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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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로슬라니는 헝가리 코마롬에스테르곰주에 위치한 도시이다. 도시 이름은 차크 가문의 문장에 있는 사자를 의미하는 헝가리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로마 시대에 정착지가 있었으며, 1383년에 처음 언급되었다.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20세기 초 석탄 채굴이 시작되어 1954년 도시 지위를 얻었지만, 대부분의 광산이 폐쇄되었다. 2011년에는 지진이 발생하기도 했다. 주변 명소로는 여러 성과 수도원이 있으며, 오로슬라니 SE 축구 클럽과 OSE 라이온스 농구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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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슬라니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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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Oroszlány |
다른 이름 | 오레슬란 (Ohreslahn, 독일어) |
위치 | 헝가리 |
도시 유형 | 도시 |
하위 구획 유형 | 국가 |
하위 구획 명칭 | 헝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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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 CET |
UTC 오프셋 | +1 |
DST 시간대 | CEST |
DST UTC 오프셋 | +2 |
우편 번호 유형 | 우편 번호 |
우편 번호 | 2840 |
지역 코드 유형 | 지역 코드 |
지역 코드 | (+36) 34 |
웹사이트 | 오로슬라니 공식 웹사이트 |
행정 구역 | |
국가 | 헝가리 |
주 | 코마롬-에스테르곰 주 |
구 | 오로슬라니 구 |
지리 | |
면적 (총) | 75.86 km² |
인구 통계 | |
총 인구 | 20034명 |
인구 조사 기준 | 2004년 |
인구 밀도 | 264.09명/km² |
2. 지명 유래
이 마을의 이름은 마을을 세운 차크 가문의 문장에 있는 사자(oroszlán|오로슬란hun)에서 유래되었다.
오로슬라니 지역은 로마 시대와 아바르족 시대를 거쳐 정착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1] 1383년 'Oroszlankewhu'(사자의 돌)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록되었으며, 차크 가문의 영지였다.[1] 오스만 제국 점령기에 황폐화되었다가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의해 재건되었고, 이후 농노제 폐지 등의 변화를 겪었다.[1] 20세기 들어 석탄 채굴로 산업화가 이루어져 1954년 도시로 승격했으나, 이후 대부분의 광산이 폐쇄되었다.[1] 2011년에는 인근에서 규모 4.3의 지진이 발생하기도 했다.[1]
3. 역사
3. 1. 초기 역사
이 마을의 이름은 마을을 세운 차크 가문의 문장에 있는 사자(oroszlánhu)에서 유래했다.
코르네 인근에는 이미 로마 시대(Quirinum)에 정착지가 있었으며, 1957년과 1973년에 발견된 묘지 유적을 통해 아바르족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1383년으로, 'Oroszlankewhu'(현대 헝가리어: oroszlánkőhu, '사자의 돌'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5세기 문서에서는 차크 가문의 영지라는 의미로 'Possesio Orozlankewhu'로 언급된다.
1536년에는 '오로슬란코 성'이 언급되지만, 오스만 제국 점령 기간 동안에는 인구가 밀집된 지역으로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았다. 1543년 오스만 군대가 타타, 게스테스, 비타니 성을 불태웠는데, 이때 오로슬란코 성도 함께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 동안 성과 그 주변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이 되어 'Pusztaoroszlánkőhu'(황폐한 사자의 돌)라고 불렸다. 이후 이 지역의 영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포조니(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 니트라, 트렌친 지역에서 슬로바키아인들을 이주시켜 빈 땅을 다시 채웠다. 이 시기에 성의 남은 폐허는 주민들이 집을 짓기 위해 돌을 가져가면서 점차 사라졌다.
라코치 독립 전쟁이 끝난 후, 당시 영주였던 안탈 에스테르하지는 지도자를 따라 망명길에 올랐고, 그의 영지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했던 요제프 에스테르하지의 소유가 되었다. 이 시기 오로슬라니에는 농민 20가구만이 살고 있었으나, 1820년대에는 약 200채의 집에 598명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1848-49년 혁명 이후 농노제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여전히 인근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를 위해 일하고 봉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힘든 생활 환경 때문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고, 이후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3. 2. 오스만 제국 점령기
1536년 문헌에 '오로슬란코 성'이 언급되지만, 오스만 제국 점령 기간 동안에는 사람이 많이 사는 곳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1543년 오스만 군대의 원정으로 타타, 게스테스, 비타니 성 등이 불탔는데, 오로슬란코 성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걸쳐 성과 그 주변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땅이 되었고, '푸스타오로슬란코'(pusztaoroszlánkő|푸스타오로슬란쾨hu, 황폐한 사자의 돌)라고 불렸다.
3. 3. 에스테르하지 가문 통치 시기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성과 그 주변 지역은 완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즉 "푸스타오로슬란코"(=황폐한 사자의 돌)로 불렸다. 이 지역은 당시 영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의해 다시 인구가 채워졌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포조니(오늘날 브라티슬라바), 니트라, 트렌친 지역에서 슬로바키아인을 빈 땅에 정착시켰다. 이 시기에는 성의 폐허가 여전히 존재했지만, 주민들이 집을 짓기 위해 조각내 가져갔다.
라코치 독립 전쟁이 끝난 후, 이 지역의 영주였던 안탈 에스테르하지는 망명했고, 그의 영토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했던 요제프 에스테르하지에게 넘어갔다. 당시에는 20가구의 농민만이 살고 있었으나, 1820년대에는 약 200채의 집에 598명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3. 4. 19세기 ~ 20세기 초
1820년대에 이르러 오로슬라니의 인구는 약 200채의 집에 598명으로 증가했다. 1848년부터 1849년까지 이어진 혁명 이후 농노제가 폐지되었지만, 지역 농민들은 여전히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에서 계속 일하며 봉사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힘든 생활 환경 때문에 수백 명의 주민들이 이 지역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으며, 이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은 오로슬라니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한편, 20세기 초에는 이 지역에서 광물 숯, 즉 석탄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3. 5. 사회주의 시대
공산주의 시대에는 도시 주변의 탄전 개발에 중점이 맞춰졌다. (이미 20세기 초에 광물 숯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로, 1954년에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고, 오로슬라니 지역은 헝가리에서 가장 중요한 석탄 채굴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푸스타밤의 유일하게 운영 중인 마르쿠스헤지 탄광을 제외한 모든 광산이 폐쇄되면서 석탄 채굴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3. 6. 현대
공산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오로슬라니 주변의 탄전에 대한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20세기 초 이미 석탄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1954년에는 도시로 승격되었고, 오로슬라니는 헝가리의 주요 석탄 채굴 지역 중 하나로 부상했다. 하지만 석탄 산업은 쇠퇴기를 맞았고, 푸스타밤에 위치한 마르쿠스헤지 탄광을 제외한 모든 광산이 문을 닫았다.
2011년 1월 29일에는 오로슬라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규모 4.3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인해 벽에 균열이 생기고 굴뚝이 무너지는 등 26건의 피해가 보고되었다. 지진의 진앙은 오로슬라니 인근 베르테솜로였으며, 진원의 깊이는 5km였다. 지진의 여파는 부다페스트에서도 감지될 정도였다.
4. 주변 명소
- 마이크
- 베르테센트케레스트 수도원
- 게렌체르 성
- 비타니 성
- 게스테시 성
- 오로슬란쾨 성
5. 스포츠
- 오로슬라니 SE: 축구 클럽이다.
- OSE 라이온스: 남자 프로 농구팀이다.
6. 자매 도시
오로슬라니는 다음 도시들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1]
- 코니스, 폴란드
- 쿠흐모, 핀란드
- 플로힝엔, 독일
- 샬랴, 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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