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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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카와 천황은 고산조 천황의 아들로, 1072년 20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섭정인 후지와라씨를 견제하고 친정을 목표로 했으며, 1086년 아들에게 양위한 후 원정(인세이)을 시작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중하류 귀족과 무가 출신 신하를 등용하여 전제 정치를 펼쳤고, 43년간 세 명의 천황의 치세에 걸쳐 권력을 유지했다. 시라카와 천황은 여성 편력이 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129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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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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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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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시라카와 천황 |
로마자 표기 | Shirakawa-tennō |
휘 | 사다히토(貞仁) |
별칭 | 융간(融観) (법명) 로쿠조테이(六条帝) |
추증 시호 | 시라카와인(白河院) 또는 시라카와 천황(白河天皇) |
재위 기간 | |
재위 | 1073년 1월 18일 ~ 1087년 1월 3일 |
일본식 재위 기간 | 엔큐 4년 12월 8일 ~ 오토쿠 3년 11월 26일 (음력) |
즉위 | 1073년 2월 8일 (엔큐 4년 12월 29일) |
대嘗祭 | 1074년 12월 12일 (조호 원년 11월 21일) |
연호 | 엔큐 조호 조랴쿠 에이호 오토쿠 |
수도 | 헤이안쿄 |
황궁 | 해당 사항 없음 |
정치 | |
관백 | 후지와라노 노리미치(1068년–1075년) 후지와라노 모로자네(1075년–1086년) |
태정대신 | 후지와라노 노부나가(1080년-1089년) |
생애 | |
출생 | 1053년 7월 7일 |
사망 | 1129년 7월 24일 |
사망 장소 | 산조니시덴 |
장례 | 1129년 8월 1일 (음력 7월 15일) |
묘소 | 조보다이인 능(成菩提院陵) |
원복 | 1066년 1월 7일 (지랴쿠 원년 12월 9일) |
가계 | |
아버지 | 고산조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노 시게코 |
배우자 | 후지와라노 겐시 |
자녀 | 호리카와 천황 가쿠교 법친왕 가쿠호 법친왕 데시 내친왕(이쿠호몬인) 레이시 내친왕 기타 |
기타 | |
역대 | 제72대 일본 천황 |
이전 | 고산조 천황 |
다음 | 호리카와 천황 |
2. 생애
고산조 천황의 아들로 태어나, 1073년 아버지의 양위로 제72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8] 즉위 초에는 친정(親政)을 통해 후지와라 섭관가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노력했다. 오토쿠 3년(1086년)에는 8세의 아들 호리카와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 상황이 직접 정무를 보는 이른바 '''원정'''(院政|인세이일본어)을 시작하였다.[13][15] 이후 손자인 도바 천황, 증손자인 스토쿠 천황 대에 이르기까지 약 43년간 치천의 군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원정을 지속했으며,[16] 다이지 4년(1129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1. 출생과 즉위
시라카와 천황은 아버지 고산조 천황과 어머니 후지와라노 시게코(藤原 茂子)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6] 어머니 시게코와 외조부 후지와라노 요시노부(藤原能信)는 일찍 사망했으며, 아버지 고산조가 아직 동궁(東宮, 황태자)이던 시절에는 간파쿠 후지와라 요리미치에게 냉대를 받는 등 순탄치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지랴쿠 원년(1065년) 13세의 나이로 원복(元服, 성인식)을 치렀다.[4] 지랴쿠 4년(1068년) 아버지 고산조 천황이 즉위하자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아 천황 즉위 전 이름인 '''사다히토 친왕'''(貞仁親王)이 되었다.[5] 이듬해인 엔큐 원년(1069년)에는 황태자로 책봉(立太子)되었다. 엔큐 3년(1071년)에는 훗날 간파쿠가 되는 후지와라 모로자네의 양녀인 후지와라 겐시(藤原賢子)가 동궁비로 입궁하였다.
엔큐 4년(1072년) 12월 8일(서기 1073년 1월 18일), 아버지 고산조 천황이 상황(上皇)으로서 인세이(院政)를 실시할 목적으로 양위함에 따라, 20세의 나이로 제72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8] 그러나 양위 반년 만인 엔큐 5년(1073년) 아버지 고산조 상황이 급서하면서, 시라카와 천황은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서 친정(親政)을 시작하게 되었다.
2. 2. 천황 친정과 섭관가 견제
엔큐 4년(1072년), 아버지 고산조 천황으로부터 양위받아 2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8] 이듬해인 엔큐 5년(1073년) 아버지 고산조 상황이 병사하면서 실질적인 천황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즉위 직후부터 아버지 고산조처럼 친정(親政)을 직접 하려 했으며, 당시 섭관가(摂関家)로서 실권을 쥐고 있던 후지와라씨 가문의 권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후지와라 노리미치와 모로자네를 간파쿠로 임명하면서도,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천황 중심의 친정을 목표로 삼았으며, 장원 정리 등에 힘쓰며 셋칸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쇼호 원년(1074년)에는 전 간파쿠였던 요리미치와 이치조 천황의 황후였던 조토몬인 쇼시(上東門院 彰子)가 사망했고,[9][10] 쇼호 2년(1075년)에는 간파쿠 노리미치마저 사망하면서 셋칸케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또한 셋칸케 내부에서도 간파쿠 지위를 둘러싸고 모로자네와 후지와라 노부나가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여 셋칸케의 구심력이 약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2. 3. 원정의 시작
아버지 고산조 천황은 시라카와 천황의 이복동생인 사네히토 친왕과 스케히토 친왕에게 황위를 잇게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고산조 천황이 양위하면서 사네히토 친왕을 황태제로 정하자 시라카와 천황은 이에 반발했다. 하지만 아버지 고산조 상황과 반(反) 섭관가 귀족들의 의지가 강하여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28][29] 당시 시라카와 천황은 섭관가의 후지와라 켄시를 중궁으로 맞이한 상태였기에, 반섭관가 세력의 입장에서는 그의 즉위가 달갑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그러나 오토쿠 2년(1085년), 황태제 사네히토 친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오토쿠 3년(1086년) 11월, 시라카와 천황은 스케히토 친왕이 아닌 자신의 아들인 8세의 다루히토 친왕(善仁親王, 훗날의 호리카와 천황)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바로 다음 날 양위를 단행했다.[13][15]
태상천황(상황)의 자리에 오른 시라카와는 시라카와인(白河院|시라카와인일본어)이라는 자신의 거처에서 어린 호리카와 천황을 대신해 직접 정무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본 역사에서 처음 시도된 본격적인 '''원정'''(院政|인세이일본어)의 시작이었다. 이로 인해 천황을 보좌하던 셋쇼와 간파쿠의 역할은 점차 형식적인 것으로 축소되었다.
다만, 시라카와 상황이 처음부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재위 시절부터 간파쿠였던 후지와라노 모로자네와는 협력 관계를 유지했으며, 원정 초기에는 정치 운영 방식이 기존의 섭관 정치와 비교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시라카와 상황의 권력이 공고해진 것은 이후 모로자네의 급작스러운 사망과 호리카와 천황의 이른 죽음으로 어린 손자 도바 천황이 즉위하는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부터였다.
2. 4. 원정기의 권력 강화
오토쿠 3년(1086년) 병사한 황태자 대신 8세의 아들 사네히토 친왕(훗날의 호리카와 천황)을 황태자로 삼은 다음날 양위하였다. 시라카와는 白河院|시라카와인일본어에서 상황으로서 직접 정무를 보는 이른바 '''원정'''(院政|인세이일본어)을 시작했다. 이후 셋쇼와 간바쿠는 명목상의 존재로 전락했지만, 시라카와 상황 역시 처음부터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재위 시절부터 간파쿠였던 후지와라노 모로자네와는 협조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 시기 원정은 섭관 정치와 큰 차이가 없었다. 모로자네는 상황의 인청(院廳, 원정을 위한 관청) 인사나 어소 건축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29]이러한 상황은 조토쿠 3년(1099년) 모로자네의 급서와 가쇼 2년(1107년) 호리카와 천황의 사망으로 어린 손자인 도바 천황이 즉위하면서 바뀌게 된다. 정치적으로 미숙한 젊은 후지와라노 다다자네가 섭정이 되자 권력은 자연스럽게 시라카와 상황에게 집중되었다. 섭관 정치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면서, 아버지인 시라카와 법황이 섭관을 대신해 어린 천황을 보좌하게 된 것이다. 에이큐 원년(1113년)에는 여전히 잠재적 위협으로 여겨지던 스케히토 친왕을 에이큐의 변을 통해 실각시켰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시라카와 법황은 수령(受領) 계급과 무사 출신의 측근(인근신, 院近臣)을 등용하여 전제적인 정치를 펼쳤다. 특히 서위(敍位, 관위 서임)와 제목(除目, 관직 임명) 등 인사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앉혔다. 도바 천황 즉위 후 첫 제목이었던 가쇼 3년(1108년) 정월에는 자신의 측근 다수를 수령으로 임명했는데, 이를 본 후지와라 무네타다는 그의 일기 《주유키》(中右記)에서 "지금 태상천황(시라카와 법황)의 위엄을 생각하니, 이미 주군과 같다. 특히 우리 상황은 이미 전정주(專政主, 정치를 독점하는 군주)이다"라고 평가했다.[30] 이후 인(院)의 인사 개입은 '임인절지'(院任諸事)라는 비공식 문서를 통해 천황이나 섭정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31] 무사들은 인(院)의 경호를 위해 새로 설치된 호쿠멘 부시(北面武士) 등에 임명되었다.
시라카와 법황은 섭관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힘썼다. 코와 4년(1102년)과 보안 원년(1120년) 두 차례에 걸쳐 섭정 후지와라 타다자네의 직무 권한을 정지시킨 사건(보안 원년의 정변)은 섭관가의 권위가 실추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과거 사네히토 친왕을 황태제로 삼았던 경험을 교훈 삼아, 호리카와 천황, 도바 천황, 스토쿠 천황의 이복 형제들에 대해서는 친왕선하나 신적강하를 인정하지 않고 출가시켜 황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이들을 위해 법친왕 제도를 만든 것은 일종의 위로 조치이기도 했다.
가호 3년(1096년)에는 총애하던 딸 테이시 내친왕이 병사하자 이를 계기로 출가하여 법명 '''유칸'''(融観)을 받고 법황이 되었다. 그는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호쇼지(法勝寺)를 비롯한 많은 사찰과 불상을 조성하게 했으나, 막대한 건설 비용은 수령 계급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고 관직 매매의 일종인 성공(成功)이 더욱 성행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호리카와 천황이 붕어한 후에는 손자인 도바 천황, 증손자인 스토쿠 천황까지 3대에 걸쳐 어린 천황을 대신하여 총 43년간 원정을 펼쳤다. 천황의 권력을 넘어서는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이러한 '천황가의 가장(家督)'을 후세에는 '치천의 군(治天の君)'이라고 부르게 된다. 시라카와 법황은 다이지 4년(1129년) 7월 7일, 77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2. 5. 사망
아들인 호리카와 천황, 손자인 도바 천황, 증손자인 스토쿠 천황의 3대에 걸쳐 약 43년간 원정(院政)를 펼쳤다. 이 기간 동안 천황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치천의 군으로서 군림하였으며,[16] 1129년(다이지 4년) 7월 7일(양력 7월 24일), 향년 77세로 사망하였다.3. 가계도
시라카와 천황의 아명(어릴 적 이름)은 貞仁親王|사다히토 친왕일본어이다.[4][5] 아버지는 제71대 고산조 천황이며, 어머니는 후지와라 모시( 藤原茂子|후지와라노 시게코일본어 )이다.[6]
시라카와 천황의 배우자와 자녀는 다음과 같다.[7]
지위 | 이름 (원어) | 생몰년 | 부친 | 자녀 |
---|---|---|---|---|
중궁(中宮) | 후지와라노 겐시(藤原賢子|후지와라노 켄시일본어) | 1057~1084 | 미나모토노 아키후사(源顕房일본어) (양부: 후지와라 모로자네(藤原師実일본어)) | |
뇨고(女御) | 후지와라노 미치코(藤原道子|후지와라노 미치코/도우시일본어) | 1042~1132 | 후지와라 요시나가( 藤原能長|후지와라노 요시나가일본어 ) | |
덴지(典侍) | 藤原経子|후지와라노 쓰네코일본어 | ? | 후지와라 쓰네히라( 藤原経平|후지와라노 쓰네히라일본어 ) | |
덴지(典侍) | 미나모토노 모로코( 源師子|미나모토노 모로코/시시일본어 ) | 1070~1149 | 미나모토노 아키후사( 源顕房일본어 ) | |
쇼지(掌侍) | 源盛子|미나모토노 모리코일본어 | ? | 미나모토노 요리쓰나( 源頼綱|미나모토노 요리쓰나일본어 ) | |
궁인(宮人) | 源頼子|미나모토노 요리코일본어 | ? | 미나모토노 요리쓰나( 源頼綱일본어 ) | (자녀 없음) |
궁인(宮人) | 春日殿|카스가노도노일본어 후지와라씨(藤原氏) | ? | 후지와라 모로카네( 藤原師兼|후지와라노 모로카네일본어 ) | |
궁인(宮人) | 후지와라씨(藤原氏) | ? | 후지와라 스에자네( 藤原季実|후지와라노 스에자네일본어 ) | |
궁인(宮人) | 미나모토씨(源氏) | ? | 미나모토노 아키후사( 源顕房일본어 ) | |
궁인(宮人) | 미나모토씨(源氏) | ? | 미나모토 마사나가( 源政長|미나모토노 마사나가일본어 ) | |
궁인(宮人) | 備前|비젠노일본어 미나모토씨(源氏) | ? | 미나모토노 아리무네( 源有宗|미나모토노 아리무네일본어 ) | |
궁인(宮人) | 기온노 뇨고( 祇園女御일본어 ) | ? | ? | (자녀 없음) |
궁인(宮人) | 기온노 뇨고의 여동생 | ? | ? | (자녀 없음) |
궁인(宮人) | 廊御方|로노 온카타일본어 | ? | 후지와라 미치스에( 藤原通季|후지와라노 미치스에일본어 ) | (자녀 없음) |
궁인(宮人) | 賀茂女御|카모노 뇨고일본어 宇礼志岐|우레이시키일본어 | 1070~1148 | 賀茂重助|가모 시게스케일본어 | (자녀 없음) |
궁인(宮人) | 賀茂女御|카모노 뇨고일본어 伊波比乎|이와히오일본어 | ? | 賀茂重助|가모 시게스케일본어 | (자녀 없음) |
4. 인물 및 평가
시라카와 천황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세 가지, 즉 '''천하삼불여의(天下三不如意)'''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헤이케 이야기에는 시라카와 법황이 "가모 강의 물, 스고로쿠의 주사위 눈, 히에이 산의 승병(야마부시)"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이는 이 세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인세이 시기 상황(上皇)이 누렸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재해(강물의 범람), 운명(주사위 눈), 통제하기 어려운 무력 집단(승병) 앞에서 강력한 권력자조차 어쩔 수 없는 한계와 고뇌를 보여주는 일화로 해석되기도 한다.
시라카와 천황의 치세 동안 태정관의 정점에 있었던 공경(公卿)은 다음과 같다.
직위 | 이름 | 생몰년 |
---|---|---|
관백 | 후지와라 노리미치 | 997–1075[24] |
관백 | 후지와라 모로자네 | 1042–1101[24] |
좌대신 | 후지와라 모로자네 | 1042–1101[24] |
우대신 | (정보 없음) | |
내대신 | 후지와라 모로미치 | 1062–1099[24] |
대납언 | 미나모토노 타카쿠니 | (정보 없음)[9] |
시라카와 천황은 여러 여성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그 관계는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여성 편력이나 남색(男色)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며, 기온 뇨고와 같은 하급 귀족 출신 여성을 총애하고 관계를 맺은 여성을 측근에게 하사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토쿠 천황이나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시라카와 법황의 사생아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위 | 이름 | 비고 |
---|---|---|
중궁 | 후지와라 겐시 (1057–1084) |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 후지와라 모로자네의 양녀 |
뇨고 | 후지와라 도우시 (1042–1132) | 후지와라 요시나가의 딸 |
덴지 | 후지와라 겐시 | 후지와라 노부히라의 넷째 딸, 후에 후지와라 킨사다의 아내 |
덴지 | 미나모토노 모로코 (1070–1148) |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 후에 후지와라 타다자네의 아내 |
덴지 | 미나모토노 요리코 | 미나모토노 요리쓰나의 딸 |
덴지 | 후지와라 스에자네의 딸 | |
덴지 | 카스가노츠보네 | 후지와라 모로카네의 딸, 후에 후지와라 무네미치의 아내 |
덴지 | 미나모토노 마사나가의 딸 | |
덴지 | 비젠 | 미나모토노 아리무네의 딸 |
덴지 |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 | |
뇨칸 | 낭어방 | 후지와라 미치스에의 딸, 후에 후지와라 사네요시의 아내 |
뇨칸 | 우레이시키 (가모 뇨고) (1070–1148) | 가모 시게스케의 딸 |
뇨칸 | 이와히오 (가모 뇨고) | 가모 시게스케의 딸 |
뇨칸 | 기온 뇨고 | 원래 미나모토노 유이키요 또는 미나모토노 나카무네의 아내? |
뇨칸 | 기온 뇨고의 여동생 | 후에 타이라노 타다모리의 아내 |
양녀 | 후지와라 쇼시 (다이켄몬인) | 후지와라 킨자네의 딸, 도바 천황의 중궁 |
시라카와 천황은 교토 동쪽 시라카와 지역에 '왕가의 씨족 사찰'이라 불리는 웅장한 사찰 호쇼지를 건립하고, 그 서쪽에 시라카와 북전(白河北殿)을 지어 인(院)의 어소로 삼았다. 붕어할 때 남긴 유언에 따라 스스로 '시라카와인'(白河院)이라는 추호를 정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퇴위 후에는 '시라카와 상황' 또는 '시라카와 법황'으로 불렸으며, '로쿠조인(六条院)'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다만 '로쿠조인'이라는 추호는 훗날 그의 현손인 로쿠조 천황에게 붙여졌다. 다이쇼 시대 이후 원호(院号)가 폐지되면서 현재는 주로 '시라카와 천황'으로 불린다.
4. 1. 긍정적 평가
고산조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시라카와 천황은 아버지처럼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친정을 목표로 삼았다.[8] 이를 위해 장원 정리 등을 추진하며 당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셋칸케(후지와라 가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노력했다. 쇼호 원년(1074년)과 2년(1075년)에 걸쳐 후지와라 요리미치, 조토몬인 쇼시, 후지와라 노리미치 등 셋칸케의 주요 인물들이 사망하고,[9][10] 보안 원년(1120년)에는 후지와라 타다자네의 직권을 정지시키는 등[27] 일련의 조치를 통해 셋칸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천황 중심의 정치 기반을 다졌다.1087년 아들인 호리카와 천황에게 양위한 뒤[13][15] 시라카와 천황은 표면적으로 물러났지만, 실제로는 다이죠 천황(상황)으로서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인세이(院政)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치 형태의 시작이었다.[16] 그는 상황의 거처인 '인'(院)에서 정무를 보며 명목상의 셋쇼와 간파쿠를 두었음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시라카와 상황은 자신의 아들 호리카와 천황, 손자 도바 천황, 증손자 스토쿠 천황에 이르는 3대에 걸쳐 43년간 인세이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유지했다.[16] 이러한 통치는 후대에 '치천의 군'(治天の君)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져 천황가 수장으로서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이처럼 시라카와 천황은 셋칸 정치를 약화시키고 인세이라는 독특한 통치 시스템을 확립하여 이후 일본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4. 2. 부정적 평가
시라카와 천황의 인세이는 장기간에 걸쳐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여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우선, 정치 운영 방식에서 측근을 중용하고 인사권을 남용했다는 비판이 있다. 시라카와 법황은 수령 계급과 무가 출신의 인근신을 이용하여 전제적인 정치를 펼쳤다.[30] 특히 서위(敍位)와 제목(除目)에 크게 개입하여 인사권을 장악했으며, 가쇼 3년(1108년) 정월의 제목에서는 자신의 측근 다수를 주요 구니의 수령으로 임명했다. 당시 후지와라 무네타다는 이러한 상황을 "지금 태상천황의 위엄을 생각하니, 이미 주군과 같다. 특히, 우리 상황은 이미 전정주(前程主)이다"라고 평가하며[30] 시라카와 법황의 강력한 권력 행사를 지적했다. 이러한 인사 개입은 '임인절지'(院宣旨)라는 비공식 문서를 통해 천황이나 섭정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31] 이는 공식적인 절차를 우회하여 인사권을 행사한 것으로, 정치적 공정성을 해치고 측근 세력의 발호를 조장할 수 있었다.
또한, 잦은 사찰 건립과 불사(佛事)로 인해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시라카와 법황은 불교를 깊이 신앙하여 호쇼지를 비롯한 많은 사찰과 불상을 건립했다. 이러한 대규모 사업의 재원은 주로 수령들을 통해 마련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관직을 매매하는 성공(成功) 제도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이는 지방 행정의 문란을 심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원정 과정에서 무사 계급의 성장을 촉진했다는 점도 지적된다. 시라카와 법황은 자신의 경호를 위해 호쿠멘 부시(北面武士)를 창설하고 무사들을 등용했다. 이는 당시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였을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무사들이 중앙 정치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는 훗날 일본에서 무가 정권이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외에도 셋칸케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후지와라 타다자네의 직권을 두 차례나 정지시키거나[31], 에이큐의 변을 통해 잠재적 경쟁자였던 스케히토 친왕을 실각시키는 등[31] 권력 유지를 위한 강압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자신의 자녀나 손주들의 황위 계승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법친왕 제도를 만들거나[31] 존칭 황후 제도를 시작하는 등[31] 황실 내부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5.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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