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영담
1. 개요
어영담은 1532년에 태어나 1594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1564년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 사천현감, 무장현감, 광양현감 등을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휘하에서 옥포해전, 한산도 해전 등 주요 해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영화, 드라마 등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어영담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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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사망 -
장 보댕
장 보댕은 프랑스의 법학자, 정치철학자, 경제학자이자 저술가로서, 『국가론』에서 제시한 주권 개념으로 절대주의 이론 발전에 기여했으나, 마녀사냥에 대한 견해와 저술은 비판받으며 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1596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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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종 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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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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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한국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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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16세기 한국 사람 -
정여립
2. 생애
어영담은 1532년(중종 27년)에 태어나 1594년(선조 27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한 장수 중 한 명으로, 여러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어영담의 주요 이력은 다음과 같다.
| | 내용 | |
|---|---|
| 1532년 | 출생 |
| 1564년 | 무과 급제 (병과 3등, 전체 11등) |
| 고흥군 점안면 여도 만호 역임 (과거 급제 이전) | |
| 1580년 12월 ~ 1582년 2월 | 사천 현감 역임 |
| 1584년 2월 ~ 1585년 3월 | 무장 현감 역임 |
| 1591년 3월 | 광양 현감 부임 |
| 임진왜란 이전 | 창성 부사 역임 |
| 임진왜란 발발 | 옥포 해전, 합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해전 등 주요 해전 참전 |
| 웅천 해전 참전 중 임발영의 모함으로 파직 위기에 처했으나, 광양 백성들의 구명 운동과 이순신의 도움으로 복직 | |
| 윤두수 등에 의해 군량미 문제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이순신의 장계로 수군 조방장 임명 | |
| 1594년 | 한산도에서 전염병으로 사망 |
어영담은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임발영과 윤두수 등의 모함으로 인해 두 번이나 파직되는 등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을 했다.
2.1. 출생 및 가계
어영담은 1532년(중종 27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자(字)는 경유(景游)이다. 경상도 함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내금위 적순부위(정7품) 충무위 부사맹을 지낸 어심(魚深)이다. 과거 급제 문서인 '방목'을 통해 출생년도가 1532년으로 확정되었다.
어영담은 아들 어응해와 어응린을 두었으나, 이들이 아들을 출산하지 못해 대를 잇지 못했다.
2.2. 관직 생활
어영담은 1564년(명종 19년) 무과에 병과 3등(전체 11등)으로 합격했다. 과거 급제 이전에는 음직으로 고흥군 점안면 여도 만호를 지냈다.
1580년 12월부터 1582년 2월까지 사천현감, 1584년 2월부터 1585년 3월까지 무장현감을 역임했고, 1591년 3월에는 광양현감에 부임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창성부사를 지냈다. 그 밖에도 여러 군직(軍職)을 지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휘하에서 옥포 해전부터 1594년 제2차 당항포 해전까지 주요 해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웅천 해전에 출전했을 때 임발영이 광양현의 군량미 문제를 이유로 어영담을 파직시키려 했으나, 김두 등 광양 지역민 126명의 구명 운동과 이순신의 요청으로 광양현감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윤두수 등에 의해 군량미 장부 외 저장 문제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이순신의 장계로 수군조방장이 되었다.
2.3. 임진왜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어영담은 광양 현감으로서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 해전, 합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해전 등 주요 해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이순신의 중부장(中部將)으로 활약하며 왜선 42척을 격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웅천 전투에 참전했을 때, 독운어사 임발영이 광양현의 군량미 600석을 문제 삼아 어영담을 파직시키려 했다. 그러나 김두 등 126명의 광양 백성들이 연서명하여 구명운동을 벌였고, 이순신 또한 어영담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광양현감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윤두수 등에 의해 군량미 장부 외 저장 문제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이순신의 장계로 수군조방장에 임명되었다.
2.4. 사망
魚泳潭중국어은 1594년 한산도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난중일기에는 "1594년 4월 초9일(정사)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비가 쏟아졌다. 어 조방장(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라는 기록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이충무공의 안타까움이 기록되어 있다.
3. 평가
이순신과의 관계, 백성들의 평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어영담은 임진왜란 시기 뛰어난 활약을 펼친 장수이자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어영담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어영담이 이순신에게 단순한 부하 장수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이자 전우였음을 보여준다.
임발영이 어영담을 파직시키려 했을 때, 김두 등 126명의 광양 지역민들이 연서를 통해 어영담 구명운동에 나섰다는 기록은 그가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군량 준비 시 백성을 위한 구호용 종자와 식량을 별도로 보관했다는 점은 그의 애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어영담은 옥포 해전부터 1594년 제2차 당항포 해전까지 주요 해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이순신의 휘하에서 중부장(中部將)으로 활약하며 적선을 격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군사적 업적은 어영담이 유능한 장수였음을 증명한다.
4. 대중문화
어영담을 다룬 영화, 드라마 등 대중문화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