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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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리코 단테는 1884년 로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유학 후 카프라니카 대학 및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신학, 교회법, 시민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철학 및 신학을 가르쳤으며, 교황청 내사원과 예부성성에서 봉직했다. 1947년 교황 전례원장에 임명되어 교황과 추기경들의 전례를 감독했고, 여러 차례의 교황 선거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관련 회의를 관리했다. 1962년 주교, 1965년 추기경이 되었으며, 1967년 로마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산타가타 데이 고티 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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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단테 | |
---|---|
기본 정보 | |
존칭 접두사 | 각하 |
이름 | 엔리코 단테 |
직함 | 교황 전례 담당관 산타가타 데이 고티의 추기경 사제 |
![]()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사목 | |
서임 | 1965년 2월 22일 |
선임자 | 존 프랜시스 달턴 |
후임자 | 실비오 안젤로 피오 오디 |
임기 종료 | 1967년 4월 24일 |
서품 | 1910년 7월 3일 |
서품자 | 주세페 체페텔리 |
주교 서임 | 1962년 9월 21일 |
주교 서임자 | 교황 요한 23세 |
추기경 서임 | 1965년 2월 22일 |
추기경 서임자 | 교황 바오로 6세 |
계급 | 추기경 사제 |
이전 직위 | 교황청 의전관 (1947–1965) 카르파시아 명의 대주교 (1962–1965) 의전성 장관 (1960–1967)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884년 7월 5일 |
출생지 | 로마, 이탈리아 왕국 |
사망일 | 1967년 4월 24일 |
사망지 | 로마, 이탈리아 |
추기경 스타일 정보 | |
호칭 | 각하 |
공식 호칭 | 각하 |
종교적 호칭 | 추기경 |
교구 | 산타가타 데이 고티 성당 |
2. 약력
엔리코 단테는 주세페 가리발디의 열렬한 지지자인 아버지 아킬레 단테와 어머니 젠나이데 인제니 사이에서 로마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공부한 후 로마의 카프라니카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신학, 교회법, 시민법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교황청 공소원에서 교회법 변호사(avvocato rotale) 면허증을 취득했다.[7]
1910년 7월 3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7] 1911년부터 1928년까지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철학을, 1947년까지 신학을 가르쳤다. 1913년부터 교황청 내사원에서 근무했고, 1914년 3월 25일 교황 전례위원단의 구성원이 되었다. 1923년 교황 전례위원과 더불어 교황청 예부성성에 들어갔다가 1930년 9월 28일 교체되었다. 1943년 몬시뇰 호칭을 받음과 동시에 예부성성 차관으로 등용되었다.[7]
1947년 6월 13일 교황 전례원장에 임명되어 교황과 추기경들이 집전하는 미사와 각종 전례를 보좌하고 감독했다.[1] 교황 베네딕토 15세, 교황 비오 12세, 교황 요한 23세, 교황 바오로 6세가 선출된 1914년, 1922년, 1939년, 1958년, 1963년 콘클라베를 감독했고, 1953년 교황 비오 12세의 추기경회의 주재를 보좌하며 그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7]
1959년 1월 25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발표한 특별 추기경회의 관리를 담당했다.[4] 1962년 8월 28일 카르파시아의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 21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으나 일련의 개혁들에 찬동하지 않았다.[5]
1965년 2월 22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산타가타 데이 고티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67년 4월 24일 로마에서 향년 82세로 선종하였으며, 산타가타 데이 고티 성당에 안장되었다.
2. 1. 사제, 학자, 교황청 관료
엔리코 단테는 주세페 가리발디의 열렬한 지지자인 아버지 아킬레 단테와 어머니 젠나이데 인제니 사이에서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후 로마의 카프라니카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또한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신학, 교회법, 시민법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교황청 공소원에서 교회법 변호사(avvocato rotale) 면허증을 취득하였다.[7]1910년 7월 3일 사제 서품을 받은 단테는[7] 1911년부터 1928년까지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며, 이후 1947년까지는 신학을 가르쳤다. 1913년부터 교황청 내사원에서 근무한 그는 1914년 3월 25일 교황 전례위원단의 구성원이 되었다. 1923년 그는 교황 전례위원과 더불어 교황청 예부성성에 들어갔다가 1930년 9월 28일 교체되었다. 1943년 그는 몬시뇰 호칭을 받음과 동시에 예부성성 차관으로 등용되었다.[7]
1947년 6월 13일 교황 전례원장에 임명된 단테는 교황과 추기경들이 집전하는 미사와 각종 전례를 보좌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1] 교황 전례원장으로서 그는 교황 베네딕토 15세와 교황 비오 12세, 교황 요한 23세, 교황 바오로 6세가 선출된 1914년, 1922년, 1939년, 1958년 그리고 1963년 콘클라베를 감독했다. 1953년 교황 비오 12세의 추기경회의 주재를 보좌한 그는 교황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7]
1959년 1월 25일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발표한 특별 추기경회의 관리를 담당했다.[4] 1962년 8월 28일 그는 카르파시아의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단테는 같은 해 9월 21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후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으나 일련의 개혁들에 찬동하지 않았다.[5]
2. 2. 교황 전례원장
1947년 6월 13일 교황청 의식원의 의전 담당관(교황 전례원장)으로 임명된 단테는 교황과 다른 추기경들이 거행하는 성스러운 의식을 돕고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1] 교황 전례원장으로서 그는 교황 베네딕토 15세와 교황 비오 12세, 교황 요한 23세, 교황 바오로 6세가 선출된 1914년, 1922년, 1939년, 1958년, 1963년의 교황 선거 공의회(콘클라베)를 감독했다.[3] 1953년 그는 자신이 깊이 존경했던 교황 비오 12세의 추기경회의 주재를 보좌했다.[7] 1959년 1월 25일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발표한 특별 추기경회의 관리를 담당했다.[4] 1962년 8월 28일 그는 카르파시아의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단테는 같은 해 9월 21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다.2. 3. 주교, 추기경, 그리고 죽음
엔리코 단테는 1962년 8월 28일 카르파시아의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9월 21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주교 서품을 받았다.[8]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으나, 일련의 개혁들에는 찬동하지 않았다.[8]
1965년 2월 22일, 단테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산타가타 데이 고티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67년 4월 24일 이른 아침, 단테는 로마에서 향년 82세를 일기로 선종하였으며, 그의 명의본당인 산타가타 데이 고티 성당에 안장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wissen.spiegel.de/wi[...]
[2]
잡지
Religion: Three in Pectore
https://content.time[...]
1960-04-11
[3]
서적
John XXIII A biography
1984
[4]
서적
[5]
잡지
Religion: Crisis of Immutability
https://content.time[...]
1962-11-09
[6]
잡지
A Roman education: a college kid at the council. (Second Vatican Council)
https://www.commonwe[...]
2004-12-17
[7]
웹사이트
wissen.spiegel.de/wi[...]
[8]
잡지
Crisis of Immutability
http://www.time.com/[...]
196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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