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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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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준은 1862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오산학교 교사로 민족 교육에 힘썼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서숙 설립, 신흥학교 교장, 만국평화회의 한국 독립 청원서 제출, 서로군정서 부독판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총판, 재만학생교과서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31년 중국군의 테러로 사망했으며,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012년 7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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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여준
한자 표기呂準
별칭호 시당(時堂)
출생일1862년
출생지경기도 용인
사망일1932년
직업독립운동가, 교육자
기타
관련 정보신라 헌강왕 때 성주군 벽진면 정착

2. 생애

1862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여준은 어릴 적 조현(祖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 중 북간도로 망명, 이동녕, 이상설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헤이그 특사 이준과 이상설을 연결했다. 1913년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남만주 동포 명의로 만국우편평화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다. 서간도 한족회 간부이자 서로군정서 부독변으로서 서간도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총판, 1921년 재만 학생 교과서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1930년 한국독립당 결성을 재가했다.

1931년 중국군의 테러로 장백산 기슭에서 요양 중 사망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12년 7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활동 (1862년 ~ 1910년)

1862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으며, 아명은 조현(祖鉉)이다.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민족 교육에 힘썼다.[1]

2. 2. 북간도 망명과 독립운동 (1910년 ~ 1931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동녕, 이상설 등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헤이그 특사였던 이준에게 이상설을 만나게 해주었다. 1913년 신흥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남만주 교포 명의로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서간도 한족회 간부로 활동하며 서로군정서를 설립, 부독판으로서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총판, 1921년 재만학생교과서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단체와 교육 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재결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의지를 이어갔다.

2. 3. 사망 (1931년)

1931년 중국군의 테러로 장백산 기슭에서 요양하던 중 사망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2012년 7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여준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3] 2012년 7월, 국가보훈처는 여준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3]

참조

[1] 웹사이트 ≪한국NGO신문≫ 신라 헌강왕때 성주군 벽진면 정착 http://www.ngonews.k[...] 2007-10-17
[2] 뉴스 보훈처, 2012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http://news.naver.co[...] 뉴스1 2011-12-19
[3] 뉴스 보훈처, 2012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https://news.naver.c[...] 뉴스1 201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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