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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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사황후는 후한 영제의 황후로, 백정 출신으로 귀족이 아니었음에도 영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아들 소제를 낳았으며, 소제가 즉위한 후에는 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했다.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던 오빠 하진이 암살당하고, 군벌 동탁이 권력을 잡자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를 옹립했다. 동탁은 하태후를 독살하고, 그녀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영사황후는 영제와 함께 문소릉에 묻혔으며, '영사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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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영제는 환제 뒤를 이어 13세에 즉위한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재위 기간 동안 환관들의 발호와 매관매직, 황건적의 난 등으로 후한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붕어 후에는 황위 계승 싸움으로 후한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 후한말 황족 - 후한 소제 (13대)
후한 소제는 후한 영제의 아들로 189년에 황위에 올랐지만 동탁에 의해 폐위되어 홍농왕으로 강등되었고, 결국 독살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영사황후 | |
---|---|
기본 정보 | |
이름 | 하황후 / 효령사황후 |
중국어 | 何皇后 / 何太后 |
후한 황후 | |
재위 기간 | 181년 1월 8일 – 189년 5월 13일 |
임기 | 8년 4개월 |
이전 | 송황후 |
이후 | 복황후 |
후한 황태후 | |
재위 기간 | 189년 5월 15일 – 189년 9월 30일 |
임기 | 4개월 15일 |
이전 | 효인황후 동태후 |
이후 | 해당 없음 |
개인 정보 | |
사망일 | 189년 9월 30일 |
아버지 | 하진 |
어머니 | 무양군 부인 |
배우자 | 영제 |
자녀 | 소제 변 |
추가 정보 | |
사후 시호 | 효령사황후 (靈思皇后) |
가족 관계 | |
형제 | 하진, 하묘 (주묘) |
2. 생애
영사황후는 키가 163cm였다. 백정 출신으로, 환관에게 뇌물을 바치고 후궁이 되었다.[30] 영제의 총애를 받아 귀인이 되었으며, 176년 아들 유변(소제)을 낳았다. 성격이 강하여 다른 빈비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178년 영제의 첫 황후 송씨가 폐위되자, 180년 황후가 되었다. 181년 영제의 총애를 받던 왕미인이 유협(훗날의 헌제)을 낳자 질투하여 왕미인을 독살했다. 영제가 격노하여 폐위될 뻔했으나, 환관들의 중재로 면했다. 같은 해 6월 아버지에게 거기장군과 작위가 추증되었고, 183년 어머니에게도 무양군(舞陽君)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소제가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였다. 시어머니 동태후[31]를 낙양에서 추방하고 죽였다. 그러나 황태후의 정권을 지지하는 오빠 하진과 환관(십상시)이 다투었고, 하진이 원소 등과 함께 십상시를 죽이려 하자, 환관과 결탁하고 있던 동생 하묘와 함께 반대했다. 결국 하진과 십상시가 모두 죽고, 하묘도 하진의 부하 오광에게 살해당하면서, 동탁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동탁은 동태후와 같은 성씨였기 때문에, 동태후에게 보복하고자 황태후를 제거하려 했다. 동탁은 황태후를 협박하여 소제를 폐위시키고, 동태후가 양육하던 유협을 황위에 앉혔다. 동탁은 황태후에게 과거 동태후에게 했던 행동이 "효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문책한 후, 영안궁에 유폐하고, 아들 홍농왕 유변과 함께 이유에게 독살시켰다. 황태후가 영제의 능에 합장되자, 동탁은 영제의 능의 부장품을 모두 빼앗았다.(『후한서』동탁전).
2. 1. 출신 배경 및 입궁
영사황후는 남양군 완현(宛縣, 현재의 난양시) 출신으로, 대부분의 한나라 황후들과 달리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아버지 하진(何真)은 백정이었고,[3] 어머니의 성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름은 '흥(興)'이었다. 그녀는 이부형제 하진(아버지 동일)과 하묘(何苗, 어머니 동일)[3][4], 그리고 환관 장양의 양자와 결혼한 여동생이 있었다.[5] 신장은 7척 1촌(약 163cm)이었다.[30]전설에 따르면, 그녀의 가족이 황제를 섬길 여성을 선발하는 임무를 맡은 환관들에게 뇌물을 준 후 영제의 후궁에 들어갔다고 한다.[6][7] 영제의 총애를 받아 귀인이 되었다.[30] 176년 영제와의 사이에서 아들 유변을 낳았는데, 유변은 영제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영제는 이전의 아들들을 잃은 것이 불운 때문이라고 믿고, 도사 사자묘(史子眇)에게 갓 태어난 유변을 키우도록 명령했다. 유변에게는 "사후(史侯)"라는 작위가 주어졌다.[8][9]
2. 2. 황후 시절
176년 아들 유변(劉辯, 훗날의 소제)을 낳았다. 영제의 첫 번째 황후인 황후 송씨가 무고로 죽은 뒤 180년 12월 5일 황후로 책봉되었다.[30] 아버지는 무양후(舞陽侯), 어머니는 무양군(舞陽君)으로 봉해졌다. 하씨는 성정이 투기가 심해 영제의 총애를 받던 왕미인이 회임하자 그녀를 독살했다.[30] 영제는 분노해서 하씨를 폐위시키려 했지만 환관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181년 헌제의 후궁 중 한 명인 미인 왕씨가 임신을 했다. 혜 황후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해칠까 두려워, 그녀는 약물을 복용하여 유산을 시도했지만 아이는 안전했고, 그녀는 태양에 대한 꿈을 꾸었다. 같은 해, 미인 왕씨가 아들 유협을 낳자 혜 황후는 그녀에게 독살을 명령했다. 헌제는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하여 혜 황후를 폐위하려 했지만, 환관들이 그를 설득하여 황후를 살려두도록 했다. 어머니가 없는 유협은 할머니인 동태후에 의해 양육되었고 "동후"()의 칭호를 받았다.
신하들이 아들 중 한 명을 황태자로 지명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헌제는 살아남은 두 아들인 유변과 유협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유변이 경박하고 존경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황제가 되기에 부적합하다고 느껴 유협을 선호했다. 그러나 그는 유협을 선택하면 혜 황후가 이복형제인 하진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걱정했다. 하진은 대장군()의 지위에 있었고 조정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결국 두 아들 중 누구도 황태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178년 영제의 첫 번째 황후였던 송씨가 폐위되자, 180년 하씨가 황후로 세워졌다.
181년 4월, 영제의 총애를 받던 왕미인이 유협(후의 헌제)을 낳자 심하게 질투하여 왕미인을 독살했다. 영제가 격노하여, 하씨는 폐위될 뻔했으나, 환관의 중재로 간신히 면했다. 같은 해 6월에 아버지에게 거기장군과 작위가 추증되었고, 183년에 어머니에게도 무양군(舞陽君)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2. 3. 황태후 시절
189년, 후한 영제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아들 유변이 14세의 나이에 소제로 즉위하자 하씨는 황태후가 되어 임조청정을 하였다. 영제의 생모인 동태후가 정사에 관여하려 할 때마다 하태후가 이를 막았다.[31] 동태후는 "네가 지금 이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오라비를 믿고 그러는 것이 아니냐. 내가 표기장군(동태후의 조카 동중)을 시켜 네 오라비의 머리를 베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라고 말하며 괘씸하게 여겼다. 하진은 하태후에게서 이 말을 전해듣고 동중을 잡아들이고 파직시키자 동중은 자살했다. 동태후 또한 근심 속에 지내다 죽었는데, 이 일로 하태후와 그 일가는 민심을 잃었다.당시 나라는 십상시로 불리는 환관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하진이 하태후에게 이들을 제거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하태후의 어머니 무양군과 그 동생 하묘가 환관들에게 뇌물을 받고 하진을 막아달라 부탁했던 터라 하태후는 하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32] 원소는 일을 지체하면 변고가 생길 것이라며 재촉했고, 하진은 그를 사례교위로 삼고 환관들을 감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결국 하태후는 십상시를 파면시켜 낙향하도록 조치했고, 원소는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모두 잡아들이라고 권했지만 하진은 이를 망설였다. 그 사이에 십상시의 우두머리 장양(하태후 여동생의 시아버지)이 며느리에게 부탁해 하태후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고, 며느리는 다시 어머니인 무양군에게 전했다. 무양군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하태후는 마음이 흔들려 십상시를 복직시켰다.
하진이 하태후에게 다시 십상시를 처단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장양의 무리는 하진을 죽였다. 십상시의 대부분은 하진의 부하 원소, 원술, 오광 등에게 죽임을 당했고, 환관의 편이었던 하묘도 오광과 그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189년 영제가 위독해지자, 그는 여덟 살 난 아들 유협을 측근이자 환관인 건석에게 은밀히 맡겼다. 영제가 죽자, 건석은 하진을 궁궐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리고 암살한 후 유협을 즉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하진의 지인이기도 한 환관 반은(潘隱|반은중국어)이 건석의 음모를 대장군에게 경고했다. 하진은 군영으로 돌아가 병든 척하며 궁궐 소환에 응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유협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건석의 계획은 실패했고, 13세의 유변이 즉위하여 소제로 알려지게 되었다.[16][17]
소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하태후는 태후가 되어 아들과 함께 조정에 참석했고 대장군 하진과 태부 원위(袁隗|원외중국어)가 그의 섭정을 맡았다.[16][17]
189년 여름, 건석은 하진과 그의 부하들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료 환관들에게 하진을 암살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태후 측근인 환관 곽승(郭勝|곽승중국어)의 설득으로 건석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진은 이후 건석을 체포하여 처형한 다음, 건석이 지휘하던 군대를 장악했다.[18]
189년 가을, 원소는 하진에게 환관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하태후는 정기적으로 남자들과 교류해야 한다는 점을 부적절하고 부끄럽게 여겨 즉시 그 제안을 거부했다. 하태후의 어머니(무양의 부인)와 하묘(何苗|하묘중국어)는 환관들에게 뇌물을 받아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또한 하진의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며 환관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태후는 환관들의 도움으로 영제의 후궁이 되었다.)[19]
하진은 이후 원소의 또 다른 제안에 따랐다. 그는 몇몇 지방 군사 관료 또는 군벌(동탁, 왕광, 교모, 정원)에게 군대를 이끌고 황도 낙양 인근으로 가서 환관 처형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도록 은밀히 지시하여, 하태후가 환관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려 했다. 하태후는 처음에는 환관을 해치려 하지 않았지만, 동탁의 군대가 낙양에 접근하자 환관들에게 궁궐을 떠나 그들의 제후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많은 환관들이 영제에 의해 제후가 되었다.)[20] 하태후의 여동생은 환관 지도자 장양의 양자에게 시집갔다. 장양은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녀는 어머니(무양의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어머니는 하태후에게 이 말을 전했다. 태후는 마음을 바꾸어 환관들을 궁궐로 다시 소환했다.[21]
189년 8월 말 또는 9월 경, 환관들은 하진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하태후의 이름으로 가짜 칙령을 발송하여 하진에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궁궐로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하진은 매복에 걸려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들은 하진을 반역죄로 선언했다.[22] 하진이 죽은 후, 그의 부하 오광()과 장장(), 그리고 원소, 원술 등은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습격하여 복수심에 환관들을 죽였다. 그들은 환관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털이 없는 젊은이들은 절망하여 군인들 앞에서 바지를 내려 자신이 환관이 아님을 증명했다. 공격 중에 환관들은 하태후, 소제, 그리고 진류왕 유협을 인질로 잡고 궁궐에서 탈출하려 했다. 노식은 환관 단규(段珪|단규중국어)를 가로막아 태후를 그에게서 구했다.[23] 환관에게 동정심을 가진 하묘는 오광과 동탁의 동생 동민(董旻|동민중국어)에게 살해되었다. 이 공격으로 2000명 이상이 사망했다.[24] 혼란 중에 환관들에게 궁궐 밖으로 끌려 나간 소제와 진류왕은 결국 강가 근처에서 발견되어 노식과 민공(閔貢|민공중국어)에게 구출되어 안전하게 돌아왔다.[25]
2. 4. 동탁의 횡포와 죽음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헌제로 즉위시켰다. 동탁은 하태후에게 시어머니인 동태후를 핍박했다는 죄를 물어 유폐시키고 이유를 시켜 짐살(鴆殺)했다.[33] 신료들은 베로 만든 상복을 입는 것이 금지되었고, 형 하진을 죽게 했다는 이유로 십상시의 난 때 죽음을 당한 하묘의 시신은 파내어져 절단된 뒤 길가에 내버려졌으며, 하태후의 어머니 무양군도 살해당해 시신이 버려졌다.3. 평가
영사황후에 대한 평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를 참고할 수는 있다.
3. 1.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탁의 명령을 받은 이유가 독주를 마시라고 권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감금되어 있던 탑 위에서 이유에게 밀쳐 떨어져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참조
[1]
서적
Annals of the Later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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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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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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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Yingxiong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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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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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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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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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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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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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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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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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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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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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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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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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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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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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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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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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uhanshu
[30]
문서
[3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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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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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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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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