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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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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1세는 1100년부터 1135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왕으로, 윌리엄 2세의 사후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즉위 초 자유 헌장을 선포하고 스코틀랜드와의 외교적 안정을 꾀했으며, 형 로베르와의 갈등 끝에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헨리 1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와의 성직 임명권 분쟁을 겪었지만, 웨스트민스터 협약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그는 행정 및 사법 개혁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지고,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관계를 유지했다. 헨리 1세는 후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그의 사후 왕위는 조카 스티븐에게 넘어갔고, 잉글랜드는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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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매튜 파리의 《히스토리아 앙글로룸》 삽화, 1253년경. 이 초상화는 일반적이며 헨리가 묻힌 레딩 수도원 교회를 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름헨리 1세
영어 이름Henry I Beauclerc
출생1068년경
출생 장소셀비, 요크셔, 잉글랜드 추정
사망1135년 12월 1일 (향년 66–67세)
사망 장소생드니앙리옹, 노르망디, 프랑스
매장 장소레딩 수도원
통치
직위잉글랜드 왕
재위 시작1100년 8월 5일
재위 종료1135년 12월 1일
대관식1100년 8월 5일
이전 통치자윌리엄 2세 (잉글랜드)
다음 통치자스티븐 (잉글랜드)
직위2노르망디 공작
재위 시작21106년
재위 종료21135년 12월 1일
이전 통치자2로베르 2세 (노르망디)
다음 통치자2스티븐 (잉글랜드)
가족
왕가노르망디 왕조
아버지윌리엄 1세 (잉글랜드)
어머니마틸다 오브 플랑드르
배우자마틸다 오브 스코틀랜드 (1100년 결혼, 1118년 사망)
아델라이자 오브 루뱅 (1121년 결혼)
자녀신성 로마 황후 마틸다
윌리엄 애설링
로버트, 제1대 글로스터 백작
알린, 몽모렌시 여사
줄리안 드 퐁트브로
마틸다 피츠로이, 페르슈 백작부인
리처드 오브 링컨
시빌라, 스코틀랜드 여왕
레이날드 드 던스타빌, 제1대 콘월 백작
마틸다 피츠로이, 브르타뉴 공작부인
로버트 피츠이디스, 오크햄튼 영주
마틸다 피츠로이, 몽빌리에 대수녀원장
헨리 피츠로이 (1158년 사망)
풀크 피츠로이
길버트 피츠로이
기타
추가 정보(더 많은 정보...)

2. 즉위 초기 (1100년 ~ 1106년)

윌리엄 2세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자, 헨리는 3일 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71][72] 원래 왕위 계승 서열상 셋째 아들이었으므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막 돌아오고 있던 형 로베르였다.[76] 실제로 많은 귀족과 군인들은 로베르를 정당한 계승자로 생각했다.[76] 헨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즉위 직후 ''자유 헌장''을 선포했다.[81]

자유 헌장은 과세를 공평하게 매기고, 면세 대상이었던 교회의 재산을 취하거나 파는 것을 금하며, 왕실의 권력 남용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83] 또한 애닉 전투 이후 소원해졌던 스코틀랜드와의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하여 멜컴 3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함으로써 외교적 안정을 꾀하였다.[331] 그는 또한 형과의 불화로 스스로 캔터베리를 떠난 안셀무스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87]

얼마 후,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했다.[106] 대귀족들은 대부분 로베르 편에 섰지만,[112] 헨리는 수많은 봉건 귀족들과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의 지지를 바탕으로 로베르와 대등하게 싸웠다.[111] 결국 알턴 조약을 통해 타협을 이끌어냈는데,[114] 로베르는 잉글랜드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노르망디 영토와 막대한 연금을 요구했다.[114] 그러나 로베르의 통치는 노르망디 사람들의 불만을 샀고, 헨리는 1106년 프랑스의 묵인 아래 노르망디를 정벌하여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 군대를 격파하고 노르망디를 차지했다.[122] 이후 로베르는 잉글랜드로 압송되어 엄중한 감시 속에 여생을 보냈다.[122]

17세기 사본에 그려진 헨리의 대관식 모습


헨리 1세의 첫 번째 왕비,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2. 1. 왕위 계승과 자유 헌장

윌리엄 2세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자, 헨리 1세는 3일 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80] 왕위 계승 서열상 셋째 아들이었던 헨리 1세의 왕위 계승은 정당하지 못했다. 원래 왕위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는 중이던 형 로베르에게 돌아가야 했다.[76] 많은 귀족들은 로베르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여겼다.[22] 헨리 1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즉위 직후 ''자유 헌장''을 선포했다.

자유 헌장은 과세를 공평하게 하고, 면세 대상이었던 교회의 재산을 취하거나 파는 것을 금하며, 왕실 권력 남용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83] 또한, 애닉 전투 이후 소원해졌던 스코틀랜드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멜컴 3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하여 외교적 안정을 꾀했다.[331] 형과의 불화로 캔터베리를 떠났던 안셀무스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했다.[87]

얼마 후,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106] 대귀족들은 대부분 로베르의 편에 섰지만,[112] 헨리 1세는 봉건 귀족들과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의 지지를 바탕으로 로베르와 대등하게 싸웠다.[111] 결국 알턴 조약을 통해 타협안을 이끌어냈다.[114] 로베르는 잉글랜드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노르망디 영토와 연금을 요구했다.[114] 그러나 로베르의 통치는 노르망디 사람들의 불만을 샀고, 헨리 1세는 1106년 노르망디를 정벌하여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 군대를 격파하고 노르망디를 차지했다.[122] 로베르는 잉글랜드로 압송되어 감시 속에 여생을 보냈다.[122]

13세기 헨리 묘사


14세기 초 헨리 1세 묘사

2. 2. 형 로베르와의 갈등

윌리엄 2세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자, 헨리는 3일 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왕위 계승 서열상 셋째 아들이었던 헨리보다 그의 형인 노르망디 공 로베르가 정당한 계승자였으나, 로베르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많은 귀족과 군인들은 로베르를 지지했기에, 헨리는 로베르가 돌아오기 전까지 상황을 타개하고자 빠르게 움직였다.[348]

헨리는 '자유 헌장'을 선포하여 과세를 공평하게 하고, 교회의 재산을 취하거나 파는 것을 금하며, 왕실 권력 남용을 금지했다. 또한, 애닉 전투 이후 소원해진 스코틀랜드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멜컴 3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하여 외교적 안정을 꾀했다. 형과의 불화로 캔터베리를 떠났던 안셀무스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했다.

얼마 후,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대귀족들은 대부분 로베르 편에 섰지만, 헨리는 수많은 봉건 귀족들과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의 지지를 바탕으로 로베르와 대등하게 싸웠다. 결국 타협을 통해 로베르는 잉글랜드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노르망디 영토와 막대한 연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베르의 통치는 노르망디 사람들의 불만을 샀고, 헨리는 1106년 노르망디를 정벌,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 군대를 격파하고 노르망디를 차지했다. 로베르는 잉글랜드로 압송되어 감시 속에 여생을 보냈다.[349][350]

노르망디 공국을 손에 넣었지만, 앙주 백작이자 메인 백작인 풀크 5세가 프랑스 왕 루이 6세와 동맹하여 적대했다. 헨리 1세의 조카이자 로베르 2세의 아들인 기욤 클리통이 노르망디 공위를 요구하며 그들과 손을 잡았고, 로베르 드 베옘 등 노르망 귀족들과 풀크 5세의 친척인 아모리 드 몽포르까지 연합하여 헨리 1세는 궁지에 몰렸다.[351][352][353]

1112년에 반격하여 슈루즈베리 백작을 체포한 이후 상황이 호전되었고,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풀크 5세와 화목했다. 1113년 메인에서 풀크 5세에게 신하됨을 인정하고 풀크 5세의 장녀 마틸다와 아들 윌리엄 아델린의 약혼(1119년 결혼)도 맺었으며 루이 6세와도 화목하여 노르망디는 일시적으로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몽포르가 다시 헨리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루이 6세와 풀크 5세는 다시 적이 되었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7세도 개입하여 노르망디에 침공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고, 1118년에는 알랑송에서 풀크 5세에게 패배했다.[354]

같은 해 보두앵 7세가 부상으로 탈퇴하자 재기하여 풀크 5세와 다시 화목하고, 1119년 8월 20일 브레뮬 전투에서 루이 6세와 기욤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루이 6세에게 자신의 노르망디 지배와 아들 윌리엄의 신하됨을 인정받았다. 소란은 가라앉은 듯 보였지만, 이듬해인 1120년에 윌리엄이 화이트십의 난파로 사고사한 후, 풀크 5세는 1123년 차녀 시빌과 기욤을 결혼시켜 다시 적이 되었고, 노르망디에서도 세 번이나 몽포르 등 여러 귀족들의 반란이 발생했다. 헨리 1세는 이듬해인 1124년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교황에게 간청하여 시빌과 기욤의 결혼을 무효화하여 풀크 5세와의 연대를 끊었다. 루이 6세는 기욤 지지로 돌아와 공석이 된 플랑드르 백작위를 기욤에게 주었지만, 1128년 기욤이 전사함으로써 마침내 노르망디 지배는 안정을 찾았다.[355][356]

3. 종교와의 관계 (1100년 ~ 1107년)

헨리 1세의 통치 능력은 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교회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행정의 핵심이었고, 이러한 관계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178] 정복왕 윌리엄은 캔터베리 대주교 랑프랑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했으며, 랑프랑은 국왕의 측근 동료이자 고문이 되었다.[179] 헨리 역시 교회 개혁을 믿었지만, 잉글랜드에서 권력을 잡자 서임권 분쟁에 휘말렸다.[181]

이 논쟁은 새로운 주교에게 지팡이와 반지를 누가 수여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이는 왕권의 상징적 시위로 국왕이 수행했지만,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1099년에 이 관행을 비난하고, 교황청만이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성직자는 지역 세속 통치자에게 충성을 맹세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182]

안셀무스는 1100년에 우르바누스 교황의 선언을 듣고 망명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와 헨리에게 교황의 뜻을 따르겠다고 알렸다.[183] 헨리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한편으로는 상징성과 충성 맹세가 중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형인 로베르트 공작과의 싸움에서 안셀무스의 지원이 필요했다.[184] 안셀무스는 미래의 왕실 타협에 대한 모호한 보장을 대가로 양보하라는 헨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교황령을 굳게 지켰다.[185] 상황은 악화되어 안셀무스는 다시 망명을 떠났고, 헨리는 그의 영지 수입을 몰수했다. 안셀무스는 파문을 위협했고, 1105년 7월 두 사람은 마침내 해결책을 협상했다.[186]

캔터베리 대주교요크 대주교 사이의 오랜 분쟁은 안셀무스의 후임인 랄프 데스퀴어 치하에서 다시 불붙었다.[189] 캔터베리 대주교는 요크 대주교가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요크는 두 주교구가 잉글랜드 교회 내에서 독립적이며 그러한 약속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헨리는 잉글랜드가 단일 교회 행정 아래에 있도록 하기 위해 캔터베리의 수위권을 지지했지만, 교황은 요크의 주장을 선호했다.[189] 이 문제는 헨리가 요크 대주교인 터스탄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왕은 이 사건이 왕실의 통제를 벗어난 교황 법정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잡해졌다.[189] 그러나 헨리는 프랑스의 루이와의 싸움에서 교황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1119년 터스탄이 랭스 공의회에 참석하여 캔터베리에 대한 어떤 의무도 언급 없이 교황에 의해 서임되도록 허용했다.[190] 헨리는 이것이 터스탄이 이전에 했던 보장을 위반한 것이라고 믿고, 국왕과 대주교가 다음 해에 협상된 해결책에 도달할 때까지 그를 잉글랜드에서 추방했다.[191]

1125년 이후, 헨리는 더 개혁적인 견해를 가진 후보자들을 교회의 고위직에 임명하기 시작하면서 안정성이 약간 변화했고, 이 세대의 영향은 헨리 사후 수년 동안 느껴졌다.[197]

당시 다른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헨리 1세는 교회에 기부하고 여러 종교 공동체를 후원했지만, 당대의 역사가들은 그를 특별히 경건한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198] 그의 개인적인 신앙은 삶의 과정에서 발전했을 수 있다. 헨리 1세는 항상 종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말년에는 영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199] 그의 사고방식의 주요 변화는 1120년 아들 윌리엄 아델린이 사망했을 때와 1129년 딸의 결혼이 붕괴 직전에 있었을 때 발생했을 것이다.[200]

종교 개혁의 지지자로서 헨리 1세는 교회 내 개혁 집단에 기부했다.[202] 그는 클뤼니 수도회의 지지자였으며,[203] 클뤼니 수도원과 리딩 수도원에 후하게 기부했다.[203] 1121년에 건설이 시작된 리딩 수도원에는 풍부한 토지와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하여 그의 왕조를 상징하는 곳으로 만들었다.[204] 그는 또한 사제 공동체를 아우구스티누스회 정규회원으로 개종시키고, 나병원을 설립하고, 수녀원을 확장하며, 사비뉴회와 티로넨시스회와 같은 수도회를 장려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205] 그는 열렬한 유물 수집가였으며, 1118년 비잔틴 유물을 수집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그중 일부는 리딩 수도원에 기증되었다.[206]

2008년 리딩 수도원의 폐허가 된 장식 회랑


그레고리우스 개혁에 관한 성직자 결혼과 성직매매 단속에 대해, 성직자 결혼 문제는 벌금을 부과하고 그 벌금을 노르망디 전쟁에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며, 엄격하게 단속하지 않았다. 헨리 1세의 측근이자 대법관 겸 솔즈베리 주교(로저 오브 솔즈베리)도 결혼한 상태였다.[366]

성직 매매 문제는, 속인에 의한 성직 임명이 문제가 된 대륙 여러 나라의 상황을 고려하여, 주교 임명 시 왕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조건만을 확보했다.[367] 이전 왕들과 달리, 수도승 출신 주교보다 속인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자신의 칙령 발급 기관(대개는 궁정 예배당 사제, 채플린)에서 일한 성직자들을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의 주교로 이동시켜 그 공로에 보답했다.[368]

3. 1. 성직 임명권 분쟁

형 윌리엄 2세와 달리 헨리 1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와 초기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곧 성직 임명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주교직과 수도원장직이 막대한 부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고 있던 헨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임명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 파스칼 2세는 이를 거절하고, 세속 군주가 성직자에게 봉토를 주는 것과 성직자가 군주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것을 금지했다. 안셀무스는 헨리가 임명한 성직자 축성을 거부하고 왕에 대한 충성 서약도 거부하여, 결국 두 번째로 캔터베리를 떠나 로마로 돌아갔다.[181]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의 인장


이러한 갈등은 왕, 교황, 대주교 사이에 수많은 편지와 회유, 협박이 오간 후 1107년 탱슈브레 전투 직전 웨스트민스터 협약으로 해결되었다. 헨리 1세는 성직 임명권을 포기했지만, 주교와 수도원장은 축성 전에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186] 이는 훗날 보름스 협약의 본보기가 되었다.

서임권 분쟁 이후에도 헨리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주교 및 대주교 선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92] 그는 많은 관리들을 주교직에 임명했고, 그의 관리들 중 일부는 주교관을 기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193] 헨리는 특히 솔즈베리의 로저와 같이 더 폭넓은 주교들을 고문으로 활용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에 주로 의존하던 이전의 전통을 깨뜨렸다.[195]

3. 2. 웨스트민스터 협약

형과 달리 헨리 1세는 안셀무스와 초기에는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얼마 후부터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는데, 그 이유는 성직 임명권 때문이었다. 주교직과 수도원장직이 막대한 부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고 있던 헨리는 수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임명권을 부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교황 파스칼 2세는 그의 요청을 매번 거절하였으며 이후에는 아예 세속 군주가 성직자들에게 봉토를 하사하는 것과 성직자들이 군주들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것을 금지해버렸다. 안셀무스는 이에 따라 헨리로부터 임명받은 성직자들에 대한 축성을 거부하였으며 왕에 대한 충성 서약 역시 거부하였다. 결국 안셀무스는 두 번째로 캔터베리를 떠나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마찰은 왕과 교황 그리고 대주교들 사이에 수많은 편지와 회유, 협박이 오간 이후 1107년 탱슈브레 전투 직전에 웨스트민스터 협약으로 타결되었는데, 이로 인해 왕은 성직 임명권을 포기하였으나 주교와 수도원장들은 축성 전에 왕에 대하여 경의를 표시해야 하였다. 이는 후에 있을 보름스 협약의 본보기가 되었다.

4. 통치와 정책

헨리 1세는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으며, 즉위 후 마그나 카르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Charter of Liberties|대관헌장영어을 제정했다.[359] 이 헌장을 통해 헨리 1세는 자의적인 권력에 침해되지 않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전임 왕 윌리엄 2세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약속했다. 또한 성직 매매와 부당 징세를 중단하고, 에드워드 참회왕 시대의 법을 부활 및 준수할 것을 선언했다.[360]

헨리 1세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그리고 영국 해협 양안을 장악하면서 잉글랜드를 자주 비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왕이 없는 잉글랜드를 통치하기 위한 행정 기구를 정비했다.[360] 1100년 11월에는 색슨 왕 에드먼드 2세의 증손녀인 마틸다와 결혼하여 노르만인과 앵글로색슨인의 화해를 도모했다.[363]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와도 화해하고, 1107년 런던 협약을 통해 윌리엄 2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교회와의 서임권 투쟁 문제도 해결했다.[363][364]

웨일스에 대해서는 지배력 강화를 꾀했으며, 직할령을 만들고 웨일스 내 잉글랜드 영주들을 봉건제로 종속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심복에게 영토를 주는 한편, 반항적인 영주는 토벌하는 강경책과 온건책을 병행하여 웨일스를 종속시키려 했다. 웨일스 제후들은 세력을 확장하면서도 헨리 1세와 싸우지 않아, 웨일스는 당분간 큰 전쟁이나 반란이 없었다.[365]

스코틀랜드에도 간섭하여 칼라일에 Diocese of Carlisle|label=칼라일 교구영어를 설치하고, 의형제인 알렉산더 1세에게 서녀 시빌라를 시집보내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124년 알렉산더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그의 동생 데이비드 1세와도 친분을 쌓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365]

4. 1. 행정 및 사법 개혁

헨리 1세는 잉글랜드의 행정과 관료 체계를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순회법정 제도를 시행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헨리 1세는 윌리엄 루퍼스로부터 잉글랜드 왕국을 물려받아 종주권을 행사하고, 국경 분쟁이 잦았던 노르망디 공국을 통치했다. 그는 왕실 사법 제도를 크게 확장했다.[165] 영국에서는 기존의 앵글로색슨 사법 제도와 지방 정부, 세금 제도를 활용하면서도 중앙 집권적인 정부 기관을 강화했다.[167] 1110년 이후 솔즈베리의 로저는 왕실 재무부를 발전시켜 카운티의 보안관으로부터 수입을 징수하고 감사했다.[168] 헨리 1세 시대에는 순회 판사들이 전국을 돌며 순회 재판소를 관리했고, 더 많은 법률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었다.[169] 왕실 사법 확대로 벌금과 수수료 수입이 증가했다.[170] 1130년에는 왕실 지출을 기록한 파이프롤이 등장했다.[171] 그는 1107년, 1108년, 1125년에 화폐 개혁을 단행하고, 통화 가치를 떨어뜨린 주화 제조업자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172] 노르망디에서는 1106년 이후 노르망디 판사들과 영국과 유사한 재무부 시스템을 통해 법과 질서를 회복했다.[174] 노르망디 제도는 헨리 1세 시대에 규모와 범위가 확장되었지만, 영국만큼 빠르지는 않았다.[175] 헨리 1세의 시스템을 운영했던 많은 관리들은 "신흥 인물"로 불렸는데, 이들은 비교적 낮은 신분에서 관리, 사법, 왕실 수입 관리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176]

헨리 1세는 즉위 후 대헌장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대관헌장을 제정하고 순회 재판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여 "정의의 사자"라고 불릴 만큼 영토를 잘 다스렸다고 평가받는다.[359] 대관헌장은 헨리 1세가 자의적인 권력에 침해되지 않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전임 윌리엄 2세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맹세하며, 성직 매매와 부당 징세를 중단하고, 에드워드 참회왕 시대의 법을 부활 및 준수할 것을 선언한 문서이다.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영국 해협 양안을 장악하면서 잉글랜드를 자주 비우게 되자, 왕이 없는 잉글랜드를 통치하기 위한 행정 기구를 정비했다.[360]

왕의 지출 관리 조직인 궁정 재무실과 문서 작성 조직인 상서부, 장관인 상서부 장관(대법관), 왕의 재산 및 기밀 문서를 관리하는 보물창고를 확충하고, 수입 관리 조직인 익스체커(재무부의 원형)가 지방 재정을 담당했다. 국왕 부재 시 행정 최고 책임자인 최고 법관이 행정, 재정, 사법을 담당하고, 국왕의 장기 부재 시에는 최고 법관과 상서부 장관, 보물창고 장관이 대리 통치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재판 조직인 큐리아 레지스에 상임 재판관을 추가하고, 지방 순회 및 왕령 경영 상황 조사, 주민 소송 처리를 담당하는 순회 재판도 정례화했다. 이러한 기반 구축 덕분에 잉글랜드는 안정을 찾았고, 1106년 이후 헨리 1세는 치세의 절반을 노르망디에서 보낼 수 있었다.[361][362]

4. 2. 대외 관계

헨리 1세는 노르망디를 둘러싸고 프랑스, 앙주, 플랑드르와 같은 주변국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1103년, 헨리는 자신의 서출 딸들을 브뢰퇴유의 외스타슈, 페르슈 백작 로트루 3세와 각각 결혼시켜 노르망디 동맹을 강화했다.[123][124] 특히 로트루 3세와의 결혼은 노르망디 국경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124]

1104년, 헨리는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가 벨렘의 로베르와 동맹을 맺자, 이를 조약 위반으로 규탄하고 노르망디의 돔프롱으로 건너가 로베르 2세와 대립하는 귀족들을 만났다.[127] 1105년, 헨리는 로베르 피츠해먼과 군대를 노르망디로 보내 로베르 2세와의 갈등을 유발했다.[130] 피츠해먼이 포로로 잡히자, 헨리는 이를 구실로 노르망디를 침공하여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다.[129] 그는 노르망디 서부를 점령하고 바예우를 불태웠으며, 캉과 팔레즈를 점령했다.[132][133]

1106년, 헨리는 다시 노르망디를 침공하여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 2세와 벨렘의 로베르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36][137][138] 이 전투에서 헨리의 예비대는 적의 측면을 공격하여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141] 로베르 2세는 포로로 잡혔고, 헨리는 노르망디의 남은 저항을 진압했다.[141][142] 헨리는 노르망디의 법과 관습을 재확인하고 귀족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았다.[143]

2008년 노르망디의 탱슈브레 마을; 1106년 탱슈브레 전투가 벌어진 곳


1108년 이후, 노르망디는 프랑스, 앙주, 플랑드르로부터 더욱 큰 위협에 직면했다.[207] 프랑스 왕 루이 6세는 헨리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하며 군사적 압박을 가했고, 앙주의 풀크 5세는 헨리를 봉건적 군주로 인정하지 않고 루이 6세와 동맹을 맺었다.[208][209][212]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도 잠시 이 동맹에 참여했다.[213]

헨리의 라이벌 루이 6세의 데니어 화폐
]헨리는 자신의 지지자 네트워크를 확장하여 이러한 위협에 대응했다.[219] 그는 1110년경 윌리엄 클리토를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112년에는 벨렘의 로베르를 체포하여 투옥했다.[221][224] 1113년, 헨리는 루이 6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 메인, 벨렘, 브르타뉴에 대한 자신의 영주권을 확인받았다.[227]

한편, 헨리는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와의 관계도 관리했다. 1114년, 헨리는 웨일스에 세 개의 군대를 파병하여 평화를 이끌어냈다.[229] 그는 웨일스 국경 지대를 강화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231] 스코틀랜드와는 알렉산더 1세 및 데이비드 1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었다.[365]

1106년에는 노르망디에 침공하여 9월 28일 탱슈브레 전투에서 승리하여 형 로베르 2세를 사로잡아 웨일스의 카디프 성에 감금하고 눈을 멀게 한 뒤 1134년 죽을 때까지 가두어 노르망디 공국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헨리가 손에 넣은 노르망디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노르망디 공국의 숙적이자 앙주 백작 겸 메인 백작인 풀크 5세가 프랑스 왕 루이 6세와 동맹을 맺어 적대했기 때문이다. 헨리 1세의 조카이자 로베르 2세의 아들인 기욤 클리통(윌리엄 클리토)이 노르망디 공위를 요구하며 그들과 손을 잡았고, 기욤을 지지하며 헨리 1세에 반항하는 슈루즈베리 백작 로베르 드 베렘 등 노르망 귀족들과 풀크 5세의 친척인 아모리 드 몽포르까지 연합하여 헨리 1세는 궁지에 몰렸다.

1112년에 반격하여 슈루즈베리 백작을 체포한 이후로는 상황이 호전되었고,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풀크 5세와 화목했다. 1113년 메인에서 풀크 5세에게 신하됨을 인정받고 풀크 5세의 장녀 마틸다와 아들 윌리엄 아델린의 약혼(1119년 결혼)도 맺었으며, 루이 6세와도 화목하여 노르망디는 일시적으로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몽포르가 다시 헨리 1세에 반란을 일으키자 루이 6세와 풀크 5세는 다시 적이 되었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7세도 개입하여 노르망디에 침공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고, 1118년에는 알랑송에서 풀크 5세에게 패배했다.

같은 해 보두앵 7세가 부상으로 탈퇴하자 재기하여 풀크 5세와 다시 화목하고, 1119년 8월 20일 브레묄 전투에서 루이 6세와 기욤 클리통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루이 6세에게 자신의 노르망디 지배와 아들 윌리엄의 신하됨을 인정받았다. 소란은 가라앉은 듯 보였지만, 이듬해인 1120년에 윌리엄이 화이트십 침몰 사고로 사망한 후, 풀크 5세는 1123년 차녀 시빌과 기욤을 결혼시켜 다시 적이 되었고, 노르망디에서도 몽포르 등 여러 귀족들의 반란이 세 번이나 발생했다. 헨리 1세는 이듬해인 1124년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교황에게 간청하여 시빌과 기욤의 결혼을 무효화하여 풀크 5세와의 연대를 끊었다. 루이 6세는 기욤 지지로 돌아와 공석이 된 플랑드르 백작위를 기욤에게 주었지만, 1128년 기욤이 전사함으로써 마침내 노르망디 지배는 안정을 찾았다.

이후 헨리 1세는 풀크 5세와의 화목에 힘썼고, 같은 해 풀크 5세의 적장자이자 마틸다의 남동생인 제프리 4세와 헨리 1세의 딸이자 윌리엄의 누이인 마틸다를 결혼시켰다. 1133년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앙리가 훗날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로서 앙주 가문을 창시한다. (풀크 5세는 결혼한 아들에게 앙주를 넘겨주고 예루살렘 왕국으로 향해 공주 멜리산드와 재혼하여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된다).

5. 후계 문제 (1120년 ~ 1135년)

헨리 1세는 아들 윌리엄 아델린을 노르망디 공작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115년 노르망디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았고, 프랑스루이 6세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여 윌리엄의 공작위 계승권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루이 6세는 플랑드르 백작 볼드윈의 지원을 받아 윌리엄 클리토를 정당한 후계자로 선포했다.[233]

테오발드 드 블루아를 지원하기 위해 헨리 1세가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로 돌아오면서 전쟁이 발발했다.[234] 1116년, 프랑스, 플랑드르, 앙주 군이 노르망디를 약탈하면서 헨리 1세는 수세에 몰렸다.[236] 몽포르의 아모리 3세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헨리 1세에게 반기를 들었고, 암살 음모까지 있었다.[236]

헨리 1세는 반란 귀족들을 토벌하고 테오발드와의 동맹을 강화하며 대응했다.[238] 1118년 9월,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볼드윈이 사망하면서 북동쪽에서의 압력이 완화되었다.[239] 1119년 초, 브레퇴유의 유스타스와 헨리 1세의 딸 줄리아나가 반란에 가담하려 했으나, 헨리 1세는 브레퇴유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부부의 노르망디 영토 대부분을 몰수했다.[245]

1119년 5월, 헨리 1세는 윌리엄 아델린과 풀크의 딸 마틸다의 결혼, 그리고 거액의 돈을 약속하며 풀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246] 풀크가 레반트로 떠난 후, 헨리 1세는 남은 적들을 진압하는 데 집중했다. 그해 여름, 헨리 1세는 브레뮬 전투에서 루이 6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했다.[248]

전쟁은 서서히 종식되었고, 1120년 6월 헨리 1세와 루이 6세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 윌리엄 아델린은 루이 6세에게 충성 맹세를 했고, 루이 6세는 윌리엄의 공작위 계승권을 확인했다.[257]

하지만 1120년 11월 25일, 백선(White Ship) 침몰로 헨리 1세의 왕위 계승 계획은 혼란에 빠졌다.[258] 헨리 1세는 아들을 잃고 새로운 왕비 아델라이스 드 루방과 결혼하여 새로운 왕자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264]

앙주와의 동맹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풀크는 헨리 1세에게 마틸다와 지참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고,[268] 헨리 1세가 거절하자 풀크는 딸 시빌라 드 앙주를 윌리엄 클리토와 결혼시키고 메인을 주었다.[270] 1123년, 노르망디-앙주 국경을 따라 반란이 일어났고, 헨리 1세는 직접 개입하여 진압했다.[273] 그는 교황 칼릭스투스 2세에게 돈을 지불하여 윌리엄 클리토와 시빌라의 결혼을 무효화했다.[277]

헨리 1세와 아델리자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헨리는 조카들 중에서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다. 스티븐 드 블루아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결국 딸 마틸다를 후계자로 선택했다.[281] 1125년 마틸다의 남편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자, 헨리 1세는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여 후계자로 선언하고 귀족들에게 맹세를 받았다.[286]

5. 1. 윌리엄 아델린의 죽음과 마틸다의 후계자 지명

1120년 11월, 헨리 1세의 외아들 윌리엄 아델린이 백선(White Ship) 침몰 사고로 사망했다.[373] 이 사고로 헨리 1세는 적자(嫡子)를 잃었고, 법정추정상속인은 딸인 마틸다가 되었다.[373] 112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자 헨리 1세는 왕비였던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주요 귀족들 앞에서 마틸다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다.[374]

하지만 당시에는 여왕의 전례가 없었고, 앙주 백작 가문에 대한 귀족들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에 마틸다에 대한 지지는 미약했다.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틸다는 앙주 백작 풀크의 아들인 조프루아와 결혼하여 헨리 2세를 낳았다. 결국 헨리 1세가 사망한 후, 왕의 조카였던 블루아의 스티븐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14세기 초엽의 묘사, 1120년 11월 25일 바르플뢰르에서 발생한 백선 침몰

5. 2. 마틸다와 제프리 플랜태저넷의 결혼

1120년 11월, 헨리 1세의 외아들 윌리엄이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는 사고로 익사하였다.[373] 헨리 1세에게는 다른 적자가 없었으므로, 법정추정상속인은 딸인 마틸다가 되었다. 1125년 독일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죽자 왕비였던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불렀고, 주요 귀족들 앞에서 그녀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다.[374] 그녀는 이후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앙주 백작 풀크의 아들인 조프루아와 결혼하여 헨리 2세를 낳게 된다.

5. 3. 헨리 1세의 죽음과 왕위 계승 분쟁

헨리 1세는 외아들 윌리엄이 1120년 배 침몰 사고로 사망하면서 후계자 문제에 직면했다.[373] 다른 적자가 없었기에 딸 마틸다법정추정상속인으로 삼고, 1125년 남편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자 그녀를 잉글랜드로 불러 귀족들에게 후계자로 인정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374] 마틸다는 앙주 백작 풀크의 아들 조프루아와 결혼하여 헨리 2세를 낳았다.

하지만 여왕의 전례가 없었고, 앙주 백작 가문에 대한 반감으로 귀족들의 지지는 미약했다. 헨리 1세 사후, 조카인 블루아의 스티븐이 왕위를 찬탈하며 갈등이 시작되었다.

말년에 헨리 1세와 마틸다, 제프리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135년 마틸다 부부는 노르망디의 왕실 성들을 요구하며 헨리 사후를 대비하려 했으나, 헨리는 제프리의 권력 장악을 우려해 거절했다.[302][303] 빌리엄 3세가 이끄는 노르망디 남부 귀족들의 반란에 마틸다 부부가 개입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다.[304]

1135년 가을, 헨리 1세는 군사 작전을 벌이다가 11월 리옹라포레에서 사냥을 즐기던 중 병에 걸렸다.[305] 헨리에 따르면, 그는 칠성장어를 너무 많이 먹어 병이 났고, 일주일 동안 상태가 악화되었다.[306] 헨리 1세는 1135년 12월 1일 사망했고, 시신은 리딩 수도원에 안치되었다.[309]

헨리 1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제프리와 마틸다는 앙주에서 전투 중이었고, 많은 귀족들은 헨리의 장례 때까지 노르망디에 머물러야 했다.[310] 노르망디 귀족들은 블루아의 테오발드를 왕으로 논의했으나,[311] 스티븐이 잉글랜드로 건너와 휴그 빅엇의 증언을 바탕으로,[313] 12월 22일 왕위에 올랐다.[314] 마틸다는 이에 반발하여 1135년부터 1153년까지 무정부 시대로 알려진 내전을 시작했다.[3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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