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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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비오 12세는 187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 1939년부터 1958년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으로 재임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바티칸의 중립을 유지하며, 41개의 회칙과 수많은 연설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설명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성모 승천 교리를 선포하고, 과학과 종교의 조화를 강조했으며, 동방 가톨릭 교회의 자치권 강화에 힘썼다. 비오 12세는 생전과 사후 모두 다양한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에 대한 침묵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대응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는 1965년 시성 조사가 시작되었으나, 2014년 시복 과정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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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1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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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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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교황 존자 |
이름 | 비오 12세 |
직함 | 로마 주교 |
모토 | ("정의의 일은 평화다" [이사 32:17]) |
출생 이름 |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 |
교회 | 가톨릭 교회 |
재임 시작 | 1939년 3월 2일 |
재임 종료 | 1958년 10월 9일 |
선임자 | 비오 11세 |
후임자 | 요한 23세 |
서품 | 1899년 4월 2일 |
서품자 |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카세타 |
주교 서임 | 1917년 5월 13일 |
주교 서임자 | 베네딕토 15세 |
추기경 서임 | 1929년 12월 16일 |
추기경 서임자 | 비오 11세 |
출생일 | 1876년 3월 2일 |
출생지 | 로마, 이탈리아 왕국 |
사망일 | 1958년 10월 9일 |
사망지 | 카스텔간돌포, 라치오 주, 이탈리아 |
이전 직책 | 국무원 외무부 차관 (1912–1914) 국무원 외무부 장관 (1914–1917) 바이에른 교황대사 (1917–1925) 사르디스 명의 대주교 (1917–1929) 독일 교황대사 (1920–1930) 프로이센 교황대사 (1926–1929)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알 첼리오 추기경 (1929–1939) 국무원 장관 (1930–1939) 국무원 외무부 장관 (1930–1939) 성 베드로 대성당 대사제 (1930–1939) 사도좌 재무원장 (1935–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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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비오 |
교육 | 알모 콜레지오 카프라니카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교황청립 로마 아테나이움 S. 아폴리나레 라 사피엔차 주립대학교 |
숭배 | 가톨릭 교회 |
시성 단계 | 존자 |
사제 서품 | |
사제 서품자 |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카세타 |
사제 서품일 | 1899년 4월 2일 |
주교 서임자 | 베네딕토 15세 |
공동 서임자 | 아고스티노 잠피니 조반니 바티스타 나살리 로카 디 코르넬리아노 |
주교 서임일 | 1917년 5월 13일 |
주교 서임 장소 | 성 베드로 대성당, 로마 |
추기경 임명자 | 비오 11세 |
추기경 임명일 | 1929년 12월 16일 |
주교 1 | 미셸 조제프 부르기뇽 데르비니 |
주교 서임일 1 | 1926년 3월 29일 |
주교 2 | 주세페 피차르도 |
주교 서임일 2 | 1930년 4월 27일 |
주교 3 | 루이지 첸토즈 |
주교 서임일 3 | 1932년 2월 14일 |
주교 4 | 프랜시스 조셉 스펠먼 |
주교 서임일 4 | 1932년 9월 8일 |
주교 5 | 알베르 레바메 |
주교 서임일 5 | 1934년 2월 4일 |
주교 6 | 사베리오 리터 |
주교 서임일 6 | 1935년 8월 11일 |
주교 7 | 마우리리오 실바니 |
주교 서임일 7 | 1936년 9월 13일 |
주교 8 | 외젠 가브리엘 제르베 로랑 티세랑 |
주교 서임일 8 | 1937년 7월 25일 |
주교 9 | 프란체스코 베네데토 치알레오 |
주교 서임일 9 | 1939년 10월 29일 |
주교 10 | 카를로 콘팔로니에리 |
주교 서임일 10 | 1941년 5월 4일 |
발음 |
2. 생애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Eugenio Maria Giuseppe Giovanni Pacelliita)는 1876년 로마의 검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교황청과 깊은 인연을 맺으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성직자의 길을 결심하고 신학과 교회법 등을 공부하였다.[9][10][11][12]
1899년 사제 서품 후 교황청 국무원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 아래에서 교회법전 편찬 등 실무 경험을 쌓았다. 이후 교황 대사로서 독일 제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활동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노력과 전후 독일 교회 안정에 기여했고, 여러 독일 주(州)와 정교조약(콘코르다트) 체결을 이끌었다.[69][70][71]
1929년 추기경으로 서임되고 1930년 교황청 국무원장에 임명되어 교황청 외교를 총괄했다. 이 시기 나치 독일과 체결한 ''라이히스콘코르다트''(1933)는 독일 내 가톨릭교회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목적이었으나, 히틀러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비판과 함께 역사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73] 파첼리는 나치 정권의 조약 위반에 지속적으로 항의했으며,[81] 나치즘을 비판한 회칙 ''불타는 마음으로''(Mit brennender Sorge, 1937) 작성에도 깊이 관여했다.[82][83]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12세가 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전쟁의 참화와 냉전 시대를 겪으며 바티칸 시국의 중립을 표방하고 외교적 노력과 구호 활동에 힘썼다.[155][156] 전후에는 교회의 국제화를 추진하고 공산주의 확산에 대응하는 입장을 취했다.[98][271] 특히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시기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침묵 논란 등 오늘날까지도 많은 연구와 논쟁이 진행 중이다.[212] 1958년 카스텔간돌포에서 선종하였다.[278]
2. 1. 생애 초기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는 1876년 3월 2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이른바 검은 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교황청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으며, 할아버지 마르칸토니오 파첼리는 교황청의 고위 관료였고 아버지는 교회법 변호사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우제니오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 깊은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12세에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로마의 여러 교육 기관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사제의 길을 준비했다.[9][10][11][12][14][15][16][17]2. 1. 1. 출생과 유년 생활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ita)는 사순 제2주일이었던 1876년 3월 2일 이탈리아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9] 그의 부모는 변호사였던 필리포 파첼리(Filippo Pacelli, 1837~1916)와 비르지니아 그라치오시(Virginia Graziosi, 1844~1920)였다.
파첼리 가문은 로마에서 강한 가톨릭 신심을 지녔으며, 역사적으로 교황청과 깊은 관계를 맺어 온 귀족 가문, 이른바 검은 귀족이었다. 이 가문은 교황령 정부에서 대대로 요직을 차지한 명문가였는데, 그의 할아버지 마르칸토니오 파첼리(Marcantonio Pacelli)는 교황청 재무부 차관[9]을 거쳐 교황 비오 9세 치하에서 내무장관(1851~1870)을 역임했으며, 1861년 바티칸의 신문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ita) 창간에 기여했다.[10][11] 할아버지의 사촌인 에르네스토 파첼리(Ernesto Pacelli)는 교황 레오 13세의 주요 재정 고문이었고, 아버지 필리포 파첼리는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12]이자 로마 로타의 학장이었다. 그의 형 프란체스코 파첼리(Francesco Pacelli, 1872~1935)는 평신도 교회법 전문가로서, 1929년 베니토 무솔리니와 라테란 조약을 협상하여 로마 문제를 마무리 지을 때 교황 비오 11세의 법률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에우제니오는 형 프란체스코와 두 누이 주세피나(Giuseppina, 1874~1955), 엘리사베타(Elisabetta, 1880~1970)[13]와 함께 로마 중심부의 파리오네 지구에서 자랐다. 1880년 가족이 비아 베트리나(Via Vetrina)로 이사한 후, 그는 피아자 피암메타(Piazza Fiammetta)에 있는 프랑스계 신의 섭리 수녀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가족은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에우제니오는 이곳에서 첫영성체를 하고 1886년부터 시종으로 봉사했다. 같은 해 그는 베네치아 광장 근처의 주세페 마르키(Giuseppe Marchi) 교수의 사립학교에도 다녔다.[14]
12세 때, 그는 법률가가 되는 대신에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초등교육을 마친 후, 1891년 아버지는 그를 엔니오 키리노 비스콘티 리체오 긴나시오(Ennio Quirino Visconti Liceo Ginnasio)에 보냈다. 이 학교는 당시 로마 최고의 예수회 교육기관이었던 콜레지오 로마노 내에 위치한 국립 학교였는데, 당시 사회에는 반가톨릭 풍토가 지배적이었다.
1894년, 18세가 된 파첼리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교인 알모 콜레지오 카프라니카(Almo Collegio Capranica)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15] 같은 해 11월, 그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강좌를, 성 아폴리나레 교황 로마 아테네움(Pontificio Ateneo Romano di Sant'Apollinare, 현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신학 강좌를 수강 등록했다. 또한 국립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에도 등록하여 현대 언어와 역사를 공부했다.
그러나 첫 학년이 끝난 1895년 여름, 그는 카프라니카와 그레고리오 대학교를 모두 그만두었다. 그의 여동생 엘리사베타는 카프라니카의 음식이 원인이었다고 회고했다.[16] 건강상의 이유로 특별히 허락을 받아 신학교 기숙사가 아닌 집에서 공부를 계속했으며, 신학교 시절 대부분을 외부 수강생으로 보냈다. 1899년, 그는 짧은 논문과 라틴어 구술 시험을 통해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신학 교육을 마쳤다.[17]
2. 1. 2. 탁덕과 몬시뇰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1899년 4월 2일 성 토요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01년, 그는 가족과 친분이 있던 빈첸초 반누텔리 추기경의 추천으로 교황청 국무원의 전신인 특무성성에 들어가 서기로 일하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04년 파첼리는 교황 의전관으로 임명되었고, 1905년에는 명예 고위 성직자인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그는 1904년부터 1916년까지 특무성성 장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의 조수로 활동하며 교회법전 편찬 작업을 도왔다. 또한, 1901년 1월에는 교황 레오 13세의 지시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 서거 시 에드워드 7세에게 보낼 조의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1908년에는 런던에서 열린 세계 성체 대회에 교황청 대표로 참석하여 윈스턴 처칠과 만났으며, 1911년에는 영국 왕 조지 5세의 즉위식에 교황청 대표로 참석했다.
파첼리는 1908년과 1911년에 각각 로마 대학교와 미국 가톨릭 대학교로부터 교회법 교수직을 제안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1911년에는 특무성성 부장관으로, 1914년에는 가스파리 추기경의 뒤를 이어 특무성성 장관으로 승진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파첼리는 전쟁 포로들의 명단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15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만나 이탈리아 관련 문제를 논의했다.
2. 2. 교황청 관료 생활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1899년 4월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교황청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훗날 국무원장이 되는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 밑에서 교회법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외교 및 법률 분야의 경험을 축적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평화 노력을 지원하는 외교 활동에 참여했으며, 1917년에는 교황 대사로 임명되어 독일 제국의 바이에른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독일 전체를 담당하는 교황 대사로서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전후 독일 사회의 안정과 교회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독일의 여러 주(州) 및 중앙 정부와 정교조약(콘코르다트)을 체결하는 데 힘썼는데, 이는 바이마르 헌법 하에서 약화될 수 있는 가톨릭교회의 교육 및 문화적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시기 바이에른(1924년), 프로이센(1929년) 등과의 정교조약 체결을 이끌었다.[69][70][71]
1929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곧이어 1930년에는 교황청 외교의 총책임자인 교황청 국무원장에 임명되었다. 1935년에는 교황 궁무처장 직책까지 겸임하며 교황청 내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국무원장으로서 파첼리는 유럽과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고, 오스트리아, 바덴, 유고슬라비아, 포르투갈 등 여러 국가와 정교조약 체결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71][72]
국무원장 재임 중 파첼리가 주도한 가장 중요한 외교적 사안 중 하나는 1933년 나치 독일과 체결한 ''라이히스콘코르다트''(제국 정교조약)이다. 파첼리는 이 조약을 통해 독일 내 가톨릭교회의 법적 지위와 활동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했으나,[73] 히틀러 정권에게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비록 조약 협상 자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진행되었지만, 나치 정권 수립 직후 체결되었다는 시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을 낳았다. 파첼리 자신은 나치 정권이 조약을 준수하지 않자 지속적으로 항의했으며(1933-1939년간 55회),[81] 1937년 나치즘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비판한 비오 11세의 회칙 ''불타는 마음으로(Mit brennender Sorge)'' 작성 과정에 깊이 관여하며 나치즘에 대한 교황청의 비판적 입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82][83]
이처럼 파첼리는 사제 서품 이후 교황청 내에서 외교관이자 행정가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이는 그가 훗날 교황으로 선출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2. 2. 1. 교황 대사


1917년 4월 23일,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에우제니오 파첼리를 사르디스의 명의주교와 바이에른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하였고, 같은 해 5월 13일에는 대주교로 승품시켰다. 착좌식 후 바이에른으로 이주했으며, 당시 프로이센이나 독일에 교황 대사가 상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첼리가 사실상 독일 제국 전체의 교황 대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파첼리는 뮌헨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종결을 위한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평화 제안을 독일 정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17년 5월 29일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3세를 만났고, 다음 날에는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와 베트만홀베크 총리를 만나 교황의 제안을 전달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군사적 승리를 원했던 독일군 최고 사령부의 반대로 독일 측의 공식 답변은 9월 20일까지 지연되었고, 베트만홀베크 총리도 곧 사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파첼리는 교황의 뜻에 따라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노력을 지속했다.
1920년 6월 23일, 바이에른과의 정교조약(콘코르다트)이 체결되면서 파첼리는 독일 전체의 교황 대사로 공식 임명되었고, 1925년에는 대사관을 베를린으로 이전했다. 뮌헨 시절부터 그를 보좌했던 로베르트 라이베르 신부,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 등 측근들도 베를린으로 함께 이동하여 계속 그를 도왔다. 베를린에서 파첼리는 교황청 외교단의 수장으로서 외교 활동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전후에는 사민당과 자유당이 참여한 바이마르 대연정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파첼리의 주요 외교 성과 중 하나는 독일의 여러 주 및 중앙 정부와의 정교조약 체결이었다. 바이마르 헌법 하에서 교육과 문화에 대한 주의 권한이 강화되자 가톨릭교회의 입지가 약화될 우려가 제기되었고, 이에 교황청은 정교조약을 통해 교회의 권리를 보장받고자 했다.
바이에른 주재 교황 대사 시절, 파첼리는 1924년 바이에른 주와 성공적으로 정교조약을 체결하여 다른 지역의 모델이 되기를 기대했다.[69][70] 이후 프로이센과도 협상을 진행하여 1929년 프로이센 콘코르다트를 체결했으나, 교육 문제를 제외하면 교회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로마로 이동한 후인 1932년에는 독일 바덴 주와도 정교조약을 체결했다.[71]
독일 전체와의 국가 단위 정교조약 체결은 파첼리가 교황 대사 시절부터 추진했던 주요 목표였으나, 개신교 및 사회주의 정당의 반대, 정국의 불안정, 주의 자치권 문제 등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74][75]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히틀러 정권은 국제적 인정을 얻고 가톨릭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정교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부총리 프란츠 폰 파펜이 로마로 파견되었고, 당시 국무원장 추기경이었던 파첼리를 대신하여 전 중앙당 의장 루트비히 카스 신부가 폰 파펜과 협상을 진행했다.[76][77][78] 그 결과 1933년 7월 20일, 파첼리가 교황청을 대표하고 폰 파펜이 독일을 대표하여 ''라이히스콘코르다트''(독일 제국 정교조약)에 서명했으며, 9월 10일 비준되었다.[79] 이 조약은 가톨릭 단체 보호(제31조), 가톨릭 학교 및 출판의 자유 보장 등을 명시했으나,[73] 나치 정권의 본질에 대한 우려 속에 체결 초기부터 논란이 되었다. 콘라트 폰 프라이징 주교 등 일부 성직자들은 히틀러 정권과의 타협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80]
나치 정권은 조약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고, 이에 파첼리는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조약 위반에 대해 55차례나 항의했다. 특히 1937년 초, 파첼리는 독일 추기경들과 협력하여 나치의 조약 위반과 나치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회칙 초안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교황 비오 11세의 이름으로 발표된 회칙 ''불타는 마음으로(Mit brennender Sorge)''이다. 이 회칙은 이례적으로 독일어로 작성되어 비밀리에 배포되었고, 종려주일에 독일 전역의 가톨릭 교회에서 낭독되어 나치즘을 공식적으로 규탄하는 최초의 주요 단체 성명이 되었다.[81][82] 이에 나치 정권은 관련 인쇄소를 폐쇄하고 성직자들을 탄압하는 등 보복 조치를 강화했다.[83] 파첼리는 이후에도 나치 정권이 정교조약을 준수할 기본적인 의지가 없음을 지적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84]
파첼리는 교황 대사 시절부터 나치즘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1935년 프랑스 루르드에서의 강론에서는 나치스를 "과거에 이미 단죄받았던 오류를 겉만 번지르르한 새 옷으로 갈아입힌 한심한 표절꾼들"이자 "인종 차별이라는 미신과 피의 우상에 지배"된 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며,[392] 1937년에는 베를린 주재 미국 영사에게 아돌프 히틀러를 "신뢰할 수 없는 악당으로 근본이 사악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반나치 성향의 독일 주교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393]
1929년 12월 16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산티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고, 1930년 2월 7일 교황청 국무원장에 임명되면서 교황 대사로서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1935년에는 교황 궁무처장 직책을 추가로 맡게 되었다.
2. 2. 2. 국무원장 및 궁무처장
1929년 12월 16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산티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된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몇 달 후인 1930년 2월 7일 교황청 국무원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1935년에는 교황 궁무처장 직책도 겸하게 되었다.
국무원장으로서 파첼리 추기경은 여러 나라와 정교조약(콘코르다트)을 체결하는 데 주력했다. 대표적으로 바덴(1932년), 오스트리아(1933년), 독일(1933년), 유고슬라비아(1935년), 포르투갈(1940년) 등과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들은 가톨릭교회가 청소년 단체, 사립학교, 병원, 카리타스 등 종교 시설을 설립하고 소유하는 것을 국가가 공인하며, 혼인 무효 선언 등 일부 사회 분야에 교회법 적용을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이는 19세기 이후 약화되었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각국의 가톨릭 신자와 교회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에서는 연방제 헌법으로 인해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 교회의 권한이 약화되었기에, 파첼리는 교황 사절 시절부터 독일 각 주(州)와의 콘코르다트 체결을 추진했다. 1924년 바이에른과 성공적으로 콘코르다트를 체결했고, 이후 프로이센(1929년), 바덴(1932년)과도 조약을 맺었다.
1870년 이후 단절되었던 외교 관계를 복원하면서 파첼리는 유럽 각국뿐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특히 1939년에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기도 했다. 또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1934년)와 헝가리 부다페스트(1938년)에서 열린 세계 성체 대회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었다.
파첼리는 당시 점증하던 반유대주의와 나치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1938년 헝가리 방문 당시, 반유대주의 법 제정에 대해 “오늘날 어느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모독하며 그분을 적대하고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지적하며 강하게 비판했다.[391] 1935년 프랑스 루르드에서는 25만 명의 신자 앞에서 나치스를 “과거에 이미 단죄받았던 오류를 겉만 번지르르한 새 옷으로 갈아입힌 한심한 표절꾼들”이자 “인종 차별이라는 미신과 피의 우상에 지배되어 있”는 오류 추종자들이라고 비판했다.[392] 1937년에는 베를린 주재 미국 영사에게 아돌프 히틀러를 “신뢰할 수 없는 악당으로 근본이 사악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반나치 성향의 독일 주교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393]
이 시기 파첼리의 활동 중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1933년 7월 20일 나치 독일과 체결한 ''라이히스콘코르다트''(제국 정교조약)이다. 파첼리는 교황청을 대표하여 이 조약을 주도했다. 독일과의 국가 차원 콘코르다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추진되었으나, 개신교 및 사회주의 정당의 반대, 정국 불안정, 주 정부의 자치권 문제 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74][75]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후, 나치 정권은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내부의 가톨릭계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정교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부총리 프란츠 폰 파펜이 로마로 파견되었고, 파첼리를 대신하여 전 독일 중앙당 의장인 사제 루트비히 카스가 실무 협상을 진행했다.[76][77][78] 조약은 7월 20일 파첼리와 폰 파펜이 서명하고 9월 10일 비준되었다.[79] 파첼리는 이 조약을 통해 독일 내 가톨릭 협회 보호(제31조), 가톨릭 학교 및 교육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을 보장받아 교회의 법적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73]
그러나 ''라이히스콘코르다트''는 나치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콘라트 폰 프라이징 주교 등 일부 성직자들은 나치 정권과의 타협에 대해 경고했다.[80] 실제로 나치 정권은 조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이에 파첼리는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조약 위반에 대해 55차례나 항의했다. 특히 1937년 초, 파첼리는 미하엘 폰 파울하버 추기경 등 독일 주교들의 도움을 받아 나치의 조약 위반과 나치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회칙 초안 작성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것이 바로 교황 비오 11세의 이름으로 발표된 회칙 ''불타는 마음으로''(Mit brennender Sorge)이다.[82] 이 회칙은 이례적으로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작성되어 비밀리에 배포되었고, 종려주일에 독일 전역의 가톨릭 성당에서 낭독되었다. 회칙은 나치즘의 이교적 성격을 강하게 비난했으며[81], 이는 주요 단체에 의한 최초의 공식적인 나치즘 규탄이었다. 이에 격분한 나치 정권은 회칙 인쇄소를 폐쇄하고 성직자들을 탄압하는 등 교회에 대한 보복 조치를 강화했다.[83] 훗날 교황이 된 비오 12세(파첼리)는 1941년 파사우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이히스콘코르다트''에 대해 "상대방(나치 정권)은 교회가 살고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와 권리를 수용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전제 조건조차 결여했음을 보여준다"고 술회했다.[84]
2. 3. 교황 선출과 즉위


1939년 2월 10일 교황 비오 11세가 선종하였다. 그의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해 소집된 콘클라베는 외교적 후보와 영적인 후보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해석이 있다.[87][88] 여러 추기경 가운데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의 외교적 경험, 특히 독일과 관련된 경험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여[87][88], 1939년 3월 2일, 그의 63번째 생일에 단 하루의 숙의와 세 번의 투표 끝에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87][88] 그는 1667년 교황 클레멘스 9세 이래 처음으로 국무원장 추기경으로서 교황에 선출되었으며[89], 교황 레오 13세 이후 처음으로 교황 궁무처장(카메를렌고)을 역임한 인물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파첼리가 자신의 선출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 투표를 요청했다는 소문도 있다.
선출이 확정된 후, 그는 자신의 교황명을 라틴어로 ‘경건한’이라는 뜻의 ‘비오(Pius)’로 정했다. 그는 “오늘부터 저는 저 자신을 비오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비오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님들을 여럿 모셨으며, 특히나 전임자이신 교황 비오 11세께 그동안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394][90] 이로써 그는 교황 비오 12세가 되었다.
비오 12세의 교황 대관식은 1939년 3월 12일에 거행되었다.
한편, 전임 교황 비오 11세는 파첼리 추기경이 자신의 후계자가 되기를 기대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시사한 바 있다. 1937년 12월 15일 마지막 추기경 서임식에서는 추기경들에게 파첼리를 가리키며 “그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91][92], 이전에도 “오늘 교황이 죽으면 내일 다른 교황이 생길 것입니다. 교회는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파첼리 추기경이 죽는다면 그것은 훨씬 더 큰 비극이 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3]

2. 4. 교황 재위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 3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1958년 선종할 때까지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전쟁의 참화와 냉전이라는 격동의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비오 12세는 전쟁 중 바티칸 시국의 공식적인 중립 정책을 표방하며[155]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전쟁 포로와 난민을 위한 구호 활동에도 힘썼다.[156][157] 전후에는 폐허가 된 유럽의 재건을 지원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하며 이에 대응하는 정책을 펼쳤다.[271][272] 또한, 로마 교황청의 국제화를 추진하여 비이탈리아인 성직자들을 주요 직책에 등용하고[98][99][100], 회칙 《복음 선포자》(1951)와 《신앙의 선물》(1957) 등을 통해 선교 지역의 자율성 강화와 문화적 토착화를 강조했다.[266][267] 그의 재위 기간 동안의 활동, 특히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시기의 역할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논쟁과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2. 4. 1. 인물 등용
비오 12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공석이 된 자신의 옛 직책인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루이지 마글리오네 추기경을 임명하였다. 바티칸의 노련한 외교관이었던 마글리오네 추기경은 스위스와의 외교관계를 재건하였으며 수년 동안 파리에서 교황 대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마글리오네 추기경은 비오 12세가 교황이 되기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훗날의 교황 바오로 6세)와 도메니코 타르디니처럼 교황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1944년 마글리오네 추기경이 사망하자, 비오 12세는 국무원장직을 공석으로 두고 타르디니를 외무부장으로, 몬티니를 내무부장으로 임명하였다.[94] 타르디니와 몬티니는 1953년 비오 12세가 그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려 할 때까지 해당 직책을 유지했다.[95]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추기경직 제안을 거절했으며,[96] 대신 주교 인장을 착용할 특권을 가진 서기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97] 타르디니는 비오 12세가 서거할 때까지 교황의 측근으로 남았고, 몬티니는 알프레도 일데폰소 슈스터 추기경 사후 밀라노 대주교가 되었다.
비오 12세는 로마 교황청 내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이탈리아인 중심의 인적 구성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독일과 네덜란드 출신 예수회 성직자인 로베르트 라이베르, 아우구스티누스 베아, 세바스찬 트롬프 등을 자신의 보좌진으로 등용하여, 이전까지 이탈리아인들이 사실상 독점해왔던 교황청의 문호를 개방해나갔다. 또한, 미국의 프랜시스 스펠만 추기경과 같은 미국인들에게도 교회 내 주요 직책을 맡기며 그들의 역할을 지원했다.[98][9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비오 12세는 이전의 어떤 교황보다도 더 많은 비이탈리아인을 등용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유고슬라비아 교황 대사 대리였던 조셉 P. 허리, 루마니아 교황 대사 게럴드 P. 오하라, 독일 교황 대사 알로이시우스 조셉 뮌히 등이 있다. 또한 처음으로 수많은 젊은 유럽인, 아시아인, 미국인들이 바티칸 내 여러 부서와 사무국에서 훈련을 받고 전 세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100]
비오 12세는 재위 기간 동안 단 두 차례의 추기경 서임식만을 거행했는데, 이는 17년간 17번의 서임식을 거행한 전임자 교황 비오 11세와는 대조적이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지 않아 추기경의 수가 38명까지 줄어들기도 했다. 당시 유일하게 생존한 미국인 추기경은 필라델피아의 데니스 조셉 더티였다.
1946년 2월 18일에 열린 첫 번째 서임식에서는 기록적인 32명의 새로운 추기경이 임명되었다. 이는 당시 추기경단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였으며, 추기경 정원 70명에 거의 도달하는 규모였다. 이 서임식에서 비오 12세는 추기경단 최대 규모를 70명으로 유지하면서도, 중국, 인도, 중동 출신 추기경들을 임명하고 아메리카 대륙 출신 추기경의 수를 늘림으로써 추기경단 내에서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줄였다.[101]
두 번째 서임식은 1953년 1월 12일에 거행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였던 도메니코 타르디니와 조반니 몬티니가 추기경으로 임명될 것으로 예상했다.[102] 비오 12세는 추기경들에게 이 두 사람이 원래 명단 가장 위에 있었음을 밝혔으나,[103] 그들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설명하고 대신 다른 승진으로 보상했다.[104] 몬티니와 타르디니는 비오 12세 서거 직후 추기경이 되었으며, 몬티니는 훗날 교황 바오로 6세로 선출되었다. 1946년과 1953년의 두 차례 서임식을 통해 500년 이상 지속되었던 이탈리아인 중심의 추기경단 구성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105]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고위 성직자들은 이러한 교황청의 국제화 노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러한 변화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나 항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106]
2. 4. 2. 사상과 신학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사상과 신학'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2. 4. 3. 제2차 세계대전 시절

1939년 3월 2일, 유럽에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은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12세'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비오 12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네딕토 15세의 선례에 따라 바티칸 시국의 공식적인 중립 정책을 표방하였다.[155] 그의 주요 목표는 교회의 존속과 사명을 보장하는 것이었다.[155] 그는 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 세계 지도자들에게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전쟁이 현실화되자 1939년 10월 첫 회칙인 ''Summi Pontificatus''를 통해 깊은 실망감을 표명하였다.
''Summi Pontificatus''는 비오 12세 재위 기간의 주요 주제들을 설정한 중요한 문서이다. 이 회칙은 폴란드 침공 직후 발표되었으며, 전쟁의 비극, 반유대주의, 전체주의,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나치 독일의 교회 박해를 규탄하였다.[159] 비오 12세는 유대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았거나 받지 않았거나 차별이 없다"는 교회의 평등 원칙을 재확인하고,[160] 모든 인간의 공통된 기원과 이성적 본성의 평등을 망각하는 것을 "해로운 오류"라고 지적하였다.[161] 그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과 도움"을 촉구하였으며,[162] 정의와 사랑, 자비를 통해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다짐하였다.[163] 또한 비전투원의 희생을 비난하였다.[223]
: [이것은] "암흑의 시간"... 폭력과 불화의 정신이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오는 시간입니다... 비극적인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국가들은 아마도 아직 "고난의 시작"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조차 수천 가정에 죽음과 황폐, 통곡과 비참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비전투원들의 피조차도 역사의 기록에 영원히 새겨진 교회에 대한 충실함과 그리스도교 문명 수호에 대한 공로로 인해 온 세상의 관대하고 형제적인 동정심을 받을 권리가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폴란드와 같은 국가에 대해 애처로운 비가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강력한 중재에 의지하여 정의와 진정한 평화의 원칙과 조화를 이루는 부활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159]
이 회칙은 이전 교황들의 회칙(Non abbiamo bisogno, Mit brennender Sorge, Divini redemptoris)에서 다룬 주제를 이어받아 "반기독교 운동"을 비판하고, 오류에 빠진 이들을 교회로 인도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164] 그는 박해에 직면하여 "겁"을 보이는 이들을 질책하며 저항을 독려하였다.[164] 그러나 비오 12세는 이 회칙에서 히틀러리즘이나 스탈린주의를 명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의 재임 기간 내내 논란이 된 중립적 태도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166]
전쟁 기간 동안 비오 12세는 바티칸을 국제적인 구호 활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156] 그의 지시에 따라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훗날 교황 바오로 6세)의 책임 아래 전쟁 포로와 난민을 위한 정보 사무소가 운영되었다. 1939년부터 1947년까지 이 사무소는 약 1천만 건(9,891,497건)의 정보 요청을 처리하고, 실종자에 대한 1천1백만 건 이상(11,293,511건)의 정보를 제공하였다.[157]
비오 12세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186] 1941년 4월에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를 비공식적으로 접견하였는데,[187] 이는 파벨리치 정권의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영국 외무부의 한 메모는 비오 12세를 "우리 시대 최고의 도덕적 겁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188] 바티칸은 파벨리치 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190] 강제 개종을 비난하였지만,[190] 세르비아인 학살 등 우스타샤 정권의 만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강력한 비판이나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189][191] 이는 크로아티아 교회의 분열이나 미래 국가 건설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191] 망명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1942년 내내 비오 12세에게 세르비아인 박해 중단을 위한 개입을 요청하였지만, 가시적인 조치는 없었다.[195] 전후 비오 12세는 우스타샤 협력 혐의로 유고슬라비아 공산 정권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크로아티아 대주교 알로이지우스 슈테피나츠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논란을 더하였다.[192]
1941년, 비오 12세는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Divini Redemptoris''가 소련에 대한 군사 지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렌드리스 법안에 반대하던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입장을 완화시켰다. 또한 1942년에는 일본 제국 및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196][198]



=== 홀로코스트와 유대인 문제 ===
홀로코스트가 본격화되자 비오 12세는 외교 채널을 통해 희생자들을 도우려 하였고,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비밀리에 지원을 제공하도록 지시하였다.[210] 1939년, 그는 무솔리니의 인종법으로 이탈리아 대학에서 해고된 유대인 학자 로베르토 알마지아 등을 바티칸에 고용하였다.[214][215] 또한 브라질 정부와 협력하여 '비아리아인 가톨릭 신자'에게 3,000개의 비자를 발급하려 하였으나, 브라질 측의 엄격한 조건과 의심으로 인해 1,000개 미만이 발급된 채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216][59][217]
비오 12세는 리투아니아 유대인의 강제 추방에 대해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에게 항의하였고(1940년),[219] 성직자들에게 수용소의 유대인을 도울 것을 요청하였다(1940년).[224] 슬로바키아의 유대인법(유대인과 비유대인 간 혼인 금지)에 반대하였으며(1941년), 슬로바키아 유대인들의 강제 수용소 이송 계획에 대해 "인종 때문에 사람들의 자연적인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조치"라며 슬로바키아 정부에 항의하였다(1942년).[233] 또한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대량 체포 및 추방에 대해 교황 대사를 통해 필리프 페탱에게 항의하도록 지시하였다(1942년).[230]
1942년 12월, 크리스마스 연설에서 비오 12세는 "자신의 잘못 없이, 때로는 국적이나 인종 때문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음이나 느린 쇠퇴에 처해졌다"고 언급하며 인종 기반 박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199] 이 연설은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대신해 말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201] 연합국 측에서는 히틀러리즘에 대한 반대 입장 표명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으나,[201] 구체적인 대상이나 사건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를 남겼다.[202]
1943년 나치의 로마 점령 당시, 로마 유대인 공동체가 금 50kg을 요구받았을 때 바티칸은 일부 지원 의사를 표명하였다.[249][250] 이후 로마에서 유대인 강제 추방이 시작되자, 바티칸 시국 내부에 477명, 로마의 여러 수도원과 수녀원에 4,238명의 유대인이 은신처를 제공받았다.[251] 이로 인해 로마 유대인의 약 80%가 강제 추방을 피할 수 있었다.[252]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구출 노력이 교황의 직접적인 명령보다는 개별 성직자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으며, 독일 외교관의 역할이 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53]
1944년에는 헝가리 정부에 유대인 처우 개선을 촉구하고, 교황 대사 안젤로 로타 등에게 유대인 보호를 지시하여 헝가리에서의 강제 추방 중단에 기여하였다.[257][258][259] 또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유대인을 위한 긴급 여권 발급을 호소하였다.[260]
하지만 비오 12세는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나치의 만행, 특히 유대인 대량 학살에 대해 명확하고 공개적인 비난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바티칸의 중립성을 유지하려 하였고,[232][226] 공개적인 비난이 오히려 희생자들의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178] 미국과 연합국 대표들이 여러 차례 공개적인 규탄을 요청하였지만,[234][239] 그는 "특정 잔학 행위를 공개적으로 규탄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239] 또한 나치를 비난하려면 동시에 볼셰비즘도 언급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240] 폴란드에서 자행된 가톨릭 신자를 포함한 대규모 학살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규탄은 없었다.[243][244]
1958년 비오 12세가 선종하였을 때, 이스라엘 외무장관 골다 메이어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과 단체들은 전쟁 중 그의 노력을 인정하며 애도를 표하였다.[306][307] 로마의 수석 랍비 엘리오 토아프는 "유대인들은 2차 세계 대전 중 교황의 명령으로 가톨릭 교회가 그들을 위해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211] 그러나 작가 존 콘웰은 그의 저서 ''히틀러의 교황''에서 교황이 나치즘에 대해 무력하고 우유부단하였으며 홀로코스트에 거의 도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212]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후 국제 가톨릭-유대인 역사 위원회(1999-2001)가 구성되어 바티칸이 공개한 전쟁 시기 문서를 검토하였지만, 추가 자료 접근의 한계로 인해 논쟁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였다.[337][339] 2020년 3월, 교황 프란치스코의 결정으로 비오 12세 재위 기간의 바티칸 비밀 문헌관 자료가 공개되어[359][360]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이다. 초기 연구 결과들은 비오 12세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정보를 인지하고 있었으며,[366][367] 비밀리에 히틀러 측과 접촉하기도 하였다는[365] 정황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의 행동과 동기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 전후 활동 및 평가 ===
제2차 세계 대전 후 비오 12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 대한 물질적 지원 제공, 가톨릭 교회의 국제화, 전 세계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발전에 주력하였다. 그의 회칙 ''Evangelii praecones''(1951)와 ''Fidei donum''(1957)은 가톨릭 선교 지역의 자율성을 강화하고 현지 문화를 존중할 것을 강조하였다.[266][267]
1946년에는 나치즘에 저항하였던 독일의 요제프 프링스,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그라프 폰 갈렌, 콘라트 폰 프라이징 주교와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드 용, 헝가리의 요제프 민젠티, 폴란드의 아담 스테판 사피에하, 프랑스의 쥘 제로 살리에주 등 다른 저항 인물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비이탈리아인 추기경 임명을 늘렸으며, 중국의 톈겅신(1946)과 인도의 발레리안 그라시아스(1953)를 각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교회의 국제화를 추진하였다.[269]
전후 비오 12세는 특히 독일 문제 해결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 주교 알로이시우스 요셉 뮌히는 비오 12세가 독일 교회의 재건, 난민 문제, 기아, 전쟁 포로 및 전범 문제 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고 기록하였다.[270] 동시에 그는 서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데에도 힘썼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들을 파문하였으며, 1952년 로마 지방 선거에서는 기독교 민주당이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우파 정당(이탈리아 사회운동 등 신파시스트 포함)과 연합하도록 독려하였다.[272] 그는 "만약 공산당이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승리하면 전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프랑스가 공산화되고, 그 다음 스페인, 그리고 유럽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다"라고 경고하며 이러한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272]
2. 4. 4. 종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교황 비오 12세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에 대한 물질적 지원, 가톨릭교회 내부의 국제화, 바티칸 시국의 국제 외교 관계 발전에 주력했다. 그의 회칙 《복음의 선포자들》(Evangelii Praecones, 1951년 6월 2일 발표)과 《신앙의 선물》(Fidei Donum, 1957년 4월 21일 발표)은 각 지역 교회가 전교 활동에 대한 자율적 결정을 내리도록 장려했으며, 이를 통해 많은 가톨릭 선교 지역이 독립 교구로 승격되었다. 비오 12세는 또한 지역 교회가 유럽 중심 문화에서 벗어나 고유 문화를 존중하는 토착화를 시행하도록 독려했다.[266][267] 그는 1956년에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갈망하는 비유럽인들'에 대한 연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268]
비오 12세는 로마 교황청 내 이탈리아인 중심 구조를 점진적으로 개혁했다. 그는 독일과 네덜란드 출신 예수회 고문인 로베르트 라이버, 아우구스티누스 베아, 세바스찬 트롬프 등을 중용했으며,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과 같은 미국인 성직자들의 교회 내 역할 확대를 지지했다.[98][9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이전 교황들보다 훨씬 많은 비이탈리아인을 주요 직책에 임명했다. 대표적으로 유고슬라비아 교황대사 대리 조셉 P. 허리(Joseph P. Hurley), 루마니아 교황대사 게럴드 P. 오하라(Gerald P. O'Hara), 독일 교황대사 알로이시우스 요셉 뮌히(Aloisius Joseph Muench) 등이 있다. 또한 유럽, 아시아, 미국 등 다양한 지역의 젊은 성직자들이 바티칸에서 훈련받고 전 세계로 파견되기 시작했다.[100] 루이지 마글리오네 추기경이 1944년 사망하자, 비오 12세는 국무원장직을 공석으로 두는 대신 도메니코 타르디니를 외무부장으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훗날 교황 바오로 6세)를 내무부장으로 임명하여 교황청 실무를 관장하게 했다.[94] 타르디니와 몬티니는 비오 12세 재위 기간 동안 그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다.
1946년, 비오 12세는 전쟁 중 나치즘에 저항했던 인사들을 대거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독일의 요제프 프링스, 클레멘스 폰 갈렌, 콘라트 폰 프라이징,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드 용, 헝가리의 요제프 민젠티, 폴란드의 아담 스테판 사피에하, 프랑스의 쥘 제로 살리에주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중국의 천건신(1946년)과 인도의 발레리안 그라시아스(1953년)를 추기경으로 임명함으로써, 각국 역사상 최초의 추기경을 배출했다.[269] 안젤로 론칼리(훗날 교황 요한 23세)와 폴란드의 스테판 비신스키 대주교 역시 1953년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교황의 측근 그룹은 독일 출신 성직자들이 두드러졌는데, 예수회 소속 로베르트 라이버, 빌헬름 헨트리히, 이보 자이거 등이 포함되었으며, 개인 고해사제인 아우구스티누스 베아 역시 독일 예수회원이었다. 교황청 내 독일어권 수녀들의 존재도 이러한 경향을 강화했다. 미국 주교 알로이시우스 요셉 뮌히는 1948년 11월 자신의 기록에서 비오 12세가 '교회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독일 교회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언급하며, 전후 독일이 직면한 복합적인 위기(난민 문제, 빈곤, 기아, 질병, 전쟁 포로 및 전범 처리, 가톨릭 내부 조직 재건, 독일의 불확실한 정치적 미래 등)를 교황의 최우선 관심사로 꼽았다.[270]
비오 12세는 서유럽과 아메리카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는 빈곤이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킨다고 판단하여 전후 복구를 위한 해외 원조 확보에 힘썼으며, 이탈리아 국내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했다.[271] 그는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가 이끄는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입장이었는데, 당의 정책이 결단력이 부족하고 좌파에 대해 유화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루이지 스투르초 신부 등으로 대표되는 당내 온건 좌파 개혁 성향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952년 로마 지방 선거를 앞두고 공산당과 사회당 연합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비오 12세는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성전'으로 규정하고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들을 파문 조치했다. 그는 예수회 소속 리카르도 롬바르디 신부를 통해 데 가스페리 총리에게 기독교민주당이 군주제 및 신파시스트 성향의 이탈리아 사회운동(MSI)을 포함한 우파 정당들과 선거 연합을 구성할 것을 제안하도록 했다. 그는 "만약 공산당이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승리한다면, 이는 전 세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프랑스가 공산화되고, 그 뒤를 이어 스페인, 결국 유럽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도미노 이론과 유사한 위기의식을 드러냈다.[272]
2. 5. 병세와 죽음


1954년 병을 앓은 이후, 비오 12세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현대 과학의 주장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말 오랜 투병 생활로 인해 퇴위를 고려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후 그의 업무 처리 방식에 변화가 생겨 장례식, 시성식, 추기경 서임식 등을 피하고 인사 문제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부하 직원이나 임명자들을 꾸짖기를 점점 어려워했는데, 특히 그의 주치의였던 리카르도 갈레아치-리시는 여러 차례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 갈레아치-리시는 말년에 교황청 직무에서 제외되었으나 직함은 유지했고, 임종 직전 교황의 사진을 몰래 찍어 프랑스 잡지에 판매하기도 했다.[273]
비오 12세는 폴 니한으로부터 세 차례 세포 활성화 치료를 받았는데, 특히 1954년 중병을 앓았을 때 받은 치료가 중요했다. 그러나 이 치료의 부작용으로 환각 증세가 나타났고, 말년에는 이로 인해 고통받으며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 그의 비명 소리가 교황의 거처 전체에 울릴 정도였다고 한다.[274]
잦은 업무 공백으로 비오 12세는 몇몇 가까운 동료들에게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보좌관 도메니코 타르디니, 연설문 작성자 로베르트 라이버 신부, 그리고 40년간 그의 가정부이자 조언자 역할을 한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있었다.[276]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은 그의 개인 고해 신부였다.[276] 이 시기에도 그는 평신도들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고, 전문가 단체들에게 특정 직업 윤리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율리우스 되프너(35세)나 카롤 보이티와(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38세)와 같이 젊은 사제들을 주교로 임명하는 경향을 보였다.[275] 반면, 공장에서 일하며 정당과 노조에 가입하는 "노동자 사제"와 같은 사목적 실험에는 단호히 반대했으며, 토마스주의 신학 전통이 현상학이나 실존주의 같은 현대 사상보다 우월하다고 계속해서 옹호했다.[275]
비오 12세는 인내심이 강한 인물로 알려졌는데, 생애 마지막 병세가 깊어져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도 흐트러지거나 고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평상시와 같이 행동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58년 10월 6일 오전 8시 30분경(CET), 여름 별장인 카스텔간돌포에서 여러 회의를 마친 후 전날부터 앓던 병세가 악화되어 뇌졸중을 일으켰다. 그는 최후의 성사를 받았다.[277] 상태가 잠시 호전되는 듯했으나, 10월 8일 두 번째 뇌졸중을 겪으며 위독해졌다. 오후에는 심각한 심폐 허탈 상태에 빠졌고, 해 질 녘에는 폐렴 증세까지 보여 산소와 혈장을 공급받았다.[277] 그의 마지막 말은 "기도하십시오. 교회를 위한 이 불행한 상황이 끝나도록 기도하십시오"였다고 전해진다. 임종 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십자가와 묵주는 그의 시신과 함께 묻혔다.[277]
10월 9일 목요일 오전 3시 52분(CET), 비오 12세는 급성 심부전으로 선종했다.[278] 그의 주치의였던 가스파니는 교황이 특정 질병이 아니라 과로로 인해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해 선종한 것이며, 몸을 아꼈다면 20년은 더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78] 도메니코 타르디니는 라틴어로 성모 마리아의 찬가인 ''마니피카트''를 봉헌했다.[278]
교황의 선종 소식에 스페인은 10일,[279] 이탈리아는 3일,[280] 쿠바는 3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279] 그의 유서는 선종한 달에 공개되었다.[281]
비오 12세의 시신 방부 처리는 주치의 리카르도 갈레아치-리시와 나폴리 출신 방부 처리사 오레스테 누치가 맡았다. 비오 12세는 자신의 장기 제거를 원치 않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보존되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이들은 비정형적인 방식을 사용했다.[282][283] 갈레아치-리시는 기자회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 보존에 사용된 것과 유사한 기름과 수지를 사용했으며, 이 방법이 시신을 영구히 보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83] 그러나 카스텔간돌포의 높은 기온 속에서 방부 처리는 실패했고, 시신은 빠르게 부패하여 신자들의 조문이 중단되어야 했다.[284] 시신 주변을 지키던 스위스 근위대원들 중 일부는 병에 걸리기도 했다고 보고되었다.[282]
장례 미사를 위해 비오 12세의 시신 행렬이 로마에 도착하자,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애도했다.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 출신인 교황을 특히 전쟁 시기의 영웅으로 추앙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다.[406][285] 당시 추기경이었던 안젤로 론칼리(훗날 교황 요한 23세)는 자신의 일기에 "과거 로마 황제도 이와 같은 개선식은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는 비오 12세가 지녔던 영적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기록했다.[407][286]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2. 6. 시복 시성
교황 비오 12세에 대한 시성 조사는 1965년 11월 1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마지막 회기 중에 시작되었다.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비오 12세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하였다.2007년 5월 교황청 성인성은 비오 12세를 가경자(Venerable)로 선포할 것을 권고하였고,[287]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12월 19일 비오 12세를 가경자로 선포하였다.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경자 선포와 동시에 이루어졌다.[8][390] 가경자 지위는 후보자의 영웅적 덕행이 인정될 때 부여된다.
비오 12세가 가경자로 선포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의 역할에 대한 논란 때문에 다양한 반응을 낳았다. 일각에서는 베네딕토 16세의 영웅적 덕행 교령 서명을 홍보상의 실수로 평가하기도 했으나, 보수적인 가톨릭 단체들은 비오 12세를 유럽 유대인의 구원자로 여기며 이를 '교회, ''교황'', 그리고 전통에 대한 충실함의 증거'로 간주한다.[288] 반면, 시몬 위젠탈 센터의 설립자이자 학장인 마빈 히어 랍비는 그의 시성이 이루어진다면 "역사가 크게 왜곡될 것"이라고 비판했으며,[289] 시드니 대회당의 책임자인 제레미 로렌스 랍비는 나치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끌고 갈 때 "수동적으로 허용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존경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290]
2013년 8월, 교황 프란치스코가 기적 심사 없이 '확실한 지식'(scientia certa) 공식을 통해 시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익명의 보고가 있었다.[291]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1월, 시성 절차 진행에 앞서 비오 12세의 제2차 세계 대전 중 역할에 대한 학술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바티칸 비밀 문서고를 개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으나, 자료 정리 및 분석에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292][293][294]
그러나 2014년 5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지 순방 후 기자회견에서 비오 12세의 시복 절차가 요구되는 기적의 부재로 인해 중단된 상태라고 언급했다.[295] 시성 청원 책임자인 피터 굼펠 신부는 2016년 다큐멘터리에서 바티칸 비밀 문서고 검토 결과 시성을 방해할 만한 논쟁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296] 시성 과정의 부 담당관인 마르크 린데이저는 비오 12세의 전구를 통한 기적 사례들이 보고되고는 있으나, 관련자들이 교구 조사 절차에 참여하지 않아 공식적인 기적 심사가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과정 지연의 주된 이유라고 설명했다.[297] 2014년에는 미국에서 비오 12세에게 노베나 기도를 드린 후 심각한 인플루엔자와 폐렴에서 회복되었다는 남성의 사례가 기적 후보로 보고되어 조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298][299]
3. 유산과 평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교황 무류성을 선포하여 성모 승천 교리를 정의했다. 이는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후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받아들여지셨다"는 내용으로,[122] 1854년 이래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교황 무류성이 사용된 사례이다. 이 교리는 1946년 회칙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Deiparae Virginis Mariae)''를 통해 모든 가톨릭 주교들에게 의견을 물은 후 결정되었다. 이 외에도 1953년 회칙 ''빛나는 관(Fulgens corona)''을 통해 마리아의 해를 선포하고,[123] 회칙 ''하늘의 여왕(Ad caeli reginam)''에서 성모 마리아의 왕후직 기념 축일을 제정하는 등[124] 마리아론 발전에 기여했다.[125] 또한 1954년부터 매주 일요일 카스텔 간돌포에 모인 신자들에게 삼종기도를 바치는 전통을 시작했다.[126]
비오 12세의 재위 기간,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엇갈린다. 전쟁 중 타임(Time)지는 가톨릭교회와 비오 12세가 전체주의에 맞서 싸웠다고 평가했으며,[300] 뉴욕 타임스 역시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침략에 반대한 점을 긍정적으로 보도했다.[301] 전후 초기에는 세계유대인회의 사무총장 아리에 레온 쿠보비츠키가 교황청의 유대인 구출 노력을 인정하며 감사를 표했고,[303]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외무장관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의 노력을 기렸다.[306][307] 이스라엘 외교관이었던 핀카스 라피드(Pinchas Lapide)는 비오 12세가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08]
그러나 생전에도 레옹 폴리아코프 등은 그가 비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 법률에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했으며,[305] 라피드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 수치의 근거에 의문을 제기했다.[309][310] 1960년대 이후 홀로코스트 당시 그의 '침묵' 또는 소극적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비오 12세의 유산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의 행동과 결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비판과 논란, #옹호와 재평가 참조)
3. 1. 비판과 논란
전쟁 중 타임(Time)지는 비오 12세와 가톨릭교회가 "다른 어떤 조직화된 권력보다도 더 알고, 더 경건하게, 더 권위 있게, 그리고 더 오랫동안 전체주의와 싸웠다"고 평가했다.[300] 또한 전쟁 중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침략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뉴욕 타임스''의 사설에서 칭찬을 받기도 했다.[301] 폴 오셰어(Paul O'Shea)에 따르면, "나치는 교황을 국제 유대인들의 앞잡이로 매도했고, 미국과 영국은 그가 나치의 침략을 비난하지 않아 끊임없이 좌절했으며, 러시아는 그를 파시즘과 나치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302]
1945년 9월 21일, 세계유대인회의 사무총장인 아리에 레온 쿠보비츠키는 파시스트와 나치의 박해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데 있어 교황청의 업적을 인정하며 교황에게 감사를 표했다.[303] 전쟁 후인 1945년 가을, 볼티모어 출신의 해리 그린스타인(Harry Greenstein)은 예루살렘의 헤르초그 랍비의 측근으로서 비오 12세에게 유대인들이 그가 해준 모든 일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전했다. 교황은 "내 유일한 후회는 더 많은 유대인들을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304] 1958년 10월 9일 비오 12세가 사망하자, 전 세계의 많은 유대인 단체와 신문들이 그의 업적을 기렸다. 유엔에서 이스라엘 외무장관 골다 메이어는 "나치 테러 시대에 우리 백성에게 두려운 순교가 닥쳤을 때, 교황의 목소리가 희생자들을 위해 울려 퍼졌다"고 말했다.[306] 런던의 ''유대인 연대기''는 10월 10일자에서 "모든 신앙과 당파의 신봉자들은 비오 12세가 그의 고귀한 직책의 책임을 용기와 헌신으로 어떻게 직면했는지 기억할 것"이라며, 그가 평화의 메시지를 설교하고 인류애와 연민을 선포했다고 평가했다.[306] 캐나다 유대인 연대기(10월 17일)에서 J. 스턴 랍비는 비오 12세가 "수천 명의 나치즘과 파시즘의 희생자인 유대인들을 숨길 수 있도록 했다"고 언급했다.[306] 전 ''아메리칸 히브루'' 칼럼니스트 윌리엄 주커만은 다른 어떤 지도자도 "나치 점령 중 유럽에서 유대인들의 최대 비극의 순간에 고인 교황보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썼다.[306] 이스라엘 총리 모셰 샤레트와 헤르초그 랍비 이삭 헤르초그 등 다른 저명한 유대인들도 비오 12세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307]
초기 연구들 중 일부는 이러한 호의적인 여론을 반영했는데, 폴란드 역사학자 오스카르 할레츠키(Oskar Halecki)의 저서 『피우스 12세: 에우제니오 파첼리: 평화의 교황』(1954)과 나자레노 파델라로의 『피우스 12세 초상』(1949)이 그 예이다. 1960년대 밀라노 주재 이스라엘 외교관이자 유대교 신학자였던 핀카스 라피드(Pinchas Lapide)는 『세 교황과 유대인들(Three Popes and the Jews)』에서 비오 12세가 "나치의 손아귀에서 최소 70만 명, 아마도 86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308] 실제로 이탈리아 항복(1943년) 후 독일군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 많은 유대인이 바티칸 시국 내부에 숨겨졌고, 바티칸 시민권을 얻기도 했다.[374][375] 이탈리아를 비롯한 가톨릭 수도원과 학교들도 유대인을 은밀히 도왔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전후 이스라엘 정부는 비오 12세에게 "세계의 의인" 상을 수여했다. 많은 유대인 단체도 라피드의 주장을 지지했다.[377][378] 히틀러 역시 가톨릭 교회와 비오 12세를 불편하게 여겼으며,[379] 이탈리아 항복 후 비오 12세 납치를 계획했으나, 친위대 사령관 카를 볼프의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전에도 비판은 존재했다. 레옹 폴리아코프는 1950년에 비오 12세가 비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 법률을 묵인했으며, "독일 친화적인 성향" 또는 히틀러가 공산 러시아를 물리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비오 11세보다 "덜 단호했다"고 비판했다.[305] 또한 라피드의 구조 인원 추정치에 대해 일부 역사학자들은[309] 그가 비가톨릭 신자들의 구출 활동을 제외하고 유럽 유대인 생존자 수를 기준으로 계산했다는 점을 들어 의문을 제기했다.[310] 가톨릭 학자 케빈 J. 매디건(Kevin J. Madigan)은 골다 메이어 등 유대 지도자들의 칭찬을 바티칸의 이스라엘 국가 승인을 얻으려는 시도로 해석하기도 했다.[311]

본격적인 논란은 1963년, 롤프 호흐후트(Rolf Hochhuth)의 희곡 ''Der Stellvertreter. Ein christliches Trauerspiel'' (''대리인, 기독교 비극'')[371]이 발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희곡은 교황 비오 12세를 홀로코스트에 대해 침묵을 지킨 위선자로 묘사하며 그의 전쟁 책임을 고발했다.[372] 이 묘사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해 "믿을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다.[312] 이 희곡은 당시 일본에서도 다케야마 미치오 등이 교황을 비판하며 논쟁을 일으켰으나, 현재는 역사적 가치가 재검토되고 있다.[373] 희곡에 대한 반발로 조셉 리히텐(Joseph Lichten)의 ''판단의 문제(A Question of Judgment)''(1963)와 같은 책들이 비오 12세의 전쟁 중 행동을 옹호했다. 리히텐은 비오 12세에 대한 비판을 "놀라운 역설"이라며 "비오 12세가 유대인을 위해 행한 행동에 대한 기록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호흐후트의 비난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313] 반면, 귄터 레위(Guenter Lewy)의 ''가톨릭 교회와 나치 독일(The Catholic Church and Nazi Germany)''(1964)과 같은 비판적인 학술 저작들도 나왔다. 레위는 "교황과 그의 고문들은 바티칸 내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오랜 온건한 반유대주의 전통의 영향을 받아 유대인들의 곤경을 진정한 긴급성과 도덕적 분노로 보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314] 2002년 이 희곡은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아멘.(Amen.)''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2009년 ''라 치빌리타 카톨리카(La Civilità Cattolica)''는 호흐후트 희곡의 비난이 유대인 사회가 아닌 공산권에서 시작되었으며, 1945년 6월 2일 모스크바 라디오가 비오 12세를 "히틀러의 교황"이라고 처음 불렀다고 주장했다.[315] 전직 루마니아 세쿠리타테(Securitate) 장군 이온 미하이 파체파(Ion Mihai Pacepa)는 2007년, 호흐후트의 희곡과 비오 12세를 나치 동조자로 공격하는 출판물들이 서구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KGB의 허위 정보 작전(12번 자리(Seat 12))의 일부라고 주장했다.[316]
이러한 논란 속에서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예수회 학자들이 바티칸 국무원 기록 보관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교황청의 문서 및 자료(Actes et documents du Saint Siège relatifs à la Seconde Guerre Mondiale)''가 1965년부터 1981년까지 11권으로 출판되었다.[216] 모든 자료는 온라인에서 열람할 수 있다.[381] 피에르 블레(Pierre Blet)는 이 11권의 요약본인 ''피우스 12세와 제2차 세계 대전, 바티칸의 기록에 따르면''(1999)을 출판하기도 했다.[317][326][330] 이 자료들을 통해 비오 12세의 유대인 관련 활동이 명확해질 것으로 기대되었다.[382][383]
1999년, 영국 작가 존 콘웰은 저서 ''히틀러의 교황''에서 비오 12세가 나치에 대한 반대를 교황권 강화라는 목표에 종속시켰으며 반유대주의자였다고 비판했다.[318]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콘웰의 반유대주의자 묘사에 "신뢰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언급했다.[319] 케네스 L. 우드워드는 ''뉴스위크'' 서평에서 "사실상의 오류와 맥락에 대한 무지가 거의 모든 페이지에 나타난다"고 비판했다.[320] 폴 오셰이는 이 책이 "많은 부정확성, 선택적 자료 사용" 등으로 실망스럽지만, "파첼리(비오 12세의 본명)가 철저히 재검토되고 그의 시대적 맥락 속에 확고히 자리 잡도록 요구함으로써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321] 콘웰 자신도 5년 후, "피우스 12세의 행동 범위가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전쟁 중 그의 침묵에 대한 동기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입장을 일부 수정했다.[322][323][324] 콘웰의 저서는 비오 12세의 시복 과정 증언과 새로 개방된 파첼리 사절단 문서에 접근한 최초의 저서 중 하나였다.[325] 일본의 오자와 타케오 역시 비판적인 입장의 저서 『로마 교황과 나치』에서 콘웰의 주장을 인용하며, 교황의 독일인에 대한 호감, 전통적 반유대주의, 공산주의 방벽으로서의 나치 독일에 대한 기대, 가톨릭 교회에 대한 폭력의 공포 등을 침묵의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콘웰의 저서를 무검증으로 인용한 부분이 많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1차 사료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후 수잔 주코티의 ''그의 창문 아래서: 바티칸과 이탈리아의 홀로코스트'' (2000), 마이클 파이어의 ''가톨릭교회와 홀로코스트, 1930~1965'' (2000) 및 ''피우스 12세, 홀로코스트, 그리고 냉전'' (2008) 등 더 학문적이면서 비판적인 분석이 나왔다.[326] 대니얼 골드해건의 ''도덕적 결산''과 데이비드 커처의 ''유대인에 반대하는 교황'' 역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반면 랄프 맥이너리와 호세 산체스는 덜 비판적인 평가를 내놓았다.[327]
콘웰의 비판에 대한 반박으로, 미국 랍비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달린은 2005년 ''히틀러의 교황 신화: 교황 피우스 12세가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출한 방법''을 출판하여, 비오 12세가 수천 명의 유대인을 구한 구세주였다는 이전의 설명을 재확인했다. 마틴 길버트는 달린의 저서가 "가장 위험한 시기에 유대인들을 위한 교황 피우스 12세의 지원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필수적인 공헌"이라고 평가했다.[328] 달린은 콘웰과 다른 비판자들이 "오늘날 가톨릭교회에 변화를 강요하려는 자신의 정치적 의제를 증진하기 위해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들의 비극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329] 마르게리타 마르키오네, 로널드 J. 리칠락 등 다른 학자들도 비오 12세를 옹호하는 저서를 출판했다.[326][330] 교회사가 윌리엄 도이노는 피오 12세가 "단호히 ''침묵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331] 이먼 더피, 클리포드 롱리, 카디널 위닝, 마이클 버리, 폴 존슨, 데니스 맥 스미스 등도 비오 12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에 도전하는 저서를 썼다.[327]
대니얼 골드해건은 2003년 저서 ''도덕적 결산''에서 비오 12세가 "공개적으로 유대인들을 언급하지 않기로 거듭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마크 리블링은 비오 12세가 1939년 첫 회칙 ''최고의 교황권''에서 바울의 골로새서 구절("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없다")을 인용하며 유대인이 인류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했다고 반박했다.[332] 가톨릭 기자 제러드 노엘은 비오 12세가 "반유대주의자"나 "나치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침묵"했으며 "히틀러가 교황을 완벽하게 조종했다"고 주장했다.[327] 이언 커쇼 역시 비슷한 결론을 내렸는데, 비오 12세가 교회를 보호하려 했고 발언이 유대인의 고통을 악화시킬까 두려워했지만, 1942년 이후로는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커쇼는 1942년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놓친 기회"라고 불렀다.[333] 제럴드 스타이너처는 비오 12세가 "개종을 통한 탈나치화"를 지원하는 사제들의 활동을 눈감아주어 전 나치 반공주의자들이 정의를 피하도록 도왔다고 비난했다.[334][335] 구이도 크노프의 「홀로코스트 전 증언」에는 비오 12세가 베를린 주교에게 보낸 1943년 서한에서 "비아리아인 또는 반아리아인 가톨릭 신자"에 대해 "현재 상황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돕지 못한다. 다만 기도할 뿐이다"라고 쓴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380]
반면, 베를린의 유대인 부부 울프슨 씨는 "우리 중 누구도 교황이 공개적으로 입장을 취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도망자는 지목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교황이 항의했다면 로마가 주목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교황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고 교황을 옹호했다. 실제로 가톨릭교회가 나치의 잔혹 행위에 반응했을 때 유대인과 교회 모두에 대한 SS의 박해가 심화된 사례가 있었다.[336]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2016년 프로그램 「히틀러의 교황, 어둠의 진실」에서는 비오 12세가 전쟁 발발 전부터 독일 내 반나치파(요제프 뮐러 등)와 비밀리에 연락하며 히틀러 암살 계획을 지지했으며, 공개 비난을 자제한 것은 히틀러를 자극해 더 큰 보복을 초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385][386] 마크 리블링(Mark Riebling) 역시 2015년 저서 『스파이들의 교회(Church of Spies)』에서 비오 12세가 1939년 10월부터 히틀러 전복 음모에 연루되었고, 독일 저항 세력과 연합국 간의 평화 중재를 준비했다고 주장했다.[358]
1999년, 논쟁 해결을 위해 가톨릭 학자 3명과 유대인 학자 3명으로 구성된 국제 가톨릭-유대인 역사 위원회(ICJHC)가 임명되었다. 위원회는 기존에 출판된 바티칸 자료(''Actes et Documents'')를 검토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추가 문서 접근 문제 등으로 인해 2001년 활동을 중단했다.[337][338][339] 위원회는 최종 보고서 없이 47개의 질문을 담은 예비 보고서를 발표했으며,[339][340] 위원 중 한 명인 마이클 마러스는 위원회가 "벽에 부딪혔다"고 평가했다.[347]
로버트 카츠(Robert Katz)의 저서 ''침묵의 죽음: 교황, 저항 그리고 로마의 독일 점령''에 대한 피터 스탠포드의 서평은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스탠포드는 바티칸이 여전히 모든 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결정적인 유죄 인정"으로 보며, 카츠가 찾아낸 문서들을 통해 비오 12세가 로마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 건물에 피신한 유대인들을 숨기는 것에 반대했으며, 진정한 영웅은 교황청 관리들에게 맞서 유대인들을 보호한 사제와 수녀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비오 12세가 중립성을 강조하며 홀로코스트에 개입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전후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외면당했다고 비판했다.[348] 카츠의 책은 또한 교황이 반나치 저항을 공산주의의 선구자로 보아 아르데아티네 학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349]
아르헨티나 언론인 우키 고니는 저서 『진짜 오데사』(2002)에서 연구 중 영국 외무부 문서를 통해 전후 나치 전범들의 탈출로(쥐구멍(ratlines))에 바티칸 관계자들이 연루되었음을 발견했다. 영국 대사 다시 오스본이 비오 12세에게 개입을 요청했으며, 교황이 악명 높은 범죄자들을 위해 비밀리에 호소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350] 수잔 브라운-플레밍의 저서(2006)는 비오 12세가 독일 전범들(예: 오토 올렌도르프)을 위해 개입했다는 고니의 연구를 뒷받침한다.[351] 마이클 파이어의 『비오 12세, 홀로코스트, 그리고 냉전』(2008)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해제된 미국, 아르헨티나, 영국 등의 문서를 활용하여, 우스타샤 정권, 폴란드 학살, 교회 재정, 로마 유대인 추방, 나치 탈출로 등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시하며 기존 바티칸 발표 자료(''Actes et Documents'')가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352][353]
2008년 9월, 베네딕토 16세는 비오 12세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칭찬했다.[354] 그러나 같은 해 10월 비오 12세 서거 50주년 추모 미사 전후로, 하이파의 랍비 셰아르 야슈브 코헨이 가톨릭교회 주교 시노드에서 전쟁 중 비오 12세의 “침묵”에 대한 실망을 표하는 등 논쟁은 계속되었다.[356] 2009년, 『길을 닦는 재단(Pave the Way Foundation)』은 비오 12세가 “나치의 폭정으로부터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주장하는 문서들을 공개했다.[357] 이 재단의 연구는 『교황 비오 12세와 제2차 세계 대전: 기록된 진실』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2019년 3월 4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오 12세 재위 기간의 바티칸 기록물을 2020년 3월 2일부터 학자들에게 공개한다고 발표했다.[359][360] 연구자들은 이 발표를 환영했지만, 홀로코스트 관련 논란으로 인해 그 의미가 다소 흐려졌다.[361] 바티칸 기록 보관소에는 수백만 페이지의 자료가 있어 연구 결과 분석에는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362] 2022년 1월, 역사학자 마이클 F. 펠드캄프는 기록 보관소 연구를 통해 비오 12세가 최소 1만 5천 명의 유대인을 구출했고, 반제 회의 직후 홀로코스트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보냈으나 미국 정부가 이를 믿지 않았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363] 2022년 6월, 기록 보관소를 분석한 데이비드 커처는 저서 "전쟁 중의 교황(The Pope at War)"에서[364] 콘클라베 직후 히틀러와 비오 12세 사이에 비밀 협상이 있었음을 밝혔다. 히틀러가 주도한 이 협상은 바티칸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했으나, 비오 12세는 독일 교회의 상황 개선에 집중하며 어떤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365] 2023년 9월,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독일 예수회 신부가 홀로코스트 정보를 교황에게 알렸다는 새로운 문서를 보도했다.[366][367]
기록 보관소는 또한 비오 12세가 마르시알 마시엘의 신학생 성추행 및 약물 남용 범죄를 인지하고도 조치를 늦게 취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368] 바티칸은 마시엘 신부의 범죄를 50년 동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69]
홀로코스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로마 유대인 연행에도 침묵했다", "바티칸이 명확히 비난했다면 독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여전히 존재한다. 비오 12세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으며, 그의 복잡한 유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3. 2. 옹호와 재평가
전쟁 중, 타임지는 비오 12세와 가톨릭교회가 "다른 어떤 조직화된 권력보다도 더 알고, 더 경건하게, 더 권위 있게, 그리고 더 오랫동안 전체주의와 싸웠다"고 평가했다.[300] 전쟁 중 그는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침략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뉴욕 타임스 사설에서 칭찬받기도 했다.[301] 폴 오셰어에 따르면, "나치는 교황을 국제 유대인들의 앞잡이로 매도했고, 미국과 영국은 그가 나치의 침략을 비난하지 않아 끊임없이 좌절했으며, 러시아는 그를 파시즘과 나치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302]전후 초기에는 비오 12세의 인도주의적 노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1945년 9월, 세계유대인회의 사무총장 아리에 레온 쿠보비츠키는 파시스트와 나치의 박해로부터 유대인을 구출한 교황청의 공로를 인정하며 감사를 표했다.[303] 같은 해 가을, 볼티모어의 해리 그린스타인(Harry Greenstein)이 예루살렘의 헤르초그 랍비를 대신하여 감사를 전하자, 교황은 "내 유일한 후회는 더 많은 유대인들을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304]
1958년 비오 12세 서거 당시, 전 세계 유대인 사회는 대체로 그의 업적을 기렸다. 유엔에서 이스라엘 외무장관 골다 메이어는 "나치 테러 시대에 우리 백성에게 두려운 순교가 닥쳤을 때, 교황의 목소리가 희생자들을 위해 울려 퍼졌다"고 연설했다.[306] 런던의 ''유대인 연대기''(Jewish Chronicle)는 그가 "평화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설교했으며,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의 잔혹함에 맞서 인류애와 연민의 미덕을 선포했다"고 평가했다.[306] 캐나다 유대인 연대기의 J. 스턴 랍비는 교황이 "수천 명의 유대인 희생자들을 숨길 수 있도록 했다"고 언급했으며,[306] ''유대인 포스트 앤 뉴스''의 윌리엄 주커만은 "나치 점령 하 유럽 유대인들의 최대 비극의 순간에 고인 교황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준 지도자는 없었다"고 썼다.[306] 이스라엘 총리 모셰 샤레트와 헤르초그 랍비 등도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307] 폴란드 역사학자 오스카르 할레츠키(Oskar Halecki)의 『피우스 12세: 에우제니오 파첼리: 평화의 교황』(1954) 등 초기 연구들도 이러한 호의적인 분위기를 반영했다.
1960년대 이스라엘 외교관이자 유대교 신학자였던 핀카스 라피드(Pinchas Lapide)는 『세 교황과 유대인들(Three Popes and the Jews)』에서 비오 12세가 "나치의 손아귀에서 최소 70만 명, 아마도 86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며 옹호론에 힘을 실었다.[308] 이 주장은 많은 유대인 단체의 지지를 받았고[377][378], 전후 이스라엘 정부는 비오 12세에게 "세계의 의인"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탈리아 항복(1943년) 후 독일군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 많은 유대인이 바티칸 내부에 숨겨졌고 바티칸 시민권을 얻었으며[374][375], 이탈리아를 비롯한 가톨릭 수도원과 학교들이 유대인을 은밀히 보호했다는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히틀러 역시 가톨릭 교회와 비오 12세를 달가워하지 않아 이탈리아 항복 후 교황 납치를 계획했으나, 친위대 사령관 카를 볼프의 만류로 실행되지 않았다.[379]
그러나 비판적인 시각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레옹 폴리아코프는 이미 1950년에 비오 12세가 비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 법률을 묵인했으며, "독일 친화적 성향" 또는 히틀러가 공산 러시아를 물리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비오 11세보다 덜 단호했다고 비판했다.[305] 본격적인 논쟁은 1963년 서독 극작가 로르프 호흐후트가 희곡 신의 대리인(Der Stellvertreter)[371]에서 교황의 전쟁 중 침묵과 책임을 고발하면서 시작되었다.[372] 이 희곡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아멘.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다케야마 미치오 등이 교황을 비판하며 논쟁이 벌어졌으나, 현재는 희곡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재검토되고 있다.[373]
1999년, 영국 작가 존 콘웰의 『히틀러의 교황』(Hitler's Pope)은 비오 12세가 나치 반대보다 교황권 강화에 더 집중했으며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논쟁을 재점화했다.[318] 이 책은 사실 오류와 맥락 무시 등의 비판을 받았고[320][32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반유대주의자 묘사에 "신뢰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평했다.[319] 콘웰 자신도 5년 후 "그의 침묵 동기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일부 입장을 수정했지만[322][323][324], 이 책은 비오 12세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수잔 주코티, 마이클 파이어, 대니얼 골드해건, 데이비드 커처, 로버트 카츠 등 여러 학자들이 교황의 침묵, 로마 유대인 연행 및 아르데아티네 학살 당시의 소극적 태도, 나치 전범들의 탈출로 운영 연루 의혹 등을 제기하며 비판적인 분석을 내놓았다.[326][327][348][349][350][351][334] 이언 커쇼는 교황이 교회 보호와 유대인 상황 악화 우려 때문에 침묵했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1942년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놓친 기회"라고 평가했다.[333] 일본의 오자와 타케오는 『로마 교황과 나치스』에서 교황의 친독일 성향, 전통적 반유대주의, 반공주의적 기대, 가톨릭 교회 보호 우려 등을 침묵의 이유로 들었으나, 이 책은 콘웰 저서에 대한 무검증 의존으로 비판받는다.
이에 맞서 랍비 데이비드 달린은 『히틀러의 교황 신화』(2005)를 통해 피우스가 수천 명의 유대인을 구한 영웅이라는 주장을 재확인하며, 비판자들이 "정치적 의제"를 위해 홀로코스트를 이용한다고 반박했다.[329] 저명한 유대인 학자 마틴 길버트 경은 달린의 책을 지지하며 "교황의 태만, 심지어 공모에 대한 분열적이고 해로운 견해를 대체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평했다.[328] 마르게리타 마르키오네, 예수회 신부 피에르 블레, 로널드 J. 리칠락 등도 교황청의 외교적 노력과 비밀 지령을 통한 유대인 구출 활동을 강조하며 교황을 적극 변호했다.[326][330] 교회사가 윌리엄 도이노는 피우스가 "단호히 침묵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331] 베를린의 유대인 부부 울프슨의 증언처럼, 당시 일부 유대인들은 교황의 공개적인 항의가 오히려 나치를 자극하여 상황을 악화시킬 것을 우려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336]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비오 12세 서거 50주년 추모 미사에서 그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칭찬했다.[354] 길을 닦는 재단(Pave the Way Foundation)은 2009년 교황의 유대인 구출 노력을 보여주는 문서를 공개했다고 발표했으며[357], 마크 리블링(Mark Riebling)은 2015년 저서 『스파이들의 교회(Church of Spies)』에서 비오 12세가 히틀러 전복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358]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2016년 다큐멘터리 「히틀러의 교황, 어둠의 진실」(Pope vs. Hitler) 역시 교황이 반나치 세력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히틀러 암살 계획을 지지했고, 공개 비난을 자제한 것은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함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385][386]
이러한 논쟁 속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바티칸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교황청의 행위와 문서(Actes et Documents du Saint Siège relatifs à la Seconde Guerre Mondiale, ADSS)" 11권을 공개했다.[381] 1999년에는 가톨릭 및 유대인 학자들로 구성된 국제 가톨릭-유대인 역사 위원회(International Catholic-Jewish Historical Commission)가 발족하여 ADSS 자료를 검토하고 47개 질문을 담은 예비 보고서를 발표했으나, 미공개 자료 접근 문제로 2001년 활동을 중단했다.[337][339][340][347]
결정적인 전기는 2019년 3월, 교황 프란치스코가 비오 12세 재위 기간(1939-1958) 전체에 해당하는 바티칸 비밀 문헌관 자료를 2020년 3월 2일부터 전면 공개한다고 발표하면서 마련되었다.[359][360] 수백만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 분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362] 2022년 1월, 독일 역사학자 미하엘 펠트캄프(Michael F. Feldkamp)는 초기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비오 12세가 개인적으로 최소 15,000명의 유대인을 구출했고, 반제 회의 직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보냈으나 미국 측이 이를 믿지 않았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363] 2022년 6월, 기록 보관소를 분석한 데이비드 커처는 저서 『전쟁 중의 교황(The Pope at War)』에서 교황 즉위 직후 히틀러와 비오 12세 사이에 비밀 협상이 있었으며, 교황은 독일 내 가톨릭 교회의 지위를 보호하려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364][365] 2023년 9월에는 독일 예수회 신부가 홀로코스트 정보를 교황에게 알렸다는 내용의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366][367] 한편, 기록 보관소 자료를 통해 비오 12세가 마르시알 마시엘 신부의 성추행 및 약물 남용 범죄를 인지하고도 조치를 늦췄다는 사실도 드러났다.[368][369]
비오 12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바티칸 비밀 문헌관 자료 공개를 통해 그의 역할에 대한 보다 명확하고 균형 잡힌 이해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종전 직후의 긍정적 평가와 이후 제기된 비판론, 그리고 최근의 재평가 움직임 속에서 그의 복잡한 유산은 다양한 관점에서 계속 조명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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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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