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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매간당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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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광 매간당 종택은 전라남도 영광군에 위치한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이다. 연안 김씨 직강공파의 종택으로, 16세기 중엽 김영이 영광군수로 부임한 숙부를 따라 정착한 후 형성된 집성촌에 자리 잡았다. 1868년에 건립된 안채를 비롯하여 삼효문, 사랑채, 곳간채 등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1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건축학적, 민속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승격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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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매간당 종택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영광연안김씨종택
한자 이름靈光延安金氏宗宅
영광연안김씨종택
영광연안김씨종택
유형국가민속문화재
지정 번호234
지정일1998년 1월 5일
주소전라남도 영광군 군남면 동간길2길 83-1 (동간리)
시대조선시대
소유자김성호
면적알 수 없음
수량일곽건물
전승지알 수 없음
전승자알 수 없음
문화재청 ID18,02340000,36
과거 정보
과거 이름영광연안김씨가
지정 유형 (과거)민속문화재
지정 번호 (과거)4
지정일 (과거)1980년 6월 2일
해제일 (과거)1998년 1월 5일
문화재청 ID (과거)24,00040000,36

2. 역사

전라남도 영광군에 위치한 영광 매간당 종택은 연안 김씨 직강공파()의 종가()이다.[1] 연안 김씨 가문은 16세기 중엽, 김영()이 영광군수로 부임한 숙부 김세공()을 따라 이곳에 오면서 영광군에 정착하기 시작했다.[1]

현재 남아있는 종택의 안채는 1868년 (고종 5년)에 건립되었으며, 이는 안채 상량문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1] 아래채는 이후 1942년에 지어졌다. 이 가옥은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풍수지리상 길지로 여겨지는 곳에 북향()으로 자리 잡은 점이 독특하다.[1]

외대문은 현 소유자의 14대조 김진(), 9대조 김재명(), 8대조 김함() 세 사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받아 세운 정려문()으로, '삼효문()'이라고도 불린다.

매간당 종택은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으며, 1980년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당시 명칭: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2. 1. 건립 배경

연안 김씨 직강공파(延安金氏直講公派)의 영광군 정착은 16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조의 4대손인 김영(金榮)이 숙부 김세공(金世公)이 영광군수로 부임하는 것을 따라 이곳에 오면서 연안 김씨 집성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1]

매간당 종택은 평야가 보이는 산 아래, 풍수지리상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 또는 '학 형국'이라고 일컬어지는 길지(吉地)에 북향으로 넓게 자리 잡고 있다.[1] 현재의 안채 건물은 안채 상량문의 "숭정기원후사무진이월이십구일(崇禎紀元後四戊辰二月二十九日)" 기록을 통해 1868년 (고종 5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1] 이 집은 연안 김씨 직강공파의 종가(宗家)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

2. 2. 건축 및 변천

현재의 영광 매간당 종택 건물은 고종 5년(1868년)에 건립되었으며, 이는 안채 상량문의 ''이라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래채는 이후 1942년에 지어졌다.

이 가옥은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공간 배치 구조를 잘 보여준다.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서당, 마부집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아래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당은 집 뒤편 언덕의 약간 경사진 곳에 위치하며, 오른쪽으로 안채의 뒷마당과 통하게 되어 있다. 사랑채 남쪽, 서당 옆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바깥대문은 정려문으로, 현 소유자의 14대조 김진(), 9대조 김재명(), 8대조 김함() 세 사람의 효성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명정()을 내리고 세워준 것이다. 이 때문에 '삼효문()'이라고 불리며, 2층 누각형으로 지어졌다. 삼효문에 걸린 현판은 고종의 형인 이재면이 썼다고 전해진다. 평상시에는 삼효문 옆에 있는 작은 대문을 사용하고, 삼효문은 집안의 중요한 의례가 있을 때만 열었다.

일반적으로 한옥이 남향이나 동향을 선호하는 것과 달리, 매간당 종택은 북향으로 지어진 점이 특징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이곳이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 또는 '학(鶴)의 형국'에 해당하는 길지(吉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또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불갑천()의 물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마을 길이 집 앞에서 만나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한강과 같아 길지로 여겨졌다는 해석도 있다.

건물과 연못 터, 그리고 집을 둘러싼 토석담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1980년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당시 명칭: 전라남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이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꾸준히 보수되어 현재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2. 3. 삼효문

현 소유자(종손 김성호)의 14대조 김진(金眞), 9대조 김재명(金載明), 8대조 김함(金含)은 효성이 지극하여 나라로부터 정려(旌閭)를 받았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문(旌門)이 바로 외대문에 해당하는 삼효문(三孝門)이다. 삼효문은 2층 누각형 대문 형태로 지어졌다. 이름처럼 세 분의 효행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삼효문에는 다음과 같은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대상 조상현판 내용비고
14대조 김진(金眞)孝贈廣進十贈通政大夫司僕司僕司政延安金眞之閭 (효증광진십증통정대부사복사복사정연안김진지려)현종 묘(廟) 기유년(1669년) 명정(命旌)
9대조 김재명(金載明)孝子通德郞延安金載明之閭 (효자통덕랑연안김재명지려)고종 기해년(1899년) 명정(命旌)
8대조 김함(金含)通政大夫禮式院左掌記延安金含之閭 (통정대부예식원좌장기연안김함지려)고종 기해년(1899년) 명정(命旌)


3. 구조

영광 매간당 종택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 사당, 서당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주요 건물들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구조이다. 공간은 크게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바깥 공간과 안채를 중심으로 한 안 공간으로 구분된다. 사랑마당 주변에는 사랑채, 서당, 마부집 등이 배치되어 있고, 중문을 통해 들어가는 안마당 주변에는 안채와 아래채가 자리한다. 사당은 집 뒤편 언덕에 별도로 배치되어 있다. 집 주위는 토석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깥대문으로는 정려문인 '삼효문'이 세워져 있다. 이처럼 매간당 종택은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 후기 지방 상류 주택의 규모와 배치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1. 배치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서당, 마부집, 연못 등을 배치하였고, 중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아래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당은 언덕 뒷편 약간 경사진 곳에 있으며, 오른쪽으로 안채의 뒷마당과 통하게 되어있다. 사랑채의 남쪽에 배치된 서당 옆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바깥대문은 2층 누각형 대문인 '삼효문'이다. 이는 현 소유자의 14대·9대·8대조의 효성을 기려 나라에서 세워준 정려문이다. 삼효문 옆으로 작은 대문 1칸을 두어 평상시에 사용하고, 삼효문은 집안의 중요한 의례가 있을 때만 열었다. 삼효문의 현판은 고종의 형인 이재면이 썼다고 전해진다.

3. 2. 건물 구성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 사당, 서당, 안대문, 바깥대문, 마부집, 호지집, 측간(외측, 내측) 등의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연못은 현재 물이 담겨 있지는 않지만 옛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외곽으로는 토석담이 옛 모습대로 둘러져 있어 전형적인 민가의 외관을 보여준다.

3. 3. 특징

영광 매간당 종택은 건물, 연못 터, 담장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보존되고 있다. 외곽은 토석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외관을 보여준다.

이 가옥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우리나라 전통 가옥이 주로 남향이나 동향으로 지어지는 것과 달리 북향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풍수지리 사상에 따른 것으로, 집터가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 또는 '학의 형국'()에 해당하는 길지이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불갑천의 물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마을 고샅의 물이 집 앞에서 만나 역수(逆水)를 이루며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마치 한강과 같아 길지로 여겨졌다고 한다.

현재 종택에는 안채, 사랑채, 곳간채, 사당, 서당, 안대문, 바깥대문(삼효문), 마부집, 호지집, 측간 등 주요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사랑채 남쪽 서당 옆에 있던 넓은 연못은 지금은 터만 남아 옛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바깥대문인 정려문 '삼효문'은 현 소유자의 14대, 9대, 8대 조상의 효성을 기려 나라에서 세운 것으로, 2층 누각형 대문 형태이다. 현판은 고종의 형인 이재면이 썼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대대로 물려온 교지, 관복, 홀(笏), 호패, 복대, 문갑, 장(欌), 탁자, 병풍, 약장, 돈궤(추정), 목판, 가죽신, 노리개 등 100여 점에 달하는 귀중한 유품들이 소장되어 있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들 유품에 대하여는 동산문화재의 보존 차원에서 별도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

영광 매간당 종택은 1980년 전라남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이후 국비와 지방비 투자로 꾸준히 보수되어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가옥은 조선 후기 지방 상류 주택의 규모와 배치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4. 소장 유물

매간당 종택에는 대대로 물려 내려온 교지, 관복, 홀, 호패, 복대, 문갑, , 탁자, 병풍, 약장, 돈궤, 목판, 가죽신, 노리개 등 100여 점에 달하는 다양한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 유품들은 조선 후기의 생활 모습과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유품들은 동산문화재 보존 차원에서 별도로 조사할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5. 평가 및 의의

영광 매간당 종택은 조선 후기 지방 상류 주택의 대표적인 예로, 그 규모와 배치를 통해 당시 양반가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 사당, 서당, 안대문, 바깥대문(삼효문), 마부집, 호지집, 측간 등 다양한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연못 터와 옛 모습 그대로 둘러진 토석담 역시 전형적인 민가의 외관을 잘 보여준다. 특히 건축 배치상 자유로운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정려문인 '삼효문'과 서당이 남아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가옥은 1980년 전라남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이후 국비와 지방비 지원을 통해 꾸준히 보수되어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또한, 대대로 물려온 교지, 관복, 호패, 각종 문서함, 가구, 생활용품 등 100여 점에 달하는 다양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어 민속학적 가치도 높다.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종 5년(1868년)에 건립되어 다른 국가민속문화재와 비교해도 건립 연대가 크게 뒤떨어지지 않으며, 건물, 연못, 담장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민속문화재로 승격될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건물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전남대학교 건축공학과 주석중 교수의 조사 보고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이 가옥은 일반적인 한옥과 달리 북향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풍수지리상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梅花落地|매화낙지zho) 또는 '학 형국'(鶴形局)이라 불리는 길지(吉地)이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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