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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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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석괴는 2세기 후반 선비족의 지도자였다. 그는 투록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4~15세에 부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단석괴는 한나라의 변경을 침략하고, 부여, 오손 등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동부, 중부, 서부로 영토를 나누어 통치했으며, 18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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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
인물 정보
단석괴 시대의 선비족 연맹
칭호대인 (大(dà)人(rén), Daren)
통치 기간기원후 156년경 – 181년
출생136년
사망181년 (45세)
부친투루후 (Touluhou, 偷(tōu)鹿(lù)侯(hóu))
민족선비족

2. 생애

단석괴는 투록후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투록후가 3년간 흉노에 가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집에서 단석괴를 낳았다. 투록후가 돌아와 단석괴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 죽이려 하자, 아내는 자신이 낮에 외출했다가 천둥소리를 듣고 하늘을 보니 우박이 입에 들어와 삼킨 후 임신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투록후는 믿지 않았지만 단석괴를 죽이지 않고 버리려 했고, 아내는 몰래 단석괴를 친정에 보내 길렀다.[1]

14~15세에 단석괴는 건장하고 지략이 뛰어나 부락에서 '대인(大人)' 즉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오늘날 산서성 양고현 북쪽 300여 리에 위치한 탄한산(彈汗山) 철구수(歠仇水) 가에 조정을 세웠다.[1] 다른 부족의 어른인 복분읍(卜賁邑)이 단석괴의 생모 부족을 야습하여 소와 양을 약탈했을 때, 단석괴는 단기로 복분읍을 추격하여 어머니 부족의 소와 양을 되찾았다. 그 이후로 단석괴의 이름은 여러 부족에 널리 알려졌다.[4]

한 환제 영수(永壽) 2년(156) 가을, 단석괴는 3~4천 기병을 이끌고 운중군을 침공하였다. 이후 선비족은 지속적으로 한나라를 공격했고, 한나라는 화친을 시도했으나 단석괴는 이를 거부했다.[12]

단석괴는 그 땅을 동, 중, 서 3개 부(部)로 나누어 통치했다.

지역범위주요 읍(邑)특징
동부우북평에서 동쪽으로 요동군까지, 부여, 예맥과 접경20여 개 읍
중부우북평에서 서쪽으로 상곡군까지10여 개 읍
서부상곡군에서 서쪽으로 돈황오손까지20여 개 읍



각 부에는 대인(大人)을 두어 통치하게 하였으며, 모두 단석괴에게 예속되었다.

한 영제 즉위 이후, 유주, 병주, 양주 변경의 여러 군은 매년 선비에게 약탈당하였고, 많은 이들이 살육당하였다. 177년, 한나라가 반격했으나 선비 군대에게 참패하였고, 사망자가 열에 일곱여덟이었다고 한다.[12]

선비족 인구가 늘면서 농경, 목축, 수렵만으로는 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다. 단석괴는 왜인(倭)이 물고기를 잘 잡는다는 것을 듣고, 기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쳐들어가 한인(汗人) 수천 명을 잡아 이주시킨 후, 물고기를 잡아 양식으로 보충했다고 한다.[13]

단석괴는 명령과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부족장으로 추대되었고, 동서 부락 어른들이 그에게 귀순해 왔다. 그는 남쪽으로는 한나라 국경 지대에서 약탈을 하고, 북쪽으로는 정령의 남하를 막았으며, 동쪽으로는 부여를 격퇴하고, 서쪽으로는 오손을 공격했다. 그의 영역은 과거 흉노의 판도에 필적하며, 동서 14,000여 리, 남북 7,000여 리에 달했다.[12]

광화 4년(181) 45세로 사망하였다.[12]

2. 1. 탄생 및 초기 생애

단석괴는 투록후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투록후가 3년간 흉노에 가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집에서 단석괴를 낳았다. 투록후가 돌아와 단석괴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 죽이려 하자, 아내는 자신이 낮에 외출했다가 천둥소리를 듣고 하늘을 보니 우박이 입에 들어와 삼킨 후 임신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투록후는 믿지 않았지만 단석괴를 죽이지 않고 버리려 했고, 아내는 몰래 단석괴를 친정에 보내 길렀다.[1]

단석괴는 14~15세에 건장하고 지략이 뛰어나 부락에서 '대인(大人)' 즉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오늘날 산서성 양고현 북쪽 300여 리에 위치한 탄한산(彈汗山) 철구수(歠仇水) 가에 조정을 세웠다.[1] 단석괴가 14~15세쯤 되었을 때, 다른 부족의 어른인 복분읍(卜賁邑)이 단석괴의 생모 부족을 야습하여 소와 양을 약탈했다. 단석괴는 단기로 복분읍을 추격하여 어머니 부족의 소와 양을 되찾았다. 그 이후로 단석괴의 이름은 여러 부족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4]

2. 2. 선비족 통합과 제국 건설

한 환제 영수(永壽) 2년(156) 가을, 단석괴는 3~4천 기병을 이끌고 운중군을 침공하였다. 이후 선비족은 지속적으로 한나라를 공격했고, 한나라는 화친을 시도했으나 단석괴는 이를 거부했다.[12]

단석괴는 그 땅을 동부, 중부, 서부 3개 부(部)로 나누었다.

각 부에는 대인(大人)을 두어 통치하게 하였으며, 모두 단석괴에게 예속되었다.

한 영제 즉위 이후, 유주, 병주, 양주 변경의 여러 군은 매년 선비에게 약탈당하였고, 많은 이들이 살육당하였다. 177년, 한나라가 반격했으나 선비 군대에게 참패하였고, 사망자가 열에 일곱여덟이었다고 한다.[12]

선비족 인구가 늘면서 농경, 목축, 수렵만으로는 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다. 단석괴는 왜인(倭)이 물고기를 잘 잡는다는 것을 듣고, 기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쳐들어가 한인(汗人) 수천 명을 잡아 이주시킨 후, 물고기를 잡아 양식으로 보충했다고 한다.[13]

단석괴는 명령과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부족장으로 추대되었고, 동서 부락 어른들이 그에게 귀순해 왔다. 그는 남쪽으로는 한나라 국경 지대에서 약탈을 하고, 북쪽으로는 정령의 남하를 막았으며, 동쪽으로는 부여를 격퇴하고, 서쪽으로는 오손을 공격했다. 그의 영역은 과거 흉노의 판도에 필적하며, 동서 14,000여 리, 남북 7,000여 리에 달했다.[12]

광화 4년(181) 45세로 사망하였다.[12]

2. 3. 후한과의 관계 및 말년

후한 한 환제 영수 2년(156) 가을, 단석괴는 3~4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운중군을 침공하였다.[4] 연희 원년(158)에 선비는 다시 한의 북변을 침공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한의 변경을 침공했다.[4] 한은 화친을 통해 변방의 우환을 해결하려 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어 인수를 가지고 가서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고자 하였으나 단석괴는 거부하였으며, 침공이 더욱 격해졌다.[4]

단석괴는 그 땅을 동부, 중부, 서부의 세 부(部)로 나누었다. 우북평에서 동쪽으로 요동군까지 이르며, 부여, 예맥과 접하는 20여 개의 읍(邑)을 동부라고 하였다. 우북평에서 서쪽으로 상곡군까지 10여 개의 읍은 중부라고 하였다. 상곡군에서 서쪽으로 둔황과 오손의 20여 개 읍을 서부라고 하였다. 각 부에는 대인(大人)을 두어 통치하게 하였으며, 모두 단석괴에게 예속되었다.[5]

한 영제 즉위 이후, 유주, 병주, 양주 변경의 여러 군은 매년 선비에게 약탈당하였고, 셀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살육당하였다.[6] 177년, 한이 반격하면서 하육을 고류(오늘날 산서성 양고현)로 파견하였고, 전안을 운중으로 보내었으며, 장민은 남흉노의 선우를 거느리고 안문으로 출격하였다. 각자 1만 기병을 이끌고 세 길로 장성 2천여 로 나갔지만, 결국 남흉노와 후한의 군대는 선비의 군대에게 참혹히 패배하였고, 사망자가 10명 중 7~8명이었다고 한다.[6]

선비의 인구는 나날이 늘고 농경, 목축, 수렵에 의지하여 생계를 이어나갔으나 부족을 부양하기에는 부족하였다. 단석괴는 순시하면서 오후진수(烏侯秦水)[12]가 수백 리에 이를 정도로 넓고 수중에 물고기가 많지만 잡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단석괴는 왜인이 물고기를 잘 잡는다는 것을 듣고, 기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한국(汗國)을 공격하고 한인(汗人) 수천 명을 잡았으며, 이들을 오후진수 강안으로 이주시켜 물고기를 잡아 양식으로 보충했다고 한다.[13]

광화 4년(181)에 45세로 사망하였다.[10]

3. 더 보기


  • 檀石槐|단석괴중국어선비의 대추장이다.[1]
  • 和連|화련중국어은 단석괴의 아들이다.[2]
  • 삼국지[3]
  • 후한서[4]

참조

[1] 서적 Hou Hanshu, vol.90
[2] 서적 Hou Hanshu, vol.90
[3] 서적 Hou Hanshui, vol.90
[4] 서적 Hou Hanshu, vol.90
[5] 서적 Hou Hanshu, vol.90
[6] 서적 Hou Hanshu, vol.90
[7] 서적 Sanguozhi, vol.30
[8] 서적 Hou Hanshu, vol.90
[9] 간행물 T'an-shih-huai and the Hsien-pei tribes of the second century A.D. https://hdl.handle.n[...] 2024-05-04
[10] 서적 Hou Hanshu, vol.90
[11] 문서 『三国志』では汙人、『後漢書』では倭人と表記。いわゆる[[倭人]]なのかは不明。
[12] 문서 오늘날 노합하(老哈河), 하북성 평천현(平泉縣) 서북부 광두산(光頭山) 북쪽 기슭 류서천(柳西川)에서 발원하여 옹니우트기[翁牛特旗] 대흥향(大興鄉) 마지보(馬地堡) 부근에서 시라무렌하[西拉木倫河]와 합류한다.
[13] 서적 삼국지(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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