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회황후
1. 개요
영회황후는 후한 영제의 후궁으로, 본래 미인(美人)의 지위에 있던 왕영(王榮)에게 사후에 추증된 시호이다. 유협(헌제)을 낳았으나, 영제의 정실 황후인 영사황후의 질투로 인해 독살되었다. 이후 아들 유협이 헌제로 즉위한 뒤 영회황후로 추존되었으며, 후한의 국모 중 남편 황제의 시호를 받은 유일한 측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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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년 출생 -
장합
장합은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원소 휘하 장수였다가 조조에게 귀순하여 촉한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제갈량의 4차 북벌 당시 전사했다. -
181년 사망 -
단석괴
단석괴는 후한 시대 선비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넓은 영역을 지배하며 후한을 위협한 지도자로, 그의 통치는 이후 선비족 발흥의 기반이 되었다. -
181년 사망 -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는 2세기 로마 제국 시대의 소피스트이자 웅변가로, 《신성한 이야기》와 《로마에 대하여》 등의 저서와 스미르나 재건 노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
한나라의 추존황후 -
효문태후
한 문제의 생모인 효문태후는 위표의 첩에서 유방의 후궁이 되었으며, 문제 즉위 후 황태후로서 소탈한 성품으로 일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후 고황후로 추존되었다. -
한나라의 추존황후 -
동태후 (후한)
후한 영제의 생모이자 헌제의 할머니인 동태후는 영제 즉위 후 황태후가 되어 권력욕을 드러내 국정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하태후와의 권력 다툼은 후한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2. 생애
왕미인(王美人)은 이름은 왕영(王榮)이며, 좋은 가문 출신이다. 풍만하고 총명하며 셈에 능했다고 한다. 가인자(下級女官)로서 후궁에 들어가 미인(嬪의 위)이 되었고, 영제의 총애를 받아 유협을 임신하였다.
영제의 정실 영사황후는 근본이 미천한 여인으로 도축업자 하진의 누이였다. 출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던 영사황후는 왕미인이 아들을 임신하자 크게 분노하여 그녀를 죽이려 했다. 황후 하씨는 기가 센 여성이었기 때문에 왕미인은 두려워하여 낙태약을 복용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때 태양을 짊어지고 걷는 꿈을 꿨다고 한다. 광화 4년(181년) 4월, 결국 유협 (후의 헌제)을 낳자 하황후의 질투를 받아 독살당했다고 한다.
그녀가 낳은 아들 유협은 영제의 모후인 동태후에게 양육되었으며, 영한 원년(189년) 동탁에 의해 제위에 즉위했다. 흥평 원년(194년), 유협은 죽은 모친에게 영회황후의 시호를 내리고 문소릉으로 개장했다.
후한의 국모 중에서 남편 황제의 시호를 받은 유일한 측비이다. 또한, 황후로 추증된 4년 전(190년), 신하들은 황제의 정실 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회황후(화제의 어머니), 경은황후(안제의 할머니) 등의 황후 호를 빼앗을 것을 요구했고, 헌제는 이에 동의했다.
2.1. 출신과 총애
왕미인(王美人)은 이름은 왕영(王榮)이며, 좋은 가문 출신이다. 풍만하고 총명하며 셈에 능했다고 한다. 가인자(下級女官)로서 후궁에 들어가 미인(嬪의 위)이 되었고, 영제의 총애를 받아 유협을 임신하였다.
영제의 정실 영사황후는 근본이 미천한 여인으로 도축업자 하진의 누이였다. 출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던 영사황후는 왕미인이 아들을 임신하자 크게 분노하여 그녀를 죽이려 했다. 황후 하씨는 기가 센 여성이었기 때문에 왕미인은 두려워하여 낙태약을 복용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때 태양을 짊어지고 걷는 꿈을 꿨다고 한다. 광화 4년(181년) 4월, 결국 유협 (후의 헌제)을 낳자 하황후의 질투를 받아 독살당했다고 한다.
그녀가 낳은 아들 유협은 영제의 모후인 동태후에게 양육되었으며, 영한 원년(189년) 동탁에 의해 제위에 즉위했다. 흥평 원년(194년), 유협은 죽은 모친에게 영회황후의 시호를 내리고 문소릉으로 개장했다.
후한의 국모 중에서 남편 황제의 시호를 받은 유일한 측비이다. 또한, 황후로 추증된 4년 전(190년), 신하들은 황제의 정실 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회황후(화제의 어머니), 경은황후(안제의 할머니) 등의 황후 호를 빼앗을 것을 요구했고, 헌제는 이에 동의했다.
2.2. 영사황후와의 갈등
왕영(王榮)은 좋은 가문 출신으로 영제의 총애를 입어 아들 유협을 임신하였다. 영제의 정실 영사황후는 근본이 미천한 여인으로 도축업자 하진의 누이였다. 출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던 영사황후는 왕미인이 아들을 임신하자 크게 분노하여 그녀를 죽이려 했다.
왕미인은 황후의 질투를 두려워한 나머지 낙태약을 복용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결국 영사황후에 의해 독살되고 말았다. 그녀가 낳은 아들 유협은 영제의 모후인 동태후에게 양육되었으며 후일 헌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2.3. 죽음과 추존
왕미인은 영사황후의 질투를 받아 독살당했다. 그녀가 낳은 아들 유협은 영제의 모후인 동태후에게 양육되었다. 189년, 동탁에 의해 유협이 헌제로 즉위하였다. 194년, 헌제는 어머니 왕씨에게 영회황후(靈懷皇后)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소릉으로 개장했다. 후한의 국모 중 남편 황제의 시호를 받은 유일한 측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