비판받았다. 말년에는 아들 채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금나라의 침공으로 북송이 멸망하면서 유배되어 사망했다. 서예에도 능하여 송나라 4대 서예가로 불리기도 했지만, 인품 문제로 인해 예술적 평가는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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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채경
한자蔡京
로마자 표기Cai Jing
원장(元長)
출생1047년 2월 14일
출생 (음력)慶暦 7년 1월 17일
출생지흥화군선유현
사망1126년 8월 11일
사망 (음력)靖康 원년 7월 21일
사망지담주
국적북송
칭호/역직재상
정치 경력
주요 군주신종
철종
휘종
흠종
가족 관계
아들채도
채조
기타 정보
특기 사항서예가
수호전 관련
수호전 등장수호전 등장 인물

2. 생애

철종의 친정이 6년 남짓으로 끝나고, 휘종 시대가 시작되었다. 휘종 초기에는 신종의 황후인 향태후의 지도 아래 건중정국을 표방하며 신법파와 구법파의 조정을 꾀했다. 이때 한충언과 증포를 재상으로 맞이했고, 채경도 중앙에 복귀했지만, 향태후에게 접근하여 신임을 얻었다. 이를 경계한 한충언과 증포는 채경을 태원부 장관으로 삼도록 휘종에게 권했으나, 태후의 중재로 무산되었다.[1] 증포는 채경을 신뢰하지 않았고, 친정을 시작한 휘종이 태후와 가까운 채경을 경계하면서 한때 파면되기도 했다. 그러나 휘종의 총신 동관과 등순무의 중재, 한충언·증포의 정치에 대한 휘종의 불만 등으로 채경은 신속하게 중앙에 복귀했다.[11]

휘종 시대에 채경은 16년간 태사(재상)의 지위에 오르며 권력을 집중했다. 신구 양당을 막론하고 반대파를 모두 추방하고 구법파로 몰아 "간당(奸黨)"이라 폄하했다. 추방된 구법당인은 300여 명에 달했고, 자손들은 금고 처분으로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간당"의 인명록으로 원우붕당비를 건립하여 "간당" 일당의 블랙리스트로 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 비석에는 신법파인 장돈과 안도 등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어, 구법 탄압을 명분으로 한 채경의 권력 장악 의도를 보여준다.[1] 이 시기에는 정치적 사건이 잇따랐는데, 채경은 재상 취임 전부터 낙옥, 동문관의 옥 등 구법파 관련 의혹 단속에 관여했고, 재상 취임 후에도 소주전법의 옥, 장회소의 옥 등의 사건을 반대파 숙청의 구실로 이용했다. 또한 신법을 명분으로 백성에게 중과세를 징수하고, 휘종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왕실 재정을 탕진시켰다. 이는 당시와 후대에 그를 간신으로 비판받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이 바치는 헌상품이 쇄도했고, 진귀한 물건을 바친 지방관은 승진했다. 한편 가족 간에도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동생, 아버지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1]

휘종 말기에는 채경의 장남 채유에게 실권이 넘어갔지만, 명목상으로는 채경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 무렵 과 연합하여 연운십륙주를 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정은 금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맹약을 여러 차례 어겨, 1125년 중원 탈취를 노린 금의 공격으로 북송이 멸망했다(정강의 변).[1]

금군의 침공으로 북송이 멸망하기 직전, 휘종은 장남 흠종에게 양위했다. 흠종은 채경 정권을 싫어했고, 금의 습격에 분노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채경에게 반대하여 은둔 생활을 하던 이강을 불러 대책을 마련했다. 채경, 동관, 왕부 등 6명은 "육적"으로 불리며 모두 유배되었다. 노령의 채경은 유배 도중 담주에서 80세로 사망했다. 유배 결정 직후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나 이미 사망하여 집행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채경이 사형을 면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장남 채유 등 형제와 일족은 흠종의 명으로 처형되었다고 『송사』 열전 제231 간신전 2에 기록되어 있다.[1]

최근 후지모토 타케시는 채경과 휘종의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1106년 혜성 출현을 구실로 채경이 파면되었는데, 실제로는 전년 요가 송과 서하의 국경 분쟁 중재에 나섰을 때, 휘종은 요의 제안을 받아들여 임서를 정사, 고구를 부사로 요에 파견했다. 그런데 채경이 몰래 임서에게 요를 도발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지시한 것을 안 휘종이 평화파로 인사를 교체하기 위해 파면했다는 것이다.[7] (단, 서하와의 화의 성립 후 채경은 복권되었다)

1109년에도 채경은 재상직에서 물러났다가 2년 후 복귀했는데, 이는 채경의 권력에 대한 불만과 채경 개인에 대한 호감 사이에서 갈등하던 휘종의 심리 때문이었다고 한다.[8] (채경의 복귀에는 개봉에 남은 아들과 지지자들의 반격도 있었다) 1113년 유교 경전에 따른 고대 예악 부흥을 꾀한 휘종이 주도하여 정거중 등이 편찬한 의례서 『정화오례신의』가 완성되었는데, 이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 채경 실각 중인 1109년이었기 때문에, 구체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채경은 불안정한 세상을 감안하여 휘종에게 봉선을 제안했지만, 봉선은 진·한 시대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의식이라 생각한 휘종이 불만을 표했고, 유정부의 건의에 따라 봉선 중지를 명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채경은 1116년 태사 사임을 표했지만, 휘종은 채경을 위로하며 고령을 이유로 3일에 한 번 출근하여 삼성(중서·문하·상서)을 총괄하고, 원하는 때에 정무를 보거나 귀가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렸다.[8] 그러나 휘종은 반 채경파인 정거중·유정부(원래 채경 측근이었으나 대요 외교 문제로 실각했고, 이후 자신이나 친족이 채경에게 처벌받아 돌아선 인물)를 재상으로 기용했고, 채경은 휘종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채경은 명예직으로 추대되는 형식으로 점차 실권을 잃어갔다.[8]

이후 채경의 장남 채유가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는 휘종 즉위 전부터 채유가 휘종을 가까이 모셨기 때문이다. 채경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금중 장악에 힘썼지만, 사실상 실각한 후에는 휘종의 친정을 돕는 측근으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 선화 연간에는 휘종 편에 서서 아버지, 동생들과 대립하기도 했다.[9][10]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그는 1070년 (희녕 3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당시에는 동생 채변의 승진이 더 빨랐는데, 채변이 형 채경을 위해 관직을 양보하도록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훗날 채경도 두각을 나타내어 신종 조 말년에는 수도 개봉부의 지부(知府)가 되었다.[1]

신종이 사망하고 선인태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녀의 신임을 받았던 구법파의 사마광이 재상으로 취임했다. 사마광은 모역법 폐지와 차역법 부활을 추진하며 5일 이내에 실행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사마광이 상정한 차역법은 이미 현실과 괴리가 있어 실현 불가능했다. 채경은 가장 어려운 곳인 개봉부에서 기한 내에 법령을 개폐하여 사마광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신종 때에는 신법에 가담했다가 구법 시행 후 구법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 류안세, 왕엄수 등에게 비판받고 하야했다.[1]

2. 2. 신법과 구법 사이의 줄타기

희녕 3년(1070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에는 동생 채변의 승진이 더 빨랐다. 그래서 채변이 형 채경에게 관직을 양보하도록 제안한 적이 있었고, 조정에서는 훌륭한 일로 여겨졌다.[1] 후에 채경도 두각을 나타내어, 신종 말년에는 수도 개봉부의 지부가 되었다.

신종이 죽고 선인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녀의 신임을 받은 구법파의 사마광이 재상에 취임했다. 사마광은 모역법 폐지와 차역법 부활을 도모하여, 이를 5일 기한으로 실행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사마광의 지휘는 편의주의적인 면이 많았고, 사마광이 예상했던 차역법 자체가 이미 실행 불가능할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많은 지방관은 그 개폐에 당황하여 기한을 도저히 지킬 수 없었다. 그런데 채경은 가장 어려운 곳인 개봉부에서 기한 내에 법령 개폐를 실행하여 사마광을 감동시켰다.[1] 그러나 그는 신종 때에는 신법에 가담하여 신법을 찬미하고, 구법이 시행되자마자 구법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구법파의 급선봉이었던 류안세, 왕엄수 등에게 격렬한 비판을 받고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인태후의 정권도 9년 정도로 끝나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다시 신법이 부활한다. 이때 많은 구법파 관료가 추방되고, 대신 신법파 관료가 등용되었다. 당시 권력자 장돈과 증포는 열렬한 신법 추진파였고, 신법을 국시로 여겼지만, 채경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채경도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다.[1] 그러나 그는 후궁과 환관과 결탁하여 자신의 출세 계기를 찾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에는 이미 동생 채변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그들의 아내들도 서로 미워했다고 전해진다.

2. 3. 휘종 시대의 권력 장악

신종 황제의 황후 흠성헌숙황후 상씨의 수렴청정 하에 휘종 초기에는 신법파와 구법파의 균형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때 신구 한충언, 증포를 재상으로 맞이하고 채경도 중앙에 복귀했지만, 증포는 채경을 신용하지 않았고, 다시 한번 파면되었다. 그러나 상씨가 갑작스럽게 죽고 친정을 시작한 휘종은 채경을 중앙 조정에 복귀시켰다. 여기에는 평소 휘종이 총애하던 내시 동관의 영향이 있었는데, 회화를 좋아하는 휘종이 서화첩을 가지러 동관을 항주에 보내면 채경은 동관을 따라다니며 그의 비위를 맞추었고 연경으로 돌아간 동관은 휘종에게 채경을 추천했다.[11]

휘종 치세에 채경은 16년간 태사(재상)의 지위에 종사하며 권력을 집중하였다. 그에게 반대한 자는 신구 양당 어느 쪽을 불문하고 추방하고, 그들을 일괄 구법파로 몰아 숙청하였다. 추방된 구법당은 삼백 명에 이르렀고, 그 자손도 연좌시켜 과거시험 자격을 박탈했다. 이렇게 생겨난 간당의 인명 일람으로 원우붕당비를 건립하고 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 기념비에는 본래 분명히 신법파에 속한 장돈(章惇), 안도(安燾)도 포함되어 있었고, 채경은 구법 탄압을 권력 장악 정책으로 이용하였다.

채경은 그 밖에도 신법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중과세를 징수하고, 휘종을 즐겁게 하였다. 대토목공사를 통해 왕실의 재정을 탕진시켰다. 이는 당시와 후세에 그를 간신이라고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2. 4. 실각과 유배

그는 신종 때에는 신법(新法)을 지지하였고, 구법파가 득세하자 구법을 지지한다고 말해 구법파의 급선봉이었던 유안세, 왕엄수 등에게서도 심한 비판을 받아 하야했다.[1]

선인태후의 정권이 끝나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법이 다시 부활하였다. 많은 구법파 관료가 추방되고 신법파 관료가 등용되었는데, 당시 권력자 장돈과 증포는 신법을 적극 지지하였으나 채경을 신뢰하지 않아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후궁과 환관과 결탁하여 자신의 출세 계기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1]

휘종 말기에는 권력 유지를 위해 실권이 채경에게서 아들 채유에게 넘어갔다. 북송 정권은 금나라와 연대하여 연운십육주요나라로부터 빼앗으려 하였으나, 금나라와 맺은 맹약을 여러 번 어겨 1125년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정강의 변)[1]

금나라의 침공 직전, 휘종은 장남 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흠종은 채경 정권을 싫어했고,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강을 등용하여 뒷수습을 맡겼다. 이강은 채경 등을 유배시키고 사형에 처했으나, 채경은 사형 직전에 병사했다.[1]

3. 정책과 비판

채경은 휘종 시기 동안 재상을 역임하며 여러 정책을 시행했고, 그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채경은 왕 안석의 신법(新法)을 부활시키는 데 협력했지만, 이전의 정책, 특히 보수적인 반대파들의 저술을 파괴하거나 급진적으로 바꾸는 소모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심괄의 저술 상당 부분도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

휘종의 통치 기간 동안 채경은 탄핵을 받고 항주로 은퇴했다가 환관 장군 동 관과의 협력을 통해 조정으로 복귀했다. 재상이 된 채경은 화석강(花石綱) 정책을 도입하고, 차와 소금 무역에 대한 세금 법 개혁 및 인력 동원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정부의 부패를 초래했다.[1]

1115년, 채경과 동 관은 송이 여진족과 연합하여 요(遼)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휘종 황제에게 요청받았다. 휘종은 처음에 관심이 없었으나, 동관의 제안에 대한 채경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채경은 휘종에게 동관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2] 휘종은 채경의 우려를 무시했다. 1120/6년, 채경은 은퇴했는데, 이는 휘종이 여진과의 동맹에 대한 그의 저항에 싫증이 났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3]

1125년, 국자감 관리 천동(陳東)은 휘종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여 채경을 포함한 여섯 명의 "역적"을 규탄했다. 금종 황제가 즉위한 후 채경은 관직에서 파면되고 유배되었으며, 유배지로 가는 도중 굶어 죽었다.[6]

3. 1. 화석강(花石綱) 정책

휘종 황제 시기, 채경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관리들이 황제에게 귀중한 선물과 공물을 바치는 데 집중하도록 하는 화석강(花石綱) 정책을 도입했다.[1] 또한 1102년과 1113년에는 차와 소금 무역에 대한 세금 법을 개혁하고 인력 동원을 증가시켰다.[1] 그러나 이러한 채경의 정책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정부의 부패를 초래했다.[1]

3. 2. 세금 제도 개혁

채경은 1102년과 1113년에 차와 소금 무역에 대한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인력 동원을 증가시켰다.[1] 이러한 개혁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정부의 부패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

3. 3. 신법과 구법 논쟁

1070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당시는 아우 채변의 승진이 빨랐다. 그 때문에 채변이 형 채경을 위해 관직을 미루도록 타진했다는 말이 있었다. 후에 채경도 두각을 나타내고, 신종 조최가 임종할 쯤에는 수도 개봉부의 장관이 되었다.

신종이 붕어하고, 선인태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 신임을 받았던 구법파의 사마광이 재상으로 취임하게 된다. 사마광은 모역법 폐지와 차역법의 부활을 도모하고, 이것을 5일 이내로 실행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원래 사마광의 지휘도 기회주의적인 면이 많아서, 사마광이 상정하고 있던 차역법 그 자체가 이미 실현불가능 할 만큼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많은 지방관은 모역법 폐지에 반발했고, 도저히 기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채경은 개봉부라고 하는 가장 곤란한 장소에서 기일에 맞춰 법령의 개폐하고, 사마광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신종 때에는 신법파에 가담하여 신법을 지지하였고, 구법파가 득세하자 구법을 지지한다고 말한 태도는 구법파의 급선봉이었던 유안세(劉安世), 왕암수(王巌叟) 등에게서도 심한 비판을 받고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다.[1]

선인태후의 정권도 9년 만에 끝나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또 한 번 신법이 부활한다. 이때 많은 구법파 관료가 추방되고, 대신하고 신법파 관료가 등용되었다. 당시의 권력자 장돈(章惇)과 증포(曾布)는 열렬한 신법 추진파였고, 신법을 국시라고 간주할 정도로 신법을 추종하였다. 채경은 이러한 권력자들에게 신용을 얻지 못했고, 그 때문에 채경도 눈에 띄었던 활약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후궁이나 내시와 결탁하여 스스로의 출세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또 이 당시에는 이미 아우 채변과의 사이가 소원해져, 그 처와도 자주 다투었다 한다.[1]

3. 4.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

휘종 초기에는 신종 황제의 황후 흠성헌숙황후 상씨의 수렴청정 하에 신법파와 구법파의 균형을 꾀하였다. 이때 신구 한충언, 증포를 재상으로 맞이하고, 채경도 중앙에 복귀했지만, 증포는 채경을 신용하지 않았고, 또 한 번 파면되었다. 그러나 상태후가 갑작스럽게 죽고 친정을 시작한 휘종은 채경을 중앙 조정에 복귀시켰다. 여기에는 평소 휘종이 총애하던 내시 동관의 영향이 있었는데, 회화를 좋아하는 휘종이 서화첩을 가지러 동관을 항주에 보내면 채경은 동관을 따라다니며 그의 비위를 맞추었고 연경으로 돌아간 동관은 휘종에게 채경을 추천했다.[11]

휘종 조에 있어서 채경은 16년간 태사(재상)의 지위에 종사할 정도로 권력을 집중하였다. 그에 반대한 자는 신구 양당 어느 쪽을 불문하고 추방하고, 그들을 일괄 구법파라고 몰아서 숙청하였다. 추방된 구법당은 삼백 명에 이르렀고, 또한 그 자손도 연좌시켜 과거시험의 자격을 박탈했다. 이렇게 생겨났던 간당의 인명 일람으로 원우붕당비(元祐朋党碑)를 건립하고, 천하에 알리게 했다. 그러나 이 기념비에는 본래 분명히 신법파에 속한 장돈(章惇), 안도(安燾)도 포함되어 있었고, 구법 탄압을 채경의 권력 장악 정책으로 이용하였다.

4. 부정부패와 몰락

채경은 휘종 시기, 환관 동 관과 협력하여 조정에 복귀해 재상이 되었다. 그는 관리들이 황제에게 귀중한 선물과 공물을 바치는 데 집중하도록 하는 화석강(花石綱) 정책을 도입하고,[1] 차와 소금 무역에 대한 세금 법을 개혁하고 인력 동원을 늘리는 등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정부 부패를 초래했다.

1115년, 채경과 동관은 휘종에게 여진족과 연합하여 요(遼)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평가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휘종은 동관의 제안에 대한 채경의 의견을 물었으나, 채경은 동관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2] 휘종은 채경의 우려를 무시했고, 결국 채경은 1120/6년에 은퇴했다.[3]

1125년, 국자감 관리 천동(陳東)은 채경을 포함한 여섯 명의 "역적"을 규탄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4] 금종 즉위 후, 채경은 관직에서 파면되어 유배되었고, 유배지로 가는 도중 굶어 죽었다.[6]

4. 1. 권력 남용과 부정축재

휘종 즉위 초, 신종의 황후 흠성헌숙황후 상씨의 수렴청정 하에 신법파와 구법파의 균형을 꾀하려 하였다. 이때 채경은 중앙에 복귀했지만, 증포의 불신으로 다시 파면되었다. 그러나 상 황후 사후 친정을 시작한 휘종은 채경을 복귀시켰다. 이는 휘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동관의 영향이 컸는데, 동관은 항주에서 채경의 비위를 맞추며 그를 휘종에게 추천했다.[11]

휘종 조에서 채경은 16년간 재상으로 권력을 집중했다. 그는 반대자를 신구 양당 불문하고 추방하고, 구법파로 몰아 숙청했다. 추방된 구법당은 300명에 달했고, 자손까지 연좌되어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들의 명단은 원우붕당비(元祐朋党碑)로 만들어 천하에 알렸는데, 여기에는 신법파인 장돈(章惇), 안도(安燾)도 포함되어 채경의 권력 장악에 이용되었다.

채경은 신법을 명분으로 백성에게 중과세를 징수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로 왕실 재정을 탕진했다. 이는 당대와 후대에 그를 간신으로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관리들이 황제에게 귀중한 선물과 공물을 바치는 화석강(花石綱) 정책을 도입했다. 1102년과 1113년에는 차와 소금 무역에 대한 세금 법을 개혁하고 인력 동원을 늘렸다. 채경의 정책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정부 부패로 이어졌다.

1125년 국자감 관리 천동(陳東)은 채경을 포함한 여섯 명의 "역적"을 규탄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금종 황제 즉위 후 채경은 파면되고 령남(嶺南)으로 유배되었다. 채경은 탄저우(현재의 창사시)에서 유배 도중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6]

4. 2. 정강의 변(靖康之變)과 몰락

1125년금나라북송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사건을 정강의 변이라 한다. 이는 휘종 말기에 권력이 채경에게서 그의 아들 채유(蔡攸)에게 넘어가면서, 조정이 금나라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맹약을 여러 번 어긴 결과였다.[1]

흠종은 금나라의 침공 직전, 휘종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았다. 흠종은 채경 정권을 싫어했고, 여론을 달래기 위해 이강을 등용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강은 내시 동관과 채경 등을 유배시키고 사형에 처했으나, 채경은 사형 직전에 병사했다.[1]

5. 평가

채경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정부의 부패를 초래한 정책을 펼친 인물로 묘사된다.[1] 1125년 국자감 관리 천동(陳東)은 휘종에게 채경을 포함한 여섯 명의 "역적"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4] 흠종 즉위 후 채경은 파면되어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굶어 죽었다.[6]

그러나 채경은 뛰어난 서예가이자 문화인이었다. 소식, 황정견, 미불과 함께 송나라 4대 서예가로 불렸으나, 인품 문제로 송사대가(宋四大家)에는 그의 동족인 채양이 대신 포함되었다. 그림, 글, 시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이러한 소양은 풍류천자(風流天子) 휘종과 잘 맞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채경과 휘종의 관계, 그리고 휘종 시대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채경은 휘종과의 관계에서 부침을 겪었고, 휘종의 견제와 호감 사이에서 갈등했다. 또한, 휘종이 주도한 의례서 편찬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다.

채경의 장남 채유(蔡攸)는 휘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아버지와 대립하기도 했다.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채경과 휘종의 문화적 요소를 중시하여 휘종조(徽宗朝)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5. 1. 부정적 평가

채경은 호화로운 생활을 한 간신으로 묘사된다. 수호전에도 네 명의 간신 중 한 명으로 고구와 함께 채경의 이름이 등장한다.[12]

남송 시대의 책인 《鶴林玉露|학림옥로중국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채경의 만두 주방에서 일했다는 사람을 한 사대부가 몸종으로 들였는데, 만두를 만들지 못한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저는 만두 주방에서 파를 채 써는 사람이었으니 만두를 만들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12]

채경의 정책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정부의 부패를 초래했다.[1] 1125년 국자감 관리 천동(陳東)은 휘종 황제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여 채경을 포함한 여섯 명의 "역적"을 규탄했다. 이들은 채경, 왕부(王黼), 동 관, 주면(朱勔), 이언(李彥), 양사성(梁師成)이었으며, 채경이 그 중심인물이었다.[4] 금종 황제가 즉위한 후 채경은 관직에서 파면되고 유배되었으며, 유배지로 가는 도중 굶어 죽었다.[6]

최근에는 채경과 휘종의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후지모토 타케시(藤本猛)는 1106년 혜성 출현을 구실로 채경이 파면된 것은, 휘종이 의 제안을 받아들여 평화적인 인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채경은 요를 도발하여 전쟁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에 파면되었다는 것이다.[7]

1109년에도 채경은 재상직에서 물러났다가 2년 후에 복귀했는데, 이는 채경의 강력한 권력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채경 개인에 대한 호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휘종의 심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채경의 복귀에는 개봉에 남은 아들과 지지자들의 반격 작업도 있었다.[8] 1113년, 휘종이 주도한 의례서 『정화오례신의(政和五禮新儀)』 편찬을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채경은 봉선(封禪)을 하려고 했지만, 휘종은 봉선이 경서에 근거하지 않은 의식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8]

결과적으로 휘종은 반 채경파인 정거중·유정부(둘 다 원래는 채경 측근이었으나 대요(對遼) 외교 문제 등으로 채경에게 처벌받아 이반했던 인물)를 재상으로 기용했고, 채경은 명예직에 추대되는 형식으로 점차 실질적인 권력을 잃어갔다.[8] 채경의 장남 채유(蔡攸)는 휘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아버지와 대립하기도 했다.[9][10]

5. 2. 예술적 재능

채경은 소식, 황정견, 미불과 함께 송나라 4대 서예가로 불렸으나, 인품 문제로 송사대가(宋四大家)에는 그의 동족인 채양이 대신 포함되었다.[8] 그는 그림, 글, 시 등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러한 소양들이 풍류천자(風流天子)라 불리는 휘종과 잘 맞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채경의 서예는 이시카와 규양(石川九楊)에게 "획의 맺음, 뻗음, 획의 긋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라는 혹평을 받는 등, 현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8] 서예사(書道史)에서 서예가로 평가받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작품 평가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채양은 높이 평가받는다.[8]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채경과 휘종의 문화적 요소를 중시하여 휘종조(徽宗朝)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8] 이들은 정치적 문제와 별개로 남송(南宋)과의 연속성, 문화적 번영 등에 주목하며, 휘종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채경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3. 현대적 관점

채경은 뛰어난 서예가이자 문화인이었지만, 그의 정책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부패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에 들어서는 채경과 휘종의 관계, 그리고 휘종 시대의 문화적 번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채경은 휘종과의 관계에서 부침을 겪었다. 1106년 혜성 출현을 구실로 파면되기도 했고, 1109년에도 재상직에서 물러났다가 2년 후에 복귀했다. 이는 채경의 권력에 대한 휘종의 견제와 동시에 그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7][8]

휘종은 유교 경전에 기반한 고대 예악(禮樂) 부흥을 시도했고, 채경은 봉선(封禪)을 추진하려 했으나 휘종이 이를 반대하면서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결국 채경은 명예직으로 추대되는 형식으로 점차 실질적인 권력을 잃어갔다.[8]

채경의 장남 채유(蔡攸)는 휘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아버지와 대립하기도 했다.[9][10]

채경은 서예에 뛰어났으며, 소식, 황정견, 미불과 함께 송나라 4대 서예가(송사대가(宋の四大家))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인품 문제로 인해 채양(蔡襄)이 대신 포함되기도 한다. 그는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으며, 이러한 문화적 소양은 휘종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채경과 휘종 시대의 문화적 요소를 중시하여 휘종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6. 대중문화 속 채경

채경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간신으로 묘사된다. 수호전에도 네 명의 간신의 한 사람으로서 고구와 동시에 채경의 이름이 등장한다.[12]

남송 때 책인 鶴林玉露|학림옥로중국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채경의 만두 주방에서 일했다던 사람을 한 사대부가 몸종으로 들였는데, 정작 만두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어째서냐고 추궁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저는 만두 주방에서 파를 채써는 사람이었으니 만두를 만들 수 없습니다."[12]

소설 수호전에서도 사간신(四姦臣) 중 한 명으로 고구와 함께 이름이 언급되며, 속편인 수호후전에서는 다른 사간신들과 함께 량산박(梁山泊)의 호한(好漢)들에게 잡혀 독살당했다고 묘사되어 있어, 채경이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아홉째 아들로 강주 지주(知州) 채구 또는 채득장(채유의 동생?)이 등장하며, 심복인 황문병(黄文炳)과 함께 부하인 대종(戴宗)을 함정에 빠뜨리는 인물로 등장한다. 또한 사위로 북경 대명부 지부(知府) 양세걸(梁世傑)이 있다.[12]

참조

[1] 서적 Science in Ancient China: Researches and Reflections VARIORUM, Ashgate Publishing
[2] 서적 Emperor Huizong Harvard University Press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논문 崇寧五年正月の政変 京都大学学術出版会
[8] 논문 北宋末、封禅計画の中止―大観・政和の徽宗と蔡京 京都大学学術出版会
[9] 논문 北宋末の宣和殿 京都大学学術出版会
[10] 서적 風流天子と「君主独裁制」-北宋徽宗朝政治史の研究 京都大学学術出版会
[11] 서적 중국 역사 이야기 9 일송북
[12] 서적 鶴林玉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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