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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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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관은 거세된 남성을 의미하며, 동아시아, 서아시아, 지중해 지역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중국에서 기원하여 주변 국가로 퍼져나갔으며, 왕실의 시중, 후궁 관리, 관료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중국에서는 완전 거세가 이루어졌으며, 환관은 권력을 획득하여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한국, 베트남, 일본 등에서도 환관 제도가 존재했으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환관은 문학, 만화, 영화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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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기본 정보
직책 명칭환관
다른 명칭내시 (內侍), 환자 (宦者), 엄인 (閹人), 태감 (太監)
역할궁중의 남자 종
성별남성
거세 여부거세됨
복무 장소궁궐
기원고대
국가여러 문화권
관련 직책궁녀
상세 정보
역할 및 의무궁중 업무 보조
왕족 시중
때로는 정치적 영향력 행사
거세 방법다양한 방법 존재
어린 나이에 거세
역사적 중요성여러 왕조에서 중요한 역할 수행
궁중 내 권력 다툼에 연루되기도 함
사회적 인식다양한 시각 존재
권력 남용에 대한 비판도 존재
한국에서의 환관고려, 조선 시대에 존재
경국대전에 규정
사옹원, 상선 등에 소속
중국에서의 환관긴 역사
명나라 때 특히 권력 강대
폐단도 많았음
베트남에서의 환관호(Hồ) 왕조 때 처음 등장
이후 여러 왕조에서 존재
기타 지역의 환관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존재
참고
관련 용어내시부
상선
사옹원

2. 동아시아의 환관

전국 시대의 중국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조선, 베트남한자 문화권 국가로 퍼져나갔다. 일본에 환관이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중국은 조선과 달리 완전거세를 하였다.[7]
  • 한국은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입양하기도 했는데, 성씨가 다른 아이를 입양하는 것도 허용되었다.[5]
  • 일본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관자'''"라는 단어에 환관의 의미도 있어서, 웅략 천황 시대에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행해졌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 베트남은 중국에서 환관 제도를 도입하여 거세 기술을 받아들였다.[1]

2. 1. 중국

중국의 환관은 조선의 환관과 달리 완전거세를 하여 음경까지 제거하였다. 이들은 음경과 고환을 항아리나 함에 담아 보관하는 관례가 있었으며, 이 항아리는 태감의 직인으로 밀봉되었다.[7] 중국 환관은 완전 거세를 했지만, '채호'라는 이름으로 궁녀와의 사실혼이 묵인되기도 했다.[7]

제지술을 개발한 채륜, 환관 역사상 가장 높은 신분에 올랐던 조등, 아프리카까지 해양 대원정을 성공시켰던 정화 등이 유명한 환관이다.[7]

전국 시대의 중국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조선베트남한자 문화권 국가로 퍼져나갔다. 일본에 환관이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중국어의 "환(宦)"은 원래 "노예"를 의미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왕의 궁묘에 모시는 사람을 "환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춘추 전국 시대 이후에는 거세되어 왕후에게 시중드는 자를 "엄인·엄인·사(寺)인" 등으로 불렀으며, "환관"은 반드시 거세된 자는 아니었다. 후한 이후 환관이 엄인 전용 관직이 되면서[2] "엄인·엄인·환관·사(寺)인" 등은 모두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나라부터 나라까지는 환관이라는 말 대신 "태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사형 다음가는 형벌(혹은 그 대체 형)로 여겨졌으며, 생식기를 절제하는 거세형('''부형''')에, 부가형으로 궁정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시키는('''궁형''')이 존재했다. 시대가 지나면서 환관이 중용되자, 스스로 성기를 잘라내어 환관이 되는 자궁 현상도 나타났다. 나라 때 궁형은 한때 폐지되었지만, 나라 때 부활하여 성행했다. 시기와 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거세되어도 성욕은 남는다고 한다. 그 때문에 환관과 여관과의 불의가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오대 십국 중 하나인 남한은 환관을 중용하여 과거 시험 성적 우수자는 먼저 성기 절단한 후에 등용할 정도였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환관의 정치 간여를 엄격히 금했지만, 제3대 영락제 때 환관 정치가 부활하여 명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이로 인해 명나라는 '환관의 나라'로 전락하였다.[7] 명대에는 환관의 수가 약 1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도 했다.

완전거세된 환관은 목소리가 높아지고, 수염이 빠지며, 나이가 들면 살이 빠지고 주름이 심하게 지는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3][4]

후한, , 은 환관을 중용한 대표적인 왕조이다. 후한에서는 호족에 대항하기 위해 황제가 환관을 수족으로 사용했고, 당나라(주로 중당 이후)에서는 번진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환관을 중용하여 황제의 폐립권까지 장악하기도 했다. 명나라에서는 황제 직속의 감찰 조직인 동창이 국정을 전횡하기도 했지만, 명대 환관의 권세는 황제의 신임에 의존했기 때문에 황제가 바뀌면 유력한 환관도 실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주족 왕조인 은 환관을 내무부 관할 하에 두고 업무를 후비의 돌봄으로 한정하여 국정에 관여할 여지를 줄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왕조가 멸망했지만,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는 1912년 퇴위 후에도 자금성에 거주하며 환관을 계속 두었다. 1924년 펑위샹의 쿠데타로 선통제와 함께 환관도 자금성에서 추방되면서 중국 환관 제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환관의 본래 업무는 남자가 출입할 수 없는 후궁의 관리 운영이었지만, 자금성 내에 거주가 허락되는 "남성"은 황제, 황자를 제외하면 모두 환관이었기 때문에, 환관의 업무는 궁정 운영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주요 업무는 다음과 같다.

  • 궁정 내 건물, 가구, 청소 등의 잡일
  • 후궁 경비 및 관리, 황제와 황후, 측실의 성행위 일시 기록
  • 첩보 및 정보 수집
  • 황제의 비서 업무

2. 1. 1. 중국 환관의 거세 방법

중국에서는 조선과 달리 환관의 음경까지 제거하는 완전거세를 시행하였다.[7] 시기와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거세 후에도 성욕은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환관과 여관 간의 불의가 자주 발생했으며, 환관의 성행위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다.

오대 십국 중 하나인 남한은 환관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과거 시험 합격자도 거세 후에 등용할 정도였다. 마지막 황제 유창 시기에는 인구 100만 명 중 환관이 2만 명에 달했다.

나라 시대에는 환관의 수가 약 1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612년에는 환관 결원 3,000명을 모집하는데 2만 명이 지원하여 모집 인원을 늘렸다는 기록도 있다.

청나라 말기에는 자금성 서화문 밖에 '소창'이라는 정부 공인 수술소가 있었고, '칼잡이(절단사)'가 거세 수술을 도맡았다. 1877년 영국인 연구자 스테인트(G.Carter.Stent)의 기록에 따르면, 수술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 자궁 지원자를 화강 위에 반쯤 엎드리게 하고, 칼잡이의 제자들이 몸을 누른다.
  • 칼잡이가 후회 여부를 묻고, 지원자가 동의하면 마취 없이 남성 생식기를 단번에 잘라낸다.
  • 출혈은 뜨거운 재로 멈추고, 요도에는 금속 마개를 꽂는다.
  • 상처는 찬물에 적신 종이로 감싸고, 봉합하지 않는다.
  • 수술 후 2~3시간 동안 방 안을 걷게 하고, 3일간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한다.
  • 상처가 아무는 데는 2개월이 걸린다.


중국에서는 고환 적출이나 음낭 절제 대신, 남성 생식기 전부를 잘라내는 완전 거세 방법을 사용했다. 칼잡이는 절단된 남성 생식기를 가공하여 항아리에 보관했고, 이는 환관 취직 시 거세 증거로 사용되었다. 이 "절단된 남성 생식기"는 "보(바오)"라고 불렸으며, 환관이 죽은 후 함께 매장되었다. 완전 거세로 인해 환관들은 평생 쪼그리고 앉아 배뇨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2. 1. 2. 유명한 중국 환관

진나라의 환관 조고이사와 함께 시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2세 황제 호해를 옹립하여 권력을 휘둘렀다. 호해를 시역하고 자영을 옹립했으나, 결국 자영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고는 환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다만, 최근에는 조고가 환관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7]

사마천전한 시대의 역사가로, 『사기』를 저술했다. 무제의 분노를 사 궁형에 처해졌다.[7]

채륜후한 시대의 환관으로, 제지법을 개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조등후한 시대의 환관으로, 순제의 환관 개혁으로 작위를 승계하고 양자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조등 자신은 신중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자손들(조숭, 조조, 조비)은 후한 왕조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7]

십상시후한 영제를 섬기며 중상시의 관직에 있던 환관 집단이다. 장양, 조충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은 정치를 농단하여 권세를 누렸다. 하진을 살해했으나, 원소원술 등이 일으킨 봉기로 인해 대부분 살해되었고, 장양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사에는 십상시가 12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7]

황호촉한의 환관으로, 유선을 섬기며 국정 실권을 장악하고 인사를 제멋대로 하여 촉한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7]

고력사는 당나라 현종을 섬긴 환관으로, 황제의 측근에서 잡무를 처리하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안사의 난 당시 현종이 성도로 피난 가는 도중, 금군 반란을 수습하기 위해 양귀비를 목 졸라 죽였다.[7]

명나라의 환관 정화는 남해 대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7]

유근명나라 정덕제 초기에 "팔호"라 불리는 다른 일곱 명의 환관과 함께 정치를 농단하고, 뇌물 수수 등 부정을 저지르며 반대 세력을 탄압하여 명나라의 부패를 야기했다. 정덕제의 신임을 잃고 황제 자리를 노렸으나 실패하여 능지형에 처해졌다.[7]

위충현명나라 천계제를 대신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동창을 통해 동림당을 탄압했다. 각지에 자신의 상을 모신 사당을 짓게 할 정도로 황제를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으며,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의 세력 확대를 초래하여 명나라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하자 제거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시신은 능지형에 처해져 효수되었다.[7]

왕승은은 명나라 숭정제를 섬긴 환관이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 끝까지 황제를 따랐으며, 숭정제가 죽자 그를 따라 죽었다.[7]

안덕해와 이련영은 청나라 서태후에게 중용된 환관이었다. 특히 이련영은 안덕해가 죽은 후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다.[7]

손요정은 청나라의 마지막 환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부의를 섬겼다. 1996년에 사망했다.[7]

2. 2. 한국

조선 연산군 때 환관 김자원은 왕명의 출납을 악용하여 전횡을 일삼았다.[5] 한편, 연산군의 폭정에 굴복하지 않은 김처선 등의 의로운 일화도 전해진다.[5] 한국의 환관은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입양하기도 했는데, 당시 일반 백성은 성씨가 다른 아이를 입양하지 못하게 한 것과는 다르게 성씨가 다른 아이를 입양하는 것도 허용되었다.[5]

삼국사기 권 10 "신라본기"에는 신라 제42대 흥덕왕(826년 즉위 - 836년 사망)이 왕비 장화부인이 즉위 2개월 만에 사망한 후 후비를 맞이하지 않고, 후궁의 시녀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환관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9세기에는 이미 환관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고려(918년 - 1392년)와 조선 왕조(1392년 - 1910년)에도 환관 제도가 존재했다.[5] 의료 기술이 미비하여 음경을 절단하면 사망률이 높아졌기 때문에, 고환만 제거하여 환관으로 만들었다.[5] 또한, 자국 관료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민을 환관으로 만들어 역대 중국 왕조에 공납하기도 했다.[5] 원 순제(1320년 - 1370년) 시대에 후궁에서 권세를 떨친 박불화|朴不花한국어는 고려에서 공납된 환관이었다.[5] 1403년( 영락 원년)에는 "명의 황제의 성지를 받들어, 용모가 단정하고 성질이 총명한 화자(환관의 다른 명칭) 35명을 선발하여 공납했다"는 기록이 조선 측 기록에 남아 있다.[5]

고려 의종이 총애하는 환관의 전횡을 허락한 것이 의종의 폐위와 무신 정권 성립의 한 원인이 되었다.[5]

조선 왕조에서는 내시부가 설치되어 환관이 임용되었다.[6] 조선 왕조 시대의 환관은 장수하는 경향이 있었다.[6] 내시부는 고려에서 계승된 직제로, 고려에서는 귀족 자제들이 내시로 임용되었으나, 조선에서는 환관이 임용되었다.[6] 이때부터 조선에서는 "내시"가 환관의 다른 명칭이 되었고, 현대 한국·북한에도 이르고 있다.[6] 조선의 환관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환관 제도가 폐지되었다.[6]

현재 한국 서울 종로구 효자동(효자동|孝子洞한국어)은 과거 퇴직한 환관이 살았던 곳으로, "화자동"(화자동|花子洞한국어)이라고 불렸다고 한다.[6]

2. 3. 일본

통설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궁형을 도입하지 않았다고 여겨지지만, 일본서기에 나오는 "'''관자'''"라는 단어에는 환관의 의미도 있어서, 웅략 천황 시대에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행해졌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중세 일본에서는 환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건무식목에는 궁형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 후태평기에는 "남자는 헤노코를 찢고(음경음낭을 잘라내는 행위)", "여자는 질구를 꿰매어 막는다"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에도 시대의 고센류에는 "오쿠가로'''라세츠'''한 것을 코에 걸다", "허수아비인가 여종을 맡는 '''라세츠'''사람"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라세츠'''"는 한자로 "라절"이라고 쓰며, "음경절단"의 속어이므로, 오오쿠(대오)의 임무를 맡은 사람이 여관들을 통솔하는 환관과 비슷한 존재가 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4. 베트남

베트남의 역대 왕조는 중국에서 환관 제도를 도입하여 거세 기술을 받아들였다. 베트남에서도 궁정 내 권력을 얻기 위해 젊은이가 스스로 자궁하는 일이 빈번했고, 이들은 공공 사업 감독부터 범죄 수사, 포고령 낭독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장기 왕조인 리 왕조의 저명한 무장인 리 투옹 끼엣 역시 환관이었다.[1]

수술 대상자는 허벅지와 복부가 묶이고, 집도자는 그를 침대에 고정했다. 생식기는 후추 물로 씻은 다음 발기된 상태로 잘라냈다. 그 후, 치유 과정에서 배뇨할 수 있도록 요도에 관을 삽입했다.[1]

3. 서아시아 및 지중해 지역의 환관

수메르 이래로 환관은 문명의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같이 수메르 문명을 계승한 오리엔트 제국에서도 환관이 사용되었다. 전쟁 포로로 잡힌 적군의 성기를 절단하여 노예로 삼는 관습이 있었으며, 형벌로서 거세당하는 자도 많았다. 환관은 관료와 후궁에 봉사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노예 신분이라도 권력과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환관이 있었다는 것은 속설이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된 이후에야 환관이 사용된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제국, 그리고 이를 계승한 동로마 제국에서도 환관이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 후기에는 황제 권력이 강해지면서 고급 관료의 세습을 막기 위해 환관을 고급 관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1] 기독교화된 동로마 제국에서는 환관이 관료, 군대의 사령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등에 임명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동고트 전쟁을 지휘한 나르세스, 포티오스와 총대주교 자리를 다툰 이그나티오스 등이 대표적인 환관 출신 인물이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자발적으로 거세하거나, 부모가 자녀의 출세를 위해 거세하는 사례도 있었다. 콤네노스 왕조 성립 이후 환관의 세력은 약해졌으며, 제국 쇠퇴와 함께 환관은 격감했다.[1]

하렘에서의 환관


일부다처제였던 이슬람 제국에서는 오리엔트의 전통을 이어받아 환관이 사용되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에서는 환관이 후궁(하렘)을 관리하며 정치 실권을 쥐는 경우도 있었다. 코란거세 금지 규정을 회피하기 위해 이슬람교도가 아닌 남성을 거세하여 환관으로 만들었으며, 외국인 흑인이나 백인 환관이 많이 채용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창시자 아غا 모하마드 칸은 유년기에 포로로 잡혀 거세되었지만, 탈출하여 왕조를 열었다. 이슬람 제국의 환관은 성기 전부를 제거하는 완전 거세와 음경이나 고환만 절제하는 불완전 거세의 두 종류가 있었으며, 완전 거세된 환관이 더 비싸게 거래되었다.

3. 1. 고대 오리엔트

수메르 이래로 환관은 문명의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수메르어에는 환관을 의미하는 단어가 8개나 있었다.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같이 수메르 문명을 계승한 오리엔트 제국에서도 환관이 사용되었다. 또한 전쟁 포로가 된 적군의 성기를 절단하여 본국으로 연행해 노예로 삼는 관습이 있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형벌로서 거세당하는 자도 많았다. 환관의 역할로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관료와 후궁에 봉사하는 자가 많았다. 또한, 환관이든 아니든 노예 신분이라도 권력과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고대 이집트에서 환관이 있었다는 것은 속설이다. 발견된 고위 신관이나 관리의 미라 중에는 성기가 없는 것도 있지만, 환관을 사용한 문서 기록은 없고, 할례의 벽화 등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성기는 수분이 많아 미라화 과정이나 그 후의 보존 상태에 따라 잃어버리기 쉬운 부위이므로, 육안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집트에서 환관이 사용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된 이후이다.

3. 2. 고대 그리스·로마 및 동로마 제국

고대 그리스로마 제국, 그리고 이를 계승한 동로마 제국에서도 환관이 사용되었다. 오리엔트와 그리스·로마에서도 환관은 궁정 내부의 잡무 담당이 중심이었지만, 로마 제국 후기 이후 황제 권력이 강해지면서 고급 관료의 세습을 막기 위해 환관을 고급 관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1]

기독교화된 동로마 제국에서는 환관이 관료로 중용되었고, 군대의 사령관이나 기독교 동방 정교회 통솔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까지 다수 임명되었다. 예를 들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동고트 전쟁을 지휘한 나르세스, 포티오스와 총대주교 자리를 다툰 이그나티오스,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최초로 폐위되는 원인이 된 재무 장관인 페르시아 출신 스테파노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치세부터 바실리우스 2세 치세 초기에 권세를 떨친 바실리오스 노토스 등은 환관이었다. 이그나티오스와 바실리오스 노토스는 각각 미카일 1세 랑가베,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의 아들이었으며, 실각한 황제의 자손으로부터 황제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나오지 않도록 거세된 자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1]

중국처럼 환관이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실권을 잡은 예는 많지만, 국가의 정규 관직에 환관이 다수 임명된 국가는 동로마 제국뿐일 것이다. 동로마 제국은 환관을 중용했기 때문에, 중국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으로 거세하여 환관을 지원하거나, 부모가 자녀의 출세를 위해 자녀를 거세하는 사례가 나왔다. 또한 기독교의 보급에 따라, 스스로 욕망을 끊을 목적으로 거세하는 자도 나타났다. 그 유행은 엄청나서, 민간에서의 거세를 금지하는 칙령이 여러 번 나올 정도였다.[1]

11세기 말~12세기에 들어, 군사 귀족 출신의 콤네노스 왕조가 성립되자, 11세기까지 문관 관료로서 군사 귀족과 대립하던 환관의 세력은 약해져 갔다. 그 후, 12세기 말 이후 제국이 쇠퇴해감에 따라, 환관의 공급원이 되는 속주가 상실되었고, 제국의 재정력도 저하되었기 때문에, 요원을 고용할 수 없게 되어 환관은 격감해 갔다.[1]

3. 3.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하렘에서 환관을 고용했다.

일부다처제였던 이슬람 제국에서는 오리엔트의 전통을 이어받아 환관이 사용되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에서는 환관이 후궁(하렘)을 관리하며, 음지의 실력자로 행동하고, 정치의 실권을 쥐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슬람 제국의 특징으로는, 코란에 기록된 교리상의 거세 금지 규정을 회피하기 위해, 이슬람교도가 아닌 남성(대부분 소년)을 거세하여 환관으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외국인인 흑인이나 백인 환관이 많이 채용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전쟁 포로가 되거나, 노예로 팔려와 환관이 된 것이다. 카자르 왕조의 창시자 아غا 모하마드 칸도 유년기에 포로로 잡혀 거세되었지만, 후에 탈출에 성공하여 세력 재결성에 성공, 환관으로서 왕조를 연 한 예이다. 당연히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사후에는 조카인 파트흐 알리 샤가 제위를 이었다.

이슬람 제국의 환관의 거세 방법은 성기 전부를 제거하는 완전 거세와 음경만, 또는 양쪽 고환만 절제하는 불완전 거세의 두 종류가 있으며, 거세 노예로 팔릴 경우에는 전자가 더 비싸게 거래되었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도 종종 남색이 행해졌으며, 환관이 군주 등 주인의 남색 상대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Kizlar agha|키즐라르 아가영어 - 흑인 환관장

4. 기타 지역의 환관

아프리카에는 환관 병사(거세 병사)의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모시족은 과거 음경만을 절단한 환관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근대 이전 유럽에는 카스트라토라는 거세된 남성 가수가 존재한다.

4. 1. 아프리카

아프리카에는 환관 병사(거세 병사)의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모시족은 과거 음경만을 절단한 환관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4. 2. 유럽

근대 이전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카스트라토라는 거세된 남성 가수가 존재한다.

5. 환관이 등장하는 작품

다음은 환관을 소재로 하거나 환관이 등장하는 작품들이다.


  • 아사다 지로의 소설 蒼穹の昴|창궁의 별중국어에서 주인공은 벼슬길과 출세를 위해 스스로 성기 절단(자궁)을 하고, 나라 말기 권력 투쟁에 뛰어든다.[1]
  • 난조 노리오의 소설집 五代将軍|5대 쇼군일본어 단편 「남색대감」에서는 주자에몬이 "라절(완전 거세)"당하여 사도 광산으로 보내진다.[2]
  • 이케가미 에이이치의 작품 テンペスト|템페스트일본어에서 주인공은 성별을 속이고 환관이라 칭하며 류큐 왕국의 관리로 활약한다.[3]
  • 쿠로사와 하유마의 소설 劉邦の宦官|유방의 환관일본어에서 소청호는 가난 때문에 환관이 되어 항우를 물리친 한 왕조를 섬긴다.[4]
  • 휴우가 나츠의 소설 薬屋のひとりごと|약사의 혼잣말일본어에서 환관 닌시는 주인공의 능력을 보고 사건 해결을 돕게 한다.[5]
  • 시노하라 치에의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일본어에는 나키아 황비에게 헌신하는 환관 신관 울히 샤르마가 등장한다.[1]
  • 다나카 요시키 원작, 가지와라 다카시 그림의 만화 흑룡의 성일본어에서 주인공 "이시하"는 스스로 환관이 되어 누얼간도지휘사의 장이 된다.[1]
  • 아오키 토모의 만화 천공의 옥좌일본어는 가공의 덕 왕조를 배경으로 많은 환관들이 등장한다.[1]
  • 애니메이션 구름처럼 바람처럼
  • 애니메이션 코드 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R2에서는 '중화 연방'의 실권을 쥔 관료 집단으로 환관이 등장한다.
  • 영화 무사도 잔혹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중 한 명이 영주에게 "라세츠"를 명령받는 장면이 나온다.

5. 1. 문학

다음은 환관을 소재로 한 외국 문학 작품들이다.

  • 아사다 지로의 소설 蒼穹の昴|창궁의 별중국어에서 주인공은 벼슬길과 출세를 바라며 자신의 손으로 성기 절단(자궁)을 하고, 나라 말기의 치열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든다.[1]
  • 난조 노리오의 소설집 五代将軍|5대 쇼군일본어의 단편 「남색대감」에서는 등장인물 주자에몬이 정원에 알몸으로 묶여 "라절(완전 거세)"당하여 사도 광산으로 보내진다.[2]
  • 이케가미 에이이치의 작품 テンペスト|템페스트일본어에서 주인공은 여성이면서 성별을 속이고 환관이라 칭하며 류큐 왕국의 관리로 활약한다.[3]
  • 쿠로사와 하유마의 소설 劉邦の宦官|유방의 환관일본어에서 금발 벽안의 미소년 소청호는 가난 때문에 환관이 되어 항우를 물리친 4년 후의 새벽녘의 한 왕조를 섬기게 된다.[4]
  • 휴우가 나츠의 소설 薬屋のひとりごと|약사의 혼잣말일본어에서 환관 닌시는 주인공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보고 사건 해결을 돕게 한다.[5]

5. 1. 1. 외국 문학


  • 아사다 지로의 소설 蒼穹の昴|창궁의 별중국어에서 주인공은 벼슬길과 출세를 바라며 자신의 손으로 성기 절단(자궁)을 하고, 나라 말기의 치열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든다.[1]
  • 난조 노리오의 소설집 五代将軍|5대 쇼군일본어의 단편 「남색대감」에서는 등장인물 주자에몬이 정원에 알몸으로 묶여 "라절(완전 거세)"당하여 사도 광산으로 보내진다.[2]
  • 이케가미 에이이치의 작품 テンペスト|템페스트일본어에서 주인공은 여성이면서 성별을 속이고 환관이라 칭하며 류큐 왕국의 관리로 활약한다.[3]
  • 쿠로사와 하유마의 소설 劉邦の宦官|유방의 환관일본어에서 금발 벽안의 미소년 소청호는 가난 때문에 환관이 되어 항우를 물리친 4년 후의 새벽녘의 한 왕조를 섬기게 된다.[4]
  • 휴우가 나츠의 소설 薬屋のひとりごと|약사의 혼잣말일본어에서 환관 닌시는 주인공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보고 사건 해결을 돕게 한다.[5]

5. 2. 만화


  • 시노하라 치에의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일본어에는 주인공 유리를 노리는 나키아 황비에게 헌신하는 환관 신관 울히 샤르마가 등장한다. 황비의 야망을 위해 암약하며, 북방 국가 왕족 출신이지만 나라가 멸망했을 때 강제로 거세당해 노예로 히타이트에 팔려왔다.[1]
  • 다나카 요시키 원작, 가지와라 다카시 그림의 만화 흑룡의 성일본어(전2권)에서 주인공 "이시하"는 당시 중국()의 동북 변방 지역을 통일하는 상급 기관 누얼간도지휘사(奴児干都指揮使)의 장이다. 군주 "연왕(燕王)"과 여러 장수와의 연락 역할을 자처하기 위해 스스로 환관이 되어 고위직을 얻었다.[1]
  • 아오키 토모의 만화 천공의 옥좌일본어는 젊은 황제를 무시하고 황태후가 권세를 휘두르는 가공의 덕 왕조를 배경으로 한다. 황태후파·반 황태후파, 고결함·악덕, 일족이 사형을 당하는 가운데 자신은 궁형·전쟁 포로(대리국이나 몽골) 출신·가난 때문에 스스로 거세하는 등 많은 환관이 등장하여 정치 개입, 관료와의 대립, 비밀 경찰과 군무, 황족의 시중, 후궁 내 잡일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실존 환관(왕승은이나 정화)을 모델로 한 인물이나, 환관이 장을 맡았던 실존 조직(동창)도 등장한다.[1]

5. 3. 애니메이션


  • 구름처럼 바람처럼
  • 코드 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R2 - 21세기에 이르러서도 형식상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중화 연방'의 실권을 쥔 관료 집단으로 등장한다. 단, 시리즈 2번째 작품인 『R2』에서만 등장하며, 1번째 작품에서는 평범한 근대적 정치가가 동국의 수뇌로 나온다.

5. 4. 영화

난조 노리오의 소설 피학의 계보를 영화화한 무사도 잔혹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중 한 명인 이이쿠라 큐타로가 영주에게 "라세츠"를 명령받는 장면이 나온다.

참조

[1] 웹사이트 8歳から12歳のうちに鋭い剃刀で陰茎と陰囊を一気に切り落とす…国を支えるために「去勢手術」が公然と行われていた“驚愕の理由” https://bunshun.jp/a[...] 文藝春秋社 2022-04-28
[2] 문서 『後漢書』宦者列伝 s:zh:後漢書/卷78
[3] 웹사이트 「宦官(かんがん)」とは何か~中国史をいろどる異形の群像【中国歴史夜話 10】 https://serai.jp/hob[...] 小学館 2020-03-29
[4] 웹사이트 【去勢された男性】中国史の裏主人公?宦官とは何者なのか {{!}} MP https://mythpedia.jp[...] mythpedia.jp 2019-02-28
[5] 문서 『三國史記』巻10 興徳王(興德王) s:zh:三國史記/卷10#興德王
[6] 웹사이트 男性は短命:宦官の研究でも裏付け https://wired.jp/201[...] WIRED.jp 2012-09-26
[7] 서적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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