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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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포 해전은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부산포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전투이다. 한산도 대첩 이후 일본군의 전략 변화에 대응하여, 조선 수군은 부산을 일본군의 보급 거점으로 보고 공격을 감행했다. 1592년 8월, 이순신은 전라 · 경상 수군을 통합하여 부산포로 진격, 일본 함선 400여 척을 공격하여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전투 결과에 대해서는, 조선 측은 승리로 평가하며 일본군의 해상 통제권 상실을 주장하는 반면, 일부 일본 측은 전략적 승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수의 역사적 자료는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하며, 일본 제국 시대와 현대 일본의 역사학자들 또한 조선의 승리로 평가한다. 이 전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쟁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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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분쟁 | 임진왜란 |
날짜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장소 | 조선 경상도 부산포 (현재 부산항 (동구)) |
결과 | 조선 수군의 승리, 극심한 피해를 입은 일본 수군의 제해권 완전 상실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수군 |
교전국 2 | 일본 수군 |
지휘관 | |
조선 | 이순신, 원균, 이억기, 정운 (전사), 권준, 배흥립, 송희립, 무의공 이순신, 나대용, 이운룡, 우치적, 신호, 황세득, 김완, 기효근, 이영남, 어영담, 이언량 |
일본 | 도요토미 히데카쓰, 도도 다카토라, 구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시마즈 요시히로, 구루시마 미치후사 |
병력 규모 | |
조선 | 전선 170여 척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
일본 | 전선 470여 척, 병력 70,000명 |
피해 규모 | |
조선 | 정운 등 6명 전사, 25명 부상, 소수 판옥선 파손 (전투에는 지장 없음) |
일본 | 전선 128척 격침 |
관련 전투 | |
관련 전역 | 제독 이순신의 4차 해전 |
전투 목록 | 부산포 (부산항) |
2. 배경
이순신의 함대가 7월 8일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후, 일본군은 전쟁 전략을 변경해야 했다. 원래 일본군의 전략은 더 많은 육군 병력과 물자를 한반도 북부로 해상 수송한 다음 명나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이 실패하면서 조선 북부 지방의 일본군은 굶주림과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군수 물자 수송로를 확보해야 했다. 다른 계획은 육로로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것이었지만, 이 경로는 의병에 의해 봉쇄되었다. 많은 한국 민간인과 승려들이 자발적인 군대를 구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했다.[12]
한산도 대첩에서 패배한 후 일본 수군은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8월 중순경 가토 기요마사 등의 부대는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에 집결시키고 군수 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당시 부산포에는 도요토미 히데카쓰군 주력 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수군 8,000여 명이 함선 430여 척을 보유하고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13]
부산포 해전의 결과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존재한다.
문록의 역 개전 당시 일본군은 제일 먼저 부산에 상륙하여 점령했다(부산진 전투). 그 이후 히젠나고야에서 이키・쓰시마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루트가 일본군의 해상 교통로가 되었고, 보급 물자는 일단 부산에 하역된 후 육로로 내륙에 수송되었다. 다시 말해 부산은 일본군에게 보급 연락상의 근본적인 거점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 수군에서는 이순신이 "부산은 적(일본군)의 근본이다. 나아가 이를 함락시키면, 적(일본군)은 반드시 근거지를 잃을 것이다.[45]"라고 부산 점령 탈환을 여러 장수들에게 선언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이는 이순신 직속의 전라좌수영에 이억기 지휘하의 전라우수영과 원균 지휘하의 경상우수영을 더하는, 실질적으로 조선 수군의 총력을 결집한 작전이었다.
3. 경과
조선은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경상우도순찰사 김수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해상 도주 통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순신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도수군절도사(경상우수사) 원균 (8월 25일 합류)의 함대와 합류하여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총 166척으로 통합 함대를 편성하여 출진하였다. 이순신은 부산포로 향하던 중 서평포, 다대포, 절영도 등에서 일본군 전선 24척을 격파했다.[14]
부산포 앞바다의 절영도(현재의 영도구)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 수군 선단 사백여 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육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군은 장사진(長蛇陣),[15] 즉 "긴 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에 압도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육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16]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활을 쏘아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각종 총통 사격을 집중하였다.[18]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였고 지리 조건도 일본군에게 유리했지만, 일본군은 이순신에게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옥포 해전의 도도 다카토라, 한산도 대첩의 와키자카 야스하루, 명량 해전의 구루시마 미치후사, 노량 해전의 시마즈 요시히로처럼 전 함대를 동원해 조선 수군을 공격하지 않고, 상당수 병력이 해안과 산 언덕에 숨어 조총과 활 공격을 했다는 것은 해전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이다.
부산포 해안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18] 이순신은 육지로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근접 백병전에서 조선군의 기량이 일본군에 비해 불리했으며, 많이 지쳤고, 병력 수도 육전을 하기에는 너무 열세였다. 또 조선 수군은 기병이 없었지만, 일본군은 경험 많은 기병을 보유한 것도 이유였다. 그 와중에도 조선군은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언덕에 활을 쏴 왜군 3,800명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아끼던 부하였던 정운을 잃었다.[19]
문록 원년(1592년) 8월 23일(명력 24일) 이순신, 이억기 등은 수군을 이끌고 여수를 출발, 다음날 사량해협에서 원균과 합류, 전선 74척, 협선 92척으로 진격하여, 이날 당포에, 26일에는 율포에, 27일에는 천성포에 이르렀다. 28일(명력 29일) 동래의 장림포를 정찰하여 낙동강 상류(김해 및 구포 부근)에 일본 배가 많이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슬러 올라가려 했으나, 강 입구가 좁아 전투에 불리하여 중단했다.
29일(명력 9월 1일) 다대포, 서평포 앞바다를 지나 절영도를 거쳐 부산포에 이르자, 일본군의 함선이 정박해 있는 것이 400여 척이나 되었고, 조선 배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함상, 성상, 산상에서 쇠뇌를 쏘아 방어했다. 일본 측은 정박 중이던 선박에 피해를 입었다. 조선 수군에서는 녹도 만호 정운을 비롯하여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순신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병력을 수습하여 퇴각, 가덕도로 갔다가, 다시 좌수영으로 돌아갔다.
4. 전투 결과에 대한 논쟁
일부 일본 측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일본 다이묘 간의 군사 서신을 언급하며, 이 해전이 일본의 전략적 승리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해전 이후 조선 수군이 이듬해 2월까지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고, 일본의 보급로가 끊긴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23] 또한,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언급하며, 부산이 일본군에게 안전한 보급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4. 1. 주요 사료의 관점
한국, 일본, 영국, 미국 역사학자들은 부산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했고 일본군이 조선 주변 해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고 평가한다. 체스터 W. 니미츠도 이 해전을 조선의 결정적인 승리로 언급하며, 일본군이 해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되었다고 말했다.[21]
조선왕조실록은 이 해전을 다음과 같이 전략적 실패로 요약했다.[22]
> 이순신과 그의 함대는 적군이 주둔하고 있는 부산을 공격했으나 격파하지 못했다. 일본 군인들이 해상 전투에서 자주 패배했기 때문에, 그들은 부산과 동래의 요새에 모여 해군 함선을 지켰다. 이순신과 원균은 많은 수의 배를 동원하여 부산만을 공격했지만, 일본 군인들은 싸우지 않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르케부스를 쐈다. 그리하여 조선 수병들은 상륙할 수 없었고, 400여 척의 빈 배를 불태운 후 이순신의 함대는 퇴각했다. 녹도만호 정운은 치열한 전투 중에 총에 맞아 사망했고, 이순신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석해했다.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의 공식 역사와 일본 다이묘 간의 군사 서신을 언급하며 그 결과를 일본의 전략적 승리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조선 수군이 이 해전 이후 다음 해 2월까지 뚜렷한 활동을 중단했고, 일본의 보급로가 끊긴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23]
그러나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 군사 보고서(현장 지휘관이 부산에서 작성), 영국 역사책, 미국 역사책 등 수십 개의 자료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4][25][26][27][28][29][30][31][32][3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체스터 W. 니미츠는 이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34]
> 나중에 벌어진 교전에서 70척 이상의 일본 선박이 연합 함대에 의해 발견되어 침몰했는데, 여기에는 군함과 수송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함대에 가해진 치명적인 타격은 한국에 있는 적군을 고립시켰고, 그들의 본국으로부터 단절시켰다. 1592년 여름 중반에 끝난 해상 작전은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 해군은 조선의 이순신 제독의 지휘를 받았다.
옥스퍼드 대학교 강사인 제임스 B. 루이스는 이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35][36]
> 이 해전은 조선 해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조선이 상대적으로 열세한 화력으로 일본 해군 기지를 공격한 10번의 해전 중 유일한 해전이었기 때문이다. 전투 중 총에 맞아 사망한 이순신의 참모 중 한 명인 정운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이 한 번의 전투에서 100척 이상의 배를 침몰시키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 겨울이 다가오자 양측은 해상 작전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시즌 동안 정박했다.
퀸스 대학교 킹스턴에서 훈련받아 문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은 미국 역사학자 새뮤얼 호울리는 이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37]
> 조선 수군의 부산 공격은 놀랍도록 성공적이었다. 5명의 사망자, 25명의 부상자, 그리고 배 한 척도 잃지 않고 일본 함대의 4분의 1을 완전히 파괴했다.
일본 제국 시대에 조선 총독부와 일본의 역사학자가 출판한 책들조차 이 전투를 조선의 결정적인 승리로 요약했다.[38][39] 더욱이 현대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이 전투가 조선의 승리라고 말했다.[40][41][42]
5. 의의와 영향
이 해전으로 일본 수군의 활동은 위축되었고,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평양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머무르다 조명연합군에 밀린 것도 이순신에 의해 해상 보급로가 차단당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호남 지역도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19]
부산포 해전 이후 일본군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일본 함대에 가해진 치명적인 타격은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을 고립시키고 본국과의 보급로를 끊는 결과를 가져왔다.[20] 일본군은 부산만의 방어선이 보급로 확보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조선 수군이 접근하자 부산 서쪽 지역을 장악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로 이어졌으며, 이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은 2만 명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1593년 6월에는 일본군이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임진왜란 개전 당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점령하였다(부산진 전투). 이후 히젠 나고야에서 이키, 쓰시마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해상 교통로가 일본군의 보급로로 활용되었고, 보급 물자는 부산에 하역된 후 육로로 내륙에 수송되었다. 즉, 부산은 일본군의 보급 연락을 위한 핵심 거점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 수군의 이순신은 "부산은 적(일본군)의 근본이다. 나아가 이를 함락시키면, 적(일본군)은 반드시 근거지를 잃을 것이다.[45]"라고 하며 부산 탈환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이순신 휘하의 전라 좌수영에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 우수영과 원균이 이끄는 경상 우수영을 더한, 사실상 조선 수군의 총력을 기울인 작전이었다.
조선 수군은 이 해전을 기점으로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2월 웅천 공격에서 겨우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로 인해 부산은 일본군에게 안전한 장소가 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급 연락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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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李忠武公全書 巻之十三 附録五 『宣廟中興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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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李忠武公全書 巻之十三 附録五 『宣廟中興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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