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관
1. 개요
예관은 전한 무제 시기의 관료로, 《서경》을 배우고 공안국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가난한 환경에서도 학문을 닦았으며, 장탕의 상주문을 고쳐 능력을 인정받아 무제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좌내사, 어사대부를 거쳐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수행했으며, 농업 장려와 형벌 완화를 통해 백성의 신뢰를 얻었다. 세금 징수 유예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납세로 재정을 안정시켰으나, 간언을 하지 않아 부하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았고, 태초 3년(기원전 10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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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2년 사망 -
호충국
호충국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태초 원년에 대홍려에 임명되어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103년까지 재직했다. -
기원전 102년 사망 -
아선우
아선우는 흉노의 선우로, 흉노와 한나라 사이의 외교적, 군사적 관계 속에서 흉노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으며, 한나라와의 갈등 속에서 조공 및 혼인 정책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내부 반란을 진압하며 흉노를 통치했다. -
역사에 관한 -
광서제
광서제는 도광제의 손자이자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1875년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며, 서태후의 섭정 아래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폐된 채 사망했다. -
역사에 관한 -
2013년
2013년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교황 사임, 북한 핵실험, 용산 개발 사업 부도, 윤창중 사건, 스노든 폭로, 김연아 우승, 방탄소년단 데뷔, 넬슨 만델라 사망 등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건들이 발생한 해이다. -
한나라의 정치인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한나라의 정치인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2. 생애
예관은 구양생에게서 서경을 배우고, 공안국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다른 제자들의 밥을 짓거나 날품을 팔아 생활비를 벌었다.
온후하고 청렴하며 지혜롭고 글짓기를 잘했지만, 말솜씨는 좋지 못했다. 정위 장탕은 법률에 밝은 사람을 속관으로 두었는데, 예관은 그렇지 못하여 정위 소속 가축을 치는 일을 맡았다. 정위의 안건 중 두 번이나 물리쳐진 상주문이 있었는데, 예관이 이를 훌륭하게 고쳐 관원들이 장탕에게 알렸다. 장탕은 예관을 연(掾)으로 삼았고, 그의 상주문은 모두 재가되었다. 무제 또한 이를 높게 평가하여 장탕은 예관을 무제에게 소개하고 중용하였다.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었을 때 예관은 그의 연이 되었고, 시어사로 추천되었다. 이후 중대부(中大夫)로 발탁되었고, 원정 4년(기원전 113년) 좌내사로 승진하였다. 농업을 장려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얻었고, 이 때문에 관원과 백성들은 그를 크게 신뢰하였다. 세금을 거둘 때에는 농번기를 피하였고, 가난한 집의 경우에는 징수를 유예하였기 때문에 수입이 적었다. 이후 군무로 인하여 황실에서 조세 수입을 살폈을 때 적다는 이유로 파면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백성들이 예관을 위하여 앞다투어 세금을 냈기 때문에 좌내사는 도리어 가장 세금이 많이 거두어진 곳이 되었다. 무제는 더욱 예관을 중하게 여겼다.
훗날 무제는 봉선 의식을 거행하려 하였는데, 유학자들에게 제도에 대해 자문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예관은 이에 대하여 봉선 제도는 군신이 정할 바가 아니라고 설파하였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무제는 이를 채택하여 스스로 정하고, 유학으로 꾸몄다.
원봉 원년(기원전 110년), 예관은 어사대부로서 태산에서 무제의 봉선 의식을 수행하였다.
사마천 등의 건의로 역법 개정이 진행되어 태초력이 제정되었다.
예관은 어사대부로 있는 동안 무제의 뜻에 맞추는 한편 무제를 간언하지 않아, 부하에게서 경시되었다. 태초 3년(기원전 102년)에 재관으로 죽었다.
2.1. 초기 생애와 학문
구양생에게서 서경을 배웠고, 이후 공안국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른 제자들의 밥을 짓는 일을 맡았고, 때로는 날품을 팔기도 하였다. 경서를 지참하여 일하고, 휴식 시간에는 경서를 읽었다.
예관은 온후하고 청렴하며 지혜로웠고, 글짓기를 잘하였으나 말솜씨는 좋지 않았다. 정위 장탕은 법률에 밝은 자를 속관으로 두었었는데, 예관은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위에 딸린 가축을 치는 일을 맡았다. 한편 정위의 안건 중 두 번이나 물리쳐진 상주문이 있었는데, 예관이 이를 훌륭히 고쳐 관원들은 이를 장탕에게 알렸다. 장탕은 예관을 연(掾)으로 삼았고, 그의 상주문은 모두 재가하였다. 무제 또한 이를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에 장탕은 예관을 무제에게 소개하였고, 또 그를 중용하였다.
2.2. 관리 임용과 승진
구양생에게서 《서경》을 배웠고, 이후 공안국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른 제자들의 밥을 짓는 일을 맡았고, 때로는 날품을 팔기도 하였다.
정위 장탕은 법률에 밝은 자를 속관으로 두었었는데, 예관은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위에 딸린 가축을 치는 일을 맡았다. 한편 정위의 안건 중 두 번이나 물리쳐진 상주문이 있었는데, 예관이 이를 훌륭히 고쳐 관원들은 이를 장탕에게 알렸다. 장탕은 예관을 연(掾)으로 삼았고, 그의 상주문은 모두 재가하였다. 무제 또한 이를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에 장탕은 예관을 무제에게 소개하였고, 그를 중용하였다.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었을 때 예관은 그의 연이 되었으며, 시어사(侍御史)로 추천되었다. 이후 중대부(中大夫)로 발탁되었고, 원정 4년(기원전 113년) 좌내사로 승진하였다. 예관은 농업을 장려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얻었고, 이때문에 관원과 백성들은 그를 크게 신뢰하였다. 세금을 거둘 때에는 농번기를 피하였고 가난한 집의 경우에는 징수를 유예하였기 때문에, 수입이 적었다. 이후 군무로 인하여 황실에서 조세 수입을 살폈을 때 적다는 이유로 파면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백성들이 예관을 위하여 앞다투어 세금을 냈기 때문에 좌내사는 도리어 가장 세금이 많이 거두어진 곳이 되었다. 무제는 더욱 예관을 중하게 여겼다.
훗날 무제는 봉선 의식을 거행하려 하였는데, 유학자들에게 제도에 대해 자문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예관은 이에 대하여 봉선 제도는 군신이 정할 바가 아니라고 설파하였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110년), 예관은 어사대부로서 태산에서 무제의 봉선 의식을 수행하였다.
예관은 어사대부로 있는 동안 온화한 성품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아 자리를 오래 보전하였지만, 일을 바로잡기 위해 간언하는 일이 없어 부하들은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2.3. 좌내사 시절의 업적
구양생에게서 《서경》을 배웠고, 공안국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다른 제자들의 밥을 짓거나 날품을 팔아 생활비를 벌었다.
예관은 온후하고 청렴하며 지혜롭고 글짓기를 잘했지만, 말솜씨는 좋지 못했다. 정위 장탕은 법률에 밝은 사람을 속관으로 두었는데, 예관은 그렇지 못하여 정위 소속 가축을 치는 일을 맡았다. 정위의 안건 중 두 번이나 물리쳐진 상주문이 있었는데, 예관이 이를 훌륭하게 고쳐 관원들이 장탕에게 알렸다. 장탕은 예관을 연(掾)으로 삼았고, 그의 상주문은 모두 재가되었다. 무제 또한 이를 높게 평가하여 장탕은 예관을 무제에게 소개하고 중용하였다.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었을 때 예관은 그의 연이 되었고, 시어사로 추천되었다. 이후 중대부(中大夫)로 발탁되었고, 원정 4년(기원전 113년) 좌내사로 승진하였다. 예관은 농업을 장려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얻었고, 이 때문에 관원과 백성들은 그를 크게 신뢰하였다. 세금을 거둘 때에는 농번기를 피하였고, 가난한 집의 경우에는 징수를 유예하였기 때문에 수입이 적었다. 이후 군무로 인하여 황실에서 조세 수입을 살폈을 때 적다는 이유로 파면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백성들이 예관을 위하여 앞다투어 세금을 냈기 때문에 좌내사는 도리어 가장 세금이 많이 거두어진 곳이 되었다. 무제는 더욱 예관을 중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