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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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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여립은 1546년 전주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이와 성혼의 제자로서 1570년 문과에 급제했다. 처음에는 서인에 속했으나 동인으로 전향한 후 이이를 비판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무장 조직인 대동계를 결성하여 왜구에 대항했으나, 반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자결했다. 이 사건(기축옥사)으로 동인과 서인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으며, 정여립은 스승을 배신한 역적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사상은 천하공물설, 불사이군론 거부 등 혁신적이었으며, 공화주의적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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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정여립
한자 이름鄭汝立
로마자 표기Jeong Yeorip
별칭죽도(竹島), 인백(仁伯)
출생1546년
출생지조선 전라도 전주부
사망1589년
사망지조선 전라도 진안군 죽도
본관동래
직업문신, 학자, 사상가
종교유교
가족 관계
아버지정희증
자녀아들 정옥남
친척정언지(9촌), 정언신(9촌), 정인겸(14촌)
활동
관련 단체대동계
사건정여립 모반 사건

2. 생애 초반

1546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양반 집안 출신으로, 어릴 적 이이(율곡)과 성혼에게 배웠다.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3년 예조 사랑, 이듬해 수찬을 역임했다.

정여립은 처음에는 서인에 속했으나, 후에 동인으로 옮겨갔다. 스승인 이이(율곡)을 비난하여 서인에게 비판받았고, 선조의 미움을 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후 학문 연구와 대동계를 결성하여 왜구에 대항했으나, 반란 모의 혐의를 받고 자결하였다(「기축옥사」). 서인은 정여립의 반역을 주장했고, 동인과 남인은 억울한 누명이라 맞서며 대립했다.

2. 1. 출생과 유년기

1546년 전라북도 전주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첨정과 익산군수를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며[10] 어머니는 박찬(朴纘)의 딸이다. 대호군을 지낸 양헌공(良獻公) 정인(鄭絪)의 8대손이나, 기축옥사 이후 직계 기록이 인멸되어 상세히 전하지는 않는다.

정여립에 관한 기록은 거의 소실되어 부정확한 것이 많다.[11] 출생지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는데, 전주시 인후동 근방, 처가인 김제시 금구면 지역, 진안군 진안읍 가막리 근처 등이 거론된다.[11]

어릴 적 이이(율곡)과 성혼의 제자로,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2. 2. 수학

그는 일찍이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이의 다른 제자들은 정여립을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을 통달하였으며, 의논이 과격하고 드높아 바람처럼 발하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12] 이이 역시 정여립의 재주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그의 과격성을 눈여겨보았고 때로는 그를 경계하게 된다. 훗날 정여립이 이이의 문하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가 서인당을 왜 찾아왔는지 까닭을 묻자, 정여립은 "저는 서인당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율곡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13]

이이는 죽기 석 달 전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조판서직 사퇴 상소를 선조에게 올리면서, "정여립은 박학하고 재주는 있으나 의논이 과격하여 다듬어지지 못한 병폐가 있다"고 지적하였다.[12] 선조는 "그런 사람을 어찌 쓸 수 있겠는가? 사람을 쓸 때는 그 이름만 취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험을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12]"라고 답하였다.

이이와 선조가 정여립을 이처럼 평하고 배척하였던 데는 다른 사적인 문제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이는 당시 동인과 서인간의 대립이 점차 양극화되기 시작하였고, 선조는 이를 제대로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점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때에 재주와 출세 의식,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정여립은 자칫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이와 선조는 경계했던 것이다.[12]

3. 관료 생활

이이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67년(명종 22년)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에 올랐으나, 이조전랑에는 오르지 못했다.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간파하고 그의 임명을 반대하였다.[11]

정여립은 이이 사후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선조의 미움을 사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16] 정여립 주변에는 정언신, 정언지, 정유길 등 동래 정씨 첨사공파 친척들이 동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3. 1. 급제와 출사

1567년(명종 22년)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24세로, 조선시대 문과 급제 평균 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14] 매우 총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이성혼의 문인으로 이들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일세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율곡 이이는 그가 기억력이 비상하고 총명함을 높이 사서 그를 아꼈다. 그러나 직설적이고 감정적인 성격으로 일부 서인 인사들과 척을 지기도 했다.

1583년 예조좌랑이 되었는데, 이어서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다.[11] 이이는 당시 이조판서직에 있었으며,[15] 아마도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간파하였던지 그의 임명을 반대하였다.[11] 이이는 자신의 문인이기도 했던 그의 과격성을 보고는 은근히 그를 경계했다. 그러나 이이는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관직 생활을 오래 계속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이가 죽은 두 달 후 정여립은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당시 정여립의 주변에는 그의 가까운 친척으로 정언신, 정언지 그리고 먼 일가로 정유길 등 동래 정씨 첨사공파 자손들이 동인계 세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정여립은 수찬에 오른 뒤 이이를 비난하고, 이이가 싫어했던 동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선조의 미움을 사서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16]

3. 2. 이이와의 갈등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한 정여립은 넓은 학식과 뛰어난 기억력으로 경전에 통달했으며, 과감하고 거침없는 언변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2] 이이 역시 정여립의 재주를 아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과격한 성격을 경계했다. 훗날 정여립이 이이를 찾아갔을 때, 이이가 서인 당을 찾아온 이유를 묻자, 정여립은 "저는 서인 당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율곡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라고 답했다.[13]

이이는 정여립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과격한 언행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이는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정여립은 박학하고 재주는 있으나 의논이 과격하여 다듬어지지 못한 병폐가 있다"고 지적했다.[12] 선조 역시 "그런 사람을 어찌 쓸 수 있겠는가?"라며 동의했다.[12]

이이와 선조가 정여립을 경계한 것은, 당시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그의 성격이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2]

1567년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0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정여립은 이이와 성혼의 후원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특히 이이는 그의 비상한 기억력과 총명함을 높이 샀다. 그러나 정여립은 직설적이고 감정적인 성격으로 일부 서인 인사들과 갈등을 빚었다.

1583년 예조좌랑이 된 정여립은 이조전랑 물망에 올랐으나,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이는 그의 임명을 반대했다.[11] 이이는 자신의 문인이었던 정여립의 과격성을 경계했던 것이다. 이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정여립은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

정여립은 이이뿐만 아니라 성혼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이이와 성혼은 그의 박식함과 총명함을 인정하여 조정에 천거하기도 했다.[13] 그러나 이이 문하에 서인만 있고 동인은 보이지 않자, 정여립은 이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13]

  • 정여립 : 서인만이 이 나라 사대부입니까?
  • 이이 : 동인들은 늘 반대만 하거든.
  • 정여립 : 그래도 그렇지, 동인에도 반드시 인물이 있을 텐데 무조건 백안시하는 건 좋지 않은데요.
  • 이이 : 뭐야?
  • 정여립 :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동인 서인 나뉘었다고 일부 선비들이 그들을 짐승 취급할 것 까지는 없잖습니까?
  • 이이 :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나[13]


동인에 대한 이이의 부정적 감정은 매우 컸다. 정여립은 이이가 공정하고 합리적일 것이라 기대했으나 실망했고, 서인이 대부분인 이이의 다른 제자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정여립에 대한 이이의 불신은 깊어졌고,[13] 정여립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공격을 받았다.[13]

3. 3. 전향 원인

1583년 예조좌랑이 된 정여립은 이어서 이조전랑 물망에 올랐다.[11]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간파하고 그의 임명을 반대했다.[11] 이이는 자신의 문인이기도 했던 그의 과격성을 보고 은근히 그를 경계했다. 그러나 이이는 병세가 악화되어 관직 생활을 오래 계속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이이가 죽은 두 달 후 정여립은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

당시 정여립 주변에는 그의 가까운 친척 정언신, 정언지와 먼 일가인 정유길 등 동래 정씨 첨사공파 자손들이 동인계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정여립은 수찬에 오른 뒤 이이를 비난하고, 이이가 싫어했던 동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선조의 미움을 사서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16]

선조는 유난히 정여립을 기피하였다. 1583년 10월 이조판서 이이는 ‘정여립을 여러 번 천거해도 선조가 매번 낙점을 거부한다’면서 “혹 중간에 참소라도 있으신 것입니까?”라고 항의할 정도로 정여립을 아꼈다.[18] 그러나 1584년에 이이 사망 뒤 동인으로 돌아선 정여립은 이이를 비난했다.[18] 『부계기문』에 의하면 선조가 정여립의 면전에서 “정여립은 오늘의 형서(邢恕)[19]로구나”라고 비판하자[20] 정여립이 성난 눈으로 물러갔다고 전한다.[18]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의 맹장으로 활약하면서 이이·성혼·박순을 비판했다. 그는 배신자로 지목되어 조헌, 정철서인 인사의 집중적인 비판과 탄핵의 표적이 되고, 이이, 성혼의 문하생이었다가 당을 바꾼 일로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과 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두 사람 다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21]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당이 많고 그들이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여립은 이미 이이가 죽기 전에 서인당을 떠났던 것이다.[21]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이이를 참다운 성인으로 숭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1]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21]

정여립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 서인을 공격하는 편에 앞장서게 된 사정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이가 그를 무척 아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오히려 직설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당수 이발(李潑) 등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하는 추정도 있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였고 이이 등의 각별한 후원을 받았음에도 전향하여 스승인 이이를 비판한 점 때문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그는 배신자나 반역자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1623년 이후 서인과 그 후신인 노론대한제국 멸망 시까지 집권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기회는 주어지지 못했다.

1584년에 이이가 죽자 이이에 대한 동인들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러자 이이에 대한 선조의 믿음도 점차 변하여 이른바 삼찬 사건(1583년)[22] 관련자들을 용서한 일이 일어났다.[22] 이때 정여립은 이러한 선조의 마음을 헤아려 경연에서 이이를 공격하는데 앞장선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은 궁지에 몰린 서인들에게 절호의 빌미를 제공하였다.[22]

경연 활동 때는 임금의 뜻에 따라 탄핵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지만, 경솔하고 과격했던 정여립은 임금의 뜻을 정확히 확인하지 않고 서둘렀던 것이며, 서인들은 그러한 허점을 백분 이용하여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정여립을 탄핵했다.[22] 이런 때에 정여립을 제거하는 일은 서인에게 있어 동인 세력의 상승세를 꺾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의리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배신자! 변절자! 은혜를 망각하는 배은망덕한 자!"라는 점은 충분히 분노를 사고도 남았다.[22] 서인들은 선조의 이 같은 분노를 자극하여 드디어 정여립을 그 도마 위에 올리는 데 성공하였다.[22] 정여립은 스승인 이이를 배반한 변절자, 배신자로 몰려 서인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고, 권세의 부침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치사한 인물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22]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가 구체적 근거가 없는 것들이었다.[22]

정여립이 이이를 비난한 것을 두고 배신자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여립이 이이를 배신했다는 주장은 당시 이이를 절대자요 성인으로 숭배하던 사람들, 특히 서인들의 입장에서 제기되었던 다소 과장된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21]'는 반론도 있다.

3. 4. 관직 은퇴

1583년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정여립은 예조좌랑을 거쳐 이조전랑 물망에 올랐으나, 이이는 그의 과격한 성격을 간파하여 반대하였다.[11][15] 이이는 자신의 문인이기도 한 정여립의 과격성을 경계했으나, 병세 악화로 관직에서 물러나 사망했다. 이이가 죽은 두 달 후, 정여립은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

정여립 주변에는 정언신, 정언지, 정유길 등 동래 정씨 첨사공파 친척들이 동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정여립은 수찬에 오른 뒤 이이를 비난하고, 이이가 싫어했던 동인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선조의 미움을 사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16]

선조는 정여립을 유난히 기피했다. 1583년 이조판서 이이는 정여립을 여러 번 천거했지만, 선조는 매번 낙점을 거부했다. 이이는 “혹 중간에 참소라도 있으신 것입니까?”라고 항의할 정도로 정여립을 아꼈다.[18] 그러나 1584년 이이 사망 후, 동인으로 돌아선 정여립은 이이를 비난했다.[18] 『부계기문』에 따르면, 선조가 정여립 면전에서 “정여립은 오늘의 형서(邢恕)[19]로구나”라고 비판하자, 정여립은 성난 눈으로 물러갔다고 한다.[18] 그는 동인 맹장으로 활약하며 이이·성혼·박순을 비판했다. 이로 인해 조헌, 정철서인 인사들의 집중적인 비판과 탄핵 표적이 되었다. 이이, 성혼 문하생이었다가 당을 바꾼 일로 선조의 눈 밖에 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546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양반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다. 이이성혼의 제자로, 1567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7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83년 예조 사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을 역임하였다.

정치적으로 처음에는 서인에 속했으나, 후에 동인에 참여했다.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난한 것 때문에 서인으로부터 강하게 비판받았다. 이러한 행동은 선조의 미움을 샀고, 이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대동계를 결성하여 왜구에 대항하였으나, 반란 계획이라는 무고를 받고 자결하였다(「기축옥사」).

4. 낙향 후 활동

정여립은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호남 금구현으로 간 뒤로는 전주에 거주하기도 하고, 김제와 진안의 별장을 왕래하기도 하였다.[24] 조정에서 그가 물러가는 것을 애석히 여겨 다시 벼슬길을 열어 줄 것을 간청하는 신하들이 나타났지만, 선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24]

정여립은 대동계를 만들어 매월 15일에 한 곳에 모여 활쏘기 대회를 열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16] 대동계는 여러 무사, 공사, 천노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에게 개혁 사상과 애국심을 심어 주고,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의 무예를 가르쳤다.[16]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 없이 가입을 허용했으며,[25] 보름마다 무술 훈련을 하며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4. 1. 대동계 조직

1587년 녹도에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급보가 들어왔다.[16] 당시 전주 부윤이었던 서인 남언경은 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남언경을 도와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출병하였다. 당시 왜구는 수가 많지 않아 대동계원이 녹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퇴각한 뒤였다.[26] 그러나 손죽도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 미처 떠나지 못한 왜구들을 전멸시켰다. 이후 왜구들이 정여립의 대동계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풍비박산 도망쳐 달아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당당하였다.[23] 전주부윤 남언경은 이에 크게 감탄하여, "그의 재주는 홀로 유술(儒術)뿐이 아니니 실로 못하는 일이 없구나"하였다.[23] 그 뒤 정여립은 문과 무를 겸비한 선비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4. 2. 왜구 격퇴

1587년 녹도에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급보가 들어왔다.[16] 당시 전주 부윤이었던 서인 남언경은 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남언경을 도와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출병하였다. 당시 왜구는 수가 많지 않아 대동계원이 녹도에 도착하였을 때 이들은 이미 퇴각한 뒤였다.[26] 그러나 손죽도(損竹島)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 미처 떠나지 못한 왜구들을 전멸시켰다. 이후 왜구들이 정여립의 대동계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풍비박산 도망쳐 달아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당당하였다.[23] 이에 대하여 전주 부윤 남언경은 크게 감탄하여, "그의 재주는 홀로 유술(儒術)뿐이 아니니 실로 못하는 일이 없구나"하였다.[23] 그 뒤 정여립은 문과 무를 겸비한 선비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5. 기축옥사

1589년 황해도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정여립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면서 기축옥사가 시작되었다.[27]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여 황해도까지 세력을 넓혔는데,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과 왕래하며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27]

이들은 정여립이 한강이 어는 시기를 틈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로 쳐들어가 대장 신립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 했다고 주장했다.[27] 이 고변으로 선조는 체포령을 내렸고, 소식을 들은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28]

5. 1. 반란 고변

1589년 황해도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정여립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이들은 정여립과 그와 친하게 지내던 변숭복, 박연령, 지함두, 승려 의연 등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27] 고변에 따라 선조는 체포령을 내렸고, 소식을 접한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은신했다.[28]

정여립이 죽도에서 자결하자 역모 혐의가 사실로 굳어졌고, 서인들은 그에 대한 공격과 탄핵을 계속했다. 고변 이후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여 조선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흉참한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정여립의 음모 사실을 믿지 않는 견해도 있었다. 명재 윤증은 ‘황신행장’에서 좌의정 정언신이 ‘정여립을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듯이 고변을 사실로 믿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선전관 이용준 등은 ‘정여립이 자신의 서실(書室)이 있는 진안 죽도(竹島)에서 자결했다’며 아들 정옥남만을 잡아와 의혹이 증폭되었다[18]는 주장도 있다. 훗날 남하정은 『동소만록』에서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죽이고선 자살했다고 아뢰었다.[18]”는 기록을 남겼다.

5. 2. 자결과 옥사

정여립이 죽도에서 자결하자 역모 혐의는 사실로 굳어졌고, 서인들은 그에 대한 공격과 탄핵을 계속했다. 고변 이후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여 조선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흉참한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선조 밑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제천문은 그가 모역을 했다는 심증을 굳혀주었다.[18]

정여립의 음모설이 나왔을 때, 그의 음모 사실을 믿지 않는 견해도 있어 팽팽히 맞섰다. 명재 윤증(尹拯)이 ‘황신(黃愼)행장’에서 좌의정 정언신(鄭언信)이 ‘정여립을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듯이 고변을 사실로 믿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선전관 이용준(李用濬) 등은 ‘정여립이 자신의 서실(書室)이 있는 진안 죽도(竹島)에서 자결했다’며 아들 정옥남(鄭玉南)만을 잡아와 의혹은 증폭되었다[18]는 주장도 있다. 훗날 남하정(南夏正:1678~1751)은 『동소만록(桐巢漫錄)』에서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죽이고선 자살했다고 아뢰었다.[18]”는 기록을 남겼다.

정여립 반란 사건 초기에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29] 정언신과 정언각 등은 정여립의 친척으로, 정여립에게는 9촌 아저씨가 된다. 정여립의 아버지에게는 8촌 형제간으로, 조선시대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었던 셈이다.

정언신이 체포되자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제 아비는 여러 해 동안 정여립과 왕래가 없었습니다."라고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권고하므로 죄를 감해주었다.[29] 그러나 조사 결과 정여립의 문서와 서신들을 조사했을 때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고,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을 내렸다.

서인들은 정여립의 옥사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라 유성룡이라고 주장했는데, 유성룡은 남인의 초대 당수였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열한 정치공세로 이해하고 원한과 의혹을 한층 더 쌓게 되었다.

5. 3. 옥사 사건의 여파

정여립이 죽자, 그의 역모설은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사실로 여겨졌다.[28]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28] 이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28]

사건 초기에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29] 정언신정언각 등은 정여립의 친척으로, 정여립에게는 9촌 아저씨가 된다. 정언신이 체포되자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므로 죄를 감해주었다.[29] 그러나 조사 결과 정여립의 문서와 서신들을 조사했을 때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고,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조대중은 당시 전라도 도사로 있으면서 관내 순찰 중 전라남도 보성에서 정여립 자살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죄로 장살을 당하였다고 한다.[30] 사실은 마침 부안에서 데려온 한 관기가 이별의 정 때문에 흘린 눈물이 잘못 전달되어 그런 참혹한 형벌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30]

선조는 사건의 형관으로 정철을 임명했는데, 이 옥사로 처음에는 80여 명이 체포 연행되었다가 그 가족과 관계자들까지 체포, 투옥되면서 무려 천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한편 서인 쪽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는데, 김빙은 추국관이 되어 추국에 참여하였는데, 원래 안질이 있는 데다가 날씨가 추워 눈물을 닦은 것이 같은 서인이었음에도 김빙과 적대관계였던 백유함의 눈에 띄어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무고를 받고 사형당하였다.

이 일로 동인서인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고, 형문장의 참혹한 장면을 목격한 이산해 등은 정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 동인의 원한에 서인의 주요 인사는 대부분 숙청되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때부터 인조 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게 되었다.[31] 세자 건저 문제로 집권한 동인서인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류성룡은 온건한 처벌을 말했고 이산해는 당한 만큼 갚자고 하여 이견이 생기면서 동인남인북인으로 분당된다.

서인들은 정여립의 옥사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라 유성룡이라고 주장했는데, 유성룡은 남인의 초대 당수였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열한 정치공세로 이해하고 원한과 의혹을 한층 더 쌓게 되었다.

정여립은 이이를 비난했다는 점과 서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동인 내에서도 부정적인 여론이 있어 끝내 복권되지 못하였다. 그는 호남의 명문거족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 이후 그의 가족들은 몰락했고, 전주 지역 출신에 대한 인사불이익이 가해졌다 한다.

5. 4. 의문의 최후

1589년 죽도에서 사망했고, 그의 조카 등도 형문장에 끌려가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장살당했다.[28] 그의 사망 원인은 자살설과 피살설이 있다. 그의 사망 이후 그의 집은 허물어지고 파헤쳐져 연못으로 만들어졌다.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였다.[28] 그가 갑자기 죽자, 그의 역모설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사실로 여겨졌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28] 이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28]

심지어 조대중은 당시 전라도 도사로 있으면서 관내 순찰 중 전라남도 보성에서 정여립 자살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죄로 장살당하였다.[30] 이는 부안에서 데려온 한 관기가 이별하며 흘린 눈물이 잘못 전달되어 참혹한 형벌을 받은 것으로, 한 여인과의 '이별의 눈물'이 나라에 반역한 '역적의 눈물'로 오인되어 목숨을 잃은 것이다.[30]

선조는 사건의 형관으로 정철을 임명했는데, 이 옥사로 처음에는 80여 명이 체포 연행되었다가 그 가족과 관계자들까지 체포, 투옥되면서 무려 천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한편 서인 쪽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 정여립의 시신은 1년 뒤인 1590년 이듬해 추형(追刑)되었는데, 형조좌랑 김빙은 추국관(推鞫官)이 되어 추국에 참여하였는데, 원래 안질이 있는 데다가 날씨가 추워 눈물을 닦은 것이 같은 서인이었음에도 김빙과 적대 관계였던 백유함의 눈에 띄어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무고를 받고 사형당하였다.

정여립 반란 사건 초기에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29] 정언신과 정언각 등은 정여립의 친척으로, 정여립에게는 9촌 아저씨가 된다. 정여립의 아버지에게는 8촌 형제간으로, 조선시대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었던 셈이다.

정언신이 체포되자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제 아비는 여러 해 동안 정여립과 왕래가 없었습니다."라고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므로 죄를 감해주었다.[29] 그러나 조사 결과 정여립의 문서와 서신들을 조사했을 때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고,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을 내렸다.

정언지, 정언신 등도 몰락했고, 정언신은 그를 변호했다가 부끄러워하여 유배 가던 길에 자살하였다.

6. 논란과 의혹

정여립 사건은 여러 논란과 의혹에 휩싸여 있다.


  • 이이 공격 논란: 1584년 이이가 사망한 후, 정여립은 동인으로 당적을 옮겨 이이를 비판했다.[18] 서인은 이를 두고 정여립을 배신자라 비난했지만, 정여립이 이이를 진심으로 존경했다는 반론도 있다.[21] 이이가 정여립의 이조전랑 임명을 반대했다는 설도 있으나, 오히려 이이가 정여립을 아꼈다는 기록도 있다.[21]
  • 대동계 역모 의혹: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는 역모의 증거로 제시되지만, 1587년 왜구 격퇴에 공을 세운 점, 서인 출신 전주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요청한 점 등에서 의문이 제기된다.[34]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는 견해도 있어, 당쟁의 희생양이라는 주장도 있다.[35]
  • 정여립의 죽음: 정여립은 자살했다는 설과 타살되었다는 설이 대립한다. 선조실록에는 자결로 기록되어 있지만,[36] 남하정의 동소만록에는 타살 후 자살로 위장되었다는 기록이 있다.[37]
  • 자살설과 타살설: 《선조실록》에는 정여립이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36] 남하정의 동소만록에는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정여립을 죽이고 자결로 위장했다는 주장이 있다.[18]
  • 조작설: 송익필이 자신의 신분 회복을 위해 정여립의 대동계를 역모 사건으로 조작했다는 주장이 있다.[36] 정철송익필이 역모를 조작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42]
  • 후유증: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발생하여 1,000여 명의 동인 인사가 숙청되었다.[38]
  • 유언비어 유포: 서인은 정여립이 유언비어를 유포했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45]
  • 도망, 도피설: 정여립의 도주 경로와 방식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6. 1. 이이 공격 논란

1584년 이이가 사망한 뒤 정여립은 동인으로 당적을 옮겨 이이를 비난했다.[18] 그는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의 맹장으로 활약하면서 이이, 성혼, 박순을 비판했다. 이 때문에 조헌, 정철서인 인사의 집중적인 비판과 탄핵의 표적이 되었고,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이었다가 당을 바꾼 일로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585년 고향으로 내려온 후에도 정여립은 동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들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다.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 그의 명망이 높았다.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두 사람 모두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21]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 당원이 많고 그들이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에 반발했다. 그런 이유로 정여립은 이이가 죽기 전에 이미 서인당을 떠났던 것이다.[21]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이이를 참다운 성인으로 숭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1]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21]

정여립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하여 서인을 공격하는 편에 앞장서게 된 사정은 확실하지 않으나, 이조전랑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이가 그를 무척 아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오히려 직설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당수 이발 등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였고 이이 등의 각별한 후원을 받았음에도 전향하여 스승인 이이를 비판한 점 때문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정여립은 배신자나 반역자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이이에 대한 동인들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이때 정여립은 경연에서 이이를 공격하는데 앞장섰는데, 이는 궁지에 몰린 서인들에게 절호의 빌미를 제공하였다.[22]

경솔하고 과격했던 정여립은 임금의 뜻을 정확히 확인하지 않고 서둘렀으며, 서인들은 그러한 허점을 백분 이용하여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정여립을 탄핵했다.[22] 정여립은 스승인 이이를 배반한 변절자, 배신자로 몰려 서인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22]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구체적 근거가 없는 것들이었다.[22]

정여립이 이이를 비난한 것을 두고 배신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여립이 이이를 배신했다는 주장은 당시 이이를 절대자요 성인으로 숭배하던 사람들, 특히 서인들의 입장에서 제기되었던 다소 과장된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라는 반론도 있다.[21]

일설에는 정여립이 이이를 배신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그가 서인을 공격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이조전랑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긴 했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32]

6. 2. 대동계의 역모 의혹

1587년 녹도에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급보가 들어왔다.[16] 당시 전주 부윤이었던 서인 남언경은 정여립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정여립은 남언경(南彦經)을 도와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출병하였다. 당시 왜구는 수가 많지 않아 대동계원이 녹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퇴각한 뒤였다.[26] 그러나 손죽도(損竹島)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 미처 떠나지 못한 왜구들을 전멸시켰다. 이후 왜구들이 정여립의 대동계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풍비박산 도망쳐 달아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당당하였다.[23] 전주부윤 남언경은 이에 크게 감탄하여, "그의 재주는 홀로 유술(儒術)뿐이 아니니 실로 못하는 일이 없구나"라고 하였다.[23] 그 뒤 정여립은 문과 무를 겸비한 선비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정여립이 조직했던 대동계가 역모의 가장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만일 대동계가 역모를 위한 조직이라면 1587년 왜구 퇴치 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서인이었는데 어떻게 동인계로 전향한 정여립에게 협조를 요청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34] 특히 이미 서인인 전주 부윤이 알고 있을 정도의 조직이라면, 더욱 마음 놓고 조직을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34] 그래서 정여립은 매월 공공연하게 모임을 갖고 국난에 협조했을 것이며, 만일 그가 임진왜란을 예상했다면 그의 이러한 조직은 의병 활동에 크게 활용되었을 것이다.[34] 그가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력을 기른 것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35]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역모(逆謀) 조작설이 존재하고 있다.

6. 3. 정여립의 죽음 의혹

정여립이 죽도에서 자결하면서 역모 혐의는 사실처럼 굳어졌고, 서인들은 정여립에 대한 공격과 탄핵을 계속했다. 고변 이후 정여립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선조의 실정을 비판하고 조선 왕조의 운이 다했음을 주장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정여립이 선조 아래에서는 뜻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며, 역모 혐의의 심증을 굳히는 증거가 되었다.[18]

그러나 정여립의 음모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명재 윤증은 황신의 행장에서 좌의정 정언신이 '정여립을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선전관 이용준 등은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자결했다며 아들 정옥남만을 잡아와 의혹을 증폭시켰다.[18] 훗날 남하정은 동소만록에서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그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다고 기록했다.[18]

6. 3. 1. 자살설과 타살설

정여립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살설과 타살설이 엇갈린다. 《선조실록》에는 정여립이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체포되기 직전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6] 그러나 남하정의 동소만록에는 "정여립이 진안 죽도로 단풍 구경을 갔는데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죽인 후 자결한 것으로 꾸몄다"는 기록이 있다.[37]桐巢漫錄중국어[18]

정여립이 죽도에서 자결하자 역모 혐의는 사실로 굳어졌고, 서인들은 그에 대한 공격과 탄핵을 계속했다. 명재 윤증은 황신행장에서 좌의정 정언신이 '정여립을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듯이 고변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선전관 이용준 등은 '정여립이 자신의 서실이 있는 진안 죽도에서 자결했다'며 아들 정옥남만을 잡아와 의혹은 증폭되었다[18]는 주장도 있다.

두 기록 중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6. 3. 2. 조작설

정여립이 실제로 대동계를 이용하여 혁명을 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는 조작설과 역모설이 있다. 조작설은 송익필이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정여립의 대동계를 역모 사건으로 엮었다는 주장이다.[36] 송익필은 서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이이, 성혼과 친분이 깊었고, 동인이면서 이이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섰던 정여립이 이이를 공격한 것에 대해 서인들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철 등 서인이 주도한 사건 조사로 기축옥사가 발생하여 동인의 주요 인물들이 제거되었고, 숙청된 인사는 1,000여 명에 달했다.[38] 이로 인해 동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임진왜란기축옥사의 황폐가 부른 재앙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참혹했다.[38]

정여립의 대동계 주요 근거지가 전라도였기 때문에 전라도 유림 사회가 초토화되었고, 호남 유림은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은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조정에서도 이순신이 활약할 때까지 전라도를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인 등용을 제한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은 고변 외에 분명한 물증이 없어[39] 진위가 불분명하며, 조작설이 제기되고 있다.[40] 조작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정여립은 수사의 손길이 미칠 것을 알면서도 각종 수신 문서를 집에 방치하여 많은 사람이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41]
  •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닌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갔을 것이며,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 150년 뒤 야사인 ≪동소만록≫에서는 정여립이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들이닥쳐 죽이고 자결로 조작 보고했다고 한다.


정철송익필이 역모를 조작한 인물로 지목받고 있다.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에는 정철이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고, 자진하여 옥사 처리를 담당했다는 내용이 있어, 정철이 유인 및 암살 음모의 최고 지휘자라는 주장이 있다. 1584년 이이가 죽은 뒤 열세에 몰린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이라는 것이다.[42]

송익필이 정철의 배후에서 기축옥사를 실질적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노비 출신 송익필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가족 70여 인을 환천시키고, 동인의 이발,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42]

정여립이 전제군주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에 의한 왕위계승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어, 여러 조작설이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42]

6. 4. 후유증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는 밀고가 조정에 들어오자 그 연루자들이 속속 잡혀오기 시작했다.[43] 선조는 모반 연루자들을 고발하면 후한 포상을 내리겠다고 분부했고, 이에 조그마한 빌미라도 있으면 있는 말 없는 말까지 보태서 고발하는 일이 빈번했다.[43] 이로 인해 1천여 명의 선비들이 죽거나 유배되거나 벼슬에서 쫓겨나는 등 화를 입었다.[43] 그 중에는 안질환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살해된 사람, 형문의 참혹함에 고개를 돌렸다는 이유로 죄인을 동정한다며 장살당한 사람도 있었다.

정여립의 반란 예비 음모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이미 종결된 사건이었지만,[44] 선조는 사태를 확대시켰다. 또한 선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을 끌어들이고 동인서인 간의 격전에 불을 붙였다.[44]

6. 5. 유언비어 유포 논란

당시 서인들은 정여립이 유언비어를 날조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이 언제 어떻게 유언비어를 날조했는가에 대한 근거는 없다. 당시 정씨가 임금이 된다는 참설이 무성하였다든가, 그가 폐암에서 지었다는 시 구절, 그리고 태평성대가 오리라는 유언비어의 정체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45] 이러한 참설은 국초 이래 사회가 어수선할 때 늘 떠돌던 것으로,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하였다면 오히려 스스로 그러한 참설을 만들어 퍼트리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45] 이 때문에 상식적으로 판단하여도 정여립이 반란을 하기 위하여 참언을 유포시켰다는 주장은 결코 설득력이 없다.[45] 차라리 반대자들이 조작하여 이를 악용, 정여립을 역모의 주범자로 몰아 대기 위하여 이를 조작하고 악용했을 가능성이 높다.[45]

6. 6. 도망, 도피설의 진위 여부

정여립의 도주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여립이 반란을 음모하고 거사하기로 결심하였다면, 그의 역모가 드러났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과격한 성격으로 보아 전투를 벌였을 수도 있고,[46] 아니면 우선 주변을 정리하고 서둘러 도망갔을 것이다.[45] 그런데도 그가 유유히 금구를 거쳐 진안 죽도(竹道)로 간 것은 도망이 아니라 유인되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45]

금구는 그의 처가가 있는 지역이고, 죽도는 그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 누구나 그 행방을 예상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정여립이 관군을 피해 도망쳐 갈 장소로 금구나 진안 죽도를 선택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죽도는 현재 진안읍 가막리에서 진안군 상전면 내송리, 외송리에 뻗어 있는 산으로, 만일 정여립이 그 속에 은신할 의향이 있었다면, 그 지형으로 보아 진안현의 관군 정도로 그를 수색, 체포하기 힘든 지역이다.[45] 그럼에도 손쉽게 그를 찾아 왕명을 전하려 했다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속아서 유인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7. 사상과 신념

정여립은 당시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주자학적 가치관과는 다른 혁신적인 사상을 가졌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라는 주장과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48]

정여립은 백성이 임금보다 중요하다는 민본주의(民本主義)에 기반하여 왕위 계승은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 , 로 이어지는 왕위의 선양을 이상적인 모범으로 보았으며, 이는 군주와 신하 간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부정하는 파격적인 사상이었다.[49]

또한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심을 부정했다.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의 충신 왕촉이 연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자결한 것을 비판하며, "왕촉의 언행은 죽음에 임하여 일시적인 감정으로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라고 주장했다.[51]

왕위 세습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창업주와 일부 군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왕족을 통솔할 능력도 되지 않는 자들이 많다고 지적하며, 능력 있는 인물을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광자치통감에서 조위를 정통으로 인정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주희촉한 유비를 정통으로 본 것에 대해서는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주나라 왕실을 떠났는데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는 것(尊周)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비판했다.[51][52]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정여립은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한다.[49] 신채호는 정여립이 천하를 공물로 보는 혁명적 사상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52]

7. 1. 천하공물설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47]과 같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사상을 주장했다.[48]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주자학적 가치관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라는 주장과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이를 보여준다. 또한 백성이 임금보다 중요하므로(民重君輕) 왕위 계승은 혈통보다는 자격 여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요··로 이어지는 왕위의 선양(禪讓)을 이상적인 모범으로 보았다. 이는 봉건왕조의 기본 가치관 중 하나인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부정하는 것으로, 당시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영국올리버 크롬웰에 비견하여 정여립을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49]

7. 2. 서얼허통론

조선 건국 이래 충청남도 연산현 계룡산 개태사 터는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라 하였다. 정여립은 일찍이 중 의연의 무리와 국내의 산천을 유람하다가 폐암(폐 암자, 중이 없는 절)의 벽에 "객이 되어 남쪽 지방에 노닌지 오래인데 / 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하여라. / 무자, 기축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 / 태평성세 이루는 것이 무엇이 어려우랴"라는 내용의 시를 적어 놓았다고 한다.[50]

당시 정여립과 관련하여 참언이 무성하였는데, 호남 전주 지방에 성인이 나서 공사천과 서얼을 금고하는 법을 모두 혁파하고 태평성대를 이루리라는 내용이었다.[34]

7. 3. 불사이군론 거부

정여립은 군주에게 절대 복종하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심을 부정했는데, 그 예로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의 충신 왕촉의 일화를 들었다.[51] 왕촉제나라가 망할 때 연나라의 대장 악의(樂毅)가 그의 어진 인품을 보고 불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자살한 인물이다.[51] 그러나 정여립은 이러한 왕촉의 자살 행위를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였으며, 왕촉의 언행은 죽음에 임하여 일시적인 감정으로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라고 보았다.[51]

그는 역성혁명론을 주장하고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다면 그런 임금에게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당시 유자혜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한 사람이고, 맹자제 선왕과 양 혜왕에게 왕도를 행하도록 권하였던 이였지만, 유자혜와 맹자 모두가 지금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주장했다.[51]

7. 4. 왕위세습론 비판과 위나라 정통론

정여립은 왕위 세습을 부정하였다.[51] 창업주와 일부 군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일가를 통솔할 능력도 되지 않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왕위는 능력에 따라 왕이 될 만한 인물을 골라 앉히는 것이지, 혈통에 맞춰 무능한 군주를 억지로 내세워 대를 이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51] 정여립은 "사마온공의 '자치통감'에서는 삼국 중 조위(조조위나라)를 후한 다음 왕조의 정통으로 인정하여 위나라의 기년으로 삼았으나, 주자촉한 소열제 유비후한 헌제의 뒤를 이은 유통(遺通)으로 기술하였다.[51]"면서, 사마온공의 주장을 직필(直筆)이라 하고 주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주나라 왕실을 떠났는데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는 것(尊周)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민중과 토지가 조조사마의에게 돌아갔는데, 구구일우(區區一隅)한 유현덕의 정통이 다 무엇이냐?"라고 하면서 주자의 사관을 비판하였다.[52]

이어서 그는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 , , 임금은 서로 자손이 아닌 자에게 왕위를 전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성인이 아니었던가?" 하면서, 중국 정치의 이상적 모델이 혈통이 아닌 능력에 의한 왕위 계승이었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52] 정여립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문도들의 표현을 따른다면 진정 앞선 성현들이 생각지 못했던 선구적인 발상이었다.[52]

7. 5. 공화주의 이론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47]과 같은 혁신적인 사상을 주장했다.[48] 그의 사상은 조선 왕조를 지탱하던 주자학적 가치관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라는 주장과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이를 보여준다. 또한 백성이 임금보다 중요하므로(民重君輕) 왕위 계승은 혈통보다 자격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고, 요··로 이어지는 왕위의 선양(禪讓)을 이상적인 모범으로 생각했다. 이는 봉건 왕조의 기본 가치관인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부정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영국올리버 크롬웰에 견주어 정여립을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49]

신채호는 정여립이 천하가 공물이라는 혁명적 사상을 내놓았다고 평가했다.[52] 정여립은 당시 조정에서 사용하던 종묘사직이란 말 대신에 천하(국가 사회 전체)가 왕공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공물, 즉 백성 모두의 공유물이라는 공동체 사상을 바탕으로 침체한 왕조 사회의 혁명적 개조를 꿈꾸었던 것이다.[52]

정여립의 이러한 제한 군주주의 사상 또는 공화주의적 이론은 그 뒤의 실학자나 개화 사상가들도 감히 언급하기 힘든,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52]

8. 평가

신채호는 정여립의 공화주의적 사상을 두고 “동양의 위인”이라 칭송하였고, 역사학자 이이화는 정여립을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고 불평등과 차별의 세상을 뜯어 고치고자 온몸으로 현실에 부딪친 진보적 지식인이었고, 선진적 사상가였으며, 민중에 토대를 둔 개혁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자신의 '조선혁명선언'에서 정여립의 개혁 사상과 이론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53] 정여립의 개혁 이론과 사상은 극히 단편적으로 전해지며, 그를 반역자로 몰아붙인 세력들에 의해 소개되었기 때문에 다소 과격하게 그려졌을 가능성은 있다.[51] 그러나 신채호의 평가처럼 정여립의 주장과 이론들이 당대 사회의 권력층을 긴장시킬 정도로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51]

9. 성격

정여립은 옹골차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23] 기백이 있고 말솜씨가 좋아서 입을 열기만 하면 그 말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좌석에 있는 이들이 칭찬하고 탄복하였고, 비록 임금 앞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쉽사리 꺾지 않고 유난히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23] 이런 성품 때문에 주변에 적도 많았지만, 그를 따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23]

그러나 그의 강직하고 어찌 보면 불온한 성품은 당대 지배 권력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위협적이고 불편한 것이었다.[23]

10. 가계

관계이름
아버지정희증
형제정여복(鄭汝復)
형제정여회(鄭汝會)
형제정여흥(鄭汝興)
누이2명
아들정옥남(鄭玉男, 생년 미상 ~ 1589년 10월 19일)
조카정집(鄭楫)


11. 정여립이 등장한 작품

12. 기타

정여립과 사돈 관계였던 백유양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세 아들과 함께 옥사했다. 그러나 백유양의 사촌 동생인 백유함은 서인으로, 사촌 형을 구명하기는커녕 매일 사헌부에 들어가 동인을 탄핵할 정도로 당파 간의 갈등이 심했다.[54]

안내상은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된 KBS 1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정여립 역을 연기했다.

최철호는 2014년에 방영된 KBS 2TV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 정여립 역을 연기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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