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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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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술은 후한 시대의 군벌로, 명문가 출신이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몰락했다. 하진 사후 군대를 이끌고 십상시를 제거하고, 동탁 토벌전에 참여했으나 남양으로 도주했다. 손견을 예주 자사로 임명하여 동탁을 공격하게 했지만, 손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보급을 끊기도 했다. 원소와 대립하며 공손찬과 연합했으나, 손책에게 강동을 빼앗기고 조조에게 연패하며 세력이 약화되었다. 197년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중으로 했으나, 여포와의 동맹 실패, 조조의 공격으로 인해 결국 199년 식량 부족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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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원술 청나라 초상화
원술의 청나라 시대 초상
이름원술
로마자 표기Yuan Shu
공로
로마자 표기Gonglu
출생155년
출생지여남군 상술현
사망199년 6월
사망지안후이성
부친원봉
조부원탕
형제원기 (이복형)
원소 (이복형)
친척원기 (사촌)
원윤 (사촌)
원위 (숙부)
양표 (매부)
양수 (조카)
하규 (사촌)
손분의 아내 (손녀)
배우자풍부인
자녀원요
관직
양책후192년 ~ 197년
남양태수189년 ~ 192년
후장군189년 ~ 190년
좌장군192년 ~ 197년
양주목 (자칭)192년 ~ 197년
정치
정치 체제중 황제 (자칭)
재위 기간197년 ~ 199년
기타 정보
직업군벌, 군인, 정치가
적수원소
조조

2. 생애

원술은 원안 이래 4대가 삼공에 오른 명문가에서 원봉의 적자로 태어나 그 위세가 대단했다. 형제로는 형인 원기가 있었는데 동탁 토벌전동탁에게 숙청당했다.[30] 또 다른 형제 원소는 원술보다 나이만 많았을 뿐 얼자였으며[31] 일찍 죽은 둘째아버지[32] 원성양자로 갔다.[33]

원술은 젊은 시절에는 협객으로 알려져 동료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후에 개심하였다. 어릴 적엔 호방하게 양갓집 자제들과 사냥을 즐겼으며 나중에 마음을 고쳐먹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郞中)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점차 관위가 올라 절충교위(折衝校尉)와 하남윤을 거쳐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에 이르렀다.

189년(중평 6년) 대장군 하진십상시에게 살해당하자, 원술은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여 환관들을 몰살하는 데 기여하였다.[34]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정권을 잡고는 원술을 후장군에 임명하며 협력을 요청했지만, 원술은 남양군으로 피하였다. 190년(초평 원년) 동탁의 횡포에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원술 역시 이름을 올렸다.[35] 마침 손견이 같은 연합군이었던 남양태수 장자(張咨)를 죽이고 남양군을 원술에게 바쳤다. 원술은 표를 올려 손견을 예주자사에 앉혔다. 형주자사 유표는 원술을 남양태수로 추천하였다. 6월(음력)[36] 동탁으로부터 파견되어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는 소부 음수를 잡아 죽였다.[34]

191년 정월, 연합군의 맹주였던 袁紹중국어동탁이 세운 헌제 대신 유우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袁術중국어은 좋은 군주가 서는 것을 꺼려 유우 옹립에 반대하고 동탁을 멸하는 데에만 집중하자고 하였다.[37] 袁紹중국어기주목 한복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유우 본인이 굳게 거절하였다.[37] 2월, 손견이 양인(陽人)에서 호진여포격파하였다.[38] 袁術중국어손견이 낙양을 점령하면 다른 뜻을 품을까 봐[39] 보급을 중단하였다. 손견이 양인에서 노양현(魯陽縣)까지 100여 를 밤새 달려와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계획을 설명하고 사심이 없음을 부르짖기에 의심을 풀었다.[40]

이 무렵 연합군은 완전히 갈라서서 袁術중국어공손찬과 연합하고, 袁紹중국어유표와 연합하여 서로 피를 흘렸다. 袁術중국어은 袁紹중국어와 연계하는 이들을 보며 ‘쌍것들이 나를 따르지 않고 우리집 놈을 따른다’[41]고 화를 냈고, 공손찬에게 편지를 써 袁紹중국어는 원씨의 자식이 아니라고 떠들었다. 袁紹중국어주흔·주앙·주우 형제를[42] 이용해 袁術중국어을 방해했다. 袁術중국어은 평소 사치스럽고 가혹하게 세금을 걷었던 탓에 백성들이나 주씨 형제[43]는 袁術중국어을 싫어하였다.

192년 양주자사 진온이 병사하였다. 袁紹중국어가 그 후임으로 원유를 내려보냈기에 격퇴하고 대신 진우를 앉혔다.[46] 수춘에서 정무를 보던 진우는 원술을 거부하였다. 원술은 음릉현으로 물러나 회북의 병력을 규합하여 수춘으로 향하였다. 이각 연립 정권은 조정을 농단하며 원술과 손을 잡으려는 생각에 태부(太傅) 마일제를 보내 좌장군과 가절(假節)을 수여하고 양책후(陽翟侯)에 봉했다. 그러나 원술은 마일제의 부절을 빼앗고 그를 억류한 채 자신의 부하들을 천거하라고 협박하였다.

194년(흥평 원년), 원술은 손견의 장남 손책을 시켜 여강태수 육강을 공격하였다. 양주자사 유요에게 빼앗긴 단양군은 오경과 손분에게 수복하라 하였다. 195년 손책이 육강을 쳐부수고, 지지부진했던 유요 전선에서도 장강을 건너 전진하였다.

193년 초, 원술은 봉구 전투 등에서 조조와 원소의 연합군에게 연패했다. 그는 회수 남쪽 기슭에 있는 구강군의 수춘(오늘날의 안후이성 수현)으로 도주하여 새로운 근거지에서 강력한 군벌 세력을 구축했다.

197년 원술은 부명(符命)을 받았다며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仲)이라 하였다.[11] 구강태수를 회남윤(淮南尹)으로 승격하고 공경백관(公卿百官)을 두었으며 천지에 제사지냈다. 이를 간하던 손책은 독립하였다. 원술은 여포에게 한윤을 사자로 보내 즉위 사실을 알리고 그 딸을 데려갔는데, 이전에 원술과 여포는 서로 사돈을 맺기로 했었다. 패국상 진규는 이 동맹이 중국에 국난이 될 것이라 보고 여포를 말렸다. 여포도 원래 원술을 싫어했던 터라 이미 길을 나선 딸 일행을 돌려세우고 한윤은 붙잡아서 허도로 압송하였다.[34]

이에 원술은 크게 노하여 장훈, 교유 등 수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일곱 길에서 밀고 올라갔지만 한섬양봉이 여포에게 붙으면서 참패하였다.[34] 한편 진왕 유총과 진국상 낙준(駱俊)은 원술의 양식 원조 요청을 일축했었다. 9월, 원술은 휘하의 장개양(張闓陽)[55]을 유총과 낙준에게 접근시켜 그들을 살해하고 진국을 침입하였다.[56] 조조가 친정을 개시하자 장훈, 교유 등을 남겨두고 돌아왔다. 호현(苦縣) 부근에서[57] 참패하여 장훈만 간신히 퇴각하고 다른 네 장수는 죽음을 당했다.[34]

군대가 쇠약해지자 이반하는 자들도 늘어났다. 게다가 가뭄으로 인해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원술 밑에서 패국상으로 있던 서소가 군량미 10만 곡(斛)을 풀었다. 원술이 화가 나 참하려는데 서소가 “당연히 죽을 것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게 되어 다행입니다.”라 하였다. 원술이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며 “족하는 혼자만 천하의 명예를 누리려 하오? 나와 같이 누릴 수는 없었소?”라 푸념하였다. 원술은 명성은 소중히 여겼을지라도 천성은 오만방자하였다. 사치는 더욱 심해져 첩이 수백 명에, 비단을 두르지 않는 이가 없었고, 양곡과 고기를 질릴 정도로 먹었다. 반면에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이는데도 이를 보살피지 않았다.

199년 여름, 물자가 바닥나 자립조차 어려워진 원술은 궁여지책으로 궁궐을 불사른 뒤 첨산(灊山)으로 갔다. 첨산에는 원술의 수하인 진란뇌박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도 거부당하는 바람에 더더욱 곤궁에 빠지고 사졸들은 흩어졌다. 근심과 번민에 휩싸인 원술은 어쩔 수 없이 원소에게 편지를 썼다. “한나라는 천하를 잃은 지 오래되어, 권신의 가문이 정사를 행하며 영웅호걸들은 서로 강역을 나눠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 군께서는 청주, 기주, 유주, 병주의 4주를 옹유하여 인가가 백만으로 이처럼 강대하고 격이 높은 자가 없습니다. 조조가 아무리 쇠락한 한 황실을 지탱하고자 한들 어떻게 끊어진 명을 잇고 이미 망한 것을 구하겠습니까? 군께서는 삼가 천명에 응하십시오.”[59]

원소는 내심 그 말이 옳다 여겼다. 청주자사로 있던 원술의 조카 원담이 사람을 보내 원술을 맞이하려 하였다. 원술은 하비를 통해 청주로 가려했으나 조조가 유비주령을 파견해 가로막는 바람에 나아가지 못하고 수춘으로 발길을 돌렸다.[34] 6월, 수춘이 80리 남은 강정(江亭)에 이르렀는데 식량은 맥곡 가루 30곡만이 남았다. 더위가 한창이어서 꿀물을 찾았지만 구할 수 없었다. 평상에 걸터앉아 "원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라고 한참이나 탄식하다가 피를 한 말가량 토하고 분사하였다.[60] 원술의 남은 일족은 여강태수 유훈에게 의탁했다가 손책이 여강군을 정복하면서 손책을 의지하게 되었다.

2. 1. 명문 원가의 적자

원안 이래 4대가 삼공에 오른[사세삼공, 四世三公] 명문 집안에서 원봉의 적자로 태어나 그 위세가 대단했다. 형제로는 형인 원기가 있었는데 동탁 토벌전동탁에게 숙청당했다.[30] 또다른 형제 원소는 원술보다 나이만 많았을 뿐 얼자였으며[31] 일찍 죽은 둘째아버지[32] 원성양자로 갔다.[33]

원술은 현재의 허난성상수이현에 위치한 유남군 여양현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서기 1세기부터 고위직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4대 이상 한나라의 공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 장제 재위 기간 동안 재임했던 원안의 후손인 원술은 사공 원봉의 적자였다. 원술은 때때로 군벌 원소의 사촌 동생[2][3]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원소의 이복 동생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협객으로 알려져 동료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후에 개심하였다. 동족인 원소가 자신보다 명망이 높다는 것을 질투하여, 원소의 낮은 출신을 자주 들먹이며 중상하고, 더 나아가 원소와 교제하는 하옹 등을 증오하였다. 어릴 적엔 호방하게 양갓집 자제들과 사냥을 즐겼으며 나중에 마음을 고쳐먹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郞中)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점차 관위가 올라 절충교위(折衝校尉)와 하남윤을 거쳐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에 이르렀다.

2. 2. 동탁 토벌전과 반동탁 연합군

189년(중평 6년) 대장군 하진십상시에게 살해당하자, 원술은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여 환관들을 몰살하는 데 기여하였다.[34]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정권을 잡고는 원술을 후장군에 임명하며 협력을 요청했지만, 원술은 남양군으로 피하였다. 190년(초평 원년) 동탁의 횡포에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원술 역시 이름을 올렸다.[35] 마침 장사태수 손견이 같은 연합군이었던 남양태수 장자(張咨)를 죽이고 남양군을 원술에게 바쳤다. 원술은 표를 올려 손견을 예주자사에 앉혔다. 형주자사 유표는 원술을 남양태수로 추천하였다. 6월(음력)[36] 동탁으로부터 파견되어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는 소부 음수를 잡아 죽였다.[34]

189년 9월 22일, 대장군 하진이 사망한 후, 원술은 황실 호랑이 경호대의 황실 군단 사령관으로서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환관 세력을 처단했다. 동탁이 한나라 중앙 정부를 장악하려 하자, 원술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원술은 동탁을 두려워하여 남양군으로 달아났다.[4] 그곳은 손견이 태수 장자를 죽인 후 원술이 장악했다.[5]

원술은 원소가 이끈 동탁 토벌전에 참여했다. 그는 예주 자사로 임명한 손견과 합류했다.[6] 191년, 손견은 동탁의 장군 화웅을 격파하고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원술은 손견이 너무 성공하여 더 이상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까 우려하여 몰래 손견의 식량 공급을 끊어 그의 진격을 방해했다. 손견이 낙양에 도착했을 때, 낙양은 동탁이 놓은 불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고, 동탁의 군대는 황제를 납치한 채 서쪽의 장안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손견의 병사들은 황실 옥새를 발견했고, 손견은 이를 자신의 상관인 원술에게 넘겨주었다.[6]

2. 3. 원술 연합 대 원소 연합

袁術중국어 연합 대 袁紹중국어 연합은 191년부터 192년까지 袁術중국어공손찬, 손견 등과 연합하여, 袁紹중국어유표 등과 연합하여 중국 후한말 지배권을 놓고 다툰 사건이다.

191년 정월, 연합군의 맹주였던 袁紹중국어동탁이 세운 헌제 대신 유우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袁術중국어은 좋은 군주가 서는 것을 꺼려 유우 옹립에 반대하고 동탁을 멸하는 데에만 집중하자고 하였다.[37] 袁紹중국어기주목 한복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유우 본인이 굳게 거절하였다.[37] 2월, 손견이 양인(陽人)에서 호진여포격파하였다.[38] 袁術중국어손견이 낙양을 점령하면 다른 뜻을 품을까 봐[39] 보급을 중단하였다. 손견이 양인에서 노양현(魯陽縣)까지 100여 를 밤새 달려와 에 그림을 그려가며 계획을 설명하고 사심이 없음을 부르짖기에 의심을 풀었다.[40]

이 무렵 연합군은 완전히 갈라서서 袁術중국어공손찬과 연합하고, 袁紹중국어유표와 연합하여 서로 를 흘렸다. 袁術중국어은 袁紹중국어와 연계하는 이들을 보며 ‘쌍것들이 나를 따르지 않고 우리집 놈을 따른다’[41]고 화를 냈고, 공손찬에게 편지를 써 袁紹중국어는 원씨의 자식이 아니라고 떠들었다. 袁紹중국어주흔·주앙·주우 형제를[42] 이용해 袁術중국어을 방해했다. 袁術중국어은 평소 사치스럽고 가혹하게 세금을 걷었던 탓에 백성들이나 주씨 형제[43]는 袁術중국어을 싫어하였다. 주앙 혹은 주우가 袁紹중국어에 의해 예주자사가 되어[44] 예주를 취하려 했다. 袁術중국어손견공손찬의 종제 공손월을 출진시켜 주씨 형제를 양주로 되돌려 보냈다.[45] 이어서 형주의 유표도 밀어붙였지만 손견전사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년 양주자사 진온이 병사하였다. 袁紹중국어가 그 후임으로 원유를 내려보냈기에 격퇴하고 대신 진우를 앉혔다.[46]

2. 4. 양주에서의 재기

수춘에서 정무를 보던 진우는 원술을 거부하였다. 원술은 음릉현으로 물러나 회북의 병력을 규합하여 수춘으로 향하였다. 진우는 화의를 청하는 아우 진공염을 붙잡고 진군하여 하비국으로 달아났다.[48] 손분과 오경이 주씨 형제를 축출하면서,[49] 원술은 구강군 일대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서주백(徐州伯)이라 자칭하였다. 이각 연립 정권은 조정을 농단하며 원술과 을 잡으려는 생각에 태부(太傅) 마일제를 보내 좌장군과 가절(假節)을 수여하고 양책후(陽翟侯)에 봉했다. 그러나 원술은 마일제의 부절을 빼앗고 그를 억류한 채 자신의 부하들을 천거하라고 협박하였다.

194년(흥평 원년), 원술은 손견의 장남 손책을 시켜 여강태수 육강을 공격하였다. 양주자사 유요에게 빼앗긴 단양군은 오경과 손분에게 수복하라 하였다. 195년 손책이 육강을 쳐부수고, 지지부진했던 유요 전선에서도 장강을 건너 전진하였다. 혜구(惠衢)를 양주자사로, 유훈을 여강태수로 삼았다.[50]

193년 초, 원술은 봉구 전투 등에서 조조와 원소의 연합군에게 연패했다. 그는 회수 남쪽 기슭에 있는 구강군의 수춘(오늘날의 안후이성 수현)으로 도주하여 새로운 근거지에서 강력한 군벌 세력을 구축했다. 그는 양주 자사 진온을 폐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랐으며, 서주의 주군이라고 칭하기도 했다.[10]

194년부터 197년 초까지 손견의 아들 손책과 매형 오경은 원술을 위해 강동에서 많은 영토를 정복했다. 그러나 원술은 서주에서 유비여포와 싸우며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여포는 196년에 잠시 원술과 동맹을 맺었지만, 곧 배신하고 원술을 수춘으로 몰아냈다.[10]

2. 5. 칭제와 몰락

197년 원술은 부명(符命)을 받았다며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仲)이라 하였다.[11] 구강태수를 회남윤(淮南尹)으로 승격하고 공경백관(公卿百官)을 두었으며 천지에 제사지냈다. 이를 간하던 손책독립하였다. 원술은 여포에게 한윤을 사자로 보내 즉위 사실을 알리고 그 을 데려갔는데, 이전에 원술과 여포는 서로 사돈을 맺기로 했었다. 패국상 진규는 이 동맹이 중국에 국난이 될 것이라 보고 여포를 말렸다. 여포도 원래 원술을 싫어했던 터라 이미 길을 나선 딸 일행을 돌려세우고 한윤은 붙잡아서 허도로 압송하였다.[34]

이에 원술은 크게 노하여 장훈, 교유, 한섬, 양봉 등 수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일곱 길에서 밀고 올라갔지만 한섬과 양봉이 여포에게 붙으면서 참패하였다.[34] 한편 진왕 유총과 진국상 낙준(駱俊)은 원술의 양식 원조 요청을 일축했었다. 9월, 원술은 휘하의 장개양(張闓陽)[55]을 유총과 낙준에게 접근시켜 그들을 살해하고 진국을 침입하였다.[56] 조조가 친정을 개시하자 장훈, 교유, 이풍, 양강, 악취를 남겨두고 돌아왔다. 호현(苦縣) 부근에서[57] 참패하여 장훈만 간신히 퇴각하고 다른 네 장수는 죽음을 당했다.[34]

군대가 쇠약해지자 이반하는 자들도 늘어났다. 게다가 가뭄으로 인해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원술 밑에서 패국상으로 있던 서소가 군량미 10만 곡(斛)을 풀었다. 원술이 화가 나 참하려는데 서소가 “당연히 죽을 것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게 되어 다행입니다.”라 하였다. 원술이 에서 내려 예를 표하며 “족하는 혼자만 천하의 명예를 누리려 하오? 나와 같이 누릴 수는 없었소?”라 푸념하였다. 원술은 명성은 소중히 여겼을지라도 천성은 오만방자하였다. 사치는 더욱 심해져 이 수백 명에, 비단을 두르지 않는 이가 없었고, 양곡과 고기를 질릴 정도로 먹었다. 반면에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이는데도 이를 보살피지 않았다.

199년 여름, 물자가 바닥나 자립조차 어려워진 원술은 궁여지책으로 궁궐을 불사른 뒤 첨산(灊山)으로 갔다. 첨산에는 원술의 수하인 진란뇌박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도 거부당하는 바람에 더더욱 곤궁에 빠지고 사졸들은 흩어졌다. 근심과 번민에 휩싸인 원술은 어쩔 수 없이 원소에게 편지를 썼다. “한나라는 천하를 잃은 지 오래되어, 권신의 가문이 정사를 행하며 영웅호걸들은 서로 강역을 나눠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는 주나라 말기의 전국 칠웅과 다를 바가 없어 종국엔 강한 자만이 거머쥘 것입니다. 원씨는 이 된다는 천명을 받아 그 상서로운 조짐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군께서는 청주, 기주, 유주, 병주의 4를 옹유하여 인가가 백만으로 이처럼 강대하고 격이 높은 자가 없습니다. 조조가 아무리 쇠락한 한 황실을 지탱하고자 한들 어떻게 끊어진 명을 잇고 이미 망한 것을 구하겠습니까? 군께서는 삼가 천명에 응하십시오.”[59]

원소는 내심 그 말이 옳다 여겼다. 청주자사로 있던 원술의 조카 원담이 사람을 보내 원술을 맞이하려 하였다. 원술은 하비를 통해 청주로 가려했으나 조조가 유비주령을 파견해 가로막는 바람에 나아가지 못하고 수춘으로 발길을 돌렸다.[34] 6월, 수춘이 80 남은 강정(江亭)에 이르렀는데 식량은 맥곡 가루 30곡만이 남았다. 더위가 한창이어서 꿀을 찾았지만 구할 수 없었다. 평상에 걸터앉아 "원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라고 한참이나 탄식하다가 를 한 가량 토하고 분사하였다.[60] 원술의 남은 일족은 여강태수 유훈에게 의탁했다가 손책이 여강군을 정복하면서 손책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후 딸은 손권의 측실이 되어 원부인이라 불렸으며, 아들 원요는 낭중에 임명되었다. 원요의 딸은 손권의 오남인 손분에게 시집갔다.

198년 여포가 뒤늦게야 원술과 협동하여 조조에 저항했으나,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당했고 원술의 구원 시도는 실패하였다.[34] 단양군 방면으로는 조랑 등에게 인수(印綬)를 주며 산월을 봉기시켜 손책에 대적하게 하였으나, 이들은 손책에게 모조리 진압당하였다.[58] 섣달, 여포가 붙잡혀 처형되었다.[34]

3. 평가

하진에게 중용될 정도로 호탕한 기상이 있었다.[34] 그러나 방자하고 사치가 심하여 그 영화를 끝까지 누리지 못했으며,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이를 자업자득이라 평하였다.[61] 배송지는 “솜털만한 공도, 검부러기만한 선행도 없으면서 미친 듯이 날뛰어 멋대로 황제를 칭했으니 의로운 사내들이 분기탱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귀신들까지도 이를 증오하였다. 근검절약했어도 파멸을 어찌하지 못했을 텐데 단지 ‘사치가 심하여 끝까지 가지 못했다’는 평은 그 크나큰 죄악을 드러내기엔 부족하다”고 혹평하였다.[62]

194년 도겸이 세상을 떴을 때, 진등은 원술이 교만하고 제멋대로여서 난세를 다스릴 인물이 아니라고 보았고, 공융 역시 원술이 명문가 출신임에도 나라를 위한 충정이 없다며 도겸의 후임자로 유비를 추천하였다.[34]

원술의 후손 여성들은 대부분 손견 가문에 첩으로 들어갔다. 대표적으로 원술의 딸은 손권의 후궁이 되었다.

4. 가계

관계이름
조부원탕
아버지원봉
형제원기, 원소
배우자풍씨(馮氏), 풍방(馮方)의 딸
아들원요
원부인
황의와 결혼
매부양표[63]
사촌원유, 원윤
친척원외, 양표, 하기



원술 사후, 사촌 동생인 원윤이 그의 군대를 물려받았다. 원술의 처와 자녀, 부하들의 가족은 원술의 옛 부하인 노강태수 유훈에게 의탁했고, 손책이 유훈을 격파했을 때 손책의 보호를 받았다. 원술의 딸은 그 후 손권의 측실이 되어 원부인이라 불렸고, 아들 원요 역시 오에 출사하여 낭중이 되었다. 훗날 원요의 딸은 손권의 다섯째 아들 손분의 정실이 되었다.

5. 섬긴 사람들

원술을 섬긴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부하



삼국지연의에서의 부하


참조

[1]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2] 서적 Sanguozhi
[3] 서적 Houhanshu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de Crespigny (2006)
[7] 서적 de Crespigny (2006)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de Crespigny (2007)
[11]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12] 서적 Houhanshu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資治通鑑音注
[15] 문서
[16] 웹사이트 袁術(えんすい)とは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17] 서적 三国志
[18]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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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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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서적 劉備と諸葛亮 カネ勘定の『三国志』 文藝春秋 2018-05
[25] 서적 後漢書
[26] 문서
[27] 서적 魏書
[28] 서적 後漢書
[29] 서적 三国志
[30] 서적 후한서
[31] 서적 후한서
[32] 서적 한서
[33] 서적 위서
[34] 서적 후한서
[35] 서적 후한서
[36] 서적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37] 서적 《[[자치통감]]》60권 한기 제52 헌제 초평 2년
[38] 논문 《[[영웅기]]》
[39] 논문 《강표전》(江表傳)
[40] 서적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견
[41] 문서 羣豎不吾從 而從吾家奴乎
[42] 서적 《후한서》공손찬전·원술전은 주흔, 《삼국지》공손찬전과 《전략》(배송지 주석, 《삼국지》공손찬전에서 인용)은 주앙, 《오록》과 《회계전록》(배송지 주석, 《삼국지》손견전에서 인용)은 주우라고만 하여 동시가 아니거나 인명의 오기일 수도 있다.
[43] 논문 《회계전록》(會稽典錄)
[44] 서적 《자치통감》60권 한기 제52 헌제 초평 2년에서는 주앙, 배송지가 《삼국지》손견전에 인용한 장발(張勃)의 《오록》에서는 주우라 하여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없다.
[45] 서적 《후한서》원술전과 《삼국지》공손찬전에서는 손견의 패배라 하였으나 《후한서》원술전, 《자치통감》60권, 배송지가 《삼국지》손견전에 인용한 《회계전록》을 따른다.
[46] 서적 《후한서》원술전과 《삼국지》원술전에서는 진온이 193년에 원술에게 죽었다고 하였으나 배송지가 《삼국지》원술전에 인용한 왕찬의 《영웅기》와 《삼국지》[[여범]]전에 인용한 [[사마표]]의 《[[구주춘추]]》를 따른다.
[47] 서적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48] 논문 《구주춘추》
[49] 서적 《삼국지》51권 오서 제6 손분, 《삼국지》50권 오서 제5 [[오부인]]
[50] 서적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책
[51] 서적 《[[논어]]》태백편(泰伯篇)에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삼분천하유기이 이복사은)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52] 서적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53] 서적 《후한서》75권 열전 제65 여포
[54] 서적 《자치통감》62권 한기 제54 헌제 건안 원년
[55] 서적 《후한서》
[56] 서적 《후한서》50권 열전 제40 진경왕 유선
[57] 서적 《삼국지》17권 위서 제17 [[우금]]. 苦縣은 고현이 아니라 호현이라 발음한다.
[58] 서적 《자치통감》62권 한기 제54 헌제 건안 3년
[59] 서적 배송지가 《삼국지》원술전에 인용한 《위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다.
[60] 서적 《오서》(吳書)
[61] 서적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
[62] 서적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유표
[63] 서적 《후한서》54권 열전 제44 [[양진 (후한)|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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