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상설은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운동가로, 1870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성균관 교수와 탁지부 재무관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며 자결을 시도하는 등 구국 운동에 헌신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서전서숙 설립, 13도의군 편성, 대한 광복군정부 수립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7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병사했으며, 사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광복군정부 - 이동녕
이동녕은 대한제국 시기 개화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독립협회, 신민회, 서전의숙, 신흥무관학교, 《대동신문》,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과 독립 운동에 헌신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 대한광복군정부 - 이동휘
이동휘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신민회 활동, 독립군 양성, 한인사회당 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고려공산당 창당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 성명회 - 이범윤
이범윤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간도 관리사, 연추 의병부대 지도자, 13도 의군 창의군 총재, 권업회 총재, 의군부 및 대한독립군단 총재 등을 역임하며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성명회 - 유인석 (1842년)
유인석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위정척사 사상에 기반하여 항일 의병 운동을 이끌었으며, 을사조약 체결 후 만주로 망명하여 한일 합방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만주에서 생을 마감하고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이상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이상설 |
한자 | 李相卨 |
로마자 표기 | I Sangseol |
다른 로마자 표기 | I Sangsŏl |
자(字) | 순오(舜五) |
호(號) | 보재(溥齋) |
출생일 | 1870년 12월 7일 (음력)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진천군 |
사망일 | 1917년 4월 1일 (향년 47세) |
사망지 | 러시아 제국 프리모르스키 지방 니콜스크 |
본관 | 경주 이씨 |
종교 | 유교(성리학) |
정치 경력 | |
직책 | 대한제국 법부 협판 |
임기 | 1905년 1월 19일 ~ 1905년 3월 22일 |
군주 | 대한제국 고종 |
직책2 | 대한제국 의정부 참찬 |
임기2 | 1905년 3월 22일 ~ 1905년 12월 1일 |
직책3 | 대한광복군 정부 정통령 |
임기3 | 1914년 5월 31일 ~ 1914년 8월 28일 |
기타 경력 | 권업회 회장·총재 |
학력 | |
학력 | 1894년 전시문과에 병과 급제 |
가족 관계 | |
양부 | 이용우 |
생부 | 이행우 |
생모 | 벽진 이씨 |
훈장 | |
훈장 |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
2. 생애
1870년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이행우(行雨)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876년 이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적되었다.[1] 총명함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7세에 이용우의 가족에게 입양되어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1]
1904년 일본 제국이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국왕에게 이를 거부할 것을 호소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에는 조약 반대와 을사오적 처벌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결국 관직을 버리고 자결을 시도하였다.[1]
이후 국권 회복과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1907년 고종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헤이그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일본의 침략이 불법임을 알리고자 했다.[1] 이들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여 헤이그로 이동하였다.[1]
1910년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함께 13도의군을 조직하여 의병들을 통합하고 일본에 항거하고자 하였으며, 1917년 우수리스크(당시 니콜스크)에서 4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시신과 유품을 소각하고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유언대로 시신과 서재는 불에 태워졌다.[1]
2. 1. 관직 생활과 구국 운동 (1894년 ~ 1905년)
1894년 전시(殿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6]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 무렵 호머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에 접한다.1900년 일본에서 인기 있던 우에노 기요시(上野淸, 1854~1924)의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편집하여 《산술신서》(算術新書)를 편찬하였다.[7]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했을 때, 박승봉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에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다음 해 1905년 법부 협판,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외국 서적 등을 참조하며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번역하고 연구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그는 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종에게 5차례 올렸으나, 12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이후 국권 회복,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2. 2. 헤이그 특사 파견과 좌절 (1907년)
1907년,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이상설을 정사로 하여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헤이그 밀사 사건 참조.)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8]1907년 7월 5일, 이상설은 만국평화 회의장에서 막힘없는 불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하였다.[8]
네덜란드가 당초 한국의 참가를 계획하였으나, 한국 대표단은 공식적으로 초청받지 못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다른 대표들을 설득하여 한국의 참가를 막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미 실패한 임무였지만, 세 한국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평화 회의를 보도한 독립적인 신문들의 관심을 얻었다.[1] 이들의 활동으로 고종은 아들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강제 퇴위당했다.[1]
헤이그 특사 파견이 실패한 후, 일제는 궐석 재판에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로 인해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8]
2. 3. 국외 독립운동과 망명 정부 수립 (1908년 ~ 1917년)
1906년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조국을 떠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 지역인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에 대해 논의하고, 간도 용정촌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준, 왕창동, 박무림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 해 서전서숙의 문을 닫아야만 했다.[1]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사이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 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하고자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하고, 퇴위된 상태에 있는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 하사와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 수립을 시도했었다.[1]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 러시아 제국, 청나라 등에 일제의 침략 규탄과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1]
일제의 교섭에 의하여 러시아 제국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 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상설은 권업회를 조직하여 권업신문|한국어 발음ru을 간행하고 한인 학교들을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 교포의 경제 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키는 데 힘을 썼다.[1]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 제국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한인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3.1운동 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 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1]
그러나 대한 광복군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와 러시아 제국이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들의 정치 및 사회 활동을 철저히 엄금했기 때문에 대한 광복군 정부는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당했다.[1] 1915년 상하이시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1]
2. 4. 최후와 유언
1917년 4월 1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그는 죽기 전에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제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닥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1]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2]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1971년 숭모비를 건립하였고, 1975년 숭렬사를 건립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2005년 12월 그를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4. 가족 관계
5. 저서
- 《산술신서》 (1900년)
참조
[1]
웹사이트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http://www.mpva.go.k[...]
2016-11-06
[2]
뉴스
항일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생애와 업적 - 증산도(JeungSanDo)
http://www.jsd.or.kr[...]
JeungSanDo
2016-03-23
[3]
뉴스
헤이그 특사 이상설 순국일은 4월 1일
https://www.hankooki[...]
[4]
웹사이트
이상설 선생 기념 사업회 및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자료
http://leesangseol.c[...]
[5]
서적
한한대사전
[6]
웹사이트
조선 방목
http://kdaq.empas.co[...]
[7]
뉴스
(박성래 교수의 ‘과학 속 세상史’) 독립운동가 이상설 한국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4-08-12
[8]
서적
한국통사
범우사
1997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사라지는 기억을 붙드는 사람들···역사의 빛을 켜다 [광복80주년 기획]
진천군, 광복 80주년 앞두고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설빵’ 내놨다
헤이그서 이준 열사 순국 118주기 추모식 개최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 서훈 승격 움직임
충북 진천 “보재 이상설 선생 서훈 ‘대한민국장’으로 상향해야”
“당신을 잊지 못하네”…3·1운동 106돌, 이상설 선생 재조명
친일 민영휘 일가 재산에서 시민 품으로…‘상당산성 껴안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