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7세 두카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미하일 7세 두카스는 105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난 비잔틴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사망 후 17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정치에는 무관심하여 어머니와 삼촌이 섭정했다. 미하일 7세는 무능한 통치로 인해 제국의 경제를 악화시키고, 군대의 반란과 영토 상실을 초래했다. 결국, 그는 니케포로스 3세의 반란으로 퇴위하여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이후 에페소스의 대주교가 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송나라에 사절단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대 에페소스인 - 헤로스트라토스
명성을 얻기 위해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운 헤로스트라토스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후대에 전해져 범죄를 통해 악명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상징이 되었다. - 고대 에페소스인 - 교황 요한 6세
교황 요한 6세는 701년부터 705년까지 재임한 그리스 출신 교황으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유지, 랑고바르드족 침입으로부터의 로마 보호, 잉글랜드 교회 문제 관여 등 교회 행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두카스 왕조 - 이리니 두케나
이리니 두케나는 11세기 비잔티움 제국 황후로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의 아내였으며, 남편의 즉위에 기여했으나 시어머니와의 갈등, 딸과 함께 황제에 맞선 음모 실패 후 수녀원 유폐, 그리고 자선 및 문학 후원 활동을 했다. - 두카스 왕조 - 알라니아의 마리아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조지아 왕 바그라트 4세의 딸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황후로, 미하일 7세 두카스와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와 결혼했으며,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즉위에 영향을 미치고 만년에는 수도원에서 조지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미하일 7세 두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군주 |
로마자 표기 | Mikhaēl VII Doukas o Parapinakēs |
별칭 | minus a quarter |
통치 | |
즉위 | 1071년 10월 |
퇴위 | 1078년 3월 |
대관식 | 1060년 경 (공동 황제로서) |
대관식 형식 | 대관식 |
이전 통치자 |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
다음 통치자 | 니케포로스 3세 보타네이아테스 |
섭정 |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1071년 10월 ~ 11월) |
공동 황제 | 레오 디오게네스 (1070년)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 (1070년)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개인 정보 | |
출생 | 1050년 경 |
사망 | 1090년 (40세 경) |
배우자 | 알라니아의 마리아 |
자녀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아버지 |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 |
어머니 |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
종교 | 동방 정교회 |
가문 | |
왕조 | 두카스 왕조 |
2. 생애
미하일 7세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가 사망하고 어머니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가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와 결혼하면서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제국에 패배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게 되었다.
미하일 7세는 학문에는 관심이 많았으나 정치에는 무능하여, 재무 장관 니케포리체스에게 의존했다. 니케포리체스는 세금을 인상하고 사치스러운 지출을 늘렸으며, 이는 군대의 약화와 경제난을 초래했다. 1071년에는 이탈리아의 마지막 영토인 바리를 노르만족에게 잃었고, 발칸반도에서는 게오르기 보이테흐의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소아시아에서는 루셀 드 바유를 비롯한 용병들의 반란이 잇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니케포로스 보타니아테스가 각각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078년 보타니아테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자, 미하일 7세는 저항 없이 왕위를 포기하고 스투디우스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이후 에페소스의 대주교가 되었고 109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미하일 7세는 송나라에 대사관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중국-로마 관계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미하일 7세는 105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와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1060년 말경 갓 태어난 동생 콘스탄티오스 두카스와 함께 또는 그 직전에 왕위에 연루되었을 것이다.[2] 1067년 5월 23일 콘스탄티누스 10세가 사망하자, 미하일 7세는 이미 17세로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 에우도키아와 삼촌 요한 두카스가 섭정으로서 제국을 통치했다.
1068년 1월 1일, 에우도키아는 장군 로마노스 4세와 결혼했고, 로마노스 4세는 미하일 7세, 콘스탄티오스, 그리고 또 다른 형제 안드로니코스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1071년 8월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투르크의 알프 아르슬란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자, 미하일 7세는 배후에 머물렀고, 권력 장악은 그의 삼촌 요한 두카스와 그의 가정교사 미하일 프셀로스가 주도했다. 미하일 7세는 1071년 10월 1일 황제로 선포되었지만, 에우도키아는 수도원으로 보내지기 전 한 달 동안 섭정을 맡았다.
2. 2. 만지케르트 전투의 여파와 내우외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투르크의 알프 아르슬란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자, 미하일 프셀로스와 그의 삼촌 요한 두카스가 권력을 잡았다. 미하일 7세는 1071년 10월 1일 황제로 선포되었지만,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는 수도원으로 보내지기 전 한 달 동안 섭정으로 통치했다.미하일 7세는 재무 장관 니케포리체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황제는 무능했고, 아첨하는 궁정 관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1] 제국 관리들은 재산을 몰수했고 심지어 교회의 재산 일부를 몰수했다. 급여가 부족한 군대는 반란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1071년에 이탈리아의 마지막 영토인 바리를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족에게 잃었다. 동시에, 게오르기 보이테흐 아래 불가리아 국가의 부활을 시도하면서 발칸에서 심각한 반란에 직면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소아시아에서 잃은 것을 회복할 수 없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티움 정부는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의 형제인 이사크 콤네노스 휘하의 새로운 군대를 셀주크 투르크를 제압하기 위해 보냈지만, 이 군대는 1073년에 패배했고 지휘관은 포로로 잡혔다. 문제는 갈라티아와 리카오니아 지역에 독립적인 공국을 건설하고 있던 루셀 드 바유 휘하의 비잔티움 서부 용병들의 탈주로 더욱 악화되었다. 요한 두카스가 이끄는 다음 군사 원정 역시 실패로 끝났고, 요한 역시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승리한 루셀은 요한 두카스에게 왕위 찬탈자 역할을 강요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로 맞은편인 크리소폴리스를 약탈했다. 알렉시우스 콤네노스 (미래의 황제) 휘하의 새로운 군대는 마침내 용병들을 물리치고 1074년에 요한 두카스를 포획했다.
이러한 불운은 통화 가치 절하로 악화되어 광범위한 불만을 야기했고, 황제는 "파라피나케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1078년에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니케포로스 보타니아테스가 각각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타니아테스는 셀주크 투르크의 지원을 받았고,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미하일 7세는 1078년 3월 24일 또는 31일에 거의 저항하지 않고 왕위를 사임하고 스투디우스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1067년 부친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 사망 후, 미하일이 황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어린 나이였기에 모친 에우도키아가 여황제로 즉위했다. 1068년, 민중과 귀족들의 군사 정권 수립에 대한 희망으로 에우도키아는 퇴위하고, 그녀와 결혼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가 황위를 계승했다. 1071년, 로마노스 4세가 친정했던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게 대패하고, 로마노스 자신도 포로로 잡히자, 에우도키아는 남편을 폐위하고 아들 미하일을 황제로 즉위시켰다. 같은 해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석방된 로마노스는 미하일 7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했지만, 체포되어 눈이 멀고 추방당했다(이듬해 사망). 이로 인해 패전 후 로마노스 4세와 셀주크 제국이 맺은 강화 조약이 파기되었고, 셀주크 제국은 이를 구실로 제국 침략을 시작하여, 이후 소아시아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기게 되었다.
로마노스 4세의 대패와 그 후의 제위 쟁탈 내분으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도 움직임이 일어났다. 1071년, 노르만족이 동로마 영토였던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에키아)를 침공하여, 같은 해 마지막 거점이었던 바리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 이래 이어져 오던 동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 지배도 막을 내렸다.
잇따른 내분과 전쟁으로 제국 경제도 크게 동요했다. 환관 니케포리치스를 중용하여 곡물 무역을 전매화하고 곡물 가격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로 인해 곡물 가격뿐만 아니라 일반 물가도 상승하여 분노한 민중들이 정부 창고를 습격, 파괴했다.
제국 내부에서도, 노르만 용병대장 루셀 드 바유와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니케포로스 보타니아테스 등 군사 귀족들의 반란이 각지에서 잇따랐다. 이러한 가운데, 1078년 1월 7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민중은 하이야 소피아 대성당에서 아직 소아시아에 있던 니케포로스 보타니아테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니케포로스는 수도로 진군했고, 이에 호응하여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미하일 7세는 퇴위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2. 3. 퇴위와 죽음
미하일 7세는 미하일 프셀로스와 요한 두카스의 조언을 계속 받았지만, 재무 장관 니케포리체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황제의 주요 관심사는 프셀로스가 형성한 학문적 추구에 있었고, 그는 니케포리체스가 군대에 적절한 자금 지원 없이 세금 인상과 사치성 지출을 증가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그는 황제로서 무능했고, 종종 아첨하는 궁정 관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2] 심각한 곤경에 처한 제국 관리들은 재산을 몰수했고 심지어 교회의 재산 일부를 몰수했다. 급여가 부족한 군대는 반란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었고, 비잔틴 제국은 1071년에 이탈리아의 마지막 영토인 바리를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족에게 잃었다. 동시에, 게오르기 보이테흐 아래 불가리아 국가의 부활을 시도하면서 발칸에서 심각한 반란에 직면했다. 이 반란은 장군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비잔틴 제국은 소아시아에서 잃은 것을 회복할 수 없었다.- -|]]|thumb|미하일 7세 두카스의 ''밀리아레시온'']]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틴 정부는 미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의 형제인 이사크 콤네노스 휘하의 새로운 군대를 셀주크 투르크를 제압하기 위해 보냈지만, 이 군대는 1073년에 패배했고 지휘관은 포로로 잡혔다. 문제는 갈라티아와 리카오니아 지역에 독립적인 공국을 건설하고 있던 루셀 드 바유 휘하의 비잔틴 서부 용병들의 탈주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은 미하일의 삼촌, ''카이사르'' 요한 두카스가 이끄는 다음 군사 원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 원정 역시 실패로 끝났고, 요한 역시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승리한 루셀은 이제 요한 두카스에게 왕위 찬탈자 역할을 강요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로 맞은편인 크리소폴리스를 약탈했다. 말리크 샤 1세가 보낸 셀주크 군대의 지원을 받은 알렉시우스 콤네노스 (미래의 황제) 휘하의 새로운 군대는 마침내 용병들을 물리치고 1074년에 요한 두카스를 포획했다.
이러한 불운은 통화 가치 절하로 악화되어 광범위한 불만을 야기했고, 이로 인해 황제는 "파라피나케스"(Παραπινάκηςgrc)라는 별명을 얻었다. 1078년에 두 명의 장군,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니케포로스 보타니아테스가 각각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타니아테스는 셀주크 투르크의 지원을 받았고, 그는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미하일 7세는 1078년 3월 24일 또는 31일에 거의 저항하지 않고 왕위를 사임하고 스투디우스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그는 나중에 에페소스의 대주교가 되었고 109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2]
왕위에서 물러나기 전에 미하일 7세는 송나라에 대사관을 보냈을 수 있으며, 이는 중국의 초기 당나라에 대한 일련의 비잔틴 대사관에 따른 것이다. 중국 역사가 마두안린 (1245–1322)이 쓴 ''문헌통고''와 14세기 작품 ''송사''를 통해 푸린 (즉, 비잔티움)의 통치자 "미에-리-이-링-가이-사" (滅力伊靈改撒)가 송나라에 보낸 대사관이 송 신종 (1067–1085년 재위) 시대인 1081년 11월에 도착했음이 알려져 있다. ''송사''는 "니-시-투-링-시-멍-판"이라는 비잔틴 외교관이자 관리가 안장된 말, 칼날, 진짜 진주를 송나라 조정에 공물로 바쳤다고 언급한다.
1075년, 여동생 테오도라 두카이나 콤네나를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元首) 도메니코 셀보에게 시집보냈다. 막내 여동생 조에는 알렉시우스 콤네노스의 동생 아드리아누스와 결혼했다.
제국 내부에서도, 노르만 용병대장 루셀 드 바유와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니케포로스 보타니아테스 등 군사 귀족들의 반란이 각지에서 잇따랐다. 이러한 가운데, 1078년 1월 7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민중은 하이야 소피아 대성당에서 아직 소아시아에 있던 니케포로스 보타니아테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니케포로스는 수도로 진군했다. 이에 호응하여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미하일 7세는 퇴위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3. 가족
바그라트 4세의 딸인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1]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낳았다.[1]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는 1075년부터 1078년까지, 그리고 1081년부터 1087/8년까지 공동 황제였다가 1095년에 사망했다.[1] 1075년, 여동생 테오도라 두카이나 콤네나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元首) 도메니코 셀보와 결혼했다. 막내 여동생 조에는 알렉시우스 콤네노스의 동생 아드리아누스와 결혼했다.
4. 평가
미하일 7세는 학문적 소양은 뛰어났지만, 정치와 국정 운영에는 무능한 황제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유능한 관료들에게 국정을 맡겼으나, 이들의 실책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1] 특히 재정 장관 니케포리체스는 세금을 인상하고 과도한 지출을 일삼아 경제를 악화시켰고, 군대에 대한 보급도 소홀히 하여 국방력을 약화시켰다.[1]
이러한 실정은 노르만족의 침입과 셀주크 투르크의 발흥으로 이어져 제국의 영토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은 제국의 안정을 크게 위협했다.[1]
결국 미하일 7세는 이러한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위해야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화폐 가치가 크게 하락하여, 그는 "파라피나케스"(모자란 놈)[1]παραπινάκης|파라피나케스grc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1]
5. 찬탈자
미하일 7세는 여러 찬탈자들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찬탈자 | 상세 |
---|---|
네스토르 | 콘스탄티누스 10세의 노예였으나 파라두나본의 둑스로 승진했다. 재무 장관 니케포리체스에게 재산을 몰수당한 후, 1076년경 반란을 일으켰다. 페체네그족의 도움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트라키아를 약탈했다. 1078년 알렉시오스 콤네노스에게 패배한 후 파라두나붐으로 후퇴했다. |
필라레토스 브라카미오스 | |
요한 두카스 | 미하일 7세의 삼촌으로, 카이사르 칭호를 받았다. |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 |
니케포로스 보타니아테스 |
6. 외교 관계
1067년 부친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의 사망 후, 미하일이 황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어린 나이였기에 모친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가 여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듬해 1068년, 민중과 귀족들의 군사 정권 수립에 대한 희망으로 에우도키아는 퇴위하고, 그녀와 결혼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가 황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1071년, 로마노스 4세가 친정했던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게 대패하고, 로마노스 자신도 포로로 잡히자, 에우도키아는 남편을 폐위하고 아들 미하일을 황제로 즉위시켰다. 같은 해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석방된 로마노스는 미하일 7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했지만, 체포되어 눈이 멀고 추방당했다(이듬해 사망). 이로 인해 패전 후 로마노스 4세와 셀주크 제국이 맺은 강화 조약이 파기되었고, 셀주크 제국은 이를 구실로 제국 침략을 시작하여, 이후 소아시아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기게 되었다.
로마노스 4세의 대패와 그 후의 제위 쟁탈 내분으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도 움직임이 일어났다. 1071년, 노르만족이 동로마 영토였던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에키아)를 침공하여, 같은 해 마지막 거점이었던 바리를 함락시켰다. 이렇게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 이래 이어져 오던 동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 지배도 막을 내렸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틴 정부는 미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의 형제인 이사크 콤네노스 휘하의 새로운 군대를 셀주크 투르크를 제압하기 위해 보냈지만, 이 군대는 1073년에 패배했고 지휘관은 포로로 잡혔다. 문제는 갈라티아와 리카오니아 지역에 독립적인 공국을 건설하고 있던 루셀 드 바유 휘하의 비잔틴 서부 용병들의 탈주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은 미하일의 삼촌, ''카이사르'' 요한 두카스가 이끄는 다음 군사 원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 원정 역시 실패로 끝났고, 요한 역시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승리한 루셀은 이제 요한 두카스에게 왕위 찬탈자 역할을 강요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로 맞은편인 크리소폴리스를 약탈했다. 말리크 샤 1세가 보낸 셀주크 군대의 지원을 받은 알렉시우스 콤네노스 (미래의 황제) 휘하의 새로운 군대는 마침내 용병들을 물리치고 1074년에 요한 두카스를 포획했다.
왕위에서 물러나기 전에 미하일 7세는 송에 대사관을 보냈을 수 있으며, 이는 중국의 초기 당나라에 대한 일련의 비잔틴 대사관에 따른 것이다. 중국 역사가 마두안린 (1245–1322)이 쓴 ''문헌통고''와 14세기 작품 ''송사''를 통해 푸린 (즉, 비잔티움)의 통치자 "미에-리-이-링-가이-사" (滅力伊靈改撒)가 송나라에 보낸 대사관이 송 신종 (1067–1085년 재위) 시대인 1081년 11월에 도착했음이 알려져 있다. ''송사''는 "니-시-투-링-시-멍-판"이라는 비잔틴 외교관이자 관리가 안장된 말, 칼날, 진짜 진주를 송나라 조정에 공물로 바쳤다고 언급한다.
1075년, 여동생 테오도라 두카이나 콤네나를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元首) 도메니코 셀보에게 시집보냈다. 막내 여동생 조에는 알렉시우스 콤네노스의 동생 아드리아누스와 결혼했다.
참조
[1]
문서
ノミスマは貨幣単位
[2]
문서
メディムノスは質量の単位。現在の何グラムに当たるかは不明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