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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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동녕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1869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동하며 개화 운동과 계몽 활동을 펼쳤고, 1906년에는 북간도에 서전의숙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헌신했다. 경술국치 이후 만주와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의정원 의장, 국무총리, 주석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법통을 수호하고 지도자로서 헌신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지원했으며, 1940년 중국 쓰촨성에서 서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1948년 유해가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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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광복군정부 - 이상설
이상설은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운동가로, 성균관 교수와 탁지부 재무관을 역임하며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독립을 호소하고,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러시아에서 사망했다. - 대한광복군정부 - 이동휘
이동휘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신민회 활동, 독립군 양성, 한인사회당 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고려공산당 창당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 경학사 - 이시영 (1868년)
이시영은 조선 후기 관료 출신 독립운동가로, 을사늑약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임시정부 요직을 역임하고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으나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며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 경학사 - 이상룡 (1858년)
이상룡은 조선 말 유학자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인물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 - 안창호
안창호는 평안남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로서, 서양식 교육과 기독교 입교 후 독립협회 활동, 대한국민회 설립 등 해외 독립운동, 신민회 조직, 흥사단 재건 등 국내외 민족 교육과 계몽 운동에 헌신하며 민족 개조를 주창하고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이동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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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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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동녕 |
명칭 | 국무령 |
국적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종교 | 대종교 |
출생일 | 1869년 10월 6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천안 목천읍 동리 |
사망일 | 1940년 3월 13일 |
사망지 | 중화민국 쓰촨성 치장 구 |
정당 | 무소속 |
서훈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
국무령 (첫 번째 임기) | |
국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수 | 5 |
취임일 | 1926년 4월 29일 |
퇴임일 | 1926년 5월 3일 |
전임 | 양기탁 |
전임 대수 | 4 |
후임 | 안창호 |
후임 대수 | 6 |
국무령 (두 번째 임기) | |
국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수 | 7 |
취임일 | 1926년 5월 16일 |
퇴임일 | 1926년 7월 7일 |
전임 | 안창호 |
전임 대수 | 6 |
후임 | 홍진 |
후임 대수 | 8 |
주석 (세 번째 임기) | |
국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수 | 11·12 |
취임일 | 1927년 8월 19일 |
퇴임일 | 1933년 3월 5일 |
전임 | 김구 |
전임 대수 | 10 |
후임 | 송병조 |
후임 대수 | 13 |
주석 (네 번째 임기) | |
국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수 | 15·16·17 |
취임일 | 1933년 10월 |
퇴임일 | 1940년 3월 13일 |
전임 | 송병조 |
전임 대수 | 14 |
후임 | 김구 |
후임 대수 | 18 |
2. 생애 초기
의성군수 등을 지낸 이병옥의 장남으로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났다.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이동녕이 17세이던 1885년 일가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봉익동으로 이주하였다. 1892년 24세에 응제진사(應製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1893년 원산에서 아버지 이병옥의 육영사업을 도왔다.
1896년 28세 되던 해에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 간사원에 선출되었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그는 이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립하여 교포들의 신분 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동녕은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출범을 이끌었으며, 초대 국무총리 이승만의 부재 시 국무총리 대행을 맡아 초기 정부 운영을 책임졌다. 이후 내무총장으로서 행정 조직 정비에 힘썼고, 국내에 격문을 보내 독립 의식을 고취했다.
3. 개화 운동과 계몽 활동
다음해 경성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상동교회의 청년지사들과 함께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승만 · 이준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승만과는 이때 이후 친숙한 동지가 되었다.
1898년 30세에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그는 옥파 이종일이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입사,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하였다.
1902년에 이상재와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에는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서울 상동 교회에서 전덕기 · 양기탁 · 신채호 · 조성환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구 · 이회영을 알게 되었다. 다음 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2개월간 다시 투옥 생활을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이동녕은 1906년 만주 북간도로 망명, 이상설과 함께 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의숙을 설립, 한국동포의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뒷날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 전덕기 · 양기탁 · 이동휘 · 이갑 · 유동열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07년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청년학우회 총무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안창호 · 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고, 상동학교의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었다.
4. 만주,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
1911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이상설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 조직에 참여하였고, 《대동신문》(大東新聞)과 《해조신문》(海潮新聞) 발행에도 참여하였다. 이상설의 알선으로 러시아 시베리아 총독이 약속했던 한국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간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1917년에는 노령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 포교 활동에 힘쓰며 독립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1918년 11월, 길림성에서 대종교의 김교헌을 비롯하여 조소앙, 조완구, 김좌진, 여준 등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후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하이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3]
5.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임시정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동녕은 1921년 국무총리 대리를 다시 맡고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 등 통합 노력을 기울였다. 1926년에는 국무령에 취임하여 국무령 중심 체제를 이끌었으며, 1927년부터는 여러 차례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며 약화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수호하고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1930년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이사장을 맡았으며,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지원하는 등 항일 투쟁에도 적극 참여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다시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어 1939년까지 재임했다. 1939년 네 번째로 주석에 선출되어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하는 등, 생애 마지막까지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5. 1. 임시정부 수립 초기
1919년 2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하이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3]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조직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같은 해 4월 10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수립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4월 11일, 동지들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당시 국무총리로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에 있어 부임하지 못하자, 이동녕이 국무총리로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초기 혼란을 수습하고 정부의 기반을 다졌다. 그해 9월 임시정부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개정되면서, 이동녕은 내무부 총장에 임명되어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11월에는 '남녀학생에게',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하여 황종화(黃鍾和), 최익무(崔益武) 등 정보원을 통해 국내에 배포하며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알렸다.
1921년 국무총리였던 이동휘가 사임하자, 이동녕은 다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시정부가 겪고 있던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 등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자, 그는 안창호, 여운형, 조소앙, 이시영, 차이석, 홍진, 노백린 등 주요 인사들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며 임시정부의 구심점 역할을 강화하고자 했다.
5. 2. 임시정부 법통 수호와 지도자 역할
1926년 양기탁, 안창호 등이 국무령직을 고사하자,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이동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58세였던 그는 법무총장도 겸임하며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중심의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1927년 3월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었다.[5] 같은 해 8월 19일, 임시정부가 임시약헌을 발표할 때 임시의정원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석[6]과 국무위원 겸 법무장을 겸임하게 되었다.[7] 그는 주석으로서 약화되었던 임시정부를 안정시키고 튼튼한 기반 위에 올려놓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9년 10월에는 세 번째로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존립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으며, 동시에 두 번째로 임시정부 주석의 중책을 맡았다.
1930년 1월에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당 기관지로 《한보》와 《한성》을 발행하였다. 같은 해 11월 6일에는 다시 임시정부 주석과 국무위원 겸 재무장에 선출되었고,[7] 임시의정원 의장직도 겸임하였다.[8]
5. 3. 이봉창, 윤봉길 의거 지원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김구, 이유필 등과 함께 지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의거의 성공으로 인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민필호 등의 도움을 받아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중국 저장성 가흥의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5. 4. 임시정부 주석 재임과 한국국민당 창당
1935년 10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고, 같은 해 11월 주석에 정식으로 취임하여[9] 1939년 9월까지 재임했다. 또한 11월에는 한국국민당의 초대 당수로 선출되었다.[9]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서 대한광복진선을 구축하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1939년 10월 25일 임정 국무회의에서 네 번째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하고 서안에 대한국사단을 파견하였다.[10]
6. 생애 후반과 서거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김구, 이유필 등과 함께 지도하여 쾌거를 이루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필호 등의 주선에 따라 임정 요인들과 함께 저장성 가흥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10월 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1월 주석에 취임하여[9] 1939년 9월까지 재임했다. 또한 11월에는 한국국민당의 초대 당수로 선출되었다.[9]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서 대한광복진선 구축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1939년 10월 25일 임정 국무회의에서 네 번째 주석으로 선출되어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하고, 시안에 대한국사단을 파견하였다.[10]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이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던 중, 1940년 3월 13일 쓰촨성 치장 현에서 급성 폐렴과 과로가 겹쳐 72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7. 사후 평가와 기념 사업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하여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3년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에 이동녕 집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11]
2019년 3월 13일 순국 79주기를 맞아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석오 이동녕 선양회 주관으로 추모식 및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또한,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56381?navigation=petitions 석오 이동녕 선생 서훈등급 상향(1등급) 청와대 청원]이 2019년 4월 10일까지 진행되었다.
8. 가족 관계
- 아들 : 이의식 - 의사
- 손자 : 이석희 - 대우그룹 부회장
참조
[1]
웹사이트
複合的思考力を持った李東寧
https://www.donga.co[...]
東亜日報
2020-12-09
[2]
웹사이트
석오 이동녕선생 69주기 추모식
http://www.mpva.go.k[...]
2016-03-04
[3]
서적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
한길사
2004
[4]
서적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5]
서적
한권으로 끝내는 적중 근현대사
문예마당
2009
[6]
서적
한국현대인물사
한길사
2006
[7]
서적
독립운동사 제4권 : 임시정부사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8]
서적
독립운동사 제4권 : 임시정부사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9]
서적
한국현대인물사
한길사
2006
[10]
웹사이트
나라사랑 광장
http://narasarang.mp[...]
[11]
웹인용
이동녕 집 터 표석 위치
https://www.googl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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