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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도키아 마크렌보리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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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우도키아 마크렌보리티사는 11세기 비잔틴 제국의 황후로,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와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와 결혼했다. 콘스탄티노스 10세 사후에는 섭정으로 활동했으며, 로마노스 4세와 결혼하여 공동 황후가 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권력을 잃고 수도원으로 은퇴했다가, 말년에는 재혼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거절하고 수녀로 생을 마감했다. 저술가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작 여부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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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도키아 마크렌보리티사
기본 정보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초상화
동시대의 에우도키아 황후의 세밀화 (이전에는 이리니 두카이나로 여겨짐). 붉은 머리카락은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보임.
로마자 표기Evdokía Makremvolítissa
칭호아우구스타
로마인의 여제 및 전제 군주
통치
통치 기간1067년 5월 23일 – 1067년 12월 31일
(또한 공동 황제 미카엘 7세의 섭정)
유형통치
선임콘스탄티누스 10세
섭정미카엘 7세 및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유형공동 황제
후임로마누스 4세
개인 정보
출생기원전 1030년경
사망1081년 이후
종교정교회
결혼 및 자녀
배우자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 (1049년 결혼, 1067년 사별)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1068년 결혼, 1072년 사별)
자녀콘스탄티누스 10세와의 사이에서
미카엘 7세 두카스
아들
안나 두카이나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테오도라 두카이나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조에 두카이나
로마누스 4세와의 사이에서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
레오 디오게네스
기타 정보
왕조두카스 왕조
황후
재임 기간1059년–1067년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아내)
1068년–1071년 (로마누스 4세의 아내)

2. 배경 및 초기 생애

에우도키아 마크렘보리티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의 조카딸로, 그의 누이가 요안니스 마크렘보리테스와 결혼했다.[1] 콘스탄티노폴리스 귀족 출신인 요안니스는 1040년에 황제 미하일 4세에 대항하여 케룰라리오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그들의 계획은 곧 중단되었다.[2] 에우도키아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종종 1030년경으로 추정한다.[3] 일부 저자는 그녀의 생몰년을 1021년~1096년으로 제시하지만, 이는 다른 자료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4] 에우도키아는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가 1059년에 즉위하기 전, 아마도 1049년경에 그와 결혼했는데,[5]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43세였다.[6] 그녀는 콘스탄티노스의 두 번째 부인이었는데,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안티오키아 공작 콘스탄티노스 달라세노스의 딸이었으며,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7] 1059년까지 그들은 이미 적어도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미래의 미하일 7세, 요절한 아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안나 두카이나, 그리고 테오도라 두카이나가 있었다.

3. 황후 및 여제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가 사망한 후, 에우도키아는 아우구스타로서 비잔틴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요한 두카스와 함께 미하일 7세와 콘스탄티오스의 섭정을 맡았지만, 실제로는 여제로서 제국을 통치했다.[1]

에우도키아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는 주화와 도상학에 반영되었다. 아들 없이 은화와 동전에 등장하는 드문 경우였으며, 1067년의 비문에는 남성형 칭호인 황제가 부여되기도 했다.[1]

콘스탄티누스 10세가 죽기 전 재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지만, 제국의 안정을 위해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8세 시피리노스의 승인을 받았다.[5] 로마노스 4세는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에우도키아와 갈등을 빚었고 점차 그녀를 권력에서 배제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제국에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자, 에우도키아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로마노스 4세가 생존하여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요한 두카스와 바랑인 친위대는 에우도키아에게 미하일 7세에게 권력을 넘기고 수도원으로 은퇴할 것을 강요했다.

3. 1. 콘스탄티노스 10세 치세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는 1059년 11월 23일, 이삭 1세 콤네노스가 퇴위한 다음 날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에우도키아는 곧 아우구스타로 대관되었는데, 아마도 같은 해였을 것이다.[1] 이 무렵 그들은 넷째 아들 콘스탄티오스 두카스를 두었는데, 그는 형 미하일보다 먼저 대관되었고, 또 다른 딸 조에도 있었다.[1] 1066년 10월 콘스탄티누스가 병에 걸리자 그는 카이사르 요한 두카스와 총대주교 요한 8세 시피리노스를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다. 에우도키아는 미하일과 콘스탄티오스만 돌보도록 되어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그녀에게 더 큰 야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 1067년 5월 23일에 사망했다.[1]

3. 2. 단독 통치와 로마노스 4세와의 결혼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는 1059년 11월 23일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에우도키아는 곧 아우구스타로 대관되었다. 1067년 콘스탄티누스가 병에 걸리자 카이사르 요한 두카스와 총대주교 요한 8세 시피리노스를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누스는 사망했다.[1]

일부 역사학자들은 에우도키아를 섭정이라기보다는 실제로 그녀 자신의 권리로 통치한 여제로 간주한다. 동시대의 인물인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에우도키아는 "최고 통치자로서 [콘스탄티누스 10세]를 계승했고, 정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았으며... 그녀는 모든 행정을 직접 관리했다."[1] 미하일 7세는 이때 "이미 소년기를 훌쩍 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행정을 어머니에게 맡겼다".

그녀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는 그녀의 주화와 대중적 도상학에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녀는 때때로 아들 없이 은화와 동전에 등장했는데,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1] 1067년의 일부 비문은 남성형 칭호 황제를 그녀에게 부여한다. 1067년 말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테르테론에는 '에우도키아와 미하일, 황제'라고 새겨져 있고, 1067년 5월에서 12월 사이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봉인에는 '에우도키아, 미하일과 콘스탄티오스, 로마인의 황제'라고 새겨져 있다.[1]

에우도키아는 콘스탄티누스의 임종 시 재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심지어 총대주교 요한 8세 시피리노스 앞에서 맹세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권력을 휘두르면 그녀의 권력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군대에서 큰 인기를 얻은 장군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를 선택했다. 에우도키아는 그의 기술과 리더십이 동방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진격을 막아주기를 희망했다.

12월 25일, 에우도키아는 로마노스에게 대관식을 준비하기 위해 ''마기스트로스''와 ''스트라텔라테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승인이 필요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에우도키아는 요한 8세를 속여 그녀가 그의 형제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요한 8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맹세를 취소했다. 결혼과 황제 대관식은 1068년 1월 1일에 거행되었고, 총대주교와 다른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15세기 에우도키아의 초상화, ''Mutinensis gr. 122''에서


새로운 남편의 도움으로 에우도키아는 임박한 위험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녀는 로마노스 4세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니케포로스와 레오를 두었다. 에우도키아와 콘스탄티누스의 또 다른 아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역시 로마노스 4세에 의해 공동 황제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에 의해 권력에서 배제되었다.[5] 동시대의 주화는 로마노스를 미하일과 그의 형제들보다 열등하게, 따라서 황후보다 열등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때때로 "황제"라고 불리지도 않으며, 일부 ''테르테론''은 그를 단지 ''데스포테스''라고 부르고, ''바실레우스''라는 칭호는 에우도키아에게만 사용한다.[5]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그녀는 그를 명시적으로 "통치자가 아닌 신하"라고 불렀다. 그러나 로마노스 4세는 곧 그녀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녀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1071년 8월 26일, 로마노스 4세는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과 대결했다. 비잔틴 군대는 궤멸되었고, 황제 자신도 포로로 잡혔다.[6] 그 소식은 며칠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전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10월 1일 원로원은 로마노스 4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에우도키아와 미하일 7세를 공동 통치자로 선포했다. 새로운 정권은 불과 한 달 동안 지속되었는데, 에우도키아에 대한 반대가 강해져 그녀를 폐위시킬 만큼 강해졌고, 특히 로마노스의 석방 소식이 수도에 도착한 후였다. 미하일 7세는 그 후 요한 두카스에 의해 단독 ''아우토크라토르''로 선포되었고, 그는 에우도키아에게 수녀로서 수도원으로 은퇴하도록 강요했다.

3. 3. 만지케르트 전투와 로마노스 4세의 몰락

콘스탄티누스 10세가 죽기 전 재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음에도, 에우도키아는 셀주크 제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1068년 1월 1일 군사 귀족 출신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와 결혼했다.[5] 이 결혼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8세 시피리노스의 승인을 받았다. 로마노스 4세는 공동 황제가 되었다.

로마노스 4세는 호전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에우도키아와 갈등을 빚었고, 점차 그녀를 권력에서 배제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제국 군대에 로마노스 4세가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에우도키아는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로마노스 4세가 생존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요한 두카스와 바랑인 친위대는 에우도키아에게 미하일 7세에게 권력을 넘기고 수도원으로 은퇴할 것을 강요했다.

4. 말년

에우도키아는 1071년 추방된 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1] 폐위 직후, 이삭 1세 콤네노스의 처제인 안나 달라세네와 동맹을 맺어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를 복위시키고 요한 두카스를 폐위시키려 했다.[1] 하지만 두카스는 곧 콤네노스 가문과 가까웠던 환관 니케포리체스의 계략으로 인해 실각했다.[2] 에우도키아는 1072년 8월 4일에 사망한 로마노스 4세를 위해 기억에 남을 만한 장례와 매장을 치렀다.[3][4]

미카엘 7세 두카스가 1078년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에 의해 폐위된 후, 에우도키아는 새 황제에게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어 결혼 제안을 받았다. 이 계획은 니케포리체스가 추방된 후 권력을 되찾은 요한 두카스의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니케포로스는 여전히 그녀에게 많은 보상과 감사의 선물을 보냈다.[7][4] 그녀의 사망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1081년에 즉위한 이후였다.[7] 그녀의 마지막 알려진 행적은 미카엘 1세 케룰라리오스 총대주교의 사촌 중 한 명을 입양한 것이다.[4]

역사가 니키포로스 그레고라스는 1세기 후에 에우도키아를 "두 번째 히파티아"라고 묘사했다.[6]

5. 자녀

에우도키아 마크렌보리티사는 첫 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녀를 두었다.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었다.[2]

이름설명
미하일 7세 두카스1060년부터 공동 황제였으며, 1071년부터는 선임 황제였다.
유아기에 사망한 아들
안나 두카이나수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1068년부터 1078년까지 공동 황제였다.
테오도라 두카이나베네치아 공작 도메니코 셀보와 결혼했다.
콘스탄티오스 두카스1060년부터 1078년까지 공동 황제였으며, 1081년 노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조에 두카이나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의 형제인 아드리아노스 콤네노스와 결혼했다.



두 번째 남편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와의 사이에서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거의 쌍둥이였을 가능성이 높다.[3]

이름설명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명령으로 반역 혐의를 받아 눈이 멀게 되었다.
레오 디오게네스전투 중 사망했다.


6. 평가

에우도키아 마크렌보리티사에 대한 평가는 그녀의 통치 기간과 결정에 따라 엇갈린다.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긍정적 평가:찰스 아브라함 엘튼은 저서 ''로마 황제 역사''에서 에우도키아를 비잔틴 제국의 주요 군주 중 한 명으로 꼽았다.[1]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녀를 단순한 섭정이 아닌 실질적인 여제로 간주한다. 동시대 인물인 미하일 프셀로스는 에우도키아가 콘스탄티누스 10세의 뒤를 이어 모든 행정을 직접 관리했다고 기록했다. 미하일 7세는 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게 행정을 맡겼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에게 정신적 장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에우도키아의 지위는 주화와 도상학에 반영되어 있으며, 아들들보다 높은 지위를 가졌음을 시사한다.
부정적 평가:에우도키아는 재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와 결혼하여 논란을 일으켰다.[1] 로마노스 4세는 헝가리인들과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1] 에우도키아는 총대주교를 속여 결혼 승인을 얻어냈다는 의혹도 받는다.[1]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에우도키아는 로마노스 4세를 "통치자가 아닌 신하"로 여겼지만, 로마노스 4세는 점차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에우도키아에게 반감을 품었다.[1]

6. 1. 긍정적 평가

찰스 아브라함 엘튼은 1825년 저서 ''로마 황제 역사''에서 에우도키아를 비잔틴 제국의 군주 중 한 명으로 꼽았다.[1] 일부 역사학자들은 에우도키아를 섭정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자신의 권리로 통치한 여제로 간주한다. 동시대 인물인 미하일 프셀로스는 "에우도키아는 최고 통치자로서 콘스탄티누스 10세를 계승했고, 정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았으며... 그녀는 모든 행정을 직접 관리했다"라고 평가했다. 미하일 7세는 "이미 소년기를 훌쩍 넘었지만", "모든 행정을 어머니에게 맡겼다"고 한다. 일부 작가들은 미하일 7세가 일종의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에우도키아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는 주화와 대중적 도상학에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들 없이 은화와 동전에 등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은제 성유물함에 새겨진 비문에는 "로마인의 위대한 황후"(''megalē basilis tōn Romaiōn'')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아들들(단지 ''바실레우스''로 불림)보다 높은 지위를 가졌음을 시사한다. 1067년의 일부 비문은 남성형 칭호인 황제를 그녀에게 부여한다. 1067년 말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테르테론에는 '에우도키아와 미하일, 황제'라고 새겨져 있고, 1067년 5월에서 12월 사이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봉인에는 '에우도키아, 미하일과 콘스탄티오스, 로마인의 황제'라고 새겨져 있다.

6. 2. 부정적 평가

에우도키아는 남편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가 죽기 전 재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고, 심지어 총대주교 앞에서도 맹세했다.[1] 그러나 혼자 권력을 휘두르면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군대에서 인기가 많았던 장군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를 선택했다.[1] 로마노스는 콘스탄티누스 10세가 죽기 직전 헝가리인들과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결정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1]

에우도키아는 로마노스 4세의 통솔력이 동방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진격을 막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1] 1067년 12월 25일, 에우도키아는 로마노스에게 대관식을 준비하기 위해 ''마기스트로스''와 ''스트라텔라테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1]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승인이 필요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에우도키아는 요한 8세를 속여 자신이 그의 형제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요한 8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맹세를 취소했다.[1] 결국 1068년 1월 1일, 결혼과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총대주교와 다른 관리들은 이에 놀랐다.[1]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에우도키아는 로마노스 4세를 "통치자가 아닌 신하"라고 명시적으로 불렀다.[1] 그러나 로마노스 4세는 곧 에우도키아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녀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1] 이러한 불만은 원로원과 군대의 한 파벌에서도 공유되었으며, 요한 두카스가 그 수장이었다.[1]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the Roman Emperors: From the Accession of Augustus to the Fall of the Last Constantine https://books.google[...] Baldwin, Cradock and Joy
[2] 서적 Byzantium. 2: The apogee Penguin Books 1993
[3] 서적 Land and privilege in Byzantium: the institution of prono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4] 웹사이트 Eudocia Macrembolitissa https://www.britanni[...]
[5] 서적
[6] 서적 1995
[7] 서적 Diogenes Laertius: Lives of Eminent Philosophers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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