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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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산도는 경상남도 통영시와 거제시 사이의 섬으로,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을 승리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조선 초기에는 대마도 정벌 출전지였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과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여 해군 기지 역할을 했다.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 김시민, 권율 장군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학익진 전술이 처음 사용된 해전이다. 현재 한산도에는 제승당, 충무사, 한산대첩비 등 유적지가 있으며, 통영과 거제에서 카페리를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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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 |
---|---|
지도 정보 | |
섬 정보 | |
![]() | |
이름 | 한산도 |
한자 표기 | 閑山島 |
면적 | 29.81km² |
위치 | 경상남도 |
최고점 | 망산 (293m) |
나라 | 대한민국 |
행정 구역 | 통영시 |
지리 좌표 | |
좌표 | 34.7818° N, 128.485° E |
2. 역사
조선 초기 세종 1년(1418년) 이종무가 병선 227척과 병력 1만 7천 285명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에 나선 출전지가 한산도의 주원방포(현 추봉리 추원포)였다.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을 이곳에 설치하고 제승당을 세웠으며,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
한산도 남동쪽 해역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 주력 함대를 격파한 한산도 대첩이 벌어진 곳이다.[1]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체포, 투옥, 고문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원균 장군이 조선 수군을 이끌게 되었으나, 원균은 조수를 고려하지 않고 부산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했다가 해안에서의 포격으로 후퇴해야 했다. 일본 수군은 끈질기게 추격하여 판옥선 대부분을 침몰시켰고, 단 13척만이 남았다. 원균은 이 참혹한 후퇴 과정에서 전사했고, 한산도와 그곳의 함대 기지는 일본군에게 노출되어 결국 불타 버렸다.
원래 거제군의 지역으로 한산섬 또는 한산도라고 불렸으며, 1900년 고종 황제 시절 진남군에 편입되었고, 1909년 용남군 한산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4년 용남군과 가제군이 통합되어 통영군 한산면이 되었다. 1932년 충무영당이 건립되었고, 1959년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한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2. 1. 조선 초기
조선 초기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에 이미 ‘한산도 목장’이라는 지명이 전해져 내려오며, 세종 1년(1418년) 이종무가 병선 227척과 병력 1만 7천 285명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에 나선 출전지가 한산도의 주원방포(현 추봉리 추원포)이다.1592년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을 이곳에 설치하고 제승당을 세웠으며,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
2. 2. 임진왜란과 한산도 대첩

조선 초기 세종 1년 1418년 삼군도제찰사 이종무가 병선 227척과 병력 1만 7천 285명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에 나선 출전지가 한산도의 주원방포(현 추봉리 추원포)이다.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과 제승당을 이곳에 설치하였고,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은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한산도 대첩은 1592년(선조 25)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이 전투 이후, 이순신 장군은 주요 해군 기지를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는데, 이는 인근 견내량 해협을 감시하고 정찰하기에 전략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견내량 해협은 일본군의 주요 기지가 있던 부산으로 바로 이어지는 내륙 수로였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체포, 투옥, 고문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원균 장군이 조선 수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원균은 조수를 고려하지 않고 부산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했다가 해안에서의 포격으로 후퇴해야 했다. 일본 수군은 끈질기게 추격하여 판옥선 대부분을 침몰시켰고, 단 13척만이 남았다. 원균은 이 참혹한 후퇴 과정에서 전사했고, 한산도와 그곳의 함대 기지는 일본군에게 노출되어 결국 불타 버렸다. 전쟁 후, 조선 해군 기지는 재건되었고, 이순신 장군은 복권되어 남은 13척의 판옥선으로 일본군을 다시 격파했다.[1]
2. 3. 임진왜란 이후
1592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행영을 이곳에 설치하고 제승당을 세웠으며,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1]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다시 지었다.원래 거제군의 지역으로 한산섬 또는 한산도라고 불렸으며, 1900년 고종 황제 시절 진남군에 편입되었고, 1909년 용남군 한산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4년 용남군과 가제군이 통합되어 통영군 한산면이 되었다.
1932년 충무영당이 건립되었고, 1959년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한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2. 4.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과 제승당을 이곳에 설치하였고,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원래 거제군의 지역으로 한산섬 또는 한산도라고 불렸으며, 1900년 고종 황제 시절에 진남군에 편입되었고, 1909년 용남군 한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용남군과 가제군이 통폐합되어 통영군 한산면이 되었다.
1932년 충무영당이 건립되었고, 1959년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한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2. 5. 현대
2007년 7월 4일 추봉도와 한산도를 연결하는 추봉교가 개통되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거제 저구항에서 추봉도를 연결하는 한산카페리가 2009년 7월 18일부터 하루 8차례 운항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거제에서도 추봉도를 통해 한산섬까지 차로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2](그 이전에는 거제도 어구에서 한산도 소고포까지 카페리호-을지호 등이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되었으므로 거제도에서 한산도까지 차로 둘러볼 수 있는 것이 처음이 아니다. 그리고 통영-한산도제승당 간의 카페리호-파라다이스호는 이전부터 운행되고 있다.)
1932년 충무영당이 건립되었고, 1959년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한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2]
3. 지리
한산도는 통영시 산양읍과 거제시 거제면과 둔덕면 사이의 바다에 위치한다. 본 섬의 최북단에는 화살대를 공급하던 대섬이 있다. 그 아래 쪽으로는 해갑도, 비산도, 상혈도, 하혈도, 좌도, 송도, 유자도 등의 작은 주변 섬이 있다. 북쪽의 비추리는 군함을 짓던 곳이며, 망골은 바다의 적의 동정을 살피던 곳이었으며, 야소는 군기창이 있었던 곳이고, 개미목은 왜적 패잔병이 개미처럼 붙어 있던 곳이라고 하여 이름지어졌다. 진두는 진을 친 요소였다는 곳으로 현재 한산면의 행정소재지이다.
제승당은 한산면 두억리 875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600871m2이고, 건물은 28동이며, 통영시에서 6.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배로 25분이 소요된다.
4. 유적지
한산섬은 1592년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이 운주당을 짓고,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한 곳이다. 1597년 폐진되었고, 1738년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웠다.[3]
4. 1. 제승당
한산섬은 1592년 한산대첩 이후 운주당을 짓고, 1593년에서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한 곳이다. 제승당은 1597년 폐진되었고, 142년 후인 1738년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웠다. 제승당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무사와 제승당 그리고 시를 읊었던 수루와 활 연습터인 한산정이 있다. 그리고 앞 바다에는 거북선 모양의 거북 등대가 있고, 한산대첩비가 있다.[3]
4. 2. 기타 유적
한산섬은 1592년 한산도 대첩 이후 운주당을 짓고,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한 곳이다. 제승당은 1597년 폐진되었고, 142년 후인 1738년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웠다. 제승당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무사와 제승당, 시를 읊었던 수루, 활 연습터인 한산정이 있다. 앞 바다에는 거북선 모양의 거북 등대가 있고, 한산대첩비가 있다.[3]
5. 문학 속 한산도
6. 교통
2007년 7월 4일 추봉도와 한산도를 연결하는 추봉교가 개통되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거제 저구항에서 추봉도를 연결하는 한산카페리가 2009년 7월 18일부터 하루 8차례 운항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거제에서도 추봉도를 통해 한산섬까지 차로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2]
한산섬은 통영과 거제에서 가는 길이 있고, 모두 카페리가 가능하다. 통영에서는 통영 여객선 터미널에서 카페리인 뉴파라다이스호, 시파라다이스호가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하며, 거제에서는 2009년 7월 18일부터 저구항에서 한산카페리가 취항하여 추봉도를 거쳐 추봉교를 건너 한산섬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 두 곳 모두 이동거리가 멀기 때문에 카페리를 이용하는 것도 좋으며, 추봉도에서 제승당까지 이동하는 정기버스가 있다.
한산도에서 매물도로 가는 여객선이 있으며, 저구항에서 카페리를 이용하면 거제-한산도-매물도를 같이 둘러볼 수 있다.
참조
[1]
논문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5-24
[2]
웹인용
한산도
http://www.badaland.[...]
통영시청
2009-02-13
[3]
간행물
제승당 입구 안내판
200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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